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11화 (11/24)

11

애비게일 매켄지는 정원을 가꾸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시는 나무에 기대 앉아 그녀를 바라보

며 시간을 보냈다. 파란 꽃망울들이 고왔으나 그는 그 꽃들이 풍경초나 물망초라는 것을 알

지는 못했다. 그 중에서 그가 아는 꽃이라곤 나팔꽃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가 화초 하나하나 흙을 북돋워 주며 담장 쪽으로 자라도록 줄기 받침대를 만들어

주는 모습을 곁눈질로 관찰했다. 벌새처럼 한두 번 화초를 뒤적이고 말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의외로 오랫동안 공을 들이며 화단을 정리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씨를 뿌렸다.

따분하고 지루해진 그는 그녀 몰래 비밀스런 상상을 하며 웃었다. 스커트 아래로 그녀의 종

아리가 힐끗 보였다. 그는 한 쪽 눈을 감고 어림잡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돌아서자

얼른 그는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살며시 뜨고 그녀를 계속 관찰했다.

다시 한 번 평가하듯 그녀의 가는 종아리를 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녀의 몸매는 멋있었다.

꽉 동여매올린 머리를 풀어서 내려뜨리고, 목까지 단단히 여민 단추를 두개쯤 풀고, 웃음 짓

는 법을 가르친다면 지나가던 남자가 발걸음을 멈출 정도로 눈길을 끌 것이다. 그는 이제 완

전히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제시, 저 벌새는 너를 위한 게 아니야.

따가운 외침이 날카롭게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서로를 자극하며 싸우는 걸까?

제시는 그것이 교배 의식의 징조임을 알았다. 종마가 암말 위에 올라타기 전에 물어뜯기부터

하지 않던가? 암고양이도 수컷이 올라타기 전에 으르렁거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심지

어 얌전한 토끼조차 앞발을 들어 심술궂은 행동을 보이고, 암캐는 뒷다리로 강하게 수캐를

가격하며 자극을 준다.

그는 다시 눈을 뜨고 애비게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뭔가 노란 것을 뽑아 코 위로 들어 올

렸다. 살짝 치켜 올라간 귀여운 코였다.

그는 벌새를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교배기에도 서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암수 모두

가 호전적으로 부리를 딱딱거리며 달려든다. 숲의 나무에 핀 꽃 속에서 꿀을 먹는 벌새를 셀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수컷 벌새들은 각각 영역을 정해서,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꽃에서

꿀을 채취한다. 벌새가 침입자와 싸우는 건 암컷 한 마리가 수컷을 유혹하려고 날아왔을 때

뿐이다. 벌처럼 윙윙거리며 암컷은 꽃 하나를 사이에 놓고 몇 번씩 다가섰다 멀어졌다 한다.

결국 암컷 벌새는 수컷이 짝짓기를 시도할수 있게 빠른 날갯짓을 멈춘다. 그리고 그 보답으

로 수컷의 꽃에서 꿀을 흠뻑 마시고는 날개가 보이지도 않게 재빠르게 날아가 버린다.

그녀가 자신을 굶기려고 했던 때가 생각났다. 서로 화를 돋구다가 싸움을 하고 유혹하던 때

도 떠올랐다.

그녀가 허리를 펴고 이마를 손등으로 닦았다. 잘 정돈된 화단을 보며 그녀가 만족의 숨을 내

쉬자 모양 좋은 가슴이 들썩였다. 그녀 뒤로 파란 꽃이 한 무더기 보였다.

젠장할, 제시! 시체나 다름없는 네 몸이 나으면 여길 나가야한다고!

안달 난 사람처럼 제시가 번쩍 몸을 일으켰다.

"지금 말을 타러 가자고 하면 뭐라 하겠소?"

그녀에게 물으며 그는 가고 싶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자는 줄 알았어요."

"지난 2주 동안 너무 많이 자서 앞으로 얼마 동안은 잠을 자지 않아도 될 것 같소."

멀리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얼굴은 어때요?"

"조금 쓰리군. 하지만 버터밀크 덕분에 훨씬 나아졌소. 이웃사람들이 궁금해 하기 전에 다

나을 것 같소."

장난스러운 웃음이 그의 입가에 맺혔다. 그녀가 다시 이마를 닦았다.

"물 좀 가져올게요."

곧 그녀는 차가운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 면도용 비누를 가지고 와 그 옆에 놓았다.

"이런, 악취가 지독해요!"

그녀가 외치며 뒤로 물러섰다.

"냄새를 맡기 전에 지레 짐작하고 하는 소리 같군."

그녀는 빙그레 웃고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는 다리사이에 대야를 놓고 얼굴을 숙

이고 세수했다. 두 손에 비누질을 하고 뺨과 턱, 목을 문질렀다. 비누질한 얼굴을 헹구고 눈

을 뜨니 그녀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시선을 옮겨 한가로이 파란 하늘과

아지랑이를 보는 시늉을 했다.

"마차 타기엔 딱 좋은 날씨군."

"하지만 난 마차도 말도 없는걸요."

"이 마을엔 말 보관소도 없소?"

"퍼킨스 씨가 운영하는 게 있어요.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건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군요."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셨잖소. 이미 걷는 연습은 충분히 했소. 당신이 외출한 동안 내

내 연습했소. 게다가 혼자서 머리도 감을 수 있잖소, 아직도 모르는 거요?"

오,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 그가 행동하기에 별다른 불편한점이 없다는 것을 오늘 아침, 흔

들의자에 앉아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내쉬던 그가 생각났다.

"그건 울퉁불퉁한 길을 마차로 달리는 것하고는 달라요."

생각에 잠긴 그녀의 시선이 길을 향했다. 마을 너머에 있는 산마루까지 가면 그리 길이 험할

것 같지 않았다.

"나랑 같이 가는 게 두려운 거요?"

그는 동그랗게 변한 그녀의 눈을 보고 사실을 짐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아니, 아니, 내가 왜, 아니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난 범죄자니까."

"당신은 환자예요. 도허티 선생님이 괜찮다고 말씀하셨지만, 난 당신이 딱딱한 마차에 앉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애비, 언제 마지막으로 내 상처를 보았소? 도허티 선생님이 다 진찰을 하고 난 후에 마차를

타도 괜찮다고 하셨소."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힘없이 되뇌며 그녀는 풀을 뽑았다.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좋은 생각이 아니겠지. 바로 당신에게 말이오."

"내게요!"

그의 시선이 산을 향하자, 그녀는 그를 머리카락에서 맨발까지 훑어보았다.

그가 풀을 들어 씹으며 천천히 말했다.

"내 말은, 이처럼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에 애비게일 매켄지양이 자신의 열차 강도를 데리고

마을로 가 마차를 빌린다면 사람들의 시선이 달갑지 않을 거란 생각 때문 아니오?"

"당신은 내 열차 강도가 아니에요, 캐머런 씨.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당신 머릿속에 되뇌어

주면 좋겠군요."

"이런, 미안하오."

그의 한 쪽 입가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그러면 이 마을의 열차 강도라고 고치겠소."

젠장, 그녀가 호소하는 듯 자신을 바라보았다. 연약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의지를 계

속 밀고 나갈 수 있을지.

"왜 또 이러는 거예요? 예의 바르게 행동하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지금 내 행동이 정중하지 않단 말이오? 나는 단지 잠시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했을 뿐이오.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도, 도망치지도 않겠다고 의사 선생님께 약속까지 했소. 오늘은 사람

들이 편안하게 여가를 즐기는 일요일이오. 이 더운 정원에 앉아서 먼 산만 바라보지 말고,

시원하게 말을 타면서 화창한 오후를 즐기는 게 훨씬 낫지 않소?"

"난 여기에서도 실컷 즐겼어요. 당신이 그 엉뚱한 제의를 하기 전까지 말이에요."

그러나 그녀는 단단하게 목을 죈 칼라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제시는 그녀가 한 번도 남자와 마차를 타 본 적이 없는 걸까 궁금해졌다. 아마 13년 전에는

있었을 것이다. 또 다시 그는 구애를 받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애비,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겠소."

그녀의 파란 눈이 제발 그만 하라는 뜻을 내보냈다. 연신 칼라를 들썩거리던 손을 내리고 다

시 산을 바라다보았다. 찌는 듯한 더위에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하니 홍조를 띠었다. 그녀가

시선을 떨궜다.

"셔츠 단추를 잠그고 부츠를 신는다면요."

조용한 가운데 여치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제시, 너 대체 뭘 하려는 거야?

갑자기 자신이 잼을 넣어 둔 그녀의 병 안에 들어가 버린, 멍청한 땅벌이 된 것 같았다. 병

을 재빨리 뒤집으면 영락없이 잡힌 꼴이었다.

생각을 떨치며 그가 웃음 지었다.

"좋소."

*   *   *

"네, 안…… 안녕하세요, 애비게일 양."

젬 퍼킨스가 그녀의 노크 소리에 대답하며 인사했다. 그는 얼굴에 떠오르는 놀라움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녀가 이곳을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티끌 하나 없이 하얀 모자와

장갑을 끼고 그녀가 바로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퍼킨스 씨. 말 한 필과 쿠션 좋은 의자가 있는 마차를 빌리려고 해요. 말이 온

순하면 좋겠어요."

"마차를 말입니까, 애비게일 양?"

마치 그녀가 도마뱀에다 안장을 올려 달라고 주문하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으로 젬이 다시

물었다.

"퍼킨스 씨, 마차를 빌려 주실 수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그녀가 메마른 음성으로 물었다.

"오, 물론 빌려드리지요. 단지 애비게일 양이 마차를 타시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아서요."

"도허티 선생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계속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께서 환자에게

신선한 공기를 쐬게 하면 빨리 완쾌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셔서요. 마차를 타는 연습도 해

두면, 철도 회사측에서 사람을 보내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철도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하셨거든요. 참, 방석이 있으면 좋겠어요."

"아, 네, 물론입니다. 그 밖에 필요하신 건 없나요?"

그가 마구간으로 가며 물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가 이곳을 방문한 것이 신기한지 머리를 갸

웃거렸다.

"네. 퍼킨스 씨, 좌석 쿠션이 좋아야 해요."

그녀는 다시 주의를 주며 대답했다.

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온 마을 사람에게 이 이야기가 퍼질것이다.

*   *   *

제시는 쿡쿡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마차에 앉아 고삐를 잡고 말을 몰고 오는 그

녀를 보니, 말 근처에는 한 번도간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온순한 암말이 고개를 연신 끄덕거

리며 히힝거렸다. 말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그녀는 고삐를 놓칠까 노심 초사하며 잔뜩 긴

장한 얼굴로 고삐를 움켜쥐었다. 현관곁 말뚝 앞에서 그녀는 조심스레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보고 웃음을 억지로 참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모습은 단정한 그녀의 집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새 바지라서 다리가 좀 끼는군 부츠를 신을 수 있게 도와주겠소?"

그가 멋쩍은 표정으로 부탁했다.

데님 바지 밑으로 맨발이 덩그러니 나와 있었다. 그녀는 얼른 무릎을 꿇고 양말과 부츠를 신

겼다. 의외로 좋은 부츠였다. 기름을 먹이고 손질을 잘한, 두텁고 값비싼 소가죽이었다.

열차 강도를 한 돈으로 이 부츠를 샀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데도 그와 외출하기로 한 계획을 돌이키지 않는 자기 자신이 이상했다.

그녀가 일어서며 풀어헤쳐진 그의 맨가슴을 외면했다.

"셔츠 단추를 잠그기로 약속했잖아요."

그가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참, 그렇지."

그는 한 쪽 발로 체중을 지탱하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힘겹게 단추를 잠그고 셔츠를 바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양잿물 때문에 생긴 붉은 기가 아직도 뺨에 남아 있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어깨 근육이 꿈틀거렸다. 멍하니 근육의 움직임을 보는 자신을 깨달은 그녀는 얼른 바

깥으로 나갔다.

그가 목발을 짚으며 마차 쪽으로 걸어나왔다. 정말 바지가 꽉끼었다. 바지 때문에 그는 마차

에 오르는 데 애를 써야만 했다.

1인승 마차라 작은 발디딤대가 높이 달려 있었다. 세 번이나 올라타려고 해봤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그쪽으로 마차를 대 볼게요."

먼저 마차를 탄 그녀가 서투르게 고삐를 잡고 말을 몰았다. 그가 현관 쪽으로 몇 걸음 물러

섰다.

"너무 잡아당기지 말아요! 느슨하게!"

방향을 잡지 못하고 말이 갈팡질팡하자, 행여 그녀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런 음성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마차는 안전하게 현관 앞에 섰다. 그가 현관의 둘째 계단 위에 목발을 짚었

다.

"당신이 몰려고요?"

당치않다는 듯한 그녀의 물음이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빈정거렸다.

"그렇지 않으면 고향인 뉴올리언스에 내 뼈가 전달될 것 같군."

그는 목발을 짚은 손에 힘을 주며 두 발을 번쩍 들어 마차에 올렸다 그러나 다리만 마차에

올려놓았을 뿐 그의 몸은 목발에 기댄 채 위험하게 흔들렸다.

"조심해요!"

애비게일이 날카롭게 외치며 반사적으로 그의 몸을 움켜잡았다. 그녀가 다급하게 잡은 것은

바지의 허리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외침과 함께 그의 몸이 솟구쳐 올랐다. 그의 도약은

거의 묘기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육중한 그의 몸에 깔려 옆으로 밀려났다. 한순간이었지만

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정신없는 와중에 그녀의 한 손은 그의 가슴에 놓이고 한 손은

그의 허리 부근을 감쌌다. 그의 허리띠를 잡은 자신의 손가락이 바지속으로 들어가 있음을

깨달은 그녀는 얼른 손을 뺏다. 그의 음흉한 웃음이 바로 뒤따라왔다. 당황한 그녀는 그를

밀쳐 내며 외면했다. 그리고 침착하게 모자를 바로 쓰고 스커트를 정돈했다. 그러나 능글맞

은 그의 웃음이 계속 그녀의 말초 신경을 자극했다. 그녀는 귀까지 빨개졌으나, 그가 고삐를

잡는 동안 등을 곧게 세우고 태연히 앉아 있었다.

"괜찮소?"

그의 음성에서도 능청스러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요!"

그녀가 소리 쳤다.

"그런데 왜 소리를 치는 거요?"

"내가 왜 이러는지 알잖아요."

"뭘 안다는 거요?"

순진한 표정이었다.

"다 알잖아요! 그래서 능청스런 표정으로 음흉하게 웃기까지하면서!"

풀을 먹인 듯 빳빳한 그녀의 태도에 그는 웃음 지었다.

"자자, 당신이 더 이상 거론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겠소. 하지만 여자 손이 바지 속으로 들어

오면 그 남자가 어떻게 행동할것 같소?"

"내 손은 당신 바지 속에 있지 않았어요!"

그녀가 화를 내며 소리 쳤다.

그가 뻔뻔한 웃음을 지었다.

"오, 천만번 미안하오, 애비게일 양. 내가 잘못 안 것 같소. 방금 전에 다른 여자의 손이 내

바지 속에 들어왔나 보군."

그가 다른 여자를 찾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목을 타고 나오는 낮은 웃음소리가 날카로

워진 그녀의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자신의 말을 되받아 쏘는 그녀의 대꾸를 즐겼다. 그

는 마차를 몰며 곁눈질로 굳어진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그녀의 마음이 풀리게 잠시 얌

전히 있기로 했다. 그는 편안히 고삐를 들고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산등성이가 있는 북쪽을 향해 철도와 평행으로 말을 달렸다.

태울 듯이 햇빛이 내리쬐었다. 그녀는 모자의 얇은 챙으로 최대한 얼굴을 가리려고 이리저리

몸을 기울였다. 좌석이 그의 긴다리를 놓기에는 비좁아서 그는 무릎을 벌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다리가 그녀의 스커트를 자꾸 스쳤다. 그녀는 최대한 다리를 모으고 두 손도 얌전히

무릎 위에 잡고 앉았다.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려 했으나 그의 무릎이 부딪혀 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즐기듯 그녀의 헛된 노력에 느긋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한마디 말도 없

이 꼿꼿이 앉아 있기만 하자, 그도 경치만 바라보았다.

산등성이가 눈앞에 보였다. 제시가 팔을 들어 조용히 옆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눈을 돌려 보

니 새하얀 목화 송이가 피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어렸다. 한참 동

안이나 그녀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제시는 은밀히 훔쳐보았다.

매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맴돌자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양 길가엔 푸르른 나무들로 울타

리가 쳐져 있었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로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너무나 상

큼하고 매력적이었다. 왼쪽으로 마차를 몰아 가니 탁 트인 벌판이 나왔다. 마치 하늘을 떼어

다 놓은 것처럼 푸르른 벌판이었다. 그녀의 입술에선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오오!"

그의 입도 벌어졌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그들은 말없이 움직이는 마차 위에 앉아 있

었다. 마치 오렌지 빛깔을 칠해놓은 듯한 한 무더기 꽃밭을 지났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그곳을 지나치는 것이 아쉽다는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제시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요?"

주위 풍경을 한시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횟대에 올라앉은 참새처럼 그녀는 좌석에 엉덩이만

간신히 걸치고 있었다.

"독수리 언덕으로요. 소나무 바위 쪽으로 개울을 따라가다가 힉스빌 능선을 넘으면 돼요."

다시 대화가 끊겼다. 암말이 토닥거리며 길을 올라가는 동안, 그들은 내내 아름다운 숲 속

정경에 웃음 지었다. 그가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마차가 지나가자 주위의 사시나무들

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온몸을 흔들었다. 수많은 사철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다투듯 나뭇가지

들을 뻗었다. 곧 그들은 나지막한 언덕에 닿았고, 저 앞에 회색 암벽이 보였다.

"저기가 독수리 언덕이오?"

그녀가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그런 것 같아요. 여기에 와 본 지 오래 되어서요."

그가 말을 세웠다. 마차 위로 따가운 햇살이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마차에 앉은

채 깎아지른 듯 섬뜩하게 높이 솟은 절벽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능선으로 말을 몰고 올라

가 커다란 전나무 그늘 아래 마차를 세웠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번득였지만 그늘은 서

늘했다. 경이로운 절벽을 바라보며 제시는 느긋하게 셔츠 단추 두 개를 풀었다. 상큼한 풀

냄새와 함께 소나무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말의 땀 냄새까지 향기롭게 느껴졌다.

"이 길로 계속 가면 폭포가 나와요. 여기보다 훨씬 시원해요."

그가 고삐를 당겨 말을 폭포 쪽으로 몰았다. 폭포에 다다르니 정말 서늘할 정도로 시원했다.

버드나무와 오리나무로 뒤덮인 암벽 사이로 하얀 물줄기가 시원하게 떨어져 내렸다. 말이

물가로 다가가 물을 마시고 눈을 껌벅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말을 조용히 지켜

보았다.

한참 후에야 제시가 입을 열었다.

"잠깐 여기에 내려서 쉬겠소?"

그녀는 마차에 꼿꼿히 앉아 있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았지만 햇살에 반짝이는 물이 그

녀를 유혹했다. 그도 마찬가지인듯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돌려, 가지가 낮게

뻗은 소나무 앞으로 갔다. 그리고 단단한 나뭇가지를 잡고 손쉽게 마차에서 내려서는, 마차

에서 목발을 꺼내 풀섶을 헤치며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그처럼 거구인 사람이 하기

엔 너무나 민첩한 동작이었다. 더군다나 다리가 불편해 목발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퓨마 같았다. 그는 내리는 걸 도와 주려는 듯 검게 그을린 손을 그녀에게 뻗었다. 놀라웠다.

이런 신사다운 행동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머리 조심해요."

위를 보니 그녀의 머리 위에 작은 나뭇가지들이 뻗어 있었다.

그의 손이 여전히 그녀를 기다렸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흰 장갑을 끼고 있다는 생

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그에게 한손을 맡기고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를 앞지르며 자신

에게 손짓하는 물가로 걸어갔다. 그들의 발치에서 하얀 물거품이 부서졌다. 그가 셔츠를 바

지에서 꺼내어 단추를 풀었다. 원래 그의 방식대로 풀어헤친 모습이 되었다. 그녀는 장갑을

낀 채였고, 그는 목발에 몸을 의지했다.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절름거리며 걸어가 걸터앉기

편안한 돌 위에 앉았다. 그가 목발을 옆으로 던지고 한숨을 내쉬었다. 힘차게 흐르는 물소

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소나무의 은은한 향기가 주위를 감돌았다. 제시는

팔베개를 하고 편안히 누워 물가에 선 애비게일을 관찰했다.

애비게일의 등뼈는 쇠꼬챙이처럼 곧게 섰다. 그녀는 느긋하게 쉬는 것을 가장 극악 무도한

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 역시 덥기는 마찬가지리라. 장갑을 낀 손이 그녀의 이마를 닦

고, 다시 목을 쓸었다.

저 개울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무엇 때문에 사람들도 없는 이곳에서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점잖은 태도를 취하는 걸까?

그는 앉지도 않고 손에 물을 적시지도 않고 그와 대화도 하지 않는 그녀가 너무나 이상했다.

"물이 아주 시원해 보이는군."

그녀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가 다시 말을 걸었다.

"어떤지 가 봐요. 난 갈 수가 없어서."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결국 그녀는 장갑을 벗고 조심스레 돌위를 걸어 개울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그녀를 관찰하지 않았다면 물에 손을 담그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남을 의식하며 교양 있게 행동하는 그녀가 갑자기 불쌍해 보였다. 드레스 앞자락이

약간 물에 젖자, 그녀는 황급히 치마를 들어 올렸다.

애비를 빠뜨리자.

그녀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광경을 생각하니 짜릿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물에 빠져도 결

코 허우적거릴 사람이 아니었다.

"물 좀 떠다 줘요."

그녀를 응시하며 그가 부탁했다. 그녀가 어깨를 조금 돌리고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어떻게요? 아무것도 없는데."

"손에다 떠오면 되잖소."

"정말 우스꽝스런 제안이군요."

"목마른 사람에겐 그렇지 않소."

"농담하지 말아요. 내 손으로 물을 떠먹일 수는 없어요."

"어째서 안 된단 말이오?"

밝은 음성으로 그가 물었다.

"절대 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의식 없는 나에게 당신은 입으로도 물을 먹였는데, 왜 손으로 물을 못 먹인단 말이오?"

그녀의 어깨가 빳빳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그를 외면했다.

"날 괴롭하는 게 그렇게 즐겁나요?"

"난 물을 마시고 싶을 뿐이오."

차분한 그의 대답이었다. 그는 깍지를 긴 두 손으로 뒷머리를 괸 채 한숨을 내쉬고 폭포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휴, 젠장, 잊어버려요. 없던 일로 합시다."

그는 머리를 바위에 대고 두 눈을 감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서 그를 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서 편안한 자세로 누운 그를

맘껏 관찰할 수 있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그의 콧수염이 어느덧 길고 무성하게 자리를 잡아

갔다. 쾌활하게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고 다시 그를 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물을 뜰 만한

것을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손으로 물을 떠서 먹인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 그녀였다. 그러나 생각만으로

도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은 시원하고 맛있어 보였다. 말도 한참이나 들이마시지 않았던가. 제시도 무척 더워 보였

다. 그는 다시 셔츠 단추를 풀어놓았다. 그가 다친 몸이 아니었다면 벌써 물 속으로 들어갔

으리라. 그는 잠을 자는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다시 물을 내려다보았다.

제시는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맨가슴으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가 펄쩍 몸을

일으키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손에 한움큼 물을 들고 옆에 서 있었다.

"입을 벌려요."

이런, 순진한 애비치일 양을 꼬드겼으니 천벌을 받겠군.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성찬을 받듯 입을 벌렸다. 그녀가 자세를 낮추며 손을 기울였으나 물

은 속절없이 그녀의 팔로 흐르거나 그의 가슴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그의 입술은 적셔지지도

않았다. 그가 몸을 일으켜서 손 안의 물을 입으로 마시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일부

러 수저를 그의 이에 부딪치며 수프를 떠먹이던 때가 생각났다. 그녀의 손 안에 있던 물도

바닥이 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애비게일은 흥건하게 쏟아진 물이 널게 퍼지게 그의 가슴을 손으로 문질러

주었다.

"아, 정말 시원하군."

기분이 좋은 듯 그의 입가에 만족하는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찡긋 윙크를 하며 말했다.

"그런데 물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소."

"난 소매가 다 젖었단 말이에요."

그녀가 소매를 끌어 올리며 불평했다. 그러나 물에 젖은 소매는 그녀의 팔에 꼭 달라붙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젖었는데, 한 번 더 수고를 해요."

이번에는 물을 떠다가 손을 그의 입술에 대고 주전자처럼 기울이니 훨씬 나았다.

자신의 손에서 물을 받아 마시는 그를 보니 그녀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몸 속 어딘가에서

전율이 전해져 왔다. 그는 갈증이 해소된 표정이었다. 그의 콧수염에 물방울이 맺혔다. 그

의 입가에 묻은 물방울을 닦는 혀의 움직임을 그녀는 매혹된 듯 지켜보았다. 언뜻 자신의 행

동을 깨달은 그녀는 얼른 옆의 덤불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안 마시오?"

그녀가 손을 들어 목을 쓰다듬었다.

"아…… 아니오. 난 괜찮아요."

그는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았으나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자기 한도를 넘는 행동을 한 것이다.

"자, 좀 앉아서 쉬어요. 여긴 정말 시원하군."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자신과 타협을 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앉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의 발치 근처에 있는 돌 위에 앉았다.

"여기에 와 본 적 없소?"

그는 개울을 바라보는 그녀의 등을 보며 물었다.

"어렸을 때 와 봤어요."

"누구랑 왔소?"

"아버지하고요. 아버지는 나무를 자르시고, 저는 그것을 나르걸 도왔어요."

"내가 이 마을에서 살았다면 매일 여기에 왔을 거요. 널찍하고 더위를 피하기엔 안성맞춤이

군."

그가 한 손을 이마 위에 놓고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어렸을 때 형과 나는 바닷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소. 게를 잡고 조개 껍질을 줍고 파도타

기를 하며 신나게 보냈지. 다시 그 바다에 가고 싶군."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어요."

그녀의 아쉬운 목소리였다.

"이 개울가하고는 상대가 안 되오. 원하오?"

"네 ?"

그녀가 뒤를 돌아 그를 보았다.

"바다를 보고 싶소?"

"잘 모르겠어요. 리처드가……."

그녀가 얼른 말을 멈추고 개울가로 시선을 돌렸다.

"리처드? 리처드가 누구요?"

"아니에요. 아무도 아니에요. 왜 갑자기 그 사람 이름이 나왔는지 모르겠군요."

"아니, 그는 특별했던 사람인 것 같군."

"아니에요."

그녀가 팔로 무릎을 감싸안았다.

"바다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 사람일 뿐이에요."

"바라는 대로 되었소?"

"몰라요."

"그와 같이 할 기회를 놓친 거요?"

그녀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상관이에요. 벌써 오래 전 일인걸요."

"얼마나 되었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털어놓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그녀에게 물어

보지 않은 것을 물으며 계속 대답을 재촉했다.

"13년 전이오?"

그의 추측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애비, 리처드를 알고 있소."

숨을 멈추고 그녀가 그의 말에 놀란 듯 뒤돌아보았다.

"어떻게 리처드를 알아요?"

"도허티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더군."

그녀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도허티 선생님은 너무 말이 많은 것 같군요."

"당신은 자기 얘기를 하는 데 너무 인색한 것 같군."

그녀는 무릎을 감싸며 다시 몸을 돌렸다.

"내 일은 나 혼자 충분히 처리할 수 있어요. 또 그렇게 해야만 하구요."

"그렇소? 자립심이 대단하군. 그런데 왜 리처드를 떠올렸소요?"

"저도 모르겠어요. 우연히 그 사람 이름이 나왔어요. 그가 떠난 뒤 한 번도 그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도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왜요? 무슨 금기라도 되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소?"

"바보 같은 소리예요."

"아니오, 그렇게 오랫동안 가슴에 묻고 지내다니. 누가 당신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하기라도

했소?"

"내가 왜 당신처럼 충동적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당신에게는 절제나 자

제심 따위는 전혀 없어요. 당신은…… 당신은 과거의 일 때문에 상처를 입으면, 그 일이 생

각날 때마다 욕설을 퍼붓겠죠. 하지만 그건 내 방법이 아니에요. 난 내 생활 방식을 고수할

거예요."

"애비, 혹시 생활 방식을 너무 고귀하게 정한 거 아니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품

고 있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힘겹게 애쓰는 거요?"

"아니에요."

"그럼 말해 봐요. 사람들이 있는 마을과 5마일은 떨어져 있는데도, 사람을 의식하며 그렇게

교양을 차리고 있소? 모자를 한사코 벗지 않는 걸 보니 그 동안 뿔이라도 돋아난 거요? 옷이

축축하게 젖었는데도 소매 단추를 끄를 생각도 하지 않는 건 무슨 이유요? 하지만 그렇게

고통스럽다면 말하지 않아도 되오. 숙녀의 마땅한 행실이라고 얼버무리는 멍청한 핑계도 대

지 말아요. 당신은 후회도 분노도 보이지 않소. 항상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매듭이나 단추

같은 건 꼼꼼히 잠그고 다니오. 물론 당신 같은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우

월하다고 생각할 테지."

그는 자신이 그녀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줄을 알았지만, 한 번이라도 그녀가 진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터놓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가르쳐 줘서 고맙군요.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삶이 불만족스럽다고 한탄하는

것도 숙녀답지 못한 행동이에요."

"누구 말이오, 당신 어머니 말씀이오?"

"네, 당신도 알아 두세요!"

"흠!"

그는 그녀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일지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오. '예전

에 리처드라는 사람을 사랑했는데 그가 날 차 버렸어. 그래서 난 미칠 것 같았지'라고 말이

오."

주먹을 꼭 쥔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두 눈이 위험스레 빛났다.

"당신은 그런 말 할 권리 없어요!"

"맞소, 애비. 하지만 당신은 있지, 그렇지 않소?"

그는 일어나 앉으며 응수했다.

"당신을 따라 나서지 말았어야 했어요. 또 다시 날 화나게 하면, 그 혐오스런 얼굴을…… 때

려 주겠어요!"

"그게 싸우고 싶다는 기분을 표현한 말이오? 나를 쳐서 당신기분이 좋아진다면 한번 해봐요.

그런데 대체 당신의 평정 상태를 깨뜨리려면 어느 정도까지 심하게 몰아세워야 하오? 왜 당

신은 욕설을 퍼붓지도 웃지도 울지도 않소? 당신 내부에서 '애비, 체통을 지켜'라고 말하던

가?"

"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

"원래 모습 그대로인,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알려 주려는 거요. 그건 금기가 아니오."

"네! 소리 치고 울고…… 그리고…… 그리고 오늘 아침처럼 흔들의자에서 그러기도 하구요!

날 당신처럼 음탕하게 만들 셈이군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건 음탕한 게 아니오. 하지만 어머니의 쓸모없는 규칙대로 살아온 사람은 알지 못하겠지.

"우리 어머니를 들먹이지 말아요! 당신이 내 집에 들어왔을때부터 못 마땅했고 결점만 보였

어요. 더 이상 우리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아요. 예의를 조금이라도 갖췄다면 그런 말은 하지

도 않았을 거예요!"

"애비, 내 말을 들어 봐요. 왜 내 이름을 부르지 않소? 왜 그렇게 만든 당신 아버지 어머니,

리처드를 비난하지 않고 도리어 나한테 화를 내는 거요?"

"그 사람들은 들먹이지 말라고 했어요! 그리고 나한테 그들이 어떻게 했든 당신은 상관할 바

아니에요!"

그녀는 벌떡 일어서며 그를 노려보았다.

"애비, 너무 흥분하는군.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거부하고싶지만 정작 당신이 비난할 대

상은 그들이라서 그러오? 내 말이 틀렸으면 반박해 봐요. 당신 어머니는 자신의 틀대로 딸을

키우며 착한 딸을 여기저기 자랑했겠지. 심지어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희생하라고까지 교육

했겠지. 게다가 도덕심은 숭고하며 육체적인 즐거움은 그 반대라고 가르치지 않았소? 결코

다른 삶의 방법은 없다고 하면서 말이오."

"최선을 다해 저를 키워 주신 부모님을 어떻게 감히 그렇게 매도해요?"

"리처드는 몰라도 그분들은 당신에게 어떤 것이 좋은지 몰랐소. 아무리 싸워도 당신 어머니

의 고리타분한 윤리 의식이 바뀌지 않을 거란 걸 알 만큼 리처드는 총명했던 것 같군. 그래

서 떠났겠지."

"하! 그럼 당신은 나한테 가장 좋은 게 뭔지 안단 말이에요?"

그는 냉정하게 그녀를 판단했다.

"아마도."

그녀도 냉정하게 그를 판단했다.

"아마도 당신에겐 날개가 돋은 것처럼 법망을 피해 다니며 범법자로 살아가는 게 가장 최선

의 방법인가 보군요!"

그녀가 마을 쪽으로 손가락을 들고 흔들었다.

그녀를 보며 그는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아하, 이제야 우리가 진실에 접근한 모양이군."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목발을 집어서 잡아당겼다.

"나처럼 잘나지도 않은, 흉악한 열차 강도가 당신의 정곡을 찌르니 당황한 거요?"

"맞아요!"

그녀는 화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며 두 주먹을 허리에 댔다.

"당신은 잘나지도 않은, 흉악한 열차 강도예요!"

"그럼 이 흉악한 열차 강도한테 당신 얘기 좀 해봐요, 애비게일 매켄지 양. 눈을 내리깔고

부정만 하지 말고 말이오."

그는 아픈 다리를 힘겹게 움직이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범죄자인 나 때문에 당신은 수녀처럼 엄정한 생활 방식을 몇 번이나 깨고 자제력을 잃었잖

소. 그 전에는 감히 생각조차못 했던 일이었지. 왜 자신의 삶을 감추려 고만 하는 거요? 그

러지 말고 한번 보여 봐요. 그러면 스스로 정화할 기회도 되지. 나 때문에 그랬다고 비난해

도 괜찮아요. 난 이미 악한 아니오?"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군요!"

그녀가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사실을 인정하기가 무척 힘든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범죄자라서 당신의 그 신성한 규범을 조금이라도 수그릴 생각이 없다는

말이오?"

코가 맞닿을 정도로 팽팽한 대치 상황이었다.

"당신과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가슴에 팔짱을 끼고 등을 돌렸다.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 그녀의 몸을 돌리려고 했다.

"이봐요, 애비게일 타조 양, 겁이 나서 머리를 땅속에 파묻는 거요? 인정할 건 인정하라구!"

그의 팔을 뿌리 쳤으나, 그는 더 가까이 다가오며 심문하듯 계속 추궁했다.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큰 소리를 치고 변기통을 던지고 나한테 키스했소. 심지어 성

적인 흥분도 약간 느꼈지. 그 느낌이 못 견딜 정도로 짜릿하다는 걸 알았을 거요. 그런데 당

신은 그 일들을 모두 나한테 뒤집어씌우며 나를 비난했소. 우리 둘 중 나쁜 사람은 나라서

그랬겠지. 하지만 내가 당신이 생각한 강도와는 달라서 혼란스러운 거 아니오, 내 말이 틀리

오?"

그가 다시 그녀의 팔을 잡고 당겼다.

"자, 얘기를 해봐요. 그 예의 바른 껍질 속에 담긴 비밀스런 죄악들을 말해요! 당신이 나한

테 말해도 난 곧 이곳을 떠날 사람이오. 그대로 고스란히 가지고 떠나겠소!"

드디어 그녀가 몸을 돌리며 소리를 질렀다.

"숨기고 있는 죄 따위는 없어요!"

같이 격렬히 소리를 치는 그의 눈엔 피곤함이 배었다.

"이 순간을 만들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오!"

갑자기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들의 시선이 얽혔다. 그녀는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는 집요하게 자신이 외면하는 사실을 인식시키려 했다. 그녀는 몸을 굳히

고 등을 돌려 저만치 걸어갔다.

"애비, 날 피하지 말아요."

그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기

를 바라는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고집스레 그를 외면했다.

"애비,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소?"

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울음에 잠긴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당…… 당신이 나한테 뭘…… 말하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나지막한 음성으로 제시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리처드가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다는 걸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게 어떻소? 그를 떠나

게 했던, 당신과 그 사람사이에서 일어난 일도 말이오."

제시는 오랫동안 입을 다물었다가 더욱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건 당신 아버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소."

"아니오, 아니에요.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리처드가 날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리고 질겁을 하는 당신을 보니 더 확신이 되오."

그녀가 몸을 홱 돌리더니 작은 주먹으로 그의 맨가슴을 때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

음 내디뎠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날 닮았소?"

제시가 집요하게 물었다.

잔혹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요정처럼 아름다운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주르륵 눈물을 흘렸

다.

"날 내버려 둬요!"

그녀가 비참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애비,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요."

그가 부드럽게 응했다.

"지옥에나 가요!"

그녀간 흐느끼며 다시 손을 들어 그를 쳤다. 그러나 그는 움츠리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한

번 또 한 번 그녀가 계속 그의 어깨와 가슴을 때렸다.

"지옥에나 가요, 리…… 리처드!"

목멘 음성이었다. 제시는 그녀의 주먹 세례를 고스란히 맞으며 굳건히 서 있었다. 그의 목에

는 그녀의 손톱에 긁힌 빨간상처가 생겼다.

그는 가만히 서서 부드럽게 말하기만 했다.

"애비, 난 리처드가 아니라 제시요."

"나도 알아요. 알아요."

그녀는 흐느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가 한 걸음 다가가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녀의 이마가 그의 단단한 가슴

에 닿았다. 그의 맨 가슴으로 그녀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코끝도 찡해졌다. 목발이 땅

에 떨어졌다. 그녀의 모자가 비스듬히 기울어져서 그가 모자에 꽂힌 핀을 잡아 뺏다.

두 손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아니오, 모자가 비뚤어졌군."

그는 세공된 핀을 바로 모자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다시 두팔로 그녀를 안았다. 그는 커다

란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안으며 엄지손가락으로 단정하게 올려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계속 그의 품에서 울었다. 그의 팔이 어깨를 두르니 편안했다. 그의 얼굴이 그녀의

부드러운 귓불을 건드렸다 그가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며 그녀의 머리에 뺨을 갖다 댔다. 이

상하게도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대로 계속 그의 품에 있고 싶었다.

애비, 애비, 내 귀여운 벌새여,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거요?

그의 내음은 아버지와 달랐지만 훨씬 좋았다. 데이비드 보다더 단단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제시가 누구고 뭘 하는 사람인지 자기 자신에게 상기시키려고 했으나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

다.

그가 여기에 있고 따스했고, 힘찬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뭐든지 다 말하

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흐느낌이 잦아들자 그는 몸을 뒤로 빼며 그녀를 보고는 부드럽게 엄지손가락으로 눈

물 자국을 닦아 주었다.

"자, 애비, 앉읍시다. 이젠 얘기를 할 수 있겠지?"

그녀는 기진 맥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녀를 개울쪽으로 이끌자 그녀도 순순히 따라

왔다. 눈물이 그녀의 격렬한 기질을 다 소모해 버린 것 같았다.

찌르레기가 버드나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애비게일이 말하기 시작하자 개울이 속삭이듯 잔

잔히 흘러갔다. 제시는 편안히 그녀가 말할 수 있게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녀의 말

을 듣자니, 편협한 애정을 가진 엄마를 사이에 둔, 애처로운 남편과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육체적인 충동보다 의무감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친 엄격한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리처드,

리처드는 육체적인 즐거움을 그녀에게 알려주려 했지만, 결국 애비게일을 어머님께 교육받은

엄격한 사고 방식의 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애비는 몇 년 동안이나 그가 떠

난 것이 병든 아버지 때문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 왔다.

그런데 담담히 자신의 얘기를 해 나가는 그녀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아 보였다. 그는 열

린 마음으로 공포와 근심, 연약함 그리고 후회의 감정을 포용하는, 성숙해진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애비게일은 변했다.

*   *   *

마을로 돌아갈 시간에 그들 사이는 무척 달라져 있었다. 신화는 깨졌다. 그녀가 툭 터놓고

허심 탄회하게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니, 그들 사이에 은밀한 친밀감까지 맴돌았다. 그러나

서로간에 생긴 깊은 이해심은 예전에 그들이 보였던 적의보다 그들에게 훨씬 더 위험했다.

그녀는 그가 얼마나 따스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동안 그들은 내내 아무 말도 없었다. 단지 서로 팔꿈치와 무릎이 스친

다는 걸 깊이 의식할 뿐이었다. 날이 어둑해지자 매미 울음소리가 사그라들고 흰 나방이 날

아다녔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낮보다 더 크게 들렸다. 집으로 향하는 말발굽 소리가 빨라

지고 히힝거리는 소리가 높아졌다.

애비게일의 어깨가 제시의 어깨에 스쳤다. 그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자 그렇게 스치지도 않게

되었다. 그는 곧장 앞을 바라보며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손에 고삐를 들었다. 오늘 그는 그

녀가 두터운 장벽을 부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그녀는 그가 아는 여자들과는 다른 여자였다. 그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니 눈이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보랏빛으로 땅거미가 내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둠이

깔린 저녁 하늘빛이었다. 야무진 그녀의 얼굴에서 혼란스러움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엔

여전히 흰장갑이 끼여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른 곳을 맴돌다가 다시 그의 눈과 마주쳤다. 애비게일은 급속히 그에게

빠져 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적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범죄자였고 곧 이 마을을 떠날

사람이었다. 고요한 가운데 돌에 부딪히는 마차 바퀴 소리만 한가로이 들렸다. 서로의 시선

이 묶였다. 불안한 듯 그녀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열차 안에서

총을 들고있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런 장면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

다. 눈을 뜨고 파란색 면 셔츠에 덮인, 그의 넓은 어깨를 관찰했다. 불룩 솟아오른 근육과

칼라를 뒤덮은 검은 머리, 두터운 목, 걷어 올린 소매 아래 보이는 검은 팔뚝, 길고 강인한

손가락.

하느님, 도와 주세요. 저는 이 사람을 원해요.

마을이 가까워졌다. 제시가 고삐를 한 손으로 잡고 말도 없도 셔츠의 단추를 잠갔다. 홍조

띤 그녀의 얼굴을 다행히 어둠이 가려 주었다. 그가 앞으로 쏠렸던 몸을 일으키자 다시 그들

의 어깨가 부딪혔다. 눈에 익은 하얀 담장이 보였다. 그는 능숙하게 현관 앞 계단으로 마차

를 몰았다.

그가 고삐를 그녀에게 넘겨 주자 그녀는 잠깐이나마 따스한 그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정중하게 그가 말을 했다.

"아까처럼 말을 돌리지 말아요. 당신이 떨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소."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은 그의 나직한 훈계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마차에서 내린 그가 황혼을 등에 지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차에 앉아 등을 쭉 펴고

거리로 말을 몰았다. 제시는 현관 옆으로 걸어가 그네에 앉아서, 하릴없이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베란다를 보았다. 깨끗한 색깔로 깔끔하게 칠해져 있었다. 이곳에서 몇

걸음만 걸어가면 정원이었다. 정면에는 하얀 버드나무로 만든 의자 두 개가 테이블을 가운데

에 두고 놓여 있었다. 의자 발치에는 부드러운 이끼들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그는 삐그덕

거리는 그네 소리를 들으며 그녀 생각에 잠겼다.

거리 아래쪽에서 모퉁이를 돌아 걸어오는 그녀의 작고 곧은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보니 근

육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젠장,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낫겠군.

그늘 속에서 그를 발견하고 그녀가 움찔 놀랐다. 그는 편안하게 그네에 앉아 한 쪽 팔을 뒤

쪽으로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팔 안에 앉아 머리를 기대고 흔들리는 기분이 어떨지 상

상해보았다.

"애비, 이제 잘 시간이군."

그는 험악한 열차 강도인 제시였다. 그녀는 계단에 올라서서 그를 바라보며 계속 암시를 주

었다. 그러나 한가로이 그네를 타는 그는 전혀 험악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무게가 힘겨운

듯 그네가 삐걱 소리를 내며 불평했다. 그녀는 혹시나 자신의 생각을 들킬까 봐 시선을 내리

깔았다.

"배고프세요?"

그 밖에 별달리 할말이 없었다.

"조금."

대답을 하고 보니 그는 무척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달았다.

"식은 닭고기와 빵도 괜찮아요?"

"물론, 여기 밖에서 먹는 게 어떻소?"

"글쎄요."

현관문을 쳐다보다가 마음을 정한 듯 대답했다.

"좋아요. 준비할게요."

그네에 앉은 그를 남겨 두고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가 쟁반을 가지고 나

와 주저하며 그에게 다가섰다.

"바닥에 놓고 여기에 앉아요."

그가 옆으로 몸을 비키며 말했다.

"어두워졌으니 아무도 우리를 보지 못할 거요."

그녀는 눈썹을 올리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쟁반을 발치에 내려놓고 그네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 서로를 의식하며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새로운 긴장감이 팽

팽히 당겨짐을 느낄 수 있었다.

둘 다 음식을 적게 먹었다. 식사를 마친 그녀는 쟁반과 그릇을 가지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다리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움직일 줄 몰랐다.

그가 한 쪽 발을 다른 쪽 무릎에 올려놓고 한 손으로 부츠를 잡았다. 그네가 흔들리며 그의

무릎이 그녀의 스커트를 스쳤다. 그녀의 시선은 데님 바지 속에 감싸인, 단단하고 튼튼한 그

의 허벅지를 향했다. 그가 발목을 풀기 위해 이리저리 돌리자 방해가 되지 않게 그녀는 스커

트를 접어 손으로 붙들었다. 따스한 그 허벅지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손으로 그의 긴 다리를 만지면 어떤 느낌일까?

그네에 흔들리는 팽팽한 근육이 보였다. 제멋대로 뻗어 가는 상상 때문에 그녀는 저 밑바닥

부터 온몸이 죄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자그마한 떨림이 되어 그녀를 괴롭혔다. 거의 스치

는 듯한 접촉이었는 데도 그녀는 근육질의 허벅지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그가 나른하게 허리를 젖히며 그네를 뒤로 밀었다. 그녀에게 다가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심장은 가까이 있는 그를 생각하며 파닥거렸다.

"잠을 자러 가야겠군."

드디어 그가 조용히 말을 했다. 심장 소리가 높아지고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네에 걸쳤던 손을 거두고 세워 둔 목발을 들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목발을 짚고, 그

녀가 앞장서기를 예의 바르게 기다렸다.

그가 창이 있는 현관문을 들어서며, 앞서는 그녀의 등에 대고 물었다.

"안에 있는 문도 닫소?"

뒤돌아 그를 보기가 두려웠다. 그녀는 부엌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아니오. 밤에도 무덥잖아요. 바깥문만 닫으세요."

이렇게 그녀와 함께 들어오니, 제시는 마치 자기 집에 돌아온 것 같았다. 그는 목발을 끌고

어두운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성냥 어디 있소?"

식품저장실 쪽에서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스토브 위에 있어요."

그는 손을 더듬어 성냥갑을 찾았다. 그녀가 쟁반을 들고 식품저장실에서 나왔다. 흔들리는

램프 불빛에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반짝였다.

오, 그녀는 너무나……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들은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저기…… 설거지를 해야겠어요."

"아…… 아, 그렇군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뭔가 떨어뜨린 사람처럼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럼 나는 자기 전에 잠시 바깥에 나갔다 오겠소."

제시는 단호한 걸음걸이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러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현관으로 향하는 길이 잘 보이도록 그녀가 램프를 들어 올렸다. 그는 등을 돌려 그녀

를 바라보았다.

웃음기 없이 붉은 빛을 띠고 그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묻힌 그의 검은 머리카락은 보

이지 않았다. 램프의 불빛에 반사되는 그의 깊은 눈동자가 보였다.

"고맙소, 애비.…… 잘 자요."

나직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는 목발을 짚고 나갔다. 어둠이 그를 완전히 삼켜버렸다.

애비게일은 설거지를 끝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현관 밖으로 나가

바깥을 살펴보니, 달이 떠서 보리수나무 아래 있는 그의 희미한 윤곽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는 한 쪽 무릎을 세우고 한 쪽 팔을 목 뒤에 돌리고 앉아 있었다. 달빛이 그의 얼굴에 반사

되었다.

"제시?"

그녀는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응?"

"괜찮아요?"

"물론. 그만 잡시다."

그러나 집 안으로 들어간 애비게일은 걸어 들어오는 그의 기척을 들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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