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10화 (10/24)

10

구름 한점 없이 맑고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으나 애비게일은 정신을

집중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어젯밤에 자제하지 못하고 반응을 보였던 일에 대해 용서를 구

하며 기도를 드릴 때조차 달콤했던 그 느낌이 몸 속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찬송가를 부르려

고 일어섰을 때 그의 타 들어갈 것 같은 키스가 되살아나서 입술이 욱신거렸다. 목덜미에 남

아 있는,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그 손의 감촉 때문에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그러

나 시선을 내려뜨려도 목깃이 긴 옷에 감싸인 가슴이 내려다보였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단

단해졌다.

어젯밤의 기억이 애비게일 매켄지를 자꾸만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것도 저 밑바닥의 원시

적인 본능을 들쑤시며. 떨쳐 내려고 애를 썼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단정하고 엄숙하게만 살아

온 그녀에게는 어젯밤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일은 전혀 생소한 경험이었다. 견딜 수 없이 짜릿

한 감각이 무자비하게 그녀를 파고들었다.

저 앞에 도허티 의사의 대머리가 보였다. 갑자기 화가 치솟았다. 그의 머리에 총부리를 내려

치고 싶었다!

그가 있는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그녀는 안부를 물어 오는 마을 사람들에게 거짓 대답을 해

야만 했다.

"그럼요,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도대체 돼지 방광이 어떻게 열차 강도의 상처 치료에 도움이 되었는지

묻기까지 했다! 이리저리 둘러대다가 할 수 없이 나중에는 멍든 그의 손을 단련시키는 데 사

용했다고 했다. 하긴 그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도

허티 의사 곁까지 간 애비게일은 궁금한 것도 많은 마을 사람들과 총을 준 멍청한 의사에게

화가 날 대로 났다.

의사는 예전 그대로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시오, 애비게일 양."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환자에게 문제라도 생겼소? 그 사람 이름이 뭐라 했지 아, 제시, 맞죠? 걷는 훈련은 합니까

?"

"네, 해요. 하지만……."

"좋아요! 좋아! 아직 다리가 뻣뻣해서 구부리지는 못해도 목발로 걸을 수는 있을 거요. 영양

가 있는 음식을 주도록 해요. 충실히 연습하면 집 밖까지 나올 수도 있겠군."

"집 밖으로요! 걸칠 옷도 전혀 없는 사람인데요. 글쎄 어제는 시트를 두르고 마당까지 나갔

어요!"

도허티가 유쾌한 듯 배를 흔들며 웃었다.

"며칠 전에 그 사람 셔츠는 가져다 주었지만 그것 말고는 생각조차 못했군. 그럼 옷을 좀 사

주도록 합시다. 어때요? 철도회사에서 비용은 부담……."

참을 수 없는지 그녀가 말을 가로챘다.

"선생님, 도대체 왜 그 사람한테 총을 주셨어요? 그가…… 총으로 절 위협해서 결국 그의 요

구를 들어 줘야 했단 말이에요."

의사가 걱정스럽다는 듯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물었다.

"당신을 위협했다고?"

"쉬!"

그녀는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별로 심각한 건 아니에요. 저녁으로 돼지 고기를 달라고 했을 뿐이에요."

그가 갑자기 미심쩍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돼지 고기를 먹였소?"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장갑을 잡아당겼다.

"저기, 그러니까…… 네, 먹였어요."

의사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는 먼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웃음 지었

다.

"정말 교활한 사람이군. 그 총에는 총알이 없었소."

애비게일은 찬물을 뒤집어쓴 표정을 지었다.

"총알이 없다고요?"

그녀의 턱선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소. 내가 총알까지 넣어서 그 사람에게 주었을 것 같소?"

"저는…… 저는……."

그런데 도리어 그녀는 도허티 의사를 멍청하다고 욕하지 않았던가. 그 빈 총에 자신이 얼간

이처럼 당한 것이었다.

"총알이 없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그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당연하지. 하지만 어쨌든 그걸로 애비게일 양을 위협했다니 유감이오. 법정에서 증언을 하

면 되겠지. 그 밖에 다른 일은 없었소."

애비게일은 자기 자신이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 일을

마을 사람들이 안다면 제대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을 것이다. 그녀도 자신의 뛰어난 자

제력에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훌륭한 가정교육과 흠잡을 데 없는 예의

범절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런데 이런 멍청한 행동을 하다니!

"네, 물론요, 도허티 선생님. 그 사람은 제게 전혀 해를 입히지 않아요. 단지 무례한 태도가

거슬릴 뿐이에요. 상처가 다 나아 가니까 그리 신경 쓸 문제도 아니지요. 외출할 정도로 회

복되면 해리슨 보안관님이 철도 회사에 전보를 쳐서 그를 데려가게 하겠지요."

"물론 그렇겠지. 조만간 여행을 할 정도가 될 거요."

"언제쯤 사람들이 와서 그를 데려갈까요?"

의사가 턱을 긁적였다.

"글쎄,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 내가 매일 들르리다.

최대한 빨리 그를 회복시키도록 하겠소. 그 밖에 내가 도와 줄 건 없소?"

"네, 그 사람 바지나 한 벌 사 주시면 돼요. 제대로 옷을 입고 목발로 걸어다니면 저도 걷는

걸 막을 필요가 없을 거예요."

"좋아요. 우선 옷부터 사지."

"빠를수록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최대한 태연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리고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애비게일의 몸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화가 나기는 처음이었다.

바보처럼 빈 총에 속아서 벌벌 떨며 노리개처럼 그에게 당하다니.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부글부글 그녀의 울화통이 끓었다.

제시는 또각! 또각! 또각! 울려 퍼지는 그녀의 구둣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요란한 걸음

걸이로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잠시 뒤 군대가 행진하듯 그녀의 발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너무나 이상했다. 교회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소리를 전혀 내지 않는 고양

이 발이었다.

그녀는 그의 방 앞에서 멈추지도 않고 지나쳐 부엌으로 갔다. 식품저장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쏟아 붓는 모양이었다. 다시 그녀가 행진하듯 방 안으로 들어서서 바람이 일

정도로 빠르게 침대로 다가왔다. 그리고 들고 있던 주전자를 요란스레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침대의 매트리스를 확 잡아당겼다. 기우뚱해진 그의 얼굴이 청

동 장식에 부딪혔다. 윙하고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그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 듯 매트리스를 들고 거칠게 셔츠에 감싼 권총을 꺼냈다. 그는 너무 놀라 멍하니 그녀

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러운 듯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만 총을 들고 말했다.

"또 한 번 이 흉악한 물건으로 날 위협하면 가만있지 않겠어요."

우아하고 거만한 태도로 그녀는 그 총을 물이 담긴 주전자 속에 퐁 집어넣었다.

"이젠 총알 뿐만 아니라 총도 없군요!"

여전히 놀란 채로 그는 부글거리며 물 속에 가라앉는 권총을 보고만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행동을 인식한 듯 그가 비틀거리며 주전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주전자 속으로 손을 집어

넣으려 하자 그녀가 차갑게 충고했다.

"나라면 그 속에 손을 넣지 않겠어요. 양잿물이거든요."

그러고는 안전하게 멀찌감치 떨어졌다.

깜짝 놀라 손을 움츠린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전자가 놓인 테

이블을 앞으로 밀어냈다.

"교활한 여자 같으니! 당장 총을 꺼내! 꺼내지 않으면 이 주전자를 바닥에 쏟아 버리겠어!"

"내 테이블!"

그녀가 외쳤다. 양잿물이 주전자에서 흘러 테이블 위를 적셨다. 물이 닿은 부분이 녹아 들어

갔다. 그녀가 기우뚱거리며 테이블로 다가가려다가 움찔 멈췄다.

"나가!"

그의 고함 소리였다. 분노에 찬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거친 야생 짐승처럼 눈이 번득였

다. 그는 화를 억누르는 듯 이를 악물고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

"당장…… 나가!"

순순히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얼른 주전자를 들고 방을 나와서 현관 밖으로 나가 양잿물을 버렸다. 화를 가라앉히

는 그에게 마당에서 주전자를 비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다시 달려들어와 아끼는 테이블

을 걸레로 닦았다. 그녀가 달그닥거리며 테이블을 닦는 동안 그는 흔들의자에 앉아 팔에 얼

굴을 묻고 있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요?"

혐오스럽다는 중얼거림이었다.

빈정거리는 그녀의 대답이 들려 왔다.

"꽤 오래 계속된 당신의 약탈 행위는 정말 인상 깊……."

"쓰잘데기없는 말은 하지도 마시오. 우리 두 사람 다 당신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는 걸

알아요! 난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려고 했을 뿐이오!"

"나도 그래요! 당신은 어젯밤에 날 이겼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이 애비게일 매켄지는 지

지 않아요. 듣고 있어요?"

그녀는 요란스레 테이블을 박박 닦으며 계속 말했다.

"내 집에 들여 놓았지요. 당신을 말이에요! 단순한 열차 강도였죠! 겨우 목숨이 붙어 있는,

살이 썩어 들어가는 거구였죠! 내 음식과 말투, 행동 심지어 꽃으로 뒤덮인 정원조차 불평하

더군요! 그러고는 간호에 대한 보답으로 발톱을 내세우며 달려들었죠!"

"간호라구?"

그가 기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원래 간호 같은 건 할 수 없는 사람이오! 개구리처럼 피가 차가운 냉혈 인간이지.

맞아, 혼자외로이 백합 위에서 살다가 생명이 붙어 있는 것만 봐도 냉큼 꽃잎 속에 숨어 버

리는 겁쟁이  개구리요! 그래, 이제서야 총이 장전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리셨나? 그래서

쿵쾅거리며 들어와 내 총을 양잿물에 처박으셨소?"

"네!"

새된 목소리로 외치며 돌아서는 애비게일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 애비게일 매켄지 양다운 행동이군! 어젯밤 일은 총이 없어도 상관없었소. 당신이 내 밑

에 깔린 다음에는 총을 겨누지도 않았잖소. 당신도 그걸 알아. 당신은 늙은 할망구처럼 인생

을 무미 건조하게 살아왔소. 감정이란 걸 조금만 보여도 마구 몸이 떨릴 만큼 말이오. 그렇

소, 난 단순한 열차 강도요! 나만 아니었다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고상함 속에 남자에 대

한 비틀어진 관념이 있다는 걸 잘 숨길 수 있었겠지.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그런 인간이란

걸 인정하지 않을 테지.

난 당신을 달아오르게 할 수 있소. 당신은 어젯밤 침대에서 내내 거짓말을 했지만 이미 당신

육체는 탐욕스런 욕망에 빠져있었소. 손을 대기만 했는 데도, 당신이 수년간 억눌러 왔는

데도 말이오. 당신은 약간투정 섞인 반항이 도리어 자극을 준다는 사실도 알더군. 그게 명백

한 성적인 자극이란 말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내가 여기 온 후부터, 당신은 자신이 금기시했던 모든 것들을 다 해 왔소. 하지만 사실, 당

신이 날 이렇게 심하게 비난하는 것도 그것들이 다 싫지 않았기 때문 아니오? 물론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리라곤 자신도 몰랐겠지.

"거짓말이에요!"

열에 받친 그녀의 외침이었다.

"당신은 어젯밤에 보였던 저급하고 비도덕적이고 야만스런 행동을 무마해 보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저급? 비도덕적? 야만?"

거친 그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이봐요, 애비, 당신이 조금이라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생각을 해봐요. 당신에게도 얼마

간 희망이 있다는 걸 알게 해준 내게 도리어 감사해야 하지 않소? 당신은 항상 기척도 내지

않는 걸음걸이에 새하얀 장갑을 끼고 생각도 깐깐하고 엄격하기만 했소. 오늘 아침에 순교자

들처럼 돌을 맞고 오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요. 애비, 인정해요. 당신은 어젯밤에 나와 같

이 침대에서 뒹구는 것을 즐겼소!"

"그만 해요! 그만!"

그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리고 홱 몸을 돌려 양잿물이 묻은 걸레를 그에게 던졌다. 물기가

흥건한 걸레는 그의 얼굴에 맞고 토끼 꼬리처럼 그의 턱과 목에 걸쳐졌다. 즉시 그의 피부

는 불에 덴 듯 벌겋게 변했고 그의 두 눈은 놀람으로 커졌다. 그는 거칠게 걸레를 움켜쥐고

내팽개쳤다.

자신이 한 일을 깨달은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질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곧바로 세면대로

달려가 마른 수건을 가지고 달려왔다. 그리고 얼른 수건으로 그의 피부에서 양잿물기를 닦아

냈다. 다행히 피부가 손상되지는 않았다. 그는 공포에 질린 그녀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자

신이 너무 지나쳤다고 후회하는 눈빛이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닦으며 그녀는 목이 막히는 듯 어렵게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했던 일들을 모두 조롱하지만…… 그건 모두당신 탓이에요. 내 수고에 대해

당신은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감사는커녕 당신은 불평 불만뿐이었죠.

그래, 내가 과연 냉혈 인간이고 틀에 박혀서 살고 수도승처럼 욕망이 없는지 알아보려고 어

젯밤에 그런 일을 했나요? 그래요?"

굳어진 얼굴로 말을 멈추며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당신이 저항도 않고 풀어진 이유를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오? 당신도 그게 좋아져서 저항

을 포기했다는 걸 모를 만큼 내가 순진할 것 같소?"

수건을 쥔 그녀의 손이 멈췄다. 수건이 그의 입을 가리고 있었다. 하얀 수건과 검은 콧수염

이 강한 대비를 이루었다. 침묵속에 그들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의 검은 눈이 그녀를

꿰뚫듯 파고들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어깨로 떨어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여전히 그는 그

녀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아무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검은 손가락으로 수건을 입에서 걷어 냈다. 그가 마지막에 했던 말

이 점점 더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애비, 나는 어땠을 거 같소? 응?"

그녀의 몸 속에 있는 신경줄 하나하나가 신중하게 당겨졌다.

목덜미가 따끔거리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게임을 좋아하는 도박사이고 법률 파괴자

이며 그녀의 적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당황하게 만드

는 열차 강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위협스런 총처럼 자신을 찌를 듯이 응시했다. 그는

웃지 않았지만 굳은 표정도 아니었다. 다만 짙은 진지함이 보일 뿐이었다.

"묻지 않았어요."

그녀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나도 그렇소."

그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재빨리 그녀는 몸을 돌리며 물었다.

"피부가 따갑나요?"

단단한 그의 손이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내 얼굴이 타서 없어지길 바란 거요?"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버티는 그녀의 뒷목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난…… 아니오, 나도 내가 뭘 바라는지 모르겠어요."

불확실하게 흔들리는 약한 음성이었다.

"당신 옆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전혀 예기치 못했을 때 당신은 화를 내

거든요. 내가 원하는 건……."

그러나 그녀는 한숨만 내쉬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바라는 건 평화뿐이었다. 쿵쾅쿵쾅

두들겨 대는 심장도, 제시 같은 사람을 향한, 위험한 욕망도 아니었다.

"당신이 또 날 화나게 하는군."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그녀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을 응시했다. 그녀의 호흡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의 속눈썹

이 내려지고 뺨이 발갛게 물들어갔다.

"팔을 놔 줘요."

떨리는 음성으로 그녀가 애원했다.

"당신이 내 몸에 닿는 걸 원치 않아요."

"애비,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군."

그가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이봐요, 날 봐요."

그가 그녀의 좁은 어깨를 잡고 강제로 몸을 돌리자, 그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녀는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내려뜨리고 그의 발만 보았다. 그가 손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그녀

의 팔을 쓰다듬었다. 팔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녀는 그의 검은 눈빛이 불러일으킨, 억

제하기 어려운 욕망과 싸웠다.

"애비, 오늘은 일요일이오. 오늘 하루만이라도 친구처럼 지내는 게 어떻소? 봐요, 이렇게 말

이오."

"난……."

그녀가 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얼굴을 들

었다. 그녀가 면도해 주어 말끔한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어려있었다. 콧수염은 그새 자라서

더 까매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이상 시선을 들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가 한숨을 내쉬고

몸을 흔들의자에 묻었다.

여전히 그녀의 팔꿈치를 잡은 채였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팔꿈치 안쪽을

쓰다듬었다. 느슨해진 그의 손아귀가 가고 싶으면 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감촉

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전에는 느껴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이 다정스럽기까지 한 부드러움

은 이 남자에게서도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이 잡은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무엇을 하는 줄은 다 알았으나 그녀는 제지하지 않았다.

천천히 그가 그녀의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의 따스한 입술과 부드러운 수염이 손에 와 닿

았다. 그의 뺨에 닿은 그녀의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마치 마술 지팡이에 닿은 것같이 그녀

는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가 갑자기 그녀의 굽어진 손바닥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매끄럽게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자신의 무릎 쪽으로 끌었다.

"안 돼요……. 다시는 안 돼요."

그녀가 애원하듯 입을 열었으나 그는 능숙하게 그녀를 이끌었다.

"어째서?"

그가 속삭이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녀의 몸이 그의 어깨 쪽으로 돌려졌다.

"그건 우리가 서로를 싫어하기……."

그의 입술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더듬으며 올라갔다. 수염이 너

무나 부드러웠다. 그의 혀가 갈구하듯 그녀의 입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 했다.

"미칫 짓이에요. 우리 모두……."

그러나 그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의 저항을 누그러뜨렸다. 그가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려 했을 때 그녀의 손은 이미 그의 목뒤에 놓여 있었다. 그녀의 손

가락이 그의 목덜미에 늘어진 곱슬한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래, 내가 미친 게 틀림없어.

그녀는 계속 그에게 키스를 허용하며 그의 손이 자신의 등을 오르락내리락하게 내버려 두었

다.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에도 점차 힘이 들어갔다. 바로 그녀의 허리띠 위였다.

그가 그녀의 입 안에서 중얼거렸다.

"애비, 싸우지 맙시다. 이번만은, 싸우지 말아요."

그의 손이 더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그녀는 그의 무릎에 앉아 반쯤 누

운 상태였다. 작은 흔들의자에 앉은 그의 몸이 단단히 굳어져 갔다. 그녀는 더 편한 자세로

있기 위해 잠시 그녀를 들었다 놓았다. 그는 자신을 더 이상 제어할 수 없었고, 자세가 불편

한 줄도 몰랐다.

의자 때문에 몸이 휘어지자 그는 교묘하게 애비게일을 뉘였다. 그는 부드럽게 몸을 움직이며

그녀의 허리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접힌 페티코트를 통

해 그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길고…… 단단한…… 그리고 자극적인 감촉이었다.

그가 밀어넣듯 압박을 가해 오자 그녀가 저항하며 막았다.

"안 돼요. 당신은 강도예요. 당신은 적이라고요."

"애비, 당신에겐 내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적이오."

그가 속삭였다. 그의 손이 겨드랑이를 비집고 들어와 그녀를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이 그녀

의 가슴에 와 닿았다. 그 상태로 그는 그녀를 꽉 껴안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가슴에 느껴

졌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옷 위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물밀듯이 치밀어 올

라오는 욕망과 힘겹게 싸웠다.

"오, 제발요. 제발 날 내려 줘요."

거의 울먹이는 소리였다. 고통과 쾌감이 가슴으로 심장으로 어깨와 팔다리로 퍼져 나갔다.

이제는 그의 널찍한 가슴이 편안했다.

"애비, 허락해 줘요."

그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안 돼요, 아, 안 돼요, 제발."

그의 머리털에 파묻힌 그녀의 입술에서 애원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애비, 당신의 여성을 느낄 수 있게 허락해 줘요."

"안 돼요."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당신…… 당신 총에도 콧수염에도 다시는 손대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당신이 해 달라는 음

식은 뭐든 만들어 줄게요. 그러니 제발 날 가게 해줘요."

"당신은 내가 놔 주길 바라지 않소."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내려놓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점거하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얼굴

사이에 수건이 놓여 있었다.

"애비, 이 수건 좀 치워요."

그가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부탁했다.

"싫어요, 제시."

그녀는 힘겹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음성을 듣자, 제시는 그

녀도 자신을 원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얼굴을 들어 턱으로 수건을 끌어내리고 그녀의

목에 코를 파묻었다.

"친구가 됩시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옷깃에 파고들었다.

"절대 안 돼요."

그녀가 거부하자 그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 위로 올라갔다. 그가 뒤로 체중을 싣자 흔들

의자가 흔들렸다. 의자와 함께 그의 몸도 그의 무릎에 앉은 그녀도 흔들렸다. 그의 단단한

몸이 더욱 자극적으로 그녀의 몸에 부딪혀 왔다. 그는 어떤 형태든 강제로 그녀에게 요구하

고 싶지는 않았다. 설사 그녀가 자신의 의지에 반해 거절한다 하더라도.

그녀에게서 허락하는 말을 듣고 싶었다. 아니면 몸을 돌려 안겨 오는 기미라도 보이기를 바

랐다.  그러나 그도 그녀에게서 그런 반응을 볼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그녀를 이대로 놔

주면 완강히 거부하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할 게 틀림없었다.

"애비, 빨리 그렇게 하자고 대답해요. 다친 다리가 아파 오는군.

그의 놀림에 그녀는 펄쩍 놀라 몸을 일으키고는 너무나 부끄러워 안절부절못했다.

"아니, 당신의 잘난 척은 정말 못 말릴 정도군요!"

그녀가 일어서려는 걸 붙잡으며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오늘은 서로 사이 좋게 지내도록 합시다. 싸우는 것도 이젠 지쳤소."

그녀가 그의 무릎에서 벗어나려 하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사이 좋게 지내지요."

"이런, 내가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소?"

그가 놀리듯 웃음 짓자 검은 수염이 말려 올라갔다. 그의 의미 심장한 눈빛과 웃음을 보니

그녀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그녀가 서둘러 부엌 쪽으로 걸어나가자, 그는 목발을 짚고

따라나왔다.

"여기에 좀 앉아 있어도 되겠소? 침실에만 있기가 답답하군."

그녀는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반대는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제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는 목발을 옆으로 뉘며 태연히 식탁 옆에 앉았다.

"성가시게 하지 않겠소."

그러나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방해가 되었다. 길게 내뻗은 다리와 목발이 부엌을 지

나다니기 불편하게 했다. 그는 앉아서 눈으로 그녀만 쫓았다. 그녀도 그의 시선을 강하게 의

식했다. 밖에서 도허티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시오. 들어가도 되겠소?"

그가 외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오, 이런."

그가 놀랍다는 듯 나와 있는 제시를 보았다.

"부엌 의자에 앉아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군. 몸은 어떻소?"

"갈수록 힘이 나는군요. 다 애비게일 양 덕분이죠."

제시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아침에 교회에서 들었소. 오, 애비게일 양, 부탁한 바지를 사 왔소. 바지가 필요하다고 애

벌리에게 부탁했더니 마지못해가게 문을 열더군. 그런데 맞지 않으면 큰일인데. 애벌리가 벌

써 문을 닫았거든."

애비게일은 데님 바지에 시선을 주더니 저녁 준비를 계속했다. 의사와 제시는 다리 상태를

보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목소리를 낮춘 그들의 대화가 어렴풋하게 들려 왔다. 잠시 후

의사가 나오더니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

"위험한 시기는 벌써 지나갔소. 그 동안 쇠약해진 체력을 회복시키기만 하면 되겠군. 간간이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쐬게 해요. 이제 옷차림도 갖추게 되었으니, 피곤하지 않은 한도 내

에서 말을 타고 마을을 돌거나 정원을 산책하게 하는 것도 괜찮겠군."

"네, 그 사람도 좋아할 거예요."

"벌써 기대가 대단하더군. 그리고 애비게일 양에겐 전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게 단단히 당

부를 해 두었소. 이젠 가 봐야겠군. 언제든 필요하면 불러요."

그녀는 의사를 배웅하러 따라 나가다가 문가에 선 제시를 보았다. 밝은 파란색 면 셔츠에 파

란 데님 바지를 입었는데, 셔츠는 앞이 풀어헤쳐져 있었다.

"선생님, 들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바지도요."

마치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배웅하는 것처럼 현관문까지 따라나서며 그가 말했다.

"애비게일 양의 생각이었네."

"그러면 애비게일 양한테 고맙다고 해야겠군요."

제시가 몸을 돌려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의사가 현관문을 나섰다.

"두 사람 다 내일 봅시다!"

도허티는 늘 그렇듯이 쾌활한 말투로 인사를 던지며 육중한 다리를 옮겨 밖으로 나갔다. 그

의 다감하고 밝은 음성을 들으니 애비게일의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녀는 제시 옆에 서서 의

사를 배웅했다.

생각지도 않게 제시가 예의를 갖춰 말을 꺼냈다.

"몸에 맞는 옷을 입으니 기분이 좋군. 애비, 고맙소."

그가 놀리거나 빈정거릴 때는 되받아 치며 응수할 수 있었으나, 이렇게 진지하게 말을 걸어

오니 당황스러웠다. 도허티 의사가 있는 동안, 깍듯이 애비게일 양이라고 불러 준 것이 기억

났다. 그러나 의사가 떠나자마자 그는 다시 그녀를 친근하게 애비라고 불렀다.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풀어헤쳐진 셔츠 사이로 검은 가슴털이 보였다. 그의 맨발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망설이는데, 그가 예의바르게 먼저 들어가라는

몸짓을 했다. 그리고 부엌으로 향하는 그녀를 따라 목발을 짚고 들어왔다. 등에 그의 시선이

강하게 의식되었다.

그녀는 다시 요리를 시작했고 그도 의자에 앉았다. 침묵이 의식되었는지 그가 말을 꺼냈다.

"의사 선생님이 당신에게 총을 들이댔냐고 묻더군."

놀란 표정으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께 그 얘기를 하다니 좀 놀랐소."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돼지 고기를 요구했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어요."

"아, 그 말밖에 하지 않았소?"

그녀는 그가 등뒤에 앉아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쓰였다. 용기를

내어 어깨 너머로 그를 바라보니 그는 팔꿈치를 식탁에 짚고 있었고 목발은 옆에 쓰러져 있

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수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녀는 다시 등을 돌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선생님께서 또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왜 내 뺨과 목이 빨갛게 변했는지 묻더군. 그래서 당신 정원에서 딴 딸기를 먹어서 그렇다

고 했소."

그녀의 손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애비게일은 자신의 목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선생님한테…… 양잿물……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렇소."

그는 안도의 숨을 쉬는 그녀의 가는 어깨를 보았다.

그녀가 어깨를 다시 으쓱 올리고는 말했다.

"맞아요, 난 정원에서 딸기를 길러요."

그녀가 숟가락으로 뭔가를 수프에 넣었다. 날씬한 엉덩이 주위에서 스커트가 흔들렸다. 갑자

기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고 나직이 말했다.

"고마워요."

무언가 야릇한 감정이 그를 훑고 지나갔다. 그녀의 말을 듣고 이렇게 기분이 좋아진 건 처음

이었다. 그가 목을 가다듬으려고 헛기침 소리를 내자 조용하던 부엌에 천둥이 치는 것 같았

다.

"애비, 뭔가 여기에 바를 게 없소? 좀 화끈거리는군."

그녀가 몸을 획 돌리더니 바로 그에게 걸어와서 머뭇거리며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만지고는

손을 움츠렸다.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이 아직도 벌갰다.

"버터밀크(버터를 만들고 남은 우유 찌꺼기)가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의 시선이 목발로 떨어졌다.

"갖고 있소?"

"네, 밖에 저장해 놨어요. 곧 가져올게요."

그녀는 마당으로 나가 물통을 들고 오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가 그릇을 가지고 나왔다. 그녀

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동안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아, 거즈가 필요하겠군요."

다시 방에 들어가 거즈를 들고 나온 그녀는 그와 접촉하기가 두려운 듯 옆에 떨어져 섰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들었다.

"당신이 바쁘다면 나 혼자 해도 괜찮소."

아까처럼 놀란 듯 그녀가 물었다.

"손은 괜찮아요?"

"손?"

"양잿물에 닿지 않았어요? 괜찮다면 됐구요. 버터밀크, 좀 더드려요?"

"아, 이거면 됐소. 충분하오."

그는 그녀가 가져온 버터밀크를 거즈에 적셔서 화끈거리는 부위에 문질렀다. 그녀가 식품저

장실에 가면서 그에게 물었다.

"버터밀크 좋아하세요?"

"그렇소."

"점심때 놓을까요?"

"그거 좋군."

그녀가 하얀 거품이 인 잔을 그에게 건넸다. 잔을 받아 쥔 그의 손가락이 더욱 검어 보였다.

"고맙소."

그 말은 오늘 벌써 두 번째였다.

드디어 그녀가 식탁에 마주 앉았다. 그녀는 그의 앞에 있는, 닭고기가 담긴 커다란 접시를

보며 물었다.

"얼마나 드릴까요?"

"당신이 먼저 덜어요."

그가 제의했다 곧 두 사람의 접시가 가득 차고, 그들은 말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만 대화하며

음식을 먹었다.

"어렸을 때 우린 일요일마다 닭고기 요리를 먹었소."

"우리라뇨?"

"음,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래프, 준, 클레어, 토미 조. 내가족이오."

"모두 어디에 계신가요?"

"뉴올리언스에 있소."

그녀는 그가 부모님과 형, 여동생들 사이에 서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웃음이 나왔다. 도무

지 어울리지 않았다.

수완 좋은 거짓말쟁이군.

"믿기지 않는다는 뜻이오?"

그가 웃으며 닭고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글쎄요."

"열차 강도에게도 부모는 있는 법이오. 그리고 부모가 같은 혈연 구성원까지 있는 강도도 있

지."

그가 어려운 말을 써서 그녀를 놀렸다 그러나 그녀는 놀림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그

가 혈연 구성원이란 단어를 썼다는 데 놀랐다. 그런 말은 그녀가 하는 말이지 그는 아니었다

"혈연 구성원이 얼마나 많은가요?"

"음, 4명이오. 두 형과 두 여동생이 있지."

"진짜예요?"

그녀가 수상한 듯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그는 버터밀크를 한 모금 마시고는 유쾌하게 웃었다.

"당신 음성에서 의심이 철철 묻어 나오는군. 그 이유는 충분히 알 것 같소. 하지만 당신의

생각이 어긋나서 미안하오. 지금도 내 부모님은 뉴올리언스에 사시면서 일요일에는 닭고기를

, 그것도 프랑스식 닭 요리를 드시오. 어젯밤에 당신이 내 머리를 감겨 줄 때 형제들이 생각

나더군. 우리는 토요일 밤마다 머리를 감고, 어머니는 일요일을 위해 구두를 윤나게 닦아 놓

으셨소."

다소 뻔뻔한 시선으로 그녀는 제시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런데 가능한 일인가? 그는 죄를 지어 고소당한 사람이었다.

그를 믿을 수는 없다.

"놀랍소?"

그녀의 놀란 표정을 보며 그가 웃었다. 그래도 그녀는 아직도 완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 집이 있는데, 왜 나왔나요?"

"이런, 난 아주 나온 게 아니오. 정기적으로 집에 들르오. 젊을 때 돈을 벌려고 집을 떠났소

. 마음이 통하는 친구도 나를 따라 나섰지. 하지만 가끔 단란하게 가족과 살던 때가 그립소.

"그러니까 친구와 함께 뉴올리언스를 떠났다는 말이에요?"

"그렇소."

"돈은 벌었나요?"

"만족할 정도로. 우린 같이 열차에서 일했소."

"오, 또 열차군요."

그녀가 알겠다는 듯 읊조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그가 자기 손을 한 번 힐끗 내려다보았다.

"현행범으로 잡혔는데."

아무렇지 않은 듯 명랑하게 말하는 그를 보니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얼른 붙임성 있는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뉴올리언스에 가족이 있는지 의심

스러웠다.

"당신은?"

식사를 마치고 그는 편안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을 식탁에 걸쳤다.

"오빠나 동생은 없소?"

돌연 그녀의 시선이 현관문의 유리창으로 향했다. 꿈꾸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

"아무도 없어요."

"난 스무 살 때 가족을 떠났소. 의사 선생님한테 듣기로는, 당신은 부모님과 여기서 살았다

는데."

"그래요."

있지도 않은 먼지를 스커트에서 털어 내며 그녀가 대답했다.

"선택의 여지도 없었던 거요?"

그녀는 그런 물음은 용납도 못 한다는 날카로운 표정을 보였다.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시는 또 수염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장난 쳤다.

"언젠가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당신은 젊은 시절을 병든 아버지 때문에 다 보냈다고

하더군. 칭찬할 만한 일이오."

애비게일은 자신을 놀리는 건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눈빛이었다.

"언제부터 수발을 들었소?"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고 그에게 말해도 되는지 마음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13년 전부터예요."

"스무 살 때부터요?"

"네."

그녀의 시선이 무릎으로 떨어졌다.

"대단하군."

나직한 그의 음성이 그녀의 맥박을 뛰게 만들었다. 그녀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어디에 시

선을 두어야 할지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거요. 애비, 지금 후회하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언제 돌아가셨소?"

제시가 계속 물었다.

"1년 전이에요."

"12년 동안 아버지를 간호한 거요?"

그녀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침묵으로 대답했다.

"12년이라, 그 동안 집안 일을 배웠다면 가정을 꾸려 나가는데는 선수가 되었겠군. 가족을

돌보는 데도. 아직 가족이 없는데 왜 그런 거요?"

느닷없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당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는 건

아니리라. 그러나 그녀는 자존심을 세우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았다.

"내가 생각해도 선수가 된 것 같아요."

"그 말은 그럴 기회가 있었다는 거요?"

그녀가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얼굴색이 변해 갔다. 그에게 털어놓는 것보다 그냥 가슴속에

고통을 묻어 놓는 편이 더 나을것 같았다.

"멜처가 그대로 떠났으니, 당신 때문에 기회가 없어진 셈이군요."

더 이상 정곡을 찔러 대는 그의 질문을 참아 낼 수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일어나 부엌을 나

가려 했다. 그의 손이 뻗어 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이제 알았소."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에 대한 증오심이 사그라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증오심이 사라진다는 것 자체가 더욱 두려웠다.

"그 얘기를 더 해야 하나요?"

그녀가 소매를 잡은 그의 검은 손가락을 응시했다.

"애비, 난 사과하는 거요. 지금까지 남에게 사과는 별로 하지 않고 살아왔소."

예상 밖의 진지함에 그녀는 놀랄 따름이었다.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성실하게 자신을 대하

는 그를 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번에 그의 사과를 거절해서 생긴 일이 기억났다. 말이라도 그녀는 이렇게 해야 했다.

"사과를 받아들이지요."

한 번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녀의 팔을 놓아 주었다. 그러나 마치 낙인이 찍힌 듯이

그 여운이 길게 팔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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