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8화 (8/24)

8

"죄송합니다만, 애비게일 양의 말씀대로는 전보를 보낼 수 없습니다."

맥스가 대답했다.

"아니, 왜 안 된다는 거예요?"

턱을 들고 대꾸하는 그녀의 음성이 딱딱해졌다.

"보안관의 명령입니다."

맥스가 중요하다는 듯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가셔서 샘에게 말씀해 보시면 전신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못 해요."

난처했다. 화를 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을을 휘젓고 다니면, 그녀가 그 남

자를 내쫓고 싶어한다고 온 마을에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속에서 울화통이 터졌지만

제시의 말이 맞았다.

"그 남자를 내 집에서 내보내고 싶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 다니면, 사람들은 왜 그런지 이유를 알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면 뭐라

고 대답할 것인가? 그가 총으로 위협해 키스를 하게 만들었다고? 결코 그 사실을 고백할 수

는 없었다. 그러면 총으로 위협해 그의 아침을 만들게 했다고 할까? 아니야, 그녀는 그의 간

호와 시중을 들기 때문에 보수를 받는 것이었다 그를 굶기려 했다는 사실을 결국 사람들 앞

에서 인정해야 했다. 총으로 위협해서 강제로 면도를 돕게 했다고 하면? 휴, 결국 그 속에

가려진 얘기까지 다 알려지면, 상황은 더나빠지겠지 그런데 왜 이 멍청한 맥스웰 스미스는

거만하게 구는 거지? 이 짧은 전보만 보내면 만사 태평인데.

이윽고 그녀는 새뮤얼 해리스 보안관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낫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애비게일 양."

해리스 보안관이 말했다.

"먼저 도허티 의사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법적인 절차로 꼭 필요하죠. 공식적으로 의사의

치료를 받는 죄인은 그 의사의 동의를 얻어야 감옥을 옮길 수 있습니다. 오, 이런 미안합니

다. 애비게일 양의 집이 감옥이란 건 아닙니다. 제 말을 이해하시겠죠, 애비게일 양?"

"네, 물론입니다, 해리스 씨. 그러면 먼저 도허티 선생님과 얘기해 봐야겠군요."

그녀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도허티 의사는 집에 없었다. 그녀는 큰길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정육점이 있는 방향

이었다. 제시의 당부 때문에 억지로 그곳으로 가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애비게일 양."

이발소를 나서는 빌 틸든이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틸든 씨."

"날씨가 너무 덥지요?"

모자를 쓰지 않은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살펴보며 그가 말을 건넸다.

"컬페퍼 식당으로 점심 먹으러 가는 길입니다."

빌이 친근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점심 식사하러 나감'이라는 팻말을 이발소

문에 내거는 프랭크 애드니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애비게일 양."

"아, 애드니 씨."

그녀가 목인사를 보냈다.

"찌는 듯이 덥군요."

"네, 그렇군요."

그녀는 보도 위로 올라갔다. 스튜어트 정크션에서 그녀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항상 일정

했다. 그녀 등뒤에서, 빌 틸든이 프랭크 애드니에게 물었다.

"여보게, 애비게일 양이 모자와 장갑 없이 거리를 다니는 걸본 적 있었나?"

"생각해 보니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구1"

그들은 포터의 정육점으로 들어서는 애비게일을 바라보며, 믿기지 않은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안녕하세요, 애비게일 양."

게이브 포터가 맞이했다.

"좋은 날이에요, 포터 씨."

"애비게일 양 댁에서 열차 강도를 돌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요?"

맘모스 같은 거구의 게이브는 앞치마를 두른 채 팔짱을 끼고있었다. 파리들이 주위를 날아다

녔다.

"체, 모두 다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이 성가시게 하지 않나요?"

"아니오, 전혀."

"도회지 멋쟁이는 어제 떠났다면서요?"

"네."

"그럼 위험하게 혼자서 그 사람과 같이 있는 겁니까?"

"포터 씨, 지금 제가 위험해 보이나요?"

"아니오, 그렇게는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애비게일 양, 마을사람들이 모두 걱정해요."

"그럼, 걱정은 그만 하시라고 하세요, 포터 씨.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건, 식량이 빨리 떨

어진다는 거지요."

그녀의 말을 들은 게이브는 깜짝 놀랐다. 그는 자신이 주문을 받기를 그녀가 기다린다는 것

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 그래요! 오늘은 뭘로 드릴까요?"

"오늘 돼지 고기는 어떤가요? 신선하게 보관되어 있나요?"

"네, 물론이죠. 신선도를 유지하려고 딱딱해질 정도로 얼음속에다 넣어 뒀습니다."

"좋아요. 그럼 포터 씨, 세 덩이 주세요."

"아니, 정말입니까?"

"아, 다시 생각해 보니 네 덩이나 다섯 덩이는 필요할 것 같군요."

"다섯 덩이요? 애비게일 양, 아무리 잘 보관해도 내일이 지나면 상하고 말 텐데요."

"그래도 다섯 덩이가 필요해요. 그리고 훈제 소시지도 주세요. 이 정도로 긴 걸로요."

그녀는 손을 들어 6인치 정도 벌렸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10인치 정도로 더

벌렸다.

"아니, 이 만큼이 좋겠군요."

"아니, 애비게일 양, 집에서 고릴라라도 키우시나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확해요!"

그리고 그녀는 불쌍한 게이브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말라는 시선을 보내며 주문했다.

"그리고 돼지 방광이 하나 필요해요."

"돼지…… 방광요? 애비게일 양?"

눈이 휘둥그래진 그가 물었다.

"포터 씨, 당신은 정육점 주인이에요, 맞지요? 그러니 내장은 다 가지고 계시겠죠?"

"오, 갖고 있어요. 아직 버리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그렇다면 하나 싸주세요."

그녀가 가차없이 주문을 하자, 그는 서둘러 고기들을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가게를

나가는 모양을 보며 중얼거렸다.

"…… 돼지 방광이라. 대체 그걸로 뭘 하려는 걸까?"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현관에 방금 생긴 지저분한 얼룩을 발견했다. 또 치료하러 이곳에

들른 도허티 의사를 놓친 것이다. 저 흉물스런 인간을 내보내야 하는데 그를 만나지 못했으

니 오늘은 지독히도 운이 없었다.

실망해서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우산대 위에 있는 거울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모자가 없

었다. 이런 세상에! 모자도 없이 외출을 했다니. 그녀는 머리를 만져 보았다. 그리고 소매와

허리를 매만지고는 얼굴이 햇볕에 그을리지 않았나 손으로 볼을 확인해 보았다.

"단단하오?"

깊은 목소리가 물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숨을 멈추고 손으로 가슴을 쓸었다.

"대체 거기에서 뭐 하는 거예요?"

그는 부엌 문가에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그의 검은 가슴과 종아리만 보일 뿐 그 밖의 몸은

시트로 감싸여 있었다.

"내가 먼저 물었소."

"네?"

그녀의 머릿속엔 저 시트가 흘러내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뿐이었다.

"물론 단단하겠지. 그렇게 매일 하늘을 찌를 듯이 들고 다녔으니, 안 그러고 배길까?"

그녀가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얼굴을 치켜 들었다.

"설 수 있으니, 이젠 이곳을 나갈 만큼 나았군요. 너무나 기쁘네요!"

"의사가 목발을 가져다 주었소. 그래서 한번 나와 본 거요. 언제 이곳을 나갈지는 내가 결정

하오.  아직 돌아갈 정도는 아니오."

"아니, 그런 차림으로 정원을 걸어다녔어요?"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해요?"

"보면 어떻소?"

"저도 지켜야 할 명예가 있어요!"

"애비게일 양, 너무 잘난 체가 심하군."

그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피가 왈칵 얼굴로 몰리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귓불까

지 빨개졌다.

"음, 좀 현기증이 나는군."

"현기증요? 다시는 그런 차림으로 돌아다니지 말아요! 침대로 돌아가요, 내 말이 안 들려요?

당신이 마루에 쓰러지면, 옮기지도 못한단 말이에요!"

그는 목발을 내디디며 방문까지는 그런대로 잘 걸어갔다. 그러나 문가에서 접힌 양탄자의 주

름을 밟자, 목발이 기우뚱하며 그가 비틀거렸다. 그녀는 얼른 달려가 그가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간신히 그의 몸을 세우고는, 앉아서 양탄자의 주름을 펴려 했다

. 그러나 목발이 그 속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제 힘으론 뺄 수가 없군요. 이 목발 좀 치워 주겠어요?"

그녀는 앉은 상태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너무나 그의 얼굴이 멀어 보였다. 말이 경

고조가 되었다.

"캐머런 씨, 이 목발을 치우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당신에게 더 이상 용서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데. 당신은…… 히스테리 심한……

벌새 아니오?"

그가 휘청하며 한 쪽 발로 깨금질을 하자, 나머지 한 쪽의 목발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옆으

로 쓰러졌다.

"빨리 침대로 가요."

그녀는 그를 어깨로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의 덩치가 너무 커서 방문을 함께

통과하기가 힘들었다. 그럭저럭 간신히 침대로 가서 그를 앉힌 뒤, 그녀는 얼른 어깨에 놓인

그의 팔을 치우고 일어섰다.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상식 있게 행동해 주시면 좋겠군요. 첫째, 벗은 몸을 과시하듯 그렇게

돌아다니지 말고, 파자마나 가운을 입으세요. 둘째, 당신은 아직 옆에서 누가 돌봐야 해요.

혼자서 집안을 돌아다니지 말아요. 그러다가 넘어지면 어떻게해요? 만약…… 고릴라처럼 당

신이 쓰러지면, 나 혼자 어떻게 당신을 감당하라구요?"

윙하고 현기증이 일었지만, 그는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애비게일 양, 전보는 쳤소?"

"네!"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당신을 데리러 그렇게 빨리 오지는 못한다고 하더군요."

"날 쫓아내고 싶다면, 좀더 잘 먹여야 할 거요. 난 모기처럼 허약해졌소. 고기는 넉넉하게

사 왔겠지?"

"네! 당신 덩치만큼 사 왔어요."

*   *   *

그는 빗방울이 천막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러나 그것은 애비게일이 부엌에서 돼

지 고기를 튀기는 소리였다. 기지개를 켰다. 오른발이 좀 당겼지만 전처럼 그리 아프지는 않

았다. 구수한 냄새를 맡고 있자니, 식욕이 당겨 입 속에 침이 가득괴고 뱃속에선 우르릉거리

며 요란스레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을 땐 거의 참기 힘든 정도였다.

"음…… 돼지 고기 냄새군. 진짜 고기 맞소?"

그녀가 쟁반을 무릎 위에 놓자 그의 입이 벙긋 벌어졌다. 요리가 식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지

뚜껑까지 덮여 있었다.

"네, 고기 요리예요."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긍정했다.

"결국 인간의 따스한 심장으로 돌아온 거요?"

"맞혀 봐요."

그녀는 쾌활하게 대답하며 뚜껑을 열었다. 접시에는 익히지도 않은 돼지의 오줌보가 있었다.

그의 검은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급격히 변해 갔다.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저 망할 접시에 있는 게 대체 뭐요?"

"진짜 고기요. 당신이 원했던 게 아닌가요?"

천진한 말투로 그녀가 물었다. 이 순간을 짜릿하게 즐기면서.

"사실대로 말하면 돼지 고기예요. 돼지 방광. 당신 같은 염소에겐 딱 맞는 음식이죠."

그가 악의에 찬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애비! 돼지 살코기 냄새를 맡았소. 핑계 댈 생각은 하지 말아요! 당장 이리로 가지고 와요!

아니면 시트 바람으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왈가닥 같은 애비게일 매켄지가 보수를 받으면서

도 날 굶긴다고 외쳐 댈까?"

그녀도 이제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잊어버리고 극심한 분노에 두 손을 꼭 쥐

었다.

"이봐요, 이젠 제가 강의를 할 차례군요! 맞아요, 돼지 살코기, 감자 튀김, 고기 수프, 채소

등등 당신 배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놓았어요. 그걸 먹으면 이곳을 힘차게 뛰

어나갈 수 있을 정도로 맛있고 양도 많죠.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얌전하게 행동하는 거예요

. 그 더러운 총을 당장 내놔요!"

"내 돼지 고기를 가져와!"

"그녀를 노려보며 그가 소리 쳤다.

"총을 내놔요!"

"지옥이 여기보다 낫겠다!"

"그럼 돼지 고기를 찾을 필요가 없겠군요!"

갑자기 총이 눈앞에 보였다. 이렇게 빨리 그가 총을 꺼낼 수 있는 줄은 몰랐다. 총은 방아쇠

가 당겨진 채 그녀를 겨누었다.

"내…… 돼지…… 고기를…… 가지고…… 와."

으르렁 거리 는 목소리였다.

당황한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 더러운 물건을 내…… 내 눈앞에서 치워요!"

"돼지 고기를 가져오면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

"제발요!"

그녀가 고함을 질렀다.

"제발!"

그가 더 크게 고함을 질렀다.

한순간 침묵이 흐르고, 두 사람 모두 이성을 찾았다. 요란스레 고함을 질러 대는 자신들이

바보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결국 그는 돼지 고기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녀의 패배였다. 내일이 일요일이라는 사실이 불

행 중 다행이었다. 범해서는 안될 죄악을 모두 저지른 그녀에게는 성스러운 가르침이 절대적

으로 필요했다. 분노, 원한, 복수, 거짓말 심지어 난잡한 남자관계까지.

그래, 키스를 하는 동안 난 더러운 여자가 된 거야. 그래, 반발할 여지가 없어. 하지만 그녀

가 죄의식을 가진다면, 더 심한 그도 신께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 사람이 악 그 자체였으나

그는 교회에 갈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돼지 방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묻지 않았다. 염소 같은 사람이니

까 흡족해 하며 다 먹어 버렸겠지!

"아버지가 쓰시던 파자마를 가지고 올게요. 그걸 입어요. 그털 투성이 다리와 가슴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니까요."

"정말이오?"

그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는, 마치 황금이라도 닦듯이 뽐내며 손으로 가슴

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자만심에 빠진 그의 행동을 무시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시

야에, 물이 담긴 대야에 잠긴 돼지 오줌통이 잡혔다. 그것을 치우려고 대야를 드니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대로 놔 둬요."

"뭐라고요!"

"그대로 놔 두라고 말했소."

"하지만 악취가 나잖아요."

그녀가 물에 반쯤 잠긴 오줌보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냥 놔 둬요!"

강한 어조로 그가 다시 말했다.

"나가서 파자마나 가지고 와요."

고맙게도 그녀는 그대로 그것을 놔 둔 채 나갔다.

토요일 오후에는 일요일을 대비해서 항상 집안 청소를 했다. 애비게일은 청소를 다 마치고

침실 문가에서 그를 불렀다.

"캐머런 씨, 이젠 차림이 점잖아지셨나요?"

"뱀도 겨드랑이가 있소?"

대답이 들려 왔다.

그녀는 손을 들어 입을 막으며 웃음을 참았다. 저 지독한 인간을 보면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데도, 어떻게 이렇게 쉽사리 나를 웃기는 거지?

"나는 어쨌든 가리고 있소. 당신이 묻는 게 그거라면 말이오. 하지만 당신 희망대로 단정한

차림은 아니오."

방으로 들어가 그를 본 애비게일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우스꽝스런 모습이었다

. 파자마 바지는 털이 무성한 그의 종아리를 반쯤 가릴 뿐이었다.

"왜 웃는 거요?"

그가 투덜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젠장할, 당신 말대로 이걸 입었는데, 차림이 점잖아지기는커녕 바보 천치가 된 기분이오.

찢어지게 가난한 짐꾼 같단 말이오. 아니야, 그 사람들은 이것보다 긴 바지를 입고 있소. 젠

장, 당신 아버지는 난쟁이가 틀림없군!"

"그래도 그걸로 만족하세요. 그것보다 더 긴 바지는 없으니까요."

털이 숭숭 난 그의 정강이를 바라보며 그녀가 또 다시 웃음을 지었다.

"좋소! 청소하러 이 방에 들어왔으면 빨리 청소나 해요. 당신이 한 번 더 날 보고 웃으면 당

장 이놈의 옷을 벗어 버리겠소!"

"당신처럼 입이 험한 사람은 처음이에요. 다시 부들풀로 당신 목구멍을 찔러 대서 그때처럼

말을 못 하도록 하고 싶군요."

"말다툼은 그만두고 청소나 해요."

그들의 언쟁도 어느덧 횟수를 더해 가니 일정한 형식이 생겼다.

그들은 화가 나면, 뜻 깊은 말이나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해서 상대방의 심기를 흐려 놓았다.

즉 심하게 비꼬거나 빈정거리면서 문자 그대로 '입으로 하는 격투전'을 벌이는 것이다. 애비

게일이 가장 즐기는 싸움 형태였다.

청소를 하는 동안 그의 시선이 계속 그녀를 쫓아다녔다. 그녀가 시트를 바꾸고 침대 밑을 청

소하는 동안, 그는 창문가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구부리고 침대 밑을 닦던 애비게일

은 구석에 깊숙이 넣어 둔 부츠를 볼 수 있었다. 매트리스 사이에, 지저분한 하얀 셔츠로 뭔

가가 감싸인 것도 보였다 권총일 것이다. 그것을 그에게 줄 사람은 도허티 의사밖에 없었다.

어쩌면 선생님은 그렇게 멍청한 행동을 했을까. 그녀는 권총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테이블 위를 깨끗이 정리하고 주전자

와 물그릇을 가져다 놓았다.

"왜 이 지저분한 것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 보고 싶군요."

그녀가 혐오스런 눈길로 돼지 방광을 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그대로 놔 둬요."

그가 시뻘건 홍당무를 싫어한다고 말한 것 빼고는, 저녁 식사는 순조롭게 지나갔다.

돼지 방광은 아직도 대야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애비게일은 머릿속으로 내일 할 일을 짜기

시작했다.

밤이 드리워지고 제시는 지루하고 따분해졌다. 그녀가 들락날락하는 모양을 보는 건 그런대

로 즐거웠지만, 이젠 주위가 조용해지고 그 혼자 방에 남아 있었다. 말다툼을 벌이더라도 그

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어렸을 때 항상 싸우던 놀이 친구처럼, 없으니 더욱 허전했다. 차라

리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편이 나을 것같았다. 그녀가 많은 양의 물을 쓰는 소리가 들려 왔

다. 목발을 이용해 문가로 걸어갔더니 그녀는 현관 계단 옆에서 머리를 감고 있었다 그는 창

이 달린 문을 열어 젖혔다. 문이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에 두 번이나 부딪혔다.

"도대체 왜 여기서 머리를 감는 거요? 당신은 통로를 꽉 막고있소."

"문이나 내 머리에서 치워요!"

비누가 잔뜩 묻은 머리 아래서 그녀가 소리 쳤다.

"내 집이니까, 어디서든 내 마음대로 머리를 감을 수 있단 말이에요. 부엌에서 물 튀기며 감

는 것보단 여기가 훨씬 나아요."

그는 창 너머로 그녀가 머리를 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대야

에 헹궜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비누 거품이 묻었다. 그는 자신이 나갈 수 있을 만큼 문을

열고 그녀 옆에 다가갔다. 그녀는 그가 나와서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무릎을 구부리고 머리를 감고 그는 서서 자신을 보았다. 상황이 불리했다.

그는 안정된 자세로 오른발을 들어 엄지발가락으로 그 비누거품을 닦아 냈다.

"지저분한 취기를 모두 없애 버리고, 반들반들하고 윤이 나는 모습으로 교회에 가려는 거요?

그는 언젠가 그녀가 썼던 어려운 말을 인용하며 빈정거렸다.

아니, 발로 내 머리를? 정말 못 말리는 남자였다. 그녀는 앞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을 휘둘

러 그의 다리를 쳤다. 찰싹 소리가 났다. 그는 짧은 파자마 바람으로 뜰에 나와 있었다.

"애비게일 양, 누구 죄를 씻어 달라고 기도할 거요? 당신이오, 나요?"

뜰에 나와 있던 이웃 소년 롭 넬슨이 그 말을 듣고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엄마! 엄마! 제가 방금 뭘 봤는지 아세요!"

머리를 다 감은 그녀가 불쾌한 얼굴로 들어갔다. 머쓱해진 그는 무기력한 자신을 생각하며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목발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기력을 회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쓸어 넘기니 머리가 가려웠다. 샴푸가 생각났다.

"애비게일 양?"

그녀를 불러 보았지만 집 안은 조용했다.

"내 말 들려요?"

대답이 없었다.

"샴푸 좀 갖다 줘요."

여전히 대답이 없었으나 위층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나 혼자 감을 수 있소."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쳐 보았지만 사실 그녀가 대답하거나 샴푸를 가져다 주리라고는 기대하

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토요일 저녁 8시에 일손을 놓고 침실 문을 닫아 거는, 전형적인 늙은 가정부 같군."

너무 따분했다. 그녀가 내려와서 말동무를 해주었으면, 그녀가 신랄한 말을 하면 그도 같이

퍼부어 줄 것이다. 누구하고라도 잠시 동안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마을에서 희미하게 술 마

시고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맥주가, 말동무가 그리웠다. 그의 무릎에 앉아 있

던 여자까지도.

애비게일은 머리를 말리면서 창문을 열어 그 위에 수건을 걸어 놓았다. 그리고 혹시 새치가

있을까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가 부르는 소리가 또 들려 왔지만 무시해 버렸다

감히 발가락을 목에 대다니.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외면하며 은밀한 웃음을 지었다. 그를 조바심 내게 하는 건 매

번 즐거웠다. 내일 교회에 뭘 입고 갈지 생각해 보았다. 옷이 다 그 침실에 있었다. 침대 아

래에 있던 총이 생각났다. 그가 했던 키스도. 얼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아직도 술집에서 떠

드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거의 칠월이 다 되어 가니 밤에도 더운 여름의 열기가 느껴

졌다.

항상 토요일 밤에는 머리를 감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오늘은 뭔가 허전했다. 그 뭔가는

남자였다. 그렇게 매스꺼운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를 조바심

나게 하며 외면할 수 있을까? 다시 샴푸를 달라는 그의 외침이 들려 왔다.

무슨 허튼 소리! 그는 머리를 다 감을 때까지 서 있지도 못할것이다! 며칠 동안이나 머리를

감지 못했을까? 아흐레? 열흘? 그가 의식이 없었을 때 머리를 감겨 주겠다고 약속했던 일이

기억났다.  철도 회사에서 그를 데리러 오면, 그는 지저분한 모습으로 여기를 나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에게 핑곗거리를 만들어 주지 않는 게 현명했다.

이건 내가 외로워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처럼 끔찍한 사람과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혼자 있

는 게 훨씬 낫다고.

갑자기 그녀가 문 앞에 나타나더니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불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항상 그런 지저분한 짓을 하나요?"

깨끗하게 닦인 돼지 방광은 속에 공기가 주입되어 공처럼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한 쪽 끝을

실로 단단히 매고 그는 그것을 오른손으로 꽉 쥐었다 놓았다 했다.

"총을 잘 다루기 위해 오른손을 단련하는 거요."

웃음을 지으며 그가 대답했다.

빈정거리던 기색이 없어진 그녀는 조심스런 시선으로 그의 손을 보았다. 총이 있는지 주위를

살폈다. 위가 팽팽히 죄어 왔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또 다시 그 혐오스런 짓을 허용해

그를 만족시켜? 그녀의 뺨이 붉게 타올랐다.

"그 지저분한 짓을 멈추면, 머리를 감을 수 있도록 도와 드리죠."

그는 입가에 웃음을 띠며, 아무렇게나 돼지 오줌보를 옆에다 던졌다.

좋았어, 여왕님의 행차시라! 잠옷으로 꽁꽁 감싸였지만 상관없어!

"머리를 감는 동안 당신이 계속 서 있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러니 귀리 샴푸를 하는 게 좋

을 것 같아요. 냄새가 향기롭진 않겠지만 훨씬 수월할 거예요."

"애비, 말을 막고 싶진 않지만 당신이 뭘 하려는진 아는 거요?"

"그럼요. 먼저 당신이 누워야 해요."

"귀리?"

믿기지 않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네."

활기 차게 그녀가 대답했다.

"건조한 방법을 원하는 거예요, 원치 않는 거예요?"

그러나 자신이 뭐라 말했는지 그녀가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그는 음흉한 눈웃음을 지었

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그에게 키스했을 때 그가 했던, 건조한 도마뱀 같다는 말을 인용

한 것이다. 그녀의 얼굴 전체가 계피 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길게 기지개를 펴며 느리게 말했다.

"기어이 날 건조하게 다루겠다는 말이군."

너무 당황한 그녀는 공연히 귀리 가루와 수건, 빨래 집게 세개를 덜그럭거리며 늘어놓았다.

그것들을 본 그는 더욱 의심스런 눈빛을 보냈다.

"이 수건을 머리 뒤에 깔아요."

성급하게 그녀가 지시했다.

"아, 알았소. 꼭 말도 못 알아듣는 멍청이 취급이군."

그는 그녀가 수건을 깔 수 있도록 머리를 들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귀리 가루를 듬뿍 그의

머리에 뿌리고 마치 비누질하는 것처럼 머리를 비볐다.

"일석이조로군 틀림없이 내일 아침 식사는 이 귀리 가루로 만든 오트밀이겠군."

그가 비꼬았다.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제시는 그런 그녀를  장난스레 곁눈질로 보았다. 이

윽고 그는 눈을 감고, 그의 머리를 매만져 주는 애비게일의 손길을 즐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토요일이 떠올랐다. 형제들의 구두에 구두약을 먹여 말끔히 닦아 놓고, 계단 아래 앉

아 토요일 아침이 밝아오길 얼마나 기다렸던가?

"머리를 들어요!"

그녀의 지시로 그는 환상에서 깨어났다.

"이걸 다 털어 내야 해요. 내가 올 때까지 이대로 있어요."

그녀는 그의 머리 밑에 놓인 수건을 조심스레 잡고는 밖으로 나가서 귀리 가루를 털어 냈다.

그리고 새 귀리 가루를 가져와 그의 머리에 뿌렸다. 이번에는 수건을 터번 모양으로 말아

그의 머리를 감싸고 그것이 흘러내리지 않게 빨래 집게로 단단히 꽂았다.

"귀리가 머리에 있는 기름때를 흡수할 거예요. 잠시 이대로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손을 씻으러 가려고 대야를 들었다. 그 속엔 아직도 돼지 방광이 있었다. 그

녀는 찡그린 얼굴로 그것을 집어들고 옆으로 던졌다.

그녀가 방 안에 돌아와 보니, 아까처럼 그는 그 방광으로 손을 단련하고 있었다.

"수건을 풀 때까지 여기에 있어요."

그가 청했다.

되돌아선 그녀는 믿기지 않는 듯 그의 손가락 관절 운동을 응시했다.

"내가 색골로 돌변해서 지분거리려 하면 어떻게 자제해야 할까?"

그가 갑자기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얼른 허리끈을 졸라맸다. 그가 주물럭거리던 지

저분한 것을 옆으로 던지고 그녀를 부드럽게 어르기 시작했다.

"이봐요, 애비, 오늘은 토요일 밤이오. 사교적인 날이지. 잊어버린 거요? 나는 2주일 가까이

이 침대에 누워 있었소. 거의 정신 착란이 생길 지경이오. 지금 내가 원하는 건 말상대뿐이

오."

그녀는 다행인 듯 한숨을 내쉬고 침대 발치의 장식 위에 걸터앉았다.

"안정을 취해야 빨리 완쾌되잖아요."

"이렇게 오랫동안 침대 신세를 진 적이 없소."

"이전에는 뭘 하셨나요?"

무자비하고 탐욕스런 강도의 삶을 자세히 들으려고 물은 건 아니었다. 다만 정상적이고 일상

적인 생활과는 먼 색다른 삶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는 진실을 말하면 그녀가 믿어 줄

것인지 잠시 고심했다.

"물론 이렇게 조용한 시골 마을에선 살지 않았소. 대부분의 시간을 당신 같은 여자와 보냈소

. 여행을 많이 다녔지."

"네, 당신 직업상 그러실 것 같아요. 그런 삶에 지치지는 않았나요?"

"가끔. 하지만 해야 했고, 지금까지 그럭저럭 해 왔소."

그녀는 시선을 들어 그의 눈을 보았다.

"아무도 그런 삶을 살라고 하지 않았어요. 왜 그만두고 건전한 직업을 찾으려고 하지 않나요

?"

"당신이 믿든 말든, 사진사가 건전한 직업이 아니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군."

"아, 그럼 당신이 카메라를 잃어버렸다고 한 말을 내가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군요."

"그렇소. 내 추측으론, 당신 같은 여자는 믿지 않을 것 같소."

"당신이 사진사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의 무리한 주장을 애비게일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다.

"철길을 놓는 것이야말로, 숭고한 역사를 만드는 일이지."

반쯤 웃음기가 있는 얼굴로 그가 대답했다.

그는 연극 배우처럼 한 쪽 손을 들어 올리며 허풍스레 말했다.

"두 줄의 철길로 거미줄처럼 땅을 엮어 놓으면, 그 혜택을 자손에게 영원히 남겨 줄 수 있소

."

그는 손을 내리고 자기 반성에 빠진 듯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같은 사건이 벌어지다니, 정말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일이었소."

한숨을 내쉰 그는 두 손을 목덜미에 대고 천장을 응시했다. 그의 심각한 얼굴에 그녀는 잠시

동안 거의 그의 말을 믿을 뻔했다.

"캐머런 씨, 내가 당신을 믿기를 바라는군요."

"나를 제시라고 부르면 입이 부르터요? 이렇게 편안히 담소를 나눌 때엔 제시라고 불러 주었

으면 좋겠소."

"이미 내 몸에 익은 교양 있는 생활 방식이라고 이해시킨 것 같은데요."

"여기엔 당신과 나밖에 아무도 없소.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을 지켜 주지."

악동같이 주위를 훑어보고는 그가 은밀하게 말했다.

"아니오, 당신을 믿지 못하겠어요. 제시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다시는. 화제를 돌리죠. 당신

직업 얘기 좀더 해줘요. 열차강도가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 줘 봐요."

고집스런 그녀에게 두 손을 든 듯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좋소. 난 철도 회사에서 일해요. 사진 찍는 일은 철로를 계획하는 단계의 일이오. 당신에게

말한 대로 직업상,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돌아다니죠. 철로가

놓일 장소들을 찍으면서 말이오, 많은 시간을 열차와 텐트 속에서 보냈소. 그래서 그다지 얘

깃거리가 없소."

"당신이 정말 그런 일을 한다면, 왜 당신을 먹여 살리는 열차승객들에게 강도짓을 저지른 거

예요?"

"애비, 그건 실수였소."

"애비게일 양이에요."

그녀가 정정했다.

"좋소. 그럼 애비게일 양, 철도 캠프를 본 적 있소?"

"한 번도 없어요."

"그래, 보지 못했겠지. 애비게일 양의 집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머니까. 철도 캠프는 마을

한복판에선 전혀 볼 수 없는 열악한 주거 환경이오. 여관비가 없는 사람들이 기거하는 곳이

지."

"당신처럼요?"

무심코 입을 연 그녀의 대답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철도 공사를 하는 인부들과 비교하면 나는 양반이나 다름없소. 그들의 삶은 거칠어요. 말은

더욱 거칠고. 아무도 감히 총알처럼 매서운 그들의 눈을 마주 보려 하지 않소. 그들 사이엔

법이란 존재하지도 않소. 다툼은 총과 주먹으로 해결하오. 어떨땐 근처에 있는 아무거나 들

고 싸우기도 하지. 망치 같은 걸로 말이오. 철도 공사장을 따라 임시로 만들어지는 캠프에는

법원도 마을도 없소. 집이나 상점, 교회, 창고 그리고 안식처 같은 단어는 아예 있지도 않

소. 남자들은 총 없이는 한 순간도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소. 산 속에 있는 스라소니나 황

야의 늑대처럼 하루하루를 살아 내는 거지. 그들은 자연스럽게 물을 중심으로 무리를 형성하

오. 다리 주변이나 밑에서 생활하지. 동물들이 항상 일정한 시간에 물을 마시러 오는 것처럼

말이오."

"캐머런 씨, 요점이 뭐예요?"

"내 말은 총을 자신의 일부처럼 가지고 다니는 서부 사람들처럼 나도 총을 지니고 다닌다는

거요. 그 열차에 총을 들고 탔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소. 하지만 강도짓을 하기 위해 그

걸 사용하지는 않았소."

"현행범으로 잡혔다는 사실을 잊으셨나 보군요."

"뭐라고? 젠장, 난 단지 깨끗이 손질을 해서 장전을 하려고 했을 뿐이오. 그런데 신경질적인

늙은 여자가 비명을 질러 댔소.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서 내 몸이 바닥에 쓰러지고 총소리가

났소. 그리고 눈을 떠보니 당신 집이었소. 이게 전부요."

"어느 정도 얘기는 되는군요. 캐머런 씨, 배우를 하tu도 되겠어요."

"배우가 될 생각은 없소. 난 괜찮은 사진사요. 내 감광판을 보면 당신도 부인하지 못할 거요

."

"무척 확신에 찬 음성이군요."

"당연하지. 두고 보면 알 거요."

"오, 물론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걸 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는군요."

"믿기기 어려운 여자군."

"난 눈앞에 확실한 증거만 있다면 진실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여자예요."

"진짜 난 사진사요. 진실이 확인되는 순간을 찍어 그 기록을 영원히 남기겠소."

"진실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를 세심히 관찰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래요, 어제 저녁을 예로 들어 보지. 어제 저녁 당신은 흔들의자에 앉아서 무척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 줬소. 환한 웃음위로 햇살이 부딪혔지. 정확히 구도를 잡으면 항상 딱딱하게 굳

어 있던 당신 얼굴을 뒤덮어 버린, 자연스럽고 편안한 원래의 당신 심성을 포착할 수 있었을

거요. 간단히 말하면, 내 카메라가 있었다면 놓치지 않았을 거란 말이오. 당신이 숨기려고

하는 그 본모습을 말이오. 사기꾼 같은 당신 정체를 완전히 밝힐 수 있었는데."

그녀의 입술이 본능적으로 부인하려고 움직였다. 입가에 웃음을 떤 채, 그는 그 입술을 의미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난 사기꾼이 아니에요."

그녀가 또박또박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마치 그녀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여기에 사기꾼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에요. 방금 한 당신 말로도 입증이 돼요. 흔들리

는 의자 위에 있는 물체를 찍지 못한다는 건 모든 사진사들이 다 알아요. 문외한인 나도 움

직이지 않는 정지된 물체를 찍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심지어 사진을 잘 찍기 위해 버

팀목까지 세우기도 하잖아요."

"일부러 내 말을 비끼는군.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하지. 당신 말대로 버팀목까지 세

워서 움직이지 않게 하면 훨씬 사진이 잘 나와요. 하지만 내 사진은 그런 기술적인 면이 부

족하오. 철도 회사를 위해 내가 왜 이곳을 찍었는지 알리는 정도니까. 그들도 말끔하게 옷을

차려 입고 자세를 잡은 사진보다는 실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원하오. 언젠가 내가 당신

사진을 찍어 주면 자연스럽게 내 말뜻을 알게 될 거요. 진짜 애비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요."

그녀의 표정을 보니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짜 내 모습은 완전히 지친 얼굴일 거예요."

그녀가 일어서며 말했다.

"믿기지 않는 당신 말을 들으려니 정말 피곤하군요. 열차 강도나 사진사보다도 당신은 배우

가 되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아요."

"애비게일 양,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조차 않는군. 사기꾼의 습성이지."

"사기꾼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군요."

그녀가 빈정거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믿어 달라는 함축적인 의미가 담긴 시선을 계속 그

녀에게 보냈다. 그의 끈질긴 시선에 불편해진 그녀는 얼른 말을 건넸다.

"이제 귀리를 털어 내야겠어요."

그녀가 화장대로 가서 빗을 가져왔다.

"혼자서도 빗질을 할 수 있소."

그러나 그녀는 그의 손을 제지하고 터번을 고정한 빨래 집게를 빼냈다. 그리고 수건을 풀어

넓게 펼치고 빗질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빗질을 하면 바닥이 온통 귀리 천지가 될 거예요. 그러면 쥐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

겠죠. 혹시 내가 다시 이 귀리 가루를 먹일까 봐 그런 거예요?"

그는 눈을 감고 부드럽게 머리를 다루는 그녀의 손길을 느꼈다. 나를 쥐처럼 싫어하는 여인

이 귀리 가루 범벅인 내 머리를 빗질해 주는 토요일 밤이군.

"뒷머리에는 손이 가지 않아요. 일어나 앉아서 침대 밖으로 머리를 숙여 주겠어요?"

그는 침대에 걸쳐 앉아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머리를 숙였다. 그녀가 조심스레 그의 두 발

사이로 귀리 가루를 쓸어 냈다. 능숙한 그녀의 빗질에 따라 하얀 귀리 가루가 바닥에 떨어졌

다. 어젯밤 흔들의자에서처럼 지금도 그녀는 자연스런 태도를 보였다. 그녀에게서 이런 평범

한 태도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자신을 억지로 예의 바르고 엄격한 테두리 안에 묶으려

하는 것같았다. 자신을 틀에 얽매려고 하는 사람들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실한 그녀

의 본성에 눈을 뜨게 하고 싶었다. 술책을 써서 그 껍질을 잠시라도 벗기고 싶었다.

빗질은 나른한 쾌감을 퍼지게 했다. 졸린 듯 멍한 머릿속에서 그는 애비게일 매켄지를 생각

했다. 오늘 밤 내내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빗

질이 끝나고 그녀도 나가고 없었다. 그녀는 올 때처럼 조용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의

뒷머리에는 부드러운 빗질의 여운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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