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7화 (7/24)

7

그녀가 2층에서 사뿐사뿐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날이 밝기 전이었다. 앞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희미하게 그녀가 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수탉이 울었다. 그녀는 서쪽 문가에 서서, 아침을 알리는 닭 울음소

리를 들으며 일출을 바라보리라.

얼마 후 그녀가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그의 방문을 지나갔다.

"애비게일 양, 동이 텄소?"

깜짝 놀라 그녀가 고개를 홱 돌리자 머리가 문에 부딪혔다. 그녀는 여전히 잠옷 차림이었다.

그래서 벽에 몸을 숨겼다.

"캐머런 씨, 일어나셨군요. 아니, 앉으셨네요!"

"도허티 의사가 앉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소."

"기분이 어때요?"

"당신과 같이 나가서 밝아 오는 하늘을 보고 싶소. 난 항상 거친 들판 위로 해가 뜨는 광경

을 보곤 했소. 요즘은 보지 못하지만 말이오. 오늘 아침은 어떻소?"

그녀는 다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몸은 벽에 숨기고 있었으나, 그녀의 오똑한 코는

볼 수 있었다.

"오늘은 분홍빛이 유난히 많아요. 달맞이꽃이 빛을 잃을 정도로요. 그 위를 빛줄기가 가르고

있어요. 현인들의 사상처럼 깊고 분명한 색깔들이 하늘을 메웠어요."

그는 불쾌하지 않게 웃어 젖혔다.

"대단하군요, 애비게일 양. 하지만 분홍빛이라는 말은 알아들수 있군요."

아름다운 일출에 매혹된 자신이 멍청해 보였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았다면 그도 매료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자신처럼 감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지만.

"저…… 좀 필요한 게 있는데, 들어가도 되겠어요?"

"이건 당신 방이지 않소. 왜 갑자기 허락을 받으려고 그러오?"

"저…… 어젯밤에 잊고 가운을 가져가지 않았거든요. 제가 들어가 있는 동안 고개를 돌려 주

셨으면 좋겠는데요."

문가에 서 있던 그녀는 제시의 밝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애비게일 양,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하얀 천으로 팔목에서 귓가까지 꽁꽁 감싸고, 뒤꿈

치까지 보이지 않게 드리웠을 것 같군요. 맞죠?"

"캐머런 씨!"

"네 선생님, 들어오세요. 당신은 안전해요."

그는 점잖은 척 느리게 말했다. 그는 편안한 자세로 침대 머리맡에 등을 대고 앉아 있다가,

입을 옷을 찾는 그녀를 무례한 눈길로 관찰했다. 애비게일이 곁눈질을 통해 보니, 그의 입가

에 시종 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가 벙글벙글 웃으며 대담하게 물었다.

"그게 뭐요?"

그녀는 얼른 속옷들이 보이지 않게 가운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가 잠들었을 때 챙겨서 나갔

어야 하는데, 후회가 되었다. 그가 대답은 기대도 하지 않은 듯 얘기를 계속해 나갔다.

"이젠 다리는 별로 아프지 않소. 이 손도 훨씬 나아졌소. 딱하나, 어젯밤에 당신이 먹인 간

때문에 위장이 무척 쓰리오. 그리고 말 탄 사람이 보이면 그 사람을 쫓아 버리고 말을 먹어

치울 정도로 너무 배가 고파요."

그녀는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을 뻔했다. 요즘 들어 자신의 감정을 자제할 수 없는 때가 종

종 있었다.

"근처에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이 보이면 조심하라고 일러 줘야겠군요. 당신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에요!"

"활기 찬 아침이오, 애비게일 양."

"캐머런 씨, 당신도 그런 것 같군요."

그녀는 차곡차곡 갠 옷가지를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애비?"

이름을 줄여서 부르자, 그녀는 발을 멈췄다.

"애비게일 양이에요."

그녀는 몸을 돌려 오만하게 턱을 들고 그를 바라보며 정정해주었다.

그러나 총, 총이 보였다.

까맣고 기름을 먹인 듯 매끄러워 보였다. 그는 왼손으로 총을 느슨하게 들고 있었다. 왼손이

라도 이 정도 거리면 충분히 적중할 수 있을 것이다.

"애비."

그는 그 말만 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무거운 침묵 아래 그가 읊조리는 소리가 점점 작

아졌다. 이윽고 그가 명랑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오늘 아침엔 기분이 무척 좋군."

그의 도톰한 입술 위로 불길한 웃음이 번졌다. 밤사이 수염이자라 얼굴이 거뭇했다. 그녀는

그의 입술을 응시하고는, 그가 무심한 듯 들고 있는 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방어하듯

옷 꾸러미를 가슴 한가득 꼭 끌어안았다.

"그게…… 어디서…… 어디서…… 났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떨렸다. 그녀의 시선은 총에 못박혀 움직일 줄 몰랐다.

"난 열차 강도잖소. 안 그렇소? 총도 없이 어떻게 열차를 털겠소?"

"그…… 그렇지만 어디서 구했어요?"

"그건 신경쓸 거 없소."

그러나 그녀에겐 총의 존재가 너무나 신경쓰였다. 그녀는 얼빠진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 있기만 했다.

"애비?"

그가 다시 불렀으나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총부리가 바닥을, 아니 그녀의 발을 겨냥하

고 있었다.

"누더기를 내려놔요."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명령했다.

"누…… 누더기요?"

"당신 팔이 있는 거 말이오."

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한동안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천천히 슬립과 스타킹, 속옷 등 옷더

미를 발치에 내려놓았다.

"이리 와요."

그는 총을 들어 그녀의 가슴을 정확히 겨누며 다시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침대 발치로 걸어

갔다.

"절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녀는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직은."

약을 올리듯 그는 왼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열차에서는 서툴렀지."

"왜 이러는 거예요?"

"오늘 당신에게 가르쳐 줄 게 있어서 그러오."

궁지에 몰린 토끼처럼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내가 뭘 가르치려는지 아오?"

말없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우선 첫째."

그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확실한 범죄자라도 절대로 함부로 콧수염을 깍아서는 안 된다는 거요. 난 이리로 오

라고 말했소."

그녀는 좀더 다가섰으나 침대머리에 기대 앉은 그가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건 아니었

다. 그는 움직이는 그녀를 따라 천천히 총부리를 움직였다.

"여기로."

바로 그의 옆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왜, 왜 날 위협하는 거예요?"

"내가 위협을 했소?"

"캐머런 씨, 총 자체가 위협이잖아요!"

"제시!"

갑자기 그가 외치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제시라고 부르시오."

"…… 제시."

그녀가 유순하게 말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 번째 강의. 애비, 당신은 남자를 속여서 사과를 받아 냈소. 뺨을 때리는 것보다 더 심한

짓이지."

"난 속이지……."

"당신은 속였소, 애비."

그가 그녀를 속였다.

"나 때문에 멜처가 놀란 다람쥐처럼 달아났다며, 내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도록 했소.

애비, 당신도 제대로 사과하라고 지적했잖소?"

그녀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난 사과했는데, 당신은 뭐라고 말했소?"

"기억나지 않아요."

"그래? 애비, 내가 생각나게 해주겠소. 그래야 다시는 그렇게하지 않겠지."

"그러지 않을게요."

그녀가 약속했다.

"제발, 총 좀 치워요."

"그러지, 당신을 가르친 후에. 그때 당신은 사과를 했으니 내가 훨씬 기분이 나아져야 한다

고 말했소. 그렇지만 난 도리어 기분이 상해 버렸소. 하지만 이젠 좋은 기분을 느껴 볼 작정

이오. 바로 곧."

그녀는 팔짱을 끼며 얇은 삼베 잠옷의 소매를 확 움켜잡았다.

"팔을 내려놔요. 애비."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얼어붙은듯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

다.

"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내 말을 들었잖소."

결국 그녀는 명령대로 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멜처에 대해 사과를 했는데, 당신은 내 사과를 거절했소. 간단히 요점만 말했는데

이제 기억나오?"

그때 일이 생각났다.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몸이 떨려 왔다.

"난 이 침대에서 움직이지를 못하니, 당신이 가까이 와요, 애비. 자, 어서."

그는 총부리를 겨누며 이리 오라고 재촉했다. 그녀가 바로 침대 옆에 섰다. 총은 계속 그녀

를 겨누었지만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멜처와 같이 있을 때, 당신은 붉게 상기되어 숨도 제대로 못쉬더군. 여기에 앉아 있는 데도

당신의 심장이 마구 뛰는 소리가 들리더군. 멜처가 떠나지 않았다면 포옹을 하고는 당신에

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오? 이 덩치 큰 열차 강도가 그를

쫓아냈지만, 적어도 늙은 멜처의 대역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말이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떨며 서 있기만 했다. 그의 부드러운 말이 계속되었다.

"당신도 이젠 알아들었겠지, 애비? 그러니 나한테 키스해요. 자, 기다리고 있잖소."

"안 돼요…… 전 못 해요."

그녀의 가슴은 죄어 드는 공포로 터질 지경이었다. 그가 총을 움직였다. 차가운 금속이 엉덩

이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올려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뜬채,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재빨리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댔다가 얼른 뒤로

물러났다.

"이걸 키스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녀가 얼른 몸을 세우자, 그의 조롱이 날아왔다.

"좀 건조하군. 늙은 도마뱀이 내 입술 위를 지나간 것 같군. 다시 한 번 해봐요. 내가 멜처

라고 생각하고."

"왜 이런 짓을……."

그녀의 항의 섞인 말을 그가 끊었다.

"다시, 애비! 그리고 이번엔 눈을 감아요. 키스할 때 눈을 뜨는 건 도마뱀뿐이오."

그의 검은 얼굴을 보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재미 있어하는 그의 눈이 감겨 있었다. 그녀

는 눈을 감고 다시 그에게 키스했다. 새로 자라기 시작한 콧수염이 야생장미 가시 같았다.

"훨씬 낫군."

그녀의 몸이 다시 서둘러 물러나자, 그가 말했다.

"이젠 혀를 좀 줘 봐요."

"오, 하느님."

그녀가 신음 소리를 냈다.

"이젠 그도 당신을 도와 줄 수 없소. 그러니 내가 말한 대로 다시 해봐요."

"제발요."

그녀가 속삭였다.

"제발, 제시!"

그가 정정했다.

"제발, 제시. 난 한 번도…… 난 하지도……."

"핑계 그만 대고, 당장 해요. 그리고 여기에 앉아요. 당신이 왔다갔다하니까 어지럽소."

몸 속이 떨려 왔다. 그녀는 조용히 침대가에 앉았다 거뭇한 구레나룻이 끔찍했다. 꼴보기 싫

은 그의 잘생긴 얼굴은 온통 털투성이였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이 어리석은 짓을 그만둬요."

그녀가 애원했다.

"난 반응해 오는 촉촉한 키스를 원하오. 애비, 남자한테 키스를 해본 적이 없는 거요? 연습

시간을 줄 여유가 없군. 뭘 두려워하는 거요?"

거부의 빛을 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옆구리에 닿은 총으로 향했다.

"자, 그럼 강의를 계속하지. 혀를 사용하는 키스를 프렌치 키스라고 하오. 모두 그런 키스를

하지, 도마뱀조차도."

그는 거만하게 거들먹거렸다. 그녀가 여전히 고집스레 움직이지 않자, 그는 총을 바로 그녀

의 턱 아래에 겨누었다.

"촉촉하게!"

그는 총을 들이밀며 그 한 마디만 했다. 철컥 거리며 방아쇠가 당겨지는 소리가 들리자, 그

녀가 기겁을 했다.

애비게일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두 눈을 꼭감고 다가갔다. 그녀의 입술이 그

의 윗입술에 닿자 두 눈이 다시 질끈 감겼다. 그녀를 맞이하려고 그의 입이 벌어졌다. 그가

그녀의 입술에 대고 살며시 속삭였다.

"긴장을 풀어요, 애비."

그는 총을 낮추고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맨가슴에 그녀를 끌어당기며 그녀의

입술로 얼굴을 가져갔다.

"팔로 내 목을 둘러요."

그의 말에 반항하듯 그녀의 눈이 더욱 꼭 감겼다.

"자, 애비, 오늘 하루 종일 여기에 있고 싶지는 않겠지?"

한쪽 손이 그의 목 위에 놓이고, 다른 손은 그의 등을 둘렀다.

총이 목 뒤를 찔렀다. 강제로 그들의 입술이 맞닿았다. 그는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뜨거운

혀를 그녀의 입술 사이로 밀어넣었다가 다시 뺐다. 그의 혀가 자신의 혀에 살짝 닿자, 공포

에 질린 그녀가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가 저항하는 팔을 밀치고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가슴이 짓눌리도록 안긴 그녀는 몸부림을 치며 그와 전쟁을 벌였지만, 그

는 유유히 입 안에 들어와 그녀의 혀를 완전히 점거했다. 잠시 후 그의 혀가 입술 아래로 미

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의 아랫입술을 이로 물었다.

"제시!"

강압적인 그의 속삭임이었다.

"…… 라고 말해요."

"…… 제시."

그녀가 울먹이며 대답하자, 다시 그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따스하고 촉촉한 그리고 그

녀의 저항을 녹이는 무언가가 담긴 키스였다.

"다시 말해 봐요, 제시."

그가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 위에서 퍼덕거리는 그녀의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제시."

그녀가 속삭였다. 자신의 목을 문지르는 그의 손과 총이 느껴졌다. 따스함과 차가움이 같이

느껴졌다. 다시 그는 깊고 부드러운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공포와 환희, 관능과 수줍음, 거

부와 허락이 혼합되어 뒤범벅이 되었다.

"애비."

그가 다시 속삭였다.

"애비."

이제 입술이 자유로워져 그의 말을 '애비게일'이라고 정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겪

어 보지 못한 생소한 나른함에 빠진 그녀의 머릿속에선 그런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입술을 떼고 그녀를 밀쳤다. 그리고 깜짝 놀란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도 따끔거리오?"

그녀는 그를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떨궜다. 갑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방법으로

더럽혀진 것 같은 불결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그녀는 그의 혀

가 깊숙이 들어오자 반항을 멈췄다. 그리고 그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의 손 아래

느껴지는 넓은 근육질 어깨가, 마구 두들겨 대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좋았다.

"오늘 수업은 이제 끝났소."

그는 만족스런 웃음을 띠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 침대에서 내려섰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 집에서 나가요. 들었어요? 지금 당장!"

"누가 총을 들고 있는지 잊었나 보군, 애비. 게다가 난 아직 걸을 수 없소. 그런데 거동도

못 하는 남자를 집 밖에다 내던져버리고는, 그 캐묻기 좋아하는 당신 이웃들한테 뭐라고 말

할 거요? 완벽하게 키스하는 방법을 가르쳐 줘서 쫓아낸다고 말할 거요?"

"그들은 묻지도 않을 거예요. 기꺼이 당신을 데리고 들어왔을 때도 아무도 묻지 않았어요.

지금 당신을 내쫓아도, 그들은 나를 비난하지 않을 거예요."

"참, 애비. 도허티 의사가 말하길,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날 돌보겠다고 자원했다더군. 그

점에 대해선 감사하게 생각하오."

그의 말은 단 몇 초 만에 그녀의 피를 끓는점에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이런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 고맙다고 말을 해주면 내가 멍청이처럼 기분이 좋아서 헤헤댈 줄 아는 건가! 잘난

척하며 거들먹거리기는!

"좀 핵심을 벗어나신 것 같군요. 철도 회사에서 당신을 데려갈 때까지 당신을 돌보면 돈을

지불한다고 했어요. 내가 원하는 감사의 표시는 그 돈밖에 없어요!"

그가 몸을 젖혀 가며 웃었다.

"애비, 왜 철도 회사에서 날 원할 것 같소?"

마치 그 이유를 안다는 표정이었다.

"그야, 열차 강도니까요!"

구역질 나도록 느물거리는 그의 얼굴을 한대 때려 주고 싶었다.

"오늘 역으로 가서 전보를 치겠어요. 당신을 빨리 데려가라고요! 당신과 상처, 콧수염 전부

다요!"

"돈을 잊었나 보군. 내가 회복할 때까지 돌봐야 받지 않소."

"하나도 잊지 않았어요. 그 음탕함과 자만심 등, 당신 특징은 다 기억해요."

그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만 하면 충분해!"

그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당장 나가서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가져와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당신을 잡아먹기 전

에. 음식 없이 남자가 얼마나 살 거 같소?"

그녀는 발을 쿵쿵 울리며 걸어가 문가에 놓은 옷을 들었다. 그리고 큰 소리가 나게 퍽퍽 발

의 먼지를 털고 다시 발을 구르며 나갔다. 그녀가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거칠게 숨을 내쉬

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나가자, 제시는 딸꾹질하듯 몸을 흔들며 소리 죽여 웃었다. 그리

고 침대 밑에 놓아둔 지저분한 셔츠를 꺼내 그것으로 빈 총을 싸서, 매트리스 밑에 집어넣었

다.

*   *   *

빵 한 조각이라도 그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애비게일은 불을 켜고 목욕을 한

뒤에 옷을 갈아입었다. 그 동안 제시는 꼬르륵 울리는 배를 움켜잡고 주기적으로 소리를 질

렀다.

"도대체 이렇게 오랫동안 거기서 뭐 하는 거요?"

"이봐, 아가씨, 굶어 죽겠소!"

"아침은 짓는 거요?"

그녀는 시계에 시선을 고정하고, 마을로 나가 전보를 칠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다른 방에

앉아 있는 염소를 굶기면서 극도의 즐거움을 느꼈다. 그의 말이 또 들려 왔다.

"요리하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군. 당신이 있을 것 같은 방벽에다 사격 연습이나 해볼까?

그러다 운이 좋아 맞힐 수도 있겠군."

그의 말은 너무나 크고 요란스러워서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당장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

다. 하지만 어떤 음식이든 먹이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해질 것이다. 이 집을 총알로 벌집을

만들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옥수수 요리는 요리하기도 간편하고 값싸고, 먹을 만은 해 보일

것이다. 그녀가 요리하는 중에도 그는 계속 칭얼거렸다.

"대체 뭐 하는 거요, 지금 돼지를 잡아 베이컨으로 만드는 거요? 사람이 굶어 죽어도 쳐다보

지도 않겠군. 음, 음식 냄새가 나는군. 무슨 요리요? 혹시 또 투수처럼 접시를 나한테 던지

려고 그러는 거 아니겠지? 그 접시에 음식이 담겨 있다면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요

."

격노한 그녀가 쟁반을 들고 문가에 설 때까지 그는 불만을 늘어놓았다.

"오, 결국 내 말을 들을 줄 알았지."

그는 멍청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디에도 총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이 다 들었겠어요."

"좋지! 동정심이 일어 나한테 건빵이라도 던져 주면, 만일을 위해 매트리스 밑에 저장을 해

둬야겠군. 서비스는 신경 쓰지않을 테니, 빨리 여기로 가져오시오. 혹시 그 쟁반에 얄팍한

계란 한 쪽도 가져오지 않은 거요?"

"정말 참을 수 없는 사람이군요! 야비한 사람 같으니!"

독기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더 크게 입을 벌리며 웃을 뿐이었다.

"애비게일 양, 당신도 마찬가지요."

분명히 유쾌한 음성이었다.

"이 시련을 꾹 참고 견디면, 달콤한 날이 기다리고 있겠지. 오, 옥수수 요리군. 옥수수 요리

에는 능숙한 숟가락질이 필요하지."

"동물들도 먹기 전엔 손을 씻어요."

"오, 그렇소? 적당한 이름을 붙여 보시지."

그가 입 안 가득 음식을 넣고 말했다. 그녀는 옆에서 혐오스런 눈길을 보냈다.

"너구리?"

"너구리는 먹을 걸 씻지, 얼굴을 닦지는 않소. 게다가 시간여유도 있지. 그리고 먹은 걸 다

토해 내고 밤새 내내 굶는 너구리는 없을 거요."

그는 그녀가 말한 너구리란 말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만들어버렸다. 그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대하고 싶었으나, 돼지처럼 행동하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화가 난 그녀는 방을 뛰

쳐나갔다.  그러나 바로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음식을 더 달라는 그의 커다란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시련 뒤에 맛보는 달콤한 옥수수 요리가 한 사발 더 필요하오."

그녀는 솥 안에 새 옥수수 알갱이를 집어넣고, 그 솥을 노려보며 옥수수가 벽돌처럼 딱딱해

지기를 기다렸다.

"날 쫓아낸 뒤엔 웨이트리스로 일을 하는 게 어떻겠소?"

악마 같은 웃음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진짜 한번 시도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소."

새하얀 크림 호수속에 있는 섬처럼 앉아서, 그는 옥수수 알갱이를 씹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

가는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고는 다시 음식을 퍼먹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난 루이스 컬페퍼의 식당에서 그가 말한 대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것보다, 저 남

자를 간호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을까. 이 일을 때려치우고 루이스 밑에서 일한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도!

그는 그릇을 다 비우고서야 빈 위장을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감사의 표시는 이 말뿐이었다

"애비, 캠프에서 요긴하겠군."

으, 그래 맞아, 도둑 캠프에서 가장 멍청한 여자를 찾으라면 바로 그녀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목소리를 높여서 소리 쳤다.

"왜 여기엔 사람에게 꼭 필요한, 따스한 물 대야가 없는 거요? 세수를 하고 싶소, 면도도.

애비, 내 말 들었소?"

저 남자만큼 참을 수 없이 무례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래, 세계 최고일 거야.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거친 몸짓으로 물을 가져 갔다.

"당신이 씻어요. 어떻게 씻는지는 배웠겠지요!"

그래도 그는 웃기만 할 뿐이었다.

"오늘 아침엔 무척 익살맞군."

그는 마치 촌극을 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부엌에 있었지만 그가 뭘 하는지 전부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는 물을 튀기며 노래를 불렀다.

"오, 이 부드러운 감촉, 여기도 저기도 너무 매끄럽다네."

노랫말이 역겨웠지만 그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간간이 그의 노래가 자신을 웃게 만

들어서, 더욱 화가 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목청껏 불렀다.

"이제 나는 반짝이는 한련화처럼 신선하다오. 이리 와서 향기를 맡아 봐요."

부엌에 있었는데도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너무나 자극적으로 들렸다. 그가 다시 총

을 들먹거리며 면도 도구를 가져오라고 위협했다. 그녀는 면도 도구를 들고 들어갔다.

"자, 시작할까요?"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톡 쏘듯 물었다. 그러나 시트가 허리까지 내려와 있어 결국 그의 맨가

슴을 보아야 했다.

"당신이?"

의외의 말에 그녀는 면도날로 그의 머리에 있는 모든 털을, 아니 머리까지도 깎아 버리고 싶

었다. 그녀는 긴장한 채 그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녀의 생각을 얼굴에서 읽어 버린 듯이 그가 말했다.

"아가씨, 내 수염에서 떨어져요. 세수는 나 혼자 하라고 하더니, 왜 면도하는 것을 도와 주

고 싶어 안달이오? 난 멀쩡한 오른손과 그런대로 움직이는 다른 한 쪽 손을 가지고 있소. 게

다가 지금은 앉을 수도 있소. 그러니 당신 도움이 없어도 그럭저럭 면도는 할 수 있을 거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나가려고 등을 돌리자, 그가 덧붙였다.

"…… 데릴라."

그녀의 등이 얼어붙었다. 자신을 삼손과 데릴라 이야기의 데릴라로 표현하다니. 화가 난 그

녀에게 이젠 신경을 쓰지 않는듯 그는 면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오늘 아침처럼 자신

의 콧수염에 가까이 와 준다면 막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아침 일을 생각하는 그의 입가에 저

절로 웃음이 생겼다. 그러나 면도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거울은 손잡이가 길쭉한 여성용

이었다. 빌어먹을 물건 같으니! 그는 간신히 거울의 긴 손잡이를 무릎 사이에 끼우고, 한 쪽

손으로는 얼굴을 팽팽히 당기고 다른 손으로는 면도날을 잡았다. 그런데 그놈의 거울이 자

꾸 미끄러져 내려갔다. 마침내 그는 포기하고, 그녀를 불렀다.

"애비게일 양, 거울 때문에 면도를 할 수가 없소. 와서 좀 잡아 줘요."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양,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가 거칠고 크

게 변했다. 절대로 듣지 못했다고 핑계를 댈 수 없는 소리였다.

"어느 수코양이가 그곳으로 쫓아간 거요? 암내 나는 고양이가 울어 대는 소리를 들은 것 같

은데! 당장 와서 거울을 붙잡아요!"

"당신은 멀쩡한 한 쪽 손과 그런대로 움직이는 다른 한 쪽 손을 가지고 있잖아요. 앉을 수도

있고요. 당신이 붙잡아요!"

애비게일이 귀를 기울이자 정 떨어지는 그의 한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젠장, 제발 부탁이오!"

애비게일의 입가에 커다란 웃음이 퍼졌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캐머런 씨?"

그녀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제발 부탁이오, 라고 했소. 빌어먹을, 다 들었잖소. 독선은 그만두고, 이리 들어와요."

"갈게요."

능구렁이처럼 사람을 대놓고 바보 취급하며 무시하는 쾌감을 그녀는 너무 빨리 알아 버렸다.

그녀가 문가에서 명랑하게 말했다.

"이토록 훌륭하게 예의를 갖추는 사람에게 어떻게 거절할 수있겠어요."

그녀가 거품 투성이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의 검은 눈이 눈사람에 박아 넣은 숯처럼 보였다.

"이 빌어먹을 거울 좀 잡아 주시옵소서, 마마!"

그녀는 거울을 잡고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면도도 해 드릴 수 있어요. 당신 손이 제대로 면도날을 잡긴 했지만, 자

봐요. 떨리잖아요."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볼을 밀어 나가며 거울만 노려보았다. 얼굴 옆선 주위에도 검

게 수염이 자라 있었다. 그는 주위 깊게 콧수염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수염을 밀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들었다.

"오, 콧수염을 조심하세요."

면도날이 그의 얼굴을 지나가자, 흰 비누 거품이 사라지면서 그의 찌푸린 얼굴이 드러났다.

"제대로 보게 거울이나 잘 들어요."

그는 윗입술을 아래로 잡아당기며 콧수염의 윤곽을 다듬어나갔다.

"나만의 독특한 모양을…… 잡기가…… 지독하게 어렵군."

"여기는 좀더 깊게 파야겠는데요?"

결점을 지적하듯 심각한 어조로 그녀가 충고했다.

"젠장, 에비게일, 조용히 해요! 그런 농담은 차라리 안 하는게 낫소. 이런, 또 거울을 움직

였소!"

"오, 미안해요."

그녀는 다시 거울을 제대로 들고 그가 끝마무리를 하는 걸 지켜 보았다. 생각보다 무척 재미

있었다. 놀라운데, 남자들 수염은 이렇게 빨리 자라는구나. 그가 면도를 마치자 검은 콧수염

이 훨씬 두드러져 보였다. 무척 우스웠다. 하지만 앞뒤 생각 않고 행동하는 이 무뢰한이 면

도를 하고 나니 훨씬 잘생겨 보였다.

"호기심이 생기오?"

그에게 마음을 간파당한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만질 수 있소. 내 기쁨이기도 하지."

"염소 수염이나 만지는 게 더 낫겠어요!"

그녀가 소리 쳤다.

"핑계를 대는군."

문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뒤통수에 그의 웃음소리가 꽂혔다.

"하지만 좋을 텐데."

뒤따라온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애비게일은 우체국이 문을 여는 시간이 지나도록 '좋을 텐

데'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또 총을 가지고 달

려들려는 건가?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고 방문 뒤로 다가갔다. 방안을 살펴보지 않고는 그냥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관문의 스프링 소리가 그녀의 존재를 알려 주었다. 그

녀가 거기에 있다는 걸 다 안다는 듯이 그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렸다.

"마을로 나가서 간말고 다른 고기가 있는지 보지 않으려오? 내일은 나를 데리러 올 사람이

없을 거요. 일요일이니까."

그녀는 색유리가 달린 현관문을 속으로 호되게 나무랐다. 그리고 스프링이 늘어나게 문을 활

짝 열어 젖혔다 그러기를 몇 번 더 반복했다. 호탕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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