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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오는 동안 내내 그녀는 그의 수염만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면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곧 그녀가 콧수염을 잘라 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오, 벌써 알지도 몰라! 그를 목욕시킬 때
처럼 또 한바탕 전쟁을 해야겠지. 아니야, 이건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하는 시련이야.
자기 손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그는 묘하게, 아니 노골적으로 사람을 자극하는 데가 있어서
, 그녀도 또 짜증이나 화를 내게 될 것이다. 휴, 이 일이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어. 콧
수염이 없어졌다는 걸 알면 틀림없이 대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이젠 그가 얼마나 변덕스러운
지 알았다. 그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몸을 떨었다.
"저 왔어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갑자기 침실에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이 여자는 집 안에 들어
오면서도 도대체 아무런 소리도내지 않았다. 그는 놀란 음성으로 감탄사만 내뱉었다.
"아하."
아직 그가 모른다는 걸 알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갑을 벗으며 방 안으로 들
어서는 그녀가 거울에 비쳤다. 놀랍게도 그는 그녀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자신을 느꼈다.
"그래, 아마씨는 사 왔소?"
그는 머리로 손을 올려 화려하게 세공된 모자 장식핀을 빼는 그녀의 옆모습을 계속 눈으로
쫓았다. 그는 그녀가 풍만한 가슴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항상 풀을 먹인 블라
우스로 가슴을 가렸다. 그러나 이 각도에서, 저렇게 팔을 들어 올리니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네, 샀어요. 그리고 차가운 음료를 만들려고 신선한 레몬을 샀어요."
그녀는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눈꼴신 멜처가 기억났다. 그래서 그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맥주를 가져다 줄 수는 없소?"
그녀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명정(酩酊 :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취함) 상태가 되면 일시적이나마 위안을 느끼
겠죠. 하지만 여기에 있는 동안은 레모네이드를 마셔야 해요."
이제 그는 그녀를 알았다. 그가 놀릴수록 그녀는 풍부한 어휘저장 창고에서 자만을 만족시키
는 말만 쏙쏙 골라서 썼다. 명정이라! 자신이 그녀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겠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와 게임하듯 논쟁하는 게 즐겁다는걸 인정했다.
"실제로 레모네이드 맛이 좋기를 바라겠소, 애비게일 양."
그녀는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상하게 그와 단순히 대화를 나누기만 하는 데도 자꾸만 마
음이 불편해졌다. 열어 놓은 창을 통해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심술궂은 바람의 장난으로 그
녀의 치마가 부풀어올랐다.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모자로 스커트를 살며시 눌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앳되고 매력 있었다. 마치 어린 소녀 같아 보였다.
"저기, 당신이 괜찮으면 지금 면도를 해주고 싶은데요."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정서 불안 환자처럼 공연히 모자장식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그
가 턱을 쓰다듬자, 애비게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지금 잿빛 곰처럼 보이겠군."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그녀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몇 분 후엔 외모만이 아니라 행동도 잿빛 곰처럼 되겠죠
"물을 데우고, 필요한 걸 가지고 올게요."
그녀는 방에서 나와 물을 불에 올려놓고, 깨끗한 수건과 아버지의 낡은 컵과 솔을 찾았다.
물그릇을 들려고 다가서는데, 그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애비게일 양, 지금 당장 꽁무니 빠지게 이리로 달려와요!"
바로 뒤에서 그의 부츠발이 엉덩이를 걷어차기라도 한 듯이, 그녀는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
으켰다. 그리고 눈을 감고 열까지 세었다. 그러나 다 세기도 전에, 그의 고함이 내리꽃혔다.
"애비게일 양, 지금 당장!"
그는 조금 전까지 그녀에게 잘 대해 주겠다고 다짐했던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마치 방패
라도 되는 양, 그녀는 물동이를 손에 확 쥐고 방에 들어갔다.
"네, 캐머런 씨?"
그녀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네 캐머런 씨'라고!"
그가 으르렁거렸다.
"내 콧수염이 어떻게 된 거요?"
"없어졌어요."
그녀는 간신히 대답했다.
"나도 방금 알게 됐소. 그런데 누구 책임이오?"
"책임요?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잘 모르겠군요."
"난 아주 멋진 콧수염을 길러 왔소. 그런데 당신이 끼어들어서……."
그는 너무나 화가 나서 제대로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망할 자식이 당신한테 내 수염을 밀어 버리라고 허락했소?"
"허락은 필요없었어요. 제가 임의로 한 일이니, 질책을 달게받겠어요."
"질책을 받겠다고!"
꿰뚫을 듯한 그의 개암빛 눈동자에서 부드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은 시트, 변기, 붕대 따위 여기에 있는 것들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것 같군. 그
렇게 갈아치우는 게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바꿔야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오,
당신! 이봐, 아가씨! 내 말 듣고 있소! 당신은 정말 못 말릴 사람이오!"
그의 분노 앞에서 그녀는 움츠러들었지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신이 이렇게 소리를 치니 귀가 아파오는군요. 제발 목소리 좀 낮춰 주세요."
그러나 너무나 자제력이 있는 그녀의 태도에 그의 분노는 더욱 타올랐다. 그의 언성이 더 높
아졌다.
"오, 하느님."
그는 지붕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날 이 여자한테서 구해 주세요!"
그리고 그는 그녀를 노려봤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오? 이 악랄한 열차 강도는 아주 위엄 있게 손가락으로 멋진 콧
수염을 쓰다듬으려고 했단 말이오. 그렇게 애지중지 길러 온 수염을 당신은 마구뽑아 댔겠지
. 그래, 너무나 남성다워서 수염을 싹 밀어 버렸소? 오, 당신에게 딱 맞는 핑곗거리군. 애비
게일 양, 당신 같은 여자에게는 모든 남자들이 위협적으로 보이겠지. 내 말이 틀리오? 당신
은 찍소리 않고 슬금슬금 걸어다니며, 집에 있는 남성스러운 것이라면 모조리 다 없애고 다
녔겠지? 그래, 당신은 싫은 남자를 찾아내서 자신의 그 청교도적인 방식으로 복수를 하며 만
족스런 웃음을 지었나? 이봐, 내 말 듣고 있소?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각오하라구
!"
애비게일은 빨갛게 얼굴색이 변한 채로, 그가 내뱉은 거의 진실에 가까운 말에 몸을 떨었다.
"어떤 비난이라도 달게 받을게요. 지금도 여기에 서서 고스란히 받잖아요. 하지만 좀 부당한
것 같아요."
"그럼, 난 이래도 마땅하다는 거요?"
그는 매스껍다는 표정으로 다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이것도?"
그리고 이번엔 손가락으로 입술 위를 가리켰다. 그녀는 콧수염의 자취라곤 하나도 남지 않은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제가 경솔하게 행동한 것 같군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몸이 떨렸지만 사과하며 타협점을 찾고 싶었다.
아니면 말을 막아 그를 잠시라도 조용하게 하고 싶었다. 그는 코방귀를 뀌며 천장을 노려보
았다.
"당신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다면, 내가 한 일을 사과드리겠어요."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소.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요
? 그렇게 눈에 거슬리던가?"
그는 감정이 상한 투로 말했다.
"지저분해 보였고, 전형적인 범법자 얼굴이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밝아졌다.
"당신도 악명 높은 악당들이 콧수염을 기른다는 것을 알잖아요."
"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래, 몇 명이나 보았소?"
"당신이 처음이에요."
"내가 처음이라."
"네."
그녀는 유순하게 대답했다.
"그래, 내가 그런 악당같이 보이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아서 면도를 해준 거요?"
그렇게 자제력 강한 애비게일이 횡설수설하며 거의 울먹이다시피 말했다.
"사실은 아, 아니에요. 네, 아니에요. 내 말은, 방해가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식사를 할 때
말이에요. 게다가 따끔거리잖아요."
그의 머리가 베개에서 들렸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따끔거린다고?"
그녀가 스스로 빌미를 제공해 준 결과였다. 설명을 요구하는 그의 눈이 계속 얼굴에 부딪혀
왔다.
"네, 내가 당신을 먹여 줄 때요."
"애비게일 양, 자세히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소."
그러나 그녀는 얼굴이 빨개진 채 몸을 돌렸다. 칼라를 빳빳이 세운 녹말풀 내음이 풍겼다.
그녀는 서둘러 면도 용구를 챙기러 총총히 걸어나갔다.
그는 방 안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마치 한 여자의 남자가 된 것 같은, 정신 나간 생각이 떠
올랐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분별력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어느 정도 화는 가라앉았다.
쇠꼬챙이를 집어넣은 것같이 뻣뻣한 애비게일 양과? 미쳤군.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
러나 이 미친 생각은 그녀가 다시 방 안에 들어오자 더 뚜렷해졌다. 고함 소리에 겁을 먹은
듯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쭈뼛쭈뼛 면도 용구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그가 눈을 번득이며 자신의 움직임을 쫓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표
정으로 그에게 다가가서 컵에 더운 물을 붓고 비누를 풀었다. 그녀가 그의 얼굴에 가까이 다
가가자 그는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내가 직접 하겠소."
그리고 비눗물이 묻은 솔을 그녀의 손에서 가져갔다.
"거울이나 잡아요."
그가 지시했다 그러나 거울 속의 얼굴을 보더니 낯을 찌푸렸다.
"젠장할, 애비. 코까지 없애지 그랬소? 남자에게 수염은 신체의 일부분과 같단 말이오."
그는 높아지려는 음성을 낮추려고 노력하며 툴툴거렸다.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본 그는 콧수
염이 잘려 나간 비참한 자기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잠시 후 그는 얼굴에 솔로 비누질
을 하기 시작했다.
거무스름한 구레나룻 위에 하얀 비누 거품이 덮이니, 그녀는 두려운 마음이 어느 정도 덜해
졌다.
"제 마음대로 면도를 해서 정말 미안해요."
그녀는 진심으로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는 비누질을 멈추고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시
선을 계속 거울에 두었다.
"난…… 나는 당신이 화를 풀었으면 좋겠어요."
또 다시 그를 화나게 한 건 아닐까 겁이 났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를 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에는 불쾌한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아까보다는 나아졌소."
최악의 상태는 지나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성질을 가라앉히려고 자제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고마웠다.
한결 마음이 밝아진 그녀가 말을 건넸다.
"수염이 참 빨리 자라는군요."
자기가 의식이 없을 때 옆에 앉아 오랫동안 간호를 했으니, 수염이 자라는 속도를 지켜 봤으
리라.
"애비게일 양, 관찰력이 예리하군요."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빌어먹게도 그녀가 시중을 들어 주는게 나을 것 같았다.
"여기 있소. 당신에게 맡기겠소."
그는 솔을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손에 아직 통증이 있어서 불편하군."
"저를 믿을 수 있어요?"
그녀의 멋진 한 쪽눈썹 위로 치켜져 올라갔으나, 는 웃음을 지었다.
"아니, 믿어야 되오?"
"멜처 씨는 믿었어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왜 이 남자에게 자기가 데이비드 멜처에게도 면도를 해주었다고 믿게
하려는지 자신도 몰랐다.
"수염이 많은 사람 같지는 않던데. 정말 면도할 수염이라도 있었던 거요?"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면 당신 코도 없앨지 몰라요."
그녀는 자세를 잡고 면도날을 그의 얼굴에 댔다.
"아니면 보기 싫은 콧수염이 자라지 못하게 완전히 면도해버릴지도 모르고요."
"코밑에 있는 수염은 건드리지 말아요."
그가 경고했다. 그리고 입가의 근육이 팽팽해지게 입을 당겼다. 능숙하게 얼굴을 스치는 면
도날이 느껴졌다. 그는 잠시 멈추게 하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이런 모양이 되게……."
"당신 콧수염 모양은 똑똑히 기억해요."
그녀가 말을 가로막았다.
"또 내 손목을 잡는군요."
잠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그의 갈색 손이 작은 그녀의 손목을 계속 잡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나도 알고 있소."
그는 웃음을 지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흉터가 생기겠군."
그는 순순히 손을 놓아 주고, 면도가 끝날 때까지 눈을 감고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면도를
하는 게 더 수월했다.
정말 내 수염 모양을 정확히 기억할까? 제시는 갑자기 마음이 흐뭇해졌다.
"애비게일 양?"
면도날을 닦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면도를 끝낸 상큼한 얼굴이 심술궂은 눈빛을 보
내며 그녀를 보았다.
"다시 수염이 자랄 때까지 당신과 시간을 보내야 될 것 같소."
"그래야겠죠. 그럼, 사이 좋은 친구처럼 레모네이드를 같이 마시겠어요, 어때요?"
그가 승낙하자 그녀는 면도 용구들을 가지고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레모네이드를 가지고
들어왔다.
"자, 이걸로 마셔 봐요."
그녀가 버들가지 같은 줄기를 건네며 잔을 권했다.
"뭐요?"
"부들풀로 만든 대롱이에요. 이걸로 레모네이드를 마셔 봐요."
입술에 대고 숨을 들이마시니 레모네이드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영리하군. 아침에 수프를 먹일 때 가져오지 그랬소? 그러면 숟가락으로 떠먹이지 않아
도 됐잖소?"
"생각을 못 했어요."
"아하."
그는 알겠다는 듯 말했다.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표정이었다.
"몇 개 더 만들었어요."
그녀는 재빨리 말하고는, 더 이상 놀리지 말라는 듯 레모네이드를 들이켰다.
"레모네이드 남은 거 또 없소? 한 잔 더 가지고 와서 얘기나 나눕시다."
"당신 고함 소리를 듣느라고 너무 지쳤어요. 당신 목소리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성공적으로 면도를 했는데,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하다니 잔인하군 가지 말아요, 잠시 동안
얘기를 나누고 싶소."
그녀는 주저하다가 바느질할 때 앉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왜 아직도 그와 이 방에 같이 있는
지 자기도 이상했다. 레모네이드를 조금 홀짝였다. 그는 목이 마른 듯 대롱으로 시원스레 들
이켜고는 투덜거렸다.
"으으으, 맥주만큼 좋군."
"전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 그녀는 맥주 맛을 모를 것이다.
"당신이 외출한 사이, 도허티 선생이 왔다 갔소."
"당신 상태가 어떻대요?"
"기대 이상이라고 하더군."
그녀는 잔에서 입을 떼었으나 시선은 떼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데, 내 생명을 구한 당신에게 감사해야 한다더군."
"정말 감사하긴 하는 거예요?"
그녀가 도전하듯 물었다.
"아직은 아니오."
그가 대답했다.
"도대체 어떻게 내 목숨을 구한 거요? 궁금하오."
"별거 아니에요. 여기 있는 고약하고 붕대 덕택이에요."
"애비게일 양, 그것뿐이라고? 너무 무심하게 말하지 말아요. 시체처럼 썩어 가는 내 몸에 당
신이 어떤 조치를 했는지, 나는 아주 당연한 호기심을 갖고 있을 뿐이오. 당사자로서 들을
권리도 있고."
무심코 그녀는 물린 상처가 있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상처를 쓸었
다. 그가 계속 자신을 바라보는걸 의식했다.
"저는 한 것도 없어요. 당신이 워낙 강인하고 건강해서 고비를 넘긴 거예요. 그뿐이에요."
"선생님과 난 당신이 내게 음식을 어떻게 먹였는지 궁금해했소. 내게 뭔가 먹였다고 당신도
말했잖소. 당신 말을 들어 보면 한 번뿐은 아닌 것 같은데,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먹
인 거요?"
"좋아요, 말하죠. 강제로 먹였어요. 여기 있는 대롱으로 말이에요. 당신 목 안에 대롱을 꽂
아야 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깨어났을 때 목이 그렇게 아팠던 거예요."
그는 주의 깊게 그녀의 손가락 관절에 난 상처를 관찰했다.
"그럼, 이 좁은 대롱 속에 당신이 숟가락으로 약을 떠서 넣었단 말이오?"
그녀는 이런 질문까지 받자 초조했다. 눈을 드니, 그가 자신의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그녀
는 얼른 손을 스커트 사이로 숨겼다.
"숟가락을 쓰지 않고 불었어요."
그녀는 성급하게 실토해 버렸다.
"당신 입으로 말이오. 애비게일 양?"
놀란 음성이었다.
"네, 캐머런 씨. 내 입으로."
그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끔찍했겠군."
"네, 그러셨을 거예요. 하지만 제발 제 처지를 생각해서 이 얘기는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내 수염이 따끔거린다고 한 거요? 그 정도로 대롱이 짧았소? 나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았겠지만."
그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가 재빨리 일어나 방을 나가려고 했는데 그가 더 빨랐
다. 그는 이미 그녀의 손등을 잡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보고 다시 얼굴을 바라보았
다. 악마 같은 웃음이 그의 입가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손가락을 살펴보며 말했다.
"이건 뭐요?"
"손을 놔 줘요!"
"내가 만족할 만큼,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상황을 파악하면 즉각 놓아 주겠소. 내 이빨 자국
이오?"
"네!"
그녀가 손을 뿌리치려고 하자, 그는 죔쇠처럼 손을 단단히 잡았다.
"왜 손을 내 입에 넣었소?"
"입을 벌리고 대롱을 넣는 동안 혀를 눌러야 했으니까요."
"그런데도 당신은 아무것도 안 했다?"
그녀는 조용히 그를 노려보았다. 얼굴이 귓불까지 빨갰다.
"의식 잃은 도둑놈에게 구강 대 구강으로 음식을 먹이는 애비게일 양의 방법. 첫째, 손가락
을 그의 입에 넣는다. 그가 물어 상처를 낼 때까지 계속 넣고 있는다. 둘째, 입 안 가득 묽
은 수프를 머금는다. 그리고 그의 입 안으로 분다. 셋째, 도둑이 깨어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발뺌한다. 맞소, 애비게일 양? 옆에서 가르쳐 준다 해도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소. 정말 충직하고 존경받을 만한 헌신적인 행동이오. 당신의 커다란 은혜에 감사를 표하
겠소."
"아니에요, 당신은 아무런 은혜도, 내 손 좀……."
"난 당신에게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하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럼 내 손을 놓고 얌전히 있으면 돼요."
"오, 안 돼요, 애비게일 양. 그렇게 성의 없이 하면 쓰나. 결국 당신은 날 간호하려고, 수치
심도 무릅쓰고 비정상적인 방법을 써야 했소. 아, 무슨 접촉을 했다는 뜻은 아니오. 당신의
아량으로 난 배은망덕하게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지나갈 뻔했소."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가락에 난 자신의 이빨 자국을 쓰다듬었다. 그들의 눈빛이 마
주쳐 섬광처럼 빛났다. 기묘한 전율이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다급해진 그녀는 손을 빼
려고 힘껏 잡아당겼다.
"이제 당신을 불쾌하게 하던 콧수염도 없소. 허락해 줘요. 이 상처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그리고 그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작은 상처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녀는 더 이상 팔
을 빼려고 실랑이하지 않고 순순히 그가 키스하게 놔 두었다. 그러자 그는 손을 뒤집어 손바
닥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꾸물거리듯 오랫동안 입을 맞추다가 그는 혀로 그녀의 촉촉한 피
부를 가볍게 햝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른 그의 얼굴을 밀치고, 다른 손으로 그 손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내 집 안으로 당신을 들였을 때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그녀가 이를 갈듯 말했다.
"당신에게 상처를 내서 사과의 뜻을 표현한 거요. 걱정 말아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요
."
"이…… 이게 사과라구요? 당신 콧수염까지 깎아 버린 것을 복수하려는 게 아니구요?"
"오, 아니오. 절대 아니오, 애비게일 양. 내가 왜 이런 식으로 사과를 하게 됐는지 당신도
알잖소."
그는 솔직하게 몇 마디 말로 함축해 버렸다. 애비게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웃음을 입가에 띠고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 화내는 것보다 더 두려운 그의 부드러운 태도에 공격당하지 않으려면.
그녀는 그날 내내 가능하면 그 침실에서 멀리 있으려고 애썼다. 그의 키스와 몸을 뚫고 지나
가던 전율이 생각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정오가 되자, 그녀는 용기를 내서 점심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될 수 있는 대로 스튜를
많이 만든 그녀는 음식을 그의 가슴 위에 털썩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잠자던 그가 깨어났다.
"이런, 서비스가 점점 나빠지는군."
그녀는 아무 대꾸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스튜를 먹든 말든 그녀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위를 조각조각 찢어 버리고 싶었다.
"스튜 좀 더 갖다 주겠소?"
몇 분 후에 그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많은 스튜를 다 먹고 또 달라고 하다니, 세상에. 닥치는 대로 집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먹어치우는, 앞뒤 모르는 염소가 생각났다.
그녀는 남은 스튜를 모두 접시에 쏟아 부어다가, 조금 전처럼 그 앞에 거칠게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나왔다. 그 동안 그는 그녀가 모르는 뭔가를 아는 듯, 원인 모를 웃음을 지었다.
오후에 그녀는 멜처가 묵었던 방을 청소했다. 옛 연인에게서 받은 빛 바랜 연애 편지처럼,
추억이 묻은 소네트책 한권이 침대 위에 쓸쓸히 놓여 있었다. 외로움이라는 것이 이런 건가.
그는 그녀의 인생으로 불쑥 들어오더니 다시 불쑥 떠나고 없었다.
아래층에서 들리는 작은 노크 소리가 그녀를 상념에서 벗어나게 했다. 층계를 내려가던 애비
게일은 현관 창 너머로 멜처가 입었던 깔끔한 양복을 힐끗 볼 수 있었다. 갑자기 맥박이 빨
라졌다. 거실을 가로지르던 그녀는 뭔가 잊은 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발그레 흥분한 얼
굴로 블라우스와 치마를 매만지고 머리를 정돈했다. 그런 그녀를 열린 문 너머로 제시가 바
라보았다.
그녀가 다시 현관으로 걸어가자, 제시에게는 더 이상 그녀가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관과
가까운 이 방에선 작은 소리라도 놓치지 않고 전부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숨을 멈췄다는
것까지도.
"아니, 멜처 씨, 당신이군요."
"네. 에헴, 슬리퍼를 돌려드리러 왔습니다."
"네, 네, 그래요. 고마워요."
현관문이 스프링 반동으로 짤깍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긴 침묵이 흘렀다.
"제가 너무 폐를 끼친 것 같군요."
"아니에요, 멜처 씨. 전혀 그렇지 않아요."
멜처는 목에 뭔가 문제가 있는 듯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해댔다. 그들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갑자기 둘이 동시에 말하기 시작했다.
"애비게일 양, 제가 화를 내서는……."
"멜처 씨, 오늘 아침에……."
다시 조용해졌다. 침실에 있던 제시는 쫑긋 귀를 기울였다.
"아침에 당신이 화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니에요, 멜처 씨.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자초지종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오후에 이곳을 떠나신다고요?"
"사랑스런 이 집에서 당신 간호를 받았던 나날들이, 얼마나 제게 소중했는지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당신은 정말 훌륭한 간호사이자 친구였습니다."
"멜처 씨, 무슨 그런 말씀을……."
이제야 애비게일은 바로 옆 침실에서 그 능글맞은 남자가 그들의 대화를 전부 들을 수 있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현관은 너무 개방된 장소였고, 부엌은
너무 은밀했다.
"아닙니다, 애비게일 양. 한련화와 소네트 그리고 풍류를 즐기는 당신의 취향까지……. 무슨
말인가 하면 전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맛있는 식사와 능숙한 간호까
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
"그래요? 하지만 제 희망은……."
멜처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애비게일은 하이 칼라 가장자리에 장식된 레이스를 만지작거
렸다.
"희망은 무척 쓰라릴 수 있어요, 멜처 씨."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네, 그래요……."
"새 신발을 사셨군요."
"네, 제가 파는 것보다는 못 해요. 하지만……."
그는 다시 말끝을 흐렸다.
"그 지팡이는 계속 쓰셔도 괜찮아요. 아니, 도리어 써 주셔서 감사해야겠군요. 아버지가 돌
아가신 후론 아무 소용이 없었거든요."
"정말 그런가요?"
매우 반기는 그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그가 지팡이를 가져가기를 몹시 바라게 되었다
. 그가 자기 집에서 작은 물건이라도 가져가서 그것을 볼 때마다 자기를 생각해 준다면.
"네, 저는 필요없어요. 하지만 멜처 씨에겐 필요하시겠죠."
"네……, 그릴 테죠. 감사합니다, 애비게일 양……."
다시 침묵이 흘렀다. 제시는 둘이 함께 그 지팡이를 짚고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현관문이
다시 짤깍거렸다.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되면, 지팡이를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아…… 네."
쓸쓸한 그의 음성이었다.
"제 말은 그러니까……."
그러나 그녀의 말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한련화 향기를 맡을 때마다 이곳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안녕히 계세요, 애비게일 양."
그는 뒤돌아 천천히 멀어져 갔다.
"안녕히 가세요, 멜처 씨."
멜처의 불규칙한 걸음걸이 소리만 들릴 뿐 주위가 고요했다.
다시 깊은 침묵이 흐르고, 잠시 후 제시는 불규칙한 멜처의 구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거
리를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멜처의 기우뚱한 모습이 창 너머로 보였다. 저 멍청이는 그때 기
차안에서 머리 좀 쓸 것이지. 이젠 절름발이 신세가 됐군. 처음으로 제시는 좌절감이나 분노
없이 멜처를 생각할 수 있었다. 애비게일이 느린 걸음으로 다시 2층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멜처만큼이나 더딘 걸음이었다. 멜처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으리라.
과거에도 한 번 그녀에게서 한 남자가 떠나버렸다는 의사이 말이 생각났다 지금 상황과 비
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찌를 듯이 밀려오는 죄책감에 몸이 꿈틀거릴 정도였다.
2층 창문에서 애비게일은 저 멀리 기차가 내뽑는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적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녀는 레이스 커튼을 움켜쥐었다. 멜처가 절룩거리며 기차에 오르는 장면이 눈
앞에 그려졌다. 자신을 잊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다시 기적소리가 울리고 기차역 위로 연
기가 솟아올랐다. 그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리면, 데이비드 멜처는 그녀의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가 누웠던 침대의 시트를 새로 가는데 그녀의 눈이 시큰거렸다.
그녀는 청소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흠, 저 인간이 멜처와 나눈 대화를 다 들었으니
또 빈정대겠지. 슬며시 문가에서 방 안을 들여다보니 제시는 자는 것 같았다. 갑자기 수면
을 방해하고 싶은 심술이 일었다.
"손에 잘 들을 것 같은 약초를 찾았어요."
말소리에 그가 깨어났다. 그는 아프지 않은 쪽 손을 꽉 쥐고 부르르 떨더니, 천천히 기지개
를 폈다. 느린 동작 하나하나에서 남성다운 내음이 물씬 풍겼다. 그녀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 남성다움을 들먹이며 공격해 오던 그가 생각났다. 그는 불만스런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비
틀었다. 이윽고 그는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 애비게일 양, 들어온 지 오래 됐소?"
"저는 방금……."
그녀는 말을 잊지 못했다. 아직도 그의 근육이 울퉁불퉁 움직였다.
"또 내 수염이 자라는 걸 관찰했소?"
"너무 우쭐대시는군요. 차라리 풀이 자라는 걸 보는 게 낫겠어요."
그는 나른하게 웃었다.
"이 멍든 손에 찜질을 해야겠어요. 치유가 빠를수록 면도를 해 달라는 부탁이 빨리 없어지겠
죠."
느닷없이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어딘가 모자란 사람 같았다.
"애비게일 양, 참호 속에 숨어서 말하는 적군 같군. 가까이와요. 어쨌든 사이 좋게 지냅시다
. 이젠 멜처 씨도 떠났잖소."
"멜처 씨는 이 문제와 아무 상관 없어요."
그녀가 불쾌한 듯 말을 이었다.
"찜질을 원하세요?"
"물론, 이 손은 총을 잡던 손이 아니오?"
그는 그녀 쪽으로 손을 뻗었고, 그녀는 그의 손을 감은 낡은 붕대를 풀어 나갔다.
"그리고 또 난 이 손을 사랑하오."
반사적으로 그녀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얼른 실수를 깨닫고 계속 붕대를 풀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왼손이 아무리 제 구실을 다해도, 사랑을 할 때 오른손을 쓰는 남자에겐 오른손이 훨씬 더
소중하지."
그녀는 하이 칼라로 가린 목 부근이 화끈했다.
"정말 음탕한 사람이군요."
붕대가 다 풀어졌으나 손가락을 움찔거릴 정도밖에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 쪽
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녀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는 걸 보니 당신도 음탕한 생각을 하는 것 같군. 애비게일 양, 이렇게 된 이상 지금
이 손으로는 총을 쏘지도 사랑을 나누지도 못하오. 그러니 너무 민감하게 행동하지 말아요."
그녀는 등을 돌리며 빠르게 말을 퍼부어 댔다. 거의 애원조였다.
"이렇게 절 자꾸 조롱하면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요? 저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방어하지도 못해요. 당신이 예전에 만났던 여자들은 그런 말에 대뜸 반박할 수 있었겠지만
저는 이럴 땐 혀가 얼어붙고 말아요. 매번 당황하죠. 결국 당신 뜻대로 되어 가니 당신은 기
분이 좋아지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농담을 들을 때마다, 벌거벗은 영혼 그대로 서 있는 기
분이에요. 부탁하겠어요. 제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게 예의 바르게 대해줘요."
"당신은 이 방에서 상큼한 한련화 향기가 나길 바라는 거요?"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 차분했다.
"절 숙녀로 대해 달라는 것말고는 바라는 게 하나도 없어요.
멜처 씨가 했던 것처럼요. 당신은 멜처 씨를 경멸하겠지만요.
당신과 달리 그는 친절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에요. 그런 그를 조롱하고 모욕할수록 당신은
스스로를 경멸스런 위치로 떨어뜨리는 거예요."
"늙은 멜처가 당신을 가졌었나?"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온갖 노력을 다해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멜처 씨는 숙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시는 분이에요. 여자의 생각을 배려해 주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에요. 항상 품위의 도를 높여 가는 분이에요. 미덕이나 신사다운 태도를 한
번도 배우지 못해 본, 당신에겐 하찮게 보일지도 몰라요. 당신은 오로지…… 오로지…… 화
내고 욕하고 시비 거는 것밖에 몰라요. 그리고 난폭하게 사람을 다뤄요. 캐머런 씨, 당신은
인간이면 마땅히 갖추고 평생 노력해서 키워 나가야 할, 예의나 존경, 인내, 관용, 심지어
감사하는 마음까지도 부정해요."
"그럼 당신은 지금까지 그런 미덕을 실천했다는 거요?"
"그러려고 노력했어요."
그는 그녀의 어깨가 자부심으로 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소? 당신은 여기에 있잖소. 멜처에게 버림받고, 예의 바르
지만 신랄한 태도 그대로 내 옆에 남아 있잖소."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등을 돌린 채로 외쳤다.
"캐머런 씨, 당신은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전혀 없어요! 전혀! 그를 잃게 한 원인이 바로 당
신과 당신의 난잡한 혀잖아요. 그가 떠났다는 사실에 당신은 극도의 만족감을 느꼈겠지요.
제겐 마지막 기회였어요. 그런데 그가 떠나서 난 더 이상……."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었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결
국 그가 이 여자를 울린 셈이었다. 어머니처럼. 그가 뉴올리언스를 떠나 다시 서부로 돌아가
려할 때, 어머니는 울었다. 애비게일 양이 우는 모습을 보니 그때와 똑같이 마음이 어지러웠
다. 그녀가 항상 말하는 대로 자기는 무감각하고 형편없는 사람 같았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생각이었다. 갑자기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기
도 전에 그녀가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재빨리 방을 나갔다.
놀랍게도 그녀는 여전히 예의를 깍듯이 갖추었다.
* * *
애비게일은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번도 남자 앞에서 운 적이 없었
다.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눈물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울고 나니 후련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아무리 기뻐도 아버지나 리처드 앞에선 운 적이 없었다. 아, 리처
드. 그의 이름만 생각해도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이젠 어떤 시련이나 상처를 당해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년 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어두워질 때까지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 떠나간 리처드와 아버지, 멜처, 그리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마음껏 울었다. 그러나 아버지 때문에 희생했던 젊은 나날에 대해선
지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제시 앞에서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그녀는 모든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눈물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는 회개하기 힘들 것이다.
* * *
시간이 흘러 해질녘이 되었을 때, 그녀는 제시에게 갔다. 그때 처음으로 둘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질 것 같은 징조가 보였다. 그녀는 감정을 폭발시키기 전의 차분한 태도로 되돌아가
있었다. 마치 그런 일은 전혀 없었던 것 같았다. 오직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의 잔재만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비난이나 도전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문
가에 서서 말했다.
"제가 당신 손 치료를 외면한 것처럼 됐군요."
"내 잘못이오."
그가 간단히 대답했다. 그는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항상 보이던 조롱기가 사
라지고 없었다.
"지금 치료해도 괜찮겠어요?"
부탁하는 말투였다.
"들어와요. 이번엔 뭘 가지고 왔소?"
"찜질거리를 가지고 왔어요. 이걸 올려놔도 괜찮아요?"
그녀는 그의 심술궂은 혀에 상처받는 일이 없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 숨
은 뜻을 간파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와 멍든 손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그는 그녀에게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심한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
동을 해도, 그녀는 다시 그를 치료하기 위해 왔다. 의무감에 의한 고집 같지는 않았다.
"어때요?"
그녀가 손을 살펴보며 물었다.
"좋지는 않소."
"뼈가 부러진 것 같아요?"
"의사가 아니라고 하더군. 하지만 움직일 때마다 무척 아프오."
"아무 곳도 부러지지 않았다니 놀랍군요."
손에 든 멍은 이제 무시무시한 녹색을 띠었다. 그녀는 김이 나는 컵에서 작지만 두툼한 헝겊
뭉치를 꺼냈다.
"그게 뭐요?"
그의 놀란 음성이었다.
"가만히 있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헝겊을 잡고 입으로 불었다.
"지금 날 벌 주려는 거요?"
그러나 그녀는 가만히 헝겁을 바라보다가 멍든 손 위에 그걸 얹었다. 손을 델 정도는 아니었
지만, 편안한 표정을 짓기는 어려웠다.
"참을 수 있소."
뜨거움을 참으며 그가 말했다. 그녀는 손만 응시했다.
"대체 뭘 넣은 거요?"
"고통을 가시게 하고 멍을 풀리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알려 줄 수 없는 비밀스런 처방이란 말이오?"
"아니에요. 단순한 풀이에요."
"풀? 무슨 풀이오?"
"'똥구멍쑤시개'라고 해요."
"'똥구멍쑤시개'라고! 당신, 제정신이오?"
그는 불만을 터뜨릴 수 있었으나, 꾹 참았다.
그가 씩 웃었지만, 그녀는 모른 체했다. 그녀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고 강의하듯 말했다.
"할머니께서 어머니에게, 어머니께서 제게 가르쳐 주신 거예요. 이 풀에는 맺힌 피가 풀리게
하는 효능이 있어요. 그래서 당신한테 사용한 거예요. 할머니는 모든 일에 이걸 썼어요. 심
지어 볼에 난 사마귀에도 쓰셨는걸요."
드디어 그녀는 볼에 손을 댄 채 그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불안한 듯 말을 맺었다.
"사마귀는 없어지지 않았어요. 저는 몇 번이나 그만 하시라고 했는데, 할머니는 절대로…….
제시의 검은 얼굴을 응시하던 그녀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울렸던 때를 생각
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그녀는 헝겊이 놓인 손을 붕대로 감았다.
"아침이 되면 근육이 풀려서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시선이 그의 손으로 향했다. 이제 날 놀리려고 하겠지. 그러나 그는 마치 자책하듯
머리를 흔들며, 손을 거두기만 했다.
"그럼, 총 한 자루 정도는 잡을 수 있겠군. 뜨거운 게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소."
고맙다는 인사는 아니었지만 친근하게 느껴졌다. 애비게일은 그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생
각에 잠겼다. 그는 사과를 하려고 한 것 같았다. 어색해 하는 그를 보니,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사과를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물이 그를 어느 정도 부드럽게 한 걸까.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우아한 생활 방식을 버리지 않았음을 알리고 싶었다. 그녀는 한련화
몇 송이를 예쁜 컵에 꽂고, 그 컵을 쟁반 위에 놓았다. 물론 쟁반에는 새하얀 리넨을 깔았다
그는 말끔한 쟁반과 꽃을 보자, 묻는 듯 한 쪽 눈썹을 올렸다. 그러나 곧 그것을 평화를 제
의하는 표시로 읽고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게 그렇게 향기가 좋다는 거요?"
그가 꽃송이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겼다.
"네."
"한련화, 맞소?"
"네."
마치 두 마리 야생 양이 대적하듯 그들의 시선이 부딪혔다.
"한 손으론 나이프질을 하지 못할 것 같소."
그의 정중한 말투는 그녀의 평화 제의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제가 할게요."
그녀가 선뜻 제의했다.
"캐머런 씨, 간 요리를 좋아하셨으면 좋겠군요. 단순히 푹 곤요리예요. 간하고 양파가 환자
에게 좋다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그녀의 말에 그는 정말 그런지 당장 묻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간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 옆에 있는 바느질용 흔들의자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먹기 쉬운 크기로 고기를 잘랐다. 드디어 그들 사이에 휴전이 확실히 성립된 것 같았
다. 그는 고기를 입에 넣고 천천히 씹어서 삼켰다. 구역질 나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되뇌며,
또 다시 그녀를 화내게 하지 않게 조용히 먹었다. 그가 생각해도 자신은 너무 잘 하고 있었
다. 하지만, 윽! 이 끔찍한 간! 얼마나 자기가 간 요리를 싫어하는가.
그녀는 고기를 계속 썰어 나갔고, 마침내 그도 한계점에 도달했다.
"컵에 뭐가 있소?"
그가 물었다.
"커피요."
"대롱도 있소?"
"물론요."
그녀는 리넨 냅킨 아래에서 대롱을 꺼냈다.
"좀 마셨으면 좋겠소."
그는 서둘러 대롱으로 커피를 빨아 댔다. 그러나 즉시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윽!"
"이런, 아직 뜨겁다고 알려 드렸어야 하는데."
그녀는 놀란 듯 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고의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평화를 원한다면, 뜨겁다
고 알려 주었어야 했다. 젠장! 그러나 그는 접시를 비워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말없이 간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가 먹는 동안 그녀는 민간 요법에 대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배운 치료법과 그의 생명을 구해준 숯과 누룩의 처방이 씌어 있는 책에 대해서.
그의 뱃속에선 서서히 반란이 일어났다.
그가 식사를 마치자 그녀가 말했다.
"내일 아침엔 손이 한결 나아질 거예요. 당신 간을 썰 수 있을…… 아니, 그러니까 당신의
식사인 간 요리를 당신 스스로 썰 수 있을 만큼 말이에요."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누워 있었다.
제발, 안 돼, 그는 생각했다. 간 외엔 뭐든 괜찮았다.
그의 뱃속이 요동치는 걸 못 느꼈는지, 그녀는 쟁반을 들고 나갔다. 이렇게 온순한 그를 보
니, 한없이 만족스러웠다. 밖에서 저녁을 반쯤 먹었을 때, 그녀는 힘없이 자신을 부르는 그
의 음성을 들었다.
"애비게일 양?"
그녀는 귀를 기울이고 웃음을 지었다. 평상시와 같이 짜증이 묻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에도 그가 흉계를 꾸밀지 몰랐다.
"애비게일 양, 양동이를 갖다 줘요, 제발…… 빨리!"
아니, 내가 제발이라는 소리를 들은 거지? 그리고 불현듯 양동이를 가지고 오라는 부탁이 떠
올랐다. 그는 침묵을 지키며 저녁 식사를 했고, 끝난 뒤에는 곧 눈을 감았다. 그답지 않게
온순하게. 오, 안 돼!
"네, 가요!"
그녀는 고함을 질렀다.
잠시 후, 요란스레 양동이가 침대 옆 방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신음 소리를 내
며 양동이가 있는 쪽으로 구르려했다. 그녀는 얼른 손을 뻗쳐 그의 아픈 다리가 움직이지 못
하게 시트와 함께 그의 몸을 잡았다. 그는 엉덩이를 사용해서 침대가로 움직였다. 그리고 양
동이에 간, 양파, 커피, 완두콩, 체리파이까지 토해냈다. 잠시 뒤 그는 탈진한 듯, 눈을 감
고 식은땀을 흘리며 힘없이 침대가에 엎드렸다.
드디어 그는 숨을 들이쉰 다음, 마루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애비게일 양, 우린 서로 잘 맞지 않는 운명인가 보오."
"자, 똑바로 누워요. 다리 상처 때문에 그렇게 누우면 안 돼요."
그녀가 명령했다.
그녀는 그가 바로 누울 수 있게 부축해 주었다. 힘없이 베개에 머리를 묻은 그의 얼굴은 창
백했다.
"상처를 다시 살펴보는 게 좋겠어요."
그는 팔을 들어 이마 위에 올려놓고, 눈을 떴다.
"상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소. 단지 간을 내가 무척 싫어할뿐이오."
"네?"
놀란 그녀의 음성이었다.
"그런데 왜 전부 먹었어요?"
"한번 먹어 보려고 했소."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실렸다.
"시도하긴 했는데, 역시 결과가 좋지 않군. 또 다시 당신과 대립하지 않으려고 그런 거요.
신경을 써서 차린 쟁반을 보니 특히 그런 마음이 더 들더군. 그런데 노력해 봤지만 내 속이
거부를 하는군."
그는 이마 위에 올렸던 손을 툭 옆으로 떨어뜨리고는 애비게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 손
으로 웃음이 나오려는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니, 그도 얼굴에 온순한 웃음이
퍼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애비게일은 웃음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침대옆의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며 웃
고 또 웃었다. 그녀는 허리를 부여안고 마음껏 방 안에 웃음소리를 퍼뜨렸다. 제시도 바라던
바였다. 흔들의자가 앞뒤로 흔들리고,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페티코트가 답답한
듯 숨가쁘게 웃어 댔다. 이렇게 밝게 웃는 그녀를 보니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같이 웃지 못해 유감이오. 하지만 그렇게 웃다간 당신 내장에 무리를 주지 않을까 걱정되는
군."
그가 말했다.
그러나 경계막을 풀어 버린 그녀에게 매료된 그는 말과 달리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오, 캐머런 씨."
그녀는 숨을 가다듬었다.
"당신이 말한 대로 그게 우리 운명인가 봐요. 제 요리를 먹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역화(淡火 :
도리어 화를 일으킴)가 됐군요."
그녀는 다시 유쾌하게 웃었다.
"역화라고? 완벽한 표현이군."
그는 위장이 쓰린 데도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오, 세상에. 날 웃기지 말아요, 제발."
그가 고통스러운 듯 몸을 움켜잡으며 애원했다.
"당신은 그래도 마땅해요. 감히 제 요리를 모욕했으니까요."
"누가 누구를 모욕했다고?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물어 보지도 않고 간 요리를
입에 쑤셔 넣은 사람이오. 그 요리를 무조건 먹인 사람이 더 모욕적인 행동을 한 게 아니오?
이봐요, 아가씨. 지금 날 봐도 알겠지만, 그건 치명적인 무기였소."
그녀는 너무나 웃겨서 그가 자신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에 방어하지 못했다. 웃느라고 기진
맥진한 그녀는 흔들의자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제시는 그런 그녀를 관찰하며 즐거웠다.
"천하 무적처럼 보이는 당신에게서 허점을 하나씩 발견하는군요."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편안한 자세로 의자를 흔들며 그녀가 말했다.
"간이 그 중 하나군요."
그녀가 이렇게 풀어진 모습은 처음 보았다. 황금빛 석양이 서쪽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녀
의 머리카락과 뺨, 칼라, 귓불 그리고 속눈썹 모두가 반짝거렸다.
그는 그녀가 몇 살쯤 되었는지 또 다시 궁금했다. 의자에 기댄 그녀는 너무나 어려 보였다.
자신 때문에 그녀가 멜처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니 가슴 아픈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는 편
안해 보였다. 서로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지 몰랐다. 잘하면 불유쾌한
죄책감도 없어질 것이다.
"몇 살이오?"
그가 물었다.
"너무 많아서, 당신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을 거예요."
"너무 많아서 멜처가 떠날 걸 미리 예견했다는 말이오?"
"당신 너무 야비해요."
그러나 그녀의 음성에선 싸우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편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그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입가에 아직도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아마 그럴지도. 그래서, 걱정하는 거요?"
그도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뭘 걱정하는데요?"
"너무 늙어 남자가 생기지 않을까 봐, 그리 걱정하지 말아요. 도시에는 노처녀들이 많소."
"하지만 이 마을에는 없어요."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내가 당신과 멜처 사이를 다시 연결해 주면, 그가 마지막 후보가 되는 거요?"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치 둘이 무슨 게임이라도 하는 듯
그는 흔들거리는 그녀의 얼굴 위로 태양 광선이 왔다갔다하며 비치는 걸 지켜 보았다.
"애비게일 양,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소."
흔들의자의 움직임이 멈춰지고, 그에게 시선을 옮긴 그녀는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당신이 정 그렇다면 없던 일로 해 둘게요."
그녀가 부드럽게 응했다.
"그러겠소?"
잠시 시간이 흘렀다.
"어쨌든, 사과하니 훨씬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것 같군. 안 그렇소? 결국 우린 속 좁은 고양
이처럼 싸워 대는 걸 멈추게 됐군. 내가 갑자기 온순해지면 당신은 도리어 그때를 그리워할
거요."
"사과하는 게 그렇게 마음이 걸려요?"
그녀가 맞섰다.
"뭐라고? 애비게일 양, 날 너무 나쁜 자식으로 아는 거 아니오? 난 누구에게도 사과할 수 있
단 말이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신 콧수염에 대해 사과하겠어요. 됐죠?"
"그건 불공평하오."
그녀는 노을이 쏟아지는 창문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녀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사과는 힘이 있다는 걸 알려 주는 표시예요. 육체적인 힘을 뜻하는 건 아니죠. 자신이 잘못
했다고 시인하는 건 대단히 힘든 일이에요. 당신도 그럴 수 있기는 하겠지만, 멜처 씨가 그
쪽 면에선 더 강한 것 같군요."
그녀의 말에 달콤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쓰디쓰게 변했다. 그 남자와 불리하게 비교되는 것도
이젠 피곤하고 지겨웠다. 자존심까지 상했다. 자신의 결점이 드러나는 건 싫었다. 게다가
이처럼 성적 매력이 없는 여자에게까지, 멜처처럼 흐물흐물거리는 남자에게 비교되어 그보다
못하다는 판정을 받는 건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확실하게 사과해서 넌덜머리 나는 일이
사라진다면, 그래, 그렇게 하지. 젠장!
"미안하오, 애비게일 양. 이젠 훨씬 기분이 좋아졌소?"
그녀는 몸을 돌리지도 않고 계속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으나, 진정한
사과가 아니라 방어막을 치기 위한 말임을 그의 음성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아니오, 전혀. 하지만 당신은 기분이 좋아졌을 거 같군요. 어때요?"
그는 핏기가 올라와 얼굴이 빨갛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사과가 거부당하자 마음이 상했다.
자신을 낮추고 여자에게 사과한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가 간신히 미안하다는 말을 했
는데, 거절당했다. 갑자기 화가 난 그는 거칠게 웃어 버렸다.
"당신이 나가면 내 기분이 더 좋아질 것 같군. 지금 당장 여길 나가서 그 간 요리를 먹으며
멜처의 단꿈이나 꿔요!"
고개를 돌린 그를 보고 그녀는 그가 화가 났다는 걸 알아챘다. 그녀의 재미 있어하는 눈길이
그의 딱딱해진 얼굴에 머물렀다. 자신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런 결과는 예상치 못했으리라. 그래도 반성하는 빛은 전혀 없었다. 불현듯
그의 신랄한 말 속에서 또 다른 뭔가가 느껴졌다.
그래, 멜처를 질투해!
믿을 수 없지만, 사실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얼른 그가 보인 반응에서 다른 원인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는 비밀스런 웃음을 지으며 일어나, 노려보는 그에게 부드러운 목소
리로 잘 자라고 인사했다.
그런 그녀를 보니, 그는 다시 그녀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난 당신에게 두 가지를 빚졌소! 콧수염하고 간 말이오.
그녀는 잠을 자러 2층에 올라갔다. 그는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을 어
떻게 화나게 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애비게일 매켄지로 가득 찼다. 그
는 그녀가 자신을 화내게 한 일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았다. 콧수염과 변기 사건 등등. 그
러나 그의 분노를 일으킨 핵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건 멜처를 그녀에게서 떠나게 했다는
그의 죄책감에 기인했다. 뉴올리언스에서 그레이트 디바이드에 이르기까지 그에게는 여자가
없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애비게일 매캔지처럼 자신을 초라한 허수아비 보듯이
보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여기에 앉아서 그 애숭이 멜처를 그리워하며 손가락만 꼬았다.
그리고 그를 사과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사과를 하게 만든 걸까? 그는 머리를 베개에 파묻었
다. 어떻게! 대체 뭐냐고!
저녁 내내 그녀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웃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어
떤 여자도 그렇게 자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래, 그 여자가 자극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그래,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여서, 내가 죄책감에 빠지도록 만들겠단 말이
지. 나를 보며, 그는 신사이고, 심지어 사과까지 했는 데도 나는 악당이라는 생각을 상기시
키겠단 말이지.
그래, 젠장! 도와 주지. 내가 사과하면, 그녀가 주장하는 대로 숙녀답게 내 얼굴을 보며 그
대로 고맙게 사과를 받아들이게 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