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5화 (5/24)

5

다음날 아침, 멜처는 몸 상태가 아주 좋았다. 발가락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애비게

일 양을 놀래 줄 생각으로 혼자아침을 먹으러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절룩거리며 천천

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상하리만치 집안이 조용했다. 계단의 마지막 단을 내디디며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현관 옆 침실로 향했다. 저 악당놈이 자신과 애비게일 양과 한 지붕 아래

있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 버리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그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슬

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마치 호기심이 가득 쌓인 소년들이 성인 클럽 안에 들어가고 싶어하

는 마음과 같았다.

그러나 문을 살며시 열고 깔끔하게 손질한 머리를 들이밀었을 때는, 이렇게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되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방 안에는 상처 입은 강도가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실 한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

다. 단지 상처에 붕대만 붙어 있었다. 한 다리는 예쁜 프릴이 달린 쿠션 위에 걸쳐졌고 다른

다리는 음탕하게도 여자의 배 위에 있었다. 여자는 침대 아래편에 불편한 자세로 누워 있었

다. 그녀의 잠옷은 허벅지 위까지 말려 올라갔고 다리는 침대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남자의 벌거벗은 엉덩이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은 남자가 손으로 헝클어뜨

린 것처럼 엉켜 있었다. 모든 것이 전율을 일으켰다. 그녀는 하필이면 창녀처럼 그 짐승 같

은 놈의 거뭇한 사타구니 가까이에 손 하나를 뻗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몰골을 보니 지금까지는 놀랄 것도 못 되었다. 마치 시궁창에서 나온 창녀처

럼 발이 시커맸고, 여기저기 지저분한 얼룩이 묻은 레이스 잠옷에, 그녀의 손과 손톱은 몇

시간은 박박 비벼야 할 정도로 새까맸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술집에서 소동을 일으켜 다친

것처럼 더러운 거즈로 싸여 있었다.

저 남자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됐지만, 애비게일 양의 모습은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때 남자가 불편한 듯 몸을 꿈틀거리며 중얼거렸다. 말도 되지 않는 괴상한 중얼거림이었지

만, 여자를 깊은 잠에서 깨우기엔 충분했다. 여자는 신음 소리를 내고 손을 더듬어 붕대를

찾으며 중얼거렸다.

"가만히 있어요, 제시."

그러고는 힘이 없는 듯 휘청거리는 손을 남자의 무릎에 떨어뜨렸다. 잠에 취한 여자의 얼굴

이 남자의 맨다리에 바싹 붙었다.

"애비, 당신이오?"

남자는 눈을 여전히 감은 채 웅얼거렸다.

"네, 제시, 저예요. 지금 자러 갈 거예요."

남자는 한 손을 편하게 여자의 머리털 속에 집어넣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여자도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잠시 후,

경악한 표정의 멜처가 조용히 자기 방으로 되돌아갔다.

*   *   *

그 장면이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정원으로 나가 쐬는 바깥 바람이

달콤하면서도 씁쓸했다. 마음 같아서는 큰 소리로 그녀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도저

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달팽이 걸음만큼 더딘 범죄자의 회복을 위해 모든 시

간을 할애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마음이 모두 악당에게 쏠린 것 같아, 질투심이 달아올랐다

데이비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악당은 자신을 불구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 발견한

삶의 즐거움까지 앗아 갔다. 평생 절름발이로 살 것 같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더 이상 자신

에게 호감을 느끼는 여자는 없으리라.

그는 약을 먹는 동안, 옆에서 시중을 드는 애비게일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어

제 일에 대한 해답이라도 찾는 듯이. 그녀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데이비드는 애비게

일의 관심을 완전히 그에게 빼앗긴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다. 갑자기 데이비드가 자신과 거리를 두었다. 한 번 더 그와 키스하고 싶었다. 어젯

밤에 힘든 고비를 넘긴 그녀는 그를 보며 지친 기분을 즐겁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가 호응을

하지 않았다. 데이비드의 발은 완전히 나은 것 같았다. 아직까지 그의 옷을 빨지 않은 사실

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데이비드를 즐겁게 하려고 힘겹게 애쓰자, 그는 사려 깊게 감사의

표시를 보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녀가 지금 아무리 명랑한 음성으로 재미있는 말도 하

고 비위를 맞춰 주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불만은 이미 벌어진 일에 관한 것이

었다.

의사가 몇 가지 주의를 주며 아편 성분이 있는 진통제를 남기고 떠났다. 늦게서야 깨어난 제

시는 기력이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배가 너무 고팠다.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 신

기했다. 몸을 조금 움직여 보니 상처를 도려낸 부분이 욱신욱신거렸지만 어제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부엌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자기를 여기에 누워 있게 만든 남자 목소리였다. 얼마나

잔 거지.

발소리가 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문가에 온 것을 알아차린 그는 창문 밖의 나무를 보던

시선을 문가로 돌렸다. 자신을 향해 선 그녀를 보니, 예전의 적대감은 사라져 있었다.

산뜻한 흰색 블라우스와 상쾌한 여름 잎사귀 같은 녹색 스커트만큼 그녀는 생기 있어 보였다

. 갈색 머리가 깔끔하게 목뒤로 올려져 있었고, 복숭아빛 피부가 상큼해 보였다. 그녀가 웃

으면 어떻게 보일까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해내셨군요."

그녀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해냈소."

그리고 부드럽게 덧붙였다.

"이리 와요."

그녀는 망설이다 천천히 침대가로 왔다.

"바쁘오?"

그가 음흉한 웃음을 보냈다.

"조금요."

감미로운 그녀의 대답이 들렸다.

그는 팔을 옆으로 툭 떨어뜨리며 그녀의 녹색 스커트를 잡았다. 그리고 무례하게 그녀의 엉

덩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완전히 당신 소유가 된 것 같소."

제시에게 이런 행동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자들에게 수백번은 해본 일이었다. 그러나 애비

게일에게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대화를 들은 데이비드가 문가로 다가왔다.

그들을 보고 핏기가 가신 데이비드는 건조한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저기, 음……."

공포와 무력감에 애비게일은 얼어붙어 있었다.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어색

하게 몸을 꿈틀거렸지만, 제시는 더 힘껏 그녀를 움켜잡았다. 그는 한쪽 입가에 웃음을 띠며

느릿느릿 말했다.

"오, 우리의 영웅, 멜처 씨 아니오?"

"품위를 지키시오!"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은 듯, 제시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애비게일에게 웃어 보였

다.

"애비, 내가 윌 하든 괜찮지 않소?"

"애비게일 양, 정말 그렇습니까?"

성이 난 데이비드의 말이 즉각 튀어나왔다. 그녀는 제시의 손을 뿌리치려 노력하며, 문가에

서 있는 데이비드를 바라보았다.

"이건……, 이건 아니에요."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간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맞소, 이 정도는 아니지."

안절부절못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을 즐기며, 제시가 놀리듯 말했다. 애비게일은 능물스런 제

시 때문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그녀는 용기를 되찾았다.

"입 닥쳐요!"

소리를 치며 애비게일은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혐오스런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다.

"이렇게 명예를 더럽히며……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본게, 벌써 두 번째요."

그가 비난했다.

"두 번째라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나는 절대로……."

"난 보았소. 애비게일 양, 당신 손이 저 사람의……."

"거짓말 말아요!"

애비게일의 손이 허리로 올라갔다.

"자, 애비, 아마 지난밤에……."

제시가 끼어들었다.

눈앞이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았다. 애비게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비열한 입 좀 다물어 주시면 고맙겠어요, 미스터…… 누구든지요!"

"당신은 잠을 자면서 저 사람을 제시라고 부르더군."

데이비드가 말했다.

"내가 잠을……."

그녀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제시는 재미있는 듯 빙그레 웃기만 했다.

"난 당신이 숙녀인 줄 알았소. 내가 바보였지."

멜처가 자신을 경멸하듯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같은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어요. 절대로!"

"오, 그래요? 그럼 당신은 어젯밤에 잔디밭에서 뛰어 놀았나요? 잠옷이며 발, 손이……."

그녀는 생생하게 기억났다. 나무를 태워 온기가 남아 있는 숯을 갈았고, 맨발에 잠옷 바람으

로 의사의 집에 뛰어갔다 왔다.

"이 사람은 의식이 없었어요. 상처가 곪았기 때문에 도허티 선생님을 부르러 갔다 왔어요."

"그래요? 밤에 의사를 본 기억이 없군요."

"그건, 그가 없었…… 그러니까, 선생님이 집에 안 계셨어요. 그래서 나 혼자 제시, 아니,

캐머런 씨를 치료해야 했어요."

"겨자 고약만 널려 있던데요."

데이비드가 따져 들었다.

"하지만 난……."

"변명할 필요 없어요, 매켄지 양. 올해가 가기 전에 누군가 그 고약이 필요하겠지요."

신랄한 멜처의 말이었다. 종잇장처럼 하얘진 애비게일은 떨리는 손을 멈추게 하기 위해 두

손을 맞잡았다.

"멜처 씨, 이곳에서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멜처의 턱에 경련이 일었다.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도 똑같이 조용히 대답하고 방을 나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그의 마음은 바위를 매단 듯

무거웠다. 그가 다시 내려왔을 때, 그녀는 현관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선 아무것

도 읽을 수가 없었다.

"신을 신발이 없소."

그가 쓸쓸하게 말했다.

"아버지 슬리퍼를 신으세요. 사람을 시켜 돌려 보내시면 돼요."

일순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가 돌려졌다.

"애비게일 양, 제가……."

그가 숨을 꿀꺽 삼켰다.

"제가 경솔했던 것 같습니다."

"네, 그러신 것 같군요."

부드럽게 대꾸하기엔 너무나 상처가 컸다. 짤막한 그녀의 대답에 그가 발걸음을 돌렸다. 그

의 발걸음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연약한 꽃잎들이 짓밟혔다. 그가 왔을 때에는 봉오리를 아

름답게 피우던 꽃들이었다. 그가 문을 열었다. 그녀의 손이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뻗어 나갔

다.

"혹시……."

그가 뒤돌아보았다. 그녀는 손을 얼른 내렸다.

"제 아버지의 지팡이가 있는데, 필요하다면 가져가세요.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그는 우산꽃이에서 지팡이를 하나 들고 말했다.

"너무 폐만 끼치는군요."

그녀는 팔을 들고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큰 오해가 생긴 거예요. 제발 떠나지 말아요. 곧 오해가 풀릴거예요. 떠나지 말고 정원에서

우리 같이 레모네이드를 마셔요. 정말 미안해요.'

그러나 자존심이 그녀를 냉담하게 만들었다. 그는 몸을 돌려 절룩거리며 떠났다.

그녀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신사 중에 신사였다. 정중

한 그의 태도는 애비게일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이젠 부질없는 일이었다. 정원

에서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일도, 그가 말했던 부드러운 도시형 구두도 없을 것이다. 평소와

같이 적막한 오후를 잡초나 뽑으며 보내고, 저녁녘엔 외로이 소네트를 읽으며 지낼 것이다.

이래서 뭘 얻었지? 또 하나 가슴 아픈 상처가 생겼다. 자신이 한 일이라곤 범죄자의 생명을

구한 것밖에 없었다.

갑자기 대사를 읊듯이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애비?"

이 한 마디 단어가 이렇게 사람을 화나게 할 줄이야.

"여기에 그런 이름 가진 사람 없어요!"

그녀는 남아 있던 눈물을 닦으며 소리 쳤다.

"애비, 이리 와요."

그는 좀더 부드럽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당장 달려가 그의 목을 포크로 마구 찌르고 싶었다. 다시는 말하지 못하게!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부엌으로 가 아침 설거지를 했다.

"애비!"

몇 분 후에 다시 그가 불렀다. 화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손에서 그릇을 내려놓지 않

았다. 그의 말을 무시하며 극도의 만족을 느꼈다. 그녀에게 그는 목에 걸린 생선 가시 같은

존재였다.

"빌어먹을, 애비! 이리 들어와!"

그의 험악한 말에 그녀는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어깨를 펴며 고개를 꼿꼿이 들

었다. 흥, 내가 또 그 따위 말에 겁먹을 줄 알아. 그녀는 차갑게 외면했다. 집안 기운이 팽

팽하게 당겨졌다. 그들은 서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한만큼 되갚아 주고 싶었다

. 다시 격분에 찬 그의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애비게일 양, 지금 당장 오지 않으면, 당신의 이 백합처럼 하얀 침대에 오줌을 눌 거요!"

그녀는 그의 우렁찬 포효에 깜짝 놀라는 동시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얼른 환자용 변기

를 가지고 갔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의 앙칼진 외침과 함께 변기가 그의 무릎에 떨어졌다. 애비게일이 화가 나서 문가에서

던진 것이다 티-이-잉, 변기의 울림 소리가 채 찾아들기도 전에 그녀가 사라졌다.

그녀는 등뒤에서 독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거침없는 상소리에 그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다시 변기를 가지러 들어가야 하는데, 스스로 상황을 불리하게 만들어

버렸다. 오! 또 불처럼 화를 내겠지! 내가 한 만큼 고스란히, 아니 몇배는 더 심하게 앙갚음

할 것이다! 그는 변기로 맞아도 당연하지만 그런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떻게 하지? 거

친 야만인처럼 난폭하게 굴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려야 해. 최대한 그를 막아야 돼. 어머니 말씀처럼 절대로 이성을 잃으면 안 돼.

분노가 끓어올라도참아야 해.

그녀는 조용한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서며 차갑게 말을 꺼냈다.

"한 가지 제안을 하죠. 당신이 나을 때까지 휴전하기로 해요. 당신을 제대로 잘 보살펴 드릴

게요. 당신도 무례하고 공격적인 행동을 삼가해 줘요."

"공격적이라고! 참, 어울리는 말이군! 내가 그 녀석한테 총을 맞아 이 모양이 되었는 데도

멍청하게 아무 짓도 못하고 이렇게 누워만 있었소. 그리고 한 여자한텐 수저로 푹푹 찔리는

고문을 당했소.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여기가 어딘지 묻지도 못했소. 게다가 침대에 묶이지

않나, 변기통에 얻어맞지 않나! 아가씨는 그런_걸 공격적이라고 말하오? 하, 그렇소, 난 공

격적이오, 여기온 다음부터 더 심해졌소!"

자신의 무례한 행동은 쏙 뺀 그의 말이 애비게일의 울화통을 두들겼지만 그녀는 잘 참아 냈

다.

"우선 말소리를 좀 낮춰야 되겠군요."

그녀가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그의 큰 목소리를 지적했다.

"더럽게 옳은 소리만 하시는군!"

시선이 서로 팽팽히 얽혔다.

"내 집에서 그런 불경스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은 더 이상 허락하지 않겠어요!"

이를 갈듯 그녀가 말했다.

"제기랄, 당신이나 그렇게 해!"

그가 소리 쳤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다니 정말 용감 무쌍하시군요."

서서히 제시는 끓는 화를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가 말한 대로 자신은 너무 버럭버

럭 소리를 내질렀다. 애비게일은 그가 얌전해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먼저 당신이 나를 애비게일이나 애비, 또는 아가씨라고 부르는 걸 허락하지 않겠어요. 당신

은 나를 애비게일 양이라고 불러야 해요. 그리고 당신이 성을 가르쳐 주면 나도 그 성을 부

르겠어요."

"제기……."

그는 얼른 말을 멈췄다. 그녀의 기분을 건드리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어겼다.

"나를 제시라고 부르는 데 무슨 문제가 있소?"

그는 말투를 조심해 가며 물었다.

"제시는 바로 내 이름이오. 내가 성을 말하지 않으면 무슨 애로 사항이 생기는 거요?"

"네, 당신 묘비명 때문에요."

엉뚱한 그녀의 말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면 절대로 말하지 않겠소."

그녀도 갑자기 웃음이 나와 얼른 몸을 돌렸다.

"제발 그만 놀리고, 이 논쟁을 매듭 짓는 게 어때요?"

"젠장, 다 해결됐소. 애비게일 양, 나를 제시라고 불러요."

쓸데없이 이렇게 강경하게 그가 억지를 쓸 줄은 전혀 몰랐다! 정말 자신이 지금까지 만난 사

람 가운데 가장 신경을 돋구는 사람이었다.

"좋아요, 이름을 알려 주는 게 싫다면, 저는 계속 당신을 캐머런 씨라고 부르겠어요. 그리고

예전처럼 무례한 언동을 하면 당신을 간호하는 것도 끝이에요. 당신이 입을 제대로 조절한

다면 고맙게 생각하겠어요."

"내 입이 그렇게 되려면 힘들 거요. 난 한 번도 조절해 본 적이 없으니까."

"확실히 그런 것 같군요. 하지만 이제부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린 서로 얼굴 보는 일도 없

을 거예요. 최선의 선택을 하길 바라요."

그는 그녀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과장해서 말하는 건 아닌지 찡그린 눈초리

로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녀를 계속 자극하고 싶었다.

"사악한 마음을 품고, 총을 가진 악한이라고 모함을 해서 나를 감옥으로 보낼 작정이오?"

그는 악의 있는 질문을 던졌다.

"말을 꾸밀 필요조차 없다는 걸, 오늘 아침이 지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아실 거예요."

그녀는 차갑게 대꾸했으나 기분은 불쾌했다.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지?

"그렇다면, 휴전하자는 당신 말을 받아들이겠소, 애비게일양."

그의 순순한 말에 그녀는 긴장이 다소 풀렸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서 창문을 열어, 방 안 공기를 상쾌한 아침 공기로 바꾸었다.

"방 안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군요. 당신에게도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고요. 당신 몸도 상쾌

함을 느낄 필요가 있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커튼을 젖혔다.

"쯧쯧, 애비게일 양, 지금 누굴 자극하는 거요?"

마치 할아버지들이 지각 없는 아이들에게 하듯 혀를 차는 소리였다. 그에게 이런 유머 감각

이 있는 줄 몰랐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내 말은 목욕을 말하는 거였어요. 당신 몸에서 지저분한 취기(臭氣 : 악취)가 나지 않는다

고 당신이 거짓말을 하면, 저도 감사하게 이대로 놓아 두도록 하죠."

그는 그녀가 당황할 때마다 어려운 상류층 말투가 튀어나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황해서

발갛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게 즐거웠다. 그래서 그는 계속 놀려 주기로 했다.

"아니, 지금 내가 알몸으로 누워 있는데, 날 목욕시켜 주겠다거요?"

그는 마치 신경이 곤두선 처녀처럼 시트를 부여잡고 당치도 않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그런 우스꽝스런 자세로 있는 그를 보자니,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그녀는 얼른

몸을 돌렸다가 그의 게임에 도전하듯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벌써 해본 적이 있는걸요. 걱정 말아요, 또 다시 할 수 있을 거예요."

놀랐는지 그의 두꺼운 눈썹이 위로 치켜져 올라갔다.

"해본 적이 있다고!"

그는 움켜잡았던 시트를 밀쳤다. 시트가 그의 배꼽 아래까지 내려갔다.

"그러니까, 이미……."

그는 느릿느릿 말하며 멀쩡한 한 쪽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녀가 방을 나가는 동안, 그는 웃음을 지었다. 진짜 자신을 목욕시켜 줬는지 의심스러웠다.

그의 웃음은 점점 크게 번져 갔다. 젠장, 애비, 당신이 한다면 나야 기꺼이 따르지. 그는

그녀의 꽃침대에 누워서 빙글빙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녀가 팔을 걷어 올리고 등장했다. 아, 이제야 손목을 보여주시는군. 그녀는 광신적이라고

할 정도로 엄격하고 정숙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갈피가 서지 않았

다. 그녀가 순진하리란 건 뻔한 이치였다. 자신의 섹시한 엉덩이를 보고 난처해 할 그녀를

상상하니, 기분은 좋아졌다.

일 같은 건 할 수 없어 보일 정도로 그녀의 손은 섬세하고 약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머뭇

거리지 않고 젖은 수건을 그의 몸에 댔다. 그런데 느낌이 너무나 매끄러웠다.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고는, 고개를 돌리고 팔을 올리라는 그녀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그녀

는 침대에 누운 남자를 불편하지 않게 하면서 품위 있게 목욕시키는 방법을 알았다. 정말 기

분이 죽여 줬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몸 왼쪽을 닦으려고 하면서 너무나 놀랍게도 침대 위

로 올라왔다. 이럴 수가! 도덕심과 엄격함으로 똘똘 뭉친 그녀가 침대 위로 올라오다니! 존

경심이 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이제 우린 휴전중이오. 왜 나를 캐머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 알려 줄 수 있소?"

그녀는 비누질을 했다.

"저는 당신이 의식이 돌아오면 제일 먼저 말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름을 묻자

, 당신은 '마이크 캐머런'이라고 말했어요. 아니 말하는 걸 보았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그는 기억을 차근차근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상쾌한 웃음소리였다.

"마이크 캐머런이 아니라, '마이 카메라'라고 말한 거요. 내 목이 말라붙어서 제대로 발음하

지 못했소."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디 있소?"

"뭐가요?"

그녀는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그를 닦으며 말했다.

"내 카메라 말이오."

"카메라요?"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진짜 카메라를 잃어버렸나 보군요. 그런데 왜 내가 그걸 안다고 생각하죠?"

그는 빈정거리듯 눈썹을 올렸다.

"그럼, 모른다는 거요?"

그의 옆구리를 닦던 그녀의 손에 들린 수건이 거의 엉덩이 가까이까지 가서 멈춰졌다. 그 아

래로 시트가 덮여 있었다. 애비게일은 그를 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정말이에요, 캐머런 씨. 당신 몸에는 카메라가 없었어요. 어디에도요."

무심코 몸을 닦다가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시선을 떨구고는

서둘러 일을 계속했다. 긴장한 듯 그녀의 손엔 힘이 들어갔다.

"애비게일 양, 부끄러운 줄 알아요."

짐짓 그녀를 나무라는 점잔 빼는 말투였다. 그는 그녀의 빨간뺨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여전히 카메라가 걱정되었다.

"카메라와 감광판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정말 몰라요? 내 가방 속에 사진 기구가 있는데. 가

방은 어디 있소?"

"무슨 소린지 정말 모르겠군요. 당신은 이대로 나한테 보내졌어요. 아무도 카메라나 감광판

같은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내가 지금 그것들을 숨기는 줄 알아요? 팔 좀 올려 주세요."

그녀는 그의 팔을 수건으로 문질러 댔다.

"그럼 도대체 어디 있는 거요. 아무도 기차에서 그걸 챙기지 않았단 말이오?"

그녀는 팔에서 비눗기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기차에서 내린 건 당신하고 멜처 씨, 그리고 멜처 씨 가방밖에 없었어요. 아무도 열차 강도

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의 말이 터무니없는 듯 그녀의 눈썹이 기울어졌다.

"혹시 범죄자들은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꾸며 낸 얘기는 아닐까 의심스러운 듯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아마 죽은 희생자들을 찍어서 스크랩하려고 그러겠지."

그는 악마 같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름이 오싹 끼친다는 표정을 지

었다.

"캐머런 씨, 농담이 지나치 잖아요!"

그녀는 버럭 소리를 치고, 더 세게 문질렀다.

"아야! 진정해요! 난 환자란 말이오, 당신도 알잖소."

"가르쳐 줄 필요 없어요."

그녀가 불쾌한 듯 말했다.

그는 설득조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카메라 얘기는 믿기 어렵겠지만, 당신을 괴롭히려고 한 말은 아니오. 차라리 내가 유머 있

고 쾌활한 열차 강도라면 당신이……."

그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이렇게 피부를 벗겨 내듯 벅벅 문지르지 않고, 가죽을 무두질하듯 부드럽게 다루지 않을까

해서 말이오! 아야, 아까도 말하지 않았소! 이봐, 당신은 아야란 말뜻도 모르는 여자요?"

"여자라고도 부르지 말아요!"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채서 거칠게 물기를 닦기 시작했다.

"어째서? 당신은 여자 아니오?"

언성을 높이며 그가 애비게일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은 길고 거무스름한 그의 손가락

속에 갇혀 버렸다. 일순 당황한 그녀의 심장이 퍼덕거렸다. 그의 찌를 듯한 검은 눈이 와

닿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신에겐 아니에요!"

뻣뻣하게 대답한 그녀는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사이에, 뭔가가 그들을 변하게 했다. 애비게일이 그의 오른쪽 다리를 씻기는 동안 그들

은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 그녀는 다리에 비누질을 하고 조심스럽게 상처 부근을 닦았다.

갑자기 그의 가슴이 들어 올려지더니, 고통스런 신음 소리와 함께 뒷머리가 베개 속으로 파

고들었다.

"아물기 시작했으니까, 차차 나아질 거예요."

그에게 위로하는 말을 건넸지만, 아직도 그녀는 그가 한 말엔 화가 나 있었다. 그녀가 기운

차게 그의 발 쪽으로 비누질을 시작할 때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늙은 멜처에겐 그런 거요?"

그녀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네 ?"

"여자 말이오. 늙은 멜처에겐 여자인 거요?"

그러나 때가 너무 나빴다. 그녀는 살살 다루어야 할 아픈 다리를 그것도 비누칠이 잔뜩 되어

있는 다리를 내팽겨쳤다. 그는 비명과 함께 숨을 헐떡였다. 그의 신음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짚고 그를 노려보았다.

"멜처 씨에게 그 정도 해를 입혔으면 충분하지, 그것도 모자라서 나를 괴롭히는 데 이용하는

거예요? 그는 신사예요. 당신이란 사람은 신사라는 말조차 알지도 못하지요? 당신의 그 잘

난 허세 때문에 그가 오해를 해서 떠났잖아요?"

그녀가 내동댕이친 다리의 통증으로, 그는 아직도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안쓰

러운 마음 따위는 들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그에게 얼마나 심한 모욕을 받았는가?

"그가 그렇게 신사였다면, 왜 당신은 그를 붙잡지 않았소?"

제시가 따지듯 물었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숨을 들이마시더니, 수건을 대야에 던져버렸다. 물방울이 밖으로 튀어 그

의 얼굴과 베개, 바닥을 적셨다. 그녀가 쿵쾅거리며 방을 나가자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요, 어디 가는 거요? 아직 목욕을 끝내지도 않았잖소!"

"쓸 만한 한 쪽 손이 있잖아요, 그 손을 써요!"

그리고 그녀의 스커트가 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는 비누 투성이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온통 비누 투성이잖소? 어떻게 하란 말이오?"

"당신의 그 더러운 입 안이나 먼저 닦아 내는 게 어때요!"

비누 거품이 바로 상처 아래 있었다.

"당장 이 비누 닦아요!"

"나보다 당신이 훨씬 깨끗이 닦을 테니, 기쁘게 양보하겠어요!"

상처에 비누 거품이 흘러들어가 아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폐 속에서 나오는 것 같은 깊

고 커다란 소리를 질렀다.

"빨리 돌아와, 이 독사 같은 여자야!"

그러나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비누 때문에 점점 아파 왔다. 그가 끙끙거리며 간신히 상처

주위의 비누를 제거했다. 가쁜 숨을 쉬며 다리를 내려다보니 허벅지와 종아리에 붙은 비누

거품은 이미 다 말라 버렸다.

애비게일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색유리가 달린 현관문을 부서져라 닫으며 나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 문을 닫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독립 전쟁 때 고용된 독일 군인처럼 무시무

시한 태도로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저런 괴물 같은 사람하고는 더 이상 같은 집에서 살수 없

어! 아무도 그처럼 자신을 격노시킨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정원을 노려보며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다시 평화로웠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 생활은 평화롭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내지 않으면 마음을 가라앉히려

고 애를 쓰는 게 전부였다. 그녀가 애써 가꾼 아마 꽃조차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

지 않았다. 저 밉살스러운 사람이 여기를 걸어서 나갈 때까지 도저히 참아 낼 수 없을 것 같

았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제일 잔인한 사람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민감한 신경'이

라며 그녀를 걱정하던 기억이 떠오르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자기 때문에 화가 나는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 그가 알아 주어도, 그녀의 집에서 머무르도록 흔쾌히 허락할 것이다.

애비게일의 부모님은 흠잡을 데 없이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욕설을 하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은 그녀에겐 너무나 생소한 일이었다. 그것이 품위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는 분노나 화를 숨기도록 배웠다. 그런데 캐머런 씨는 잘도 그녀의 분노를 끌어냈다. 느

닷없이 죄책감이 일었다. 환자에게 변기를 던져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 그렇게 했다.

그것도 그의 다리에 맞혀 일부러 아프게 했다. 그리고 토라진 아이처럼 문을 쾅 닫으며 나

왔다. 그런 점잖치 못한 행동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 수치심으로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깊이 반성하던 그녀를 다시 곤두박질시키는 사람이 있었다. 정원까지 나왔는데도 그

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더운 여름 공기 사이로 퍼지는 그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후회스러웠

던 감정을 단번에 쓸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애비게일 양, 일도 안 하는데 철도 회사에서 당신한테 돈을 주는 거요? 내 아침밥은 어떻게

됐소?"

어휴, 이런 뻔뻔스런 남자 같으니라고! 배를 쫄쫄 굶게 하고싶었다. 정말 매스꺼운 사람이야

! 그러나 자신이 놓은 덫에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숙녀다운 태도를 망토처럼 뒤

집어쓰고, 그의 아침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그녀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전에는 있었던 하얀 리넨 냅킨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 나는 왜 늙은 멜처처럼 꽃이 없는 거요?"

"당신이 어떻게 그걸……."

그녀가 놀란 눈으로 미처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열자, 그가 웃었다.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지금 내가 얼굴을 붉힌 여자를 보는 게 맞소? 이런, 이런, 늙은

멜처가 그때 뭘 했는지 궁금해지는군.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나 보군."

그가 계속 '늙은 멜처'라고 부르는 건 그녀를 자극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우리가 휴전중이란 걸 기억하나요?"

그녀가 딱딱하게 물었다.

"난 단지, 왜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지 알고 싶은 거요."

그는 짐짓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불평했다.

"당신은 음식을 원했고, 난 음식을 가지고 왔어요. 아침 내내 쓸데없는 소리를 재잘거릴 거

예요,  아니면 음식을 들 거예요?"

"당신이 날 독살하려고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렸소."

멜처 씨가 따스하게 그녀의 요리를 칭찬하던 것을 생각하자, 이런 못 말리는 사람을 보니 울

화통이 끓어올랐다. 숨도 못 쉬게 베개로 얼굴을 덮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검은 악마의

머리에 베개를 받쳐 주었다. 그러나 생각이 얼굴에 나타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가

슴에 수건을 펴 주고 숟가락을 드는 그녀를 세심하게 바라보았다. 미약하지만 그의 눈빛엔

자신의 소중한 치아를 좀더 부드럽게 대하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혼자서 먹는 게 어때요?"

그녀가 차갑게 물었다.

"안 돼요. 이렇게 누워서는 먹지 못하오. 게다가 당신은 나한테 음식 먹이는 걸 즐기는 줄로

아는데, 안 그렇소, 애비게일 양?"

천천히 그의 입가에 웃음기가 생겼다.

"무슨 요리요?"

"이건, 음, 묽은 쇠고기 수프예요."

"날 굶겨 죽이려고 작정한 거요?"

그는 자신이 공격하기보다 방어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리려고, 경악한 음성으로 물었

다.

"저녁에는 좀더 괜찮은 음식을 먹을 거예요. 지금은 수프하고 삶은 달걀밖에 없어요."

"끔찍하군."

그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끔찍하다는 말은 맛을 보고 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무슨 말이오?"

"길리아드 향유를 약간 혼합했어요. 조금 쓰겠지만 체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가 숟가락에 수프를 조금 떠서 그의 이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며 입에 넣어주려 하자,

그는 조금 생각하는 눈치였다.

"애비게일 양, 당신은 항상 딴 세상 사람처럼 말하오?"

그가 물었다.

그가 또 다시 자신을 짜증나게 하려고 한다.

"내 말이 뭐 잘못되었나요?"

"그게 아니오. 말하는 방식이 틀렸단 말이오. 평범하게 말하는 게 어떻소? 이렇게 말이오. '

내가 약을 섞었는데, 그걸 먹으면 곧 나을 거예요.'"

그녀는 데이비드 멜처가 소네트처럼 말한다고 칭송한 걸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비꼬고

싶다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갔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교양 있게 행동하는 자신에게

자부심 혹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눌러 버렸다. 그런데 그

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봐요, 애비게일 양, 도대체 왜 조금이라도 굽히려는 기색이 없소?"

그가 놀리듯 물었다.

"당신은 항상 내가 굽히는 걸 보잖아요. 캐머런 씨, 당신은 날 화나게 하고, 인내심을 잃게

해서 생선 장수보다 심하게 소리를 지르게 만들어요. 나는 교양 있는 사람이고, 교양 있게

말을 하고 싶어요. 당신은 별의별 방법으로 나를 자극했어요. 이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군요. 지금 숟가락을 가져가서 혼자 먹으려는 거예요?"

"아니, 아니오."

그는 조용히 대답했으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녀의 손목을 고리처럼 긴 손가락

으로 느슨하게 감고 있었다. 그는 개암빛 눈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다시 손을 내려다보

았다. 그가 부드럽게 흔들었더니, 월등한 그의 힘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듯 그녀의 손이 가만

히 흔들렸다.

"어떻게 하나, 이제부터 당신은 좀더 화내고 인내심이 바닥나 소리를 치게 될 것이오. 냉혈

동물보다 훨씬 인간적이지 않소? 왜 가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거요? 난 전혀 개의치 않소.

그녀는 얼른 손을 뿌리쳤다. 쉽사리 그의 손이 떨어졌다.

"달걀을 먹어요."

그가 입을 벌리자 그녀가 숟가락으로 떠주었다.

"너무 작소."

그녀는 기쁘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네, 어련하시겠어요. 하지만 당신의 기력을 돋궈 줄 거예요 빨리 회복돼야 당신을 쫓아낼

날도 가까워지겠지요. 그러니 최상의 간호를 해 드릴게요. 당신이 아침을 다들면, 고약을 만

들 아마씨를 사러 마을에 있는 필드 씨네 식료품점에 가야겠어요. 아마씨는 상처를 빨리 아

물게 하는 효능이 있거든요. 그래도 제게는 더디게 느껴지겠지만요."

"이 손은 어떻게 할 거요? 더럽게 아픈 걸 보니 어딘가 부러진 것 같소."

그녀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냈다.

"음, 내 말이 틀리지 않을 거요, 애비게일 양. 지나치다 싶게 애를 쓰는 당신이 정말 고맙소

. 하지만 두 손으로 자유롭게 당신을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소."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그 지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농담을 들려 주면 고마워하겠군요."

제시는 점점 더 그녀를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신랄한 혀

를 가졌고, 유머 감각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거의 인간이라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규율에

꽉짜인 그녀의 행동이나 생각을 꺾어 보고 싶었다. 그녀의 말대로 음식은 정말 끔찍할 정도

로 맛이 없었다.

그가 말했다.

"아, 나가기 전에 한 가지 더. 면도를 해주었으면 하는데, 어떻소?"

그녀는 마치 풍뎅이를 삼킨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건 아직, 아직 급하지 않아요, 그렇죠?"

그녀가 갑자기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지금까지 길러 왔잖아요. 몇 시간 더 지난다 해도 문제될 건 없죠?"

그는 뺨을 쓸어 보았다. 그녀가 숨을 멈추었다. 다행히 잠시동안 그녀에게 집행 유예를 주는

듯, 그의 손이 윗입술 경계에서 멈추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 이 집을 나가고 싶어졌다.

"길리아드 향유를 다려야 해요. 그리고 식료품점에도 가야하고. 당신은…… 내가 나가 있는

동안…… 휴식을 취하세요. 그리고……."

"가요. 나가고 싶으면 나가요."

그는 문을 가리켰다. 왜 갑자기 그녀가 초조한 듯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이상했다. 그

녀가 몇 분 후에 길리아드 향유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는 꿀꺽 삼켰다.

정말 지독했다.

"으으."

그는 눈을 감고 몸을 떨며 툴툴거렸다. 그의 혀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정상이라면 그의 찡

그린 얼굴을 보고 즐거워해야겠지만, 애비게일은 완전히 없어진 콧수염을 그가 알아채지 않

을까 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을로 나가면서도 그녀는 걱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방에는 남쪽, 동쪽, 서쪽에 창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곧은 자세로 거리를 혼자 걸어

가는 모습을 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더운 6월에 그녀는 모자를 쓰고 장갑

까지 끼었다. 과연 애비게일 양다웠다. 속옷에서 등뼈까지 풀을 먹인 여자 같았다. 관절이

구부러지는 것이 신기했다. 그녀가 시야에서 없어지자, 그는 다른 생각에 빠져 들었다.

락웰 열차 제일 끝칸에 있는 카메라와 사진 기구를 정말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까. 열차 안

에 두고 내렸다면, 벌써 락웰의 승객들이 좋아라 하고 가지고 갔을 텐데. 아니면 나 없이 카

메라만 도착한 걸 짐 허드슨이 알고 있을 것이다. 빨리 짐을 만나봐야겠다.

제시의 생각을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그가 대답했다. 들어선 사람은 활기차 보이는 짧은 머리에 몸집이 땅딸막한 남자였다. 그 사

람은 줄곧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듯 진료 가방을 들어 올렸다.

"클리블랜드 도허티요. 여기선 편하게 의사라고 부르오. 오늘은 기분이 어떻소? 전보다는 훨

씬 생기차 보이는군."

제시는 본능적으로 그가 좋아졌다.

"여자가 너무 고집스러워서 내가 죽도록 놔 두지 않아요."

의사는 큰 소리로 웃었다.

'이 사내는 애비게일 양을 정확히 파악했군.'

"애비게일 말이오? 애비게일은 매사에 정확하지. 그녀가 당신을 돌보게 되다니 억세게 운이

좋은 거요. 당신도 알듯이, 이 마을에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을 거요."

"그랬을 것 같군요."

"당신을 기차에서 넘겨받았을 때엔 어느 정도 차림을 갖추고 있었소. 하지만 남은 거라곤 이

셔츠하고 부츠밖에 없소. 물론 바지는 잘라야 했소. 그리고 이것도 당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소."

의사는 무게를 가늠하듯 권총을 들며 침대에 누운 제시를 응시했다.

"물론 총알은 없소."

의사는 지적하듯 말했다. 그리고 감촉이 매끄럽고 묵직한 총에서 매정하게 정을 떼듯 차갑게

침대 위로 던졌다.

"침대 밑에 셔츠와 부츠를 놓아 두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애비게일 양의 집을 지저분하게 만

들고 싶지 않습니다."

"벌써 애비게일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녀는 어디 있소?"

"마을에 있는 식료품점에 갔습니다."

제시는 애비게일처럼 예의를 갖춰 대답했다.

"애비게일 양에게 심한 질책을 받았나 보군. 도대체 거기는 왜 간다고 합디가?"

의사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아마 씨앗으로 고약을 만든다고 하더군요."

"옳은 소리요. 실력 없는 의사보다 그녀의 치료약이 훨씬 나을 거요. 그녀가 해낸 걸 한번

봅시다."

그는 시트를 들어 상처를 살펴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치료에 진전이 있었다.

"상처가 계속 곪았다면 다리를 잃어야 했을 거요. 그런데 그녀가 숯과 누룩을 혼합해서 고약

을 만들어 상처에 붙였군요. 이것 봐요. 지금은 거의 화농 현상이 없어졌잖소. 청년, 당신은

목숨을 구한 거요. 아니, 최소한 다리는 구한 거요."

"하지만 먼저 수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열차에서 저를 끌어내 선생님께 데리고

갔기 때문에 아직까지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열차 강도라고 하는 사람을

수술해 주기가 어려우셨을 텐데요."

"사람들이라, 그럴지도. 그 사람들 중에 나도 속하오. 음, 그 잘난 당신 이름이나 들어 봅시

다."

제시는 자신과 비슷한 이 남자의 말투도 좋았다. 의사는 자신이 구한 사람이 열차 강도든 누

구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제시라고 부르세요."

"그래, 제시 우선 먼저 의학적인 치료를 하겠소, 재판은 나중이지."

"재판요?"

"그렇소. 거기에서 판결을 내리겠지. 물론 당신은 피고로 묶여서 들어갈 거요."

"소란을 일으켰다고요?"

"소란죄가 아니오. 제기랄, 온 마을 사람들이 내 정원에 몰려들어서 당신을 환자로 받으면

안 된다고 했소. 짜증이 날 정도로 격렬했지. 아, 내 말을 막지 말아요. 아직도 주민들은 당

신이 한 마을에 있는 것조차 싫다고 흥분해 있소 상황을 고려해 보면 당신도 그들을 비난하

지 못할 거요."

"아직까지도요. 후, 애비게일 양은 용감한 편인가요?"

"물론. 오이 샐러드처럼 차갑게, 군중 한가운데 를 행진하듯 걸어왔소. 그리고 그놈의 주민

들 앞에서 당신을 돌보겠다고 분명히 말했소. 아, 당신들 둘이군! 사람들은 그녀의 당당한

인품앞에 금방 어린 양처럼 순해졌소."

"선생님, 그녀의 인품이라니오?"

"정말 모르오?"

"글쎄요, 짚이는 데가 있지만 선생님께 확실히 듣고 싶습니다."

"말해 줄 수는 있소. 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그녀와 같이 있어도 알아내지 못할 거요. 당신

도 그녀가 창녀 같은 여자는 아니란 걸 알아차렸을 거요. 간단하게 말해, 더도 말고 덜도 말

고 애비게일 양은 이 마을의 모범이오."

의사는 생각하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려웠다.

"그러니까 어떤 여자가 기품 있는 숙녀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면, 그 여자를 애비게일 양과

비교하면 될 거요. 애비게일 양은 이 마을 사람들이 본 가장 기품 있는 숙녀요. 사랑스런 딸

에게 행동 규범을 가르쳐 주고 싶으면, 애비게일 양만 보여 주면되는 거요. 여자들은 그녀에

게 품행과 예절에 대해 강의까지 받으려고 했소. 그녀는 결점이 하나도 없는 바로 숙녀 그

자체요. 하지만 그녀가 총을 가진 악한에게도 차별 없이 정중하게 대해서, 마을 사람들이 무

척 놀랐을 거요."

사람들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했을 텐데, 의사는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되는 대로 말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나요?"

제시가 물었다.

"애비게일 양요? 아직."

그리고 도허티 의사는 잠시 생각하고는 덧붙였다.

"아, 언젠가 거의 결혼할 뻔했소. 건달이었지.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소. 하지만 내 기억에

는, 그 녀석은 애비게일의 아버지 병세가 아주 심해질 때까지 그녀에게 구혼을 했소. 겉보기

에도 신부와 함께 병상에 누운 신부의 아버지를 돌볼 것 같지는 않았지. 사람들에게 밀려나

그가 떠났소. 몇 년이 지나자, 사람들도 어느덧 잊게 되었소. 물론 그녀는 마을 사람들과 다

르지만, 그녀와 같은 미혼 여성에게 당신을 간호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오. 그래서 그녀가 당

신을 맡겠다고 해서 모두들 얼마나 놀랐는지."

의사가 그를 보았다.

"그녀가 힘든 간호를 잘 참아 내고 있소?"

"산파처럼 믿음직해요."

"전형적인 그녀의 특성이오. 책임감을 가진 이상, 지옥이나 뜨거운 물에도 들어갈 준비가 되

어 있지. 아버지 때문에 좋은 시절을 다 보냈소. 아버지가 돌아가자, 그녀는 이 마을에서 가

장 나이 든 처녀가 되었소. 그녀가 거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도 그녀를 존경

한다오. 당신 마을에선 그녀보다 훨씬 젊은 사람에게도 노처녀라는 꼬리표를 붙이겠지만, 여

기선 아무도 그녀를 그렇게 취급하지 않소. 게다가 이런 경우엔, 당신이 그녀에게 마땅히 존

경심을 보이면 우리 모두 기뻐할 거요."

"알겠습니다. 아, 선생님, 제 손을 봐 주셨으면 합니다."

의사는 단지 멍이 들었을 뿐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진료상황을 간단히 말했다.

"당신은 빠른 속도로 치유되고 있소. 그녀한테 고마워해요. 아직은 발을 끌어당기지 말아요.

서서히 움직이도록 해요. 내일쯤엔 앉아 보도록 해요.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요. 상태를

지켜봐야겠지만, 주말쯤에는 발을 질질 끌면서라도 걸을 수 있을 거요. 너무 무리하지는 말

아요."

제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빨리 사람이 좋아진적은 없었다. 의사는 갈 준비를

했다.

"선생님?"

"음?"

"멜처란 친구는 어떻게 된 겁니까?"

"왜 물어 보는지 모르겠군."

도허티 의사는 제시의 얼굴이 굳어진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늘 이 마을을 떠날 것 같더군. 역에서 덴버행 오후 열차표를 샀소. 당신이 그 사람 발가

락을 쏘았다는 걸 알고 있소?"

"들었어요."

"그는 아마 평생 절름거려야 할 거요. 고소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소?"

"제가 유죄가 아니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것 보세요. 그는 절 거의 죽일 뻔했잖아요."

제시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이러쿵저러쿵 말해 봤자 소용없소. 당신도 알다시피, 당신은 악당이고 그는 영웅이

오."

의사의 마음을 솔직히 표현한 말인 데도, 이상하게 말 속에서 제시에 대한 비난을 읽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결국 제시는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승인을 보였다.

"애비게일 양에게 전해 줘요. 내가 필요하면 들르겠다고요. 하지만 이젠 필요하지 않을 것

같소."

"고맙습니다, 선생님."

의사는 문가에서 돌아섰다.

"애비게일 양에게 고맙다고 해요. 당신을 살린 사람은 그녀요."

그리고 그는 떠났다.

제시는 누워서 의사가 남기고 간 말을 생각했다. 구혼자에게 열렬히 청혼받는 젊고 활기 찬

애비게일 양을 머릿속에 그려 보려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병든 아버지를 간호하는 장

면을 떠올리는 편이 훨씬 쉬울 것 같았다. 그녀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했다. 서른

남짓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나 행동이 그녀를 더 나이 들어 보이고, 따분하고,

곰팡내 나게했다.

그녀가 남편과 아이들과 같이 있는 광경을 상상하니 우스꽝스러웠다. 칭얼거리는 아이의 손

가락이 얼룩 하나 없는 그녀의 앞치마를 잡아당기고, 그녀의 교육으로 쓸데없는 걸 숭배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아이는 틀림없이 애 늙은이일 것이다. 부드러운 어머니상은 그녀에게 전

혀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남자 아래서 황홀경에 빠져 신음하는 그녀의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카드 한 장으로 모든 게 달라 보이는 입체경처럼, 지난밤에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사

투를 벌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잠옷, 지저분해진 살결, 그에게

기대며 간청하던 모습, 그리고 자신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던 모습. 불꽃의 화신처럼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항상 보여 오던 새침하고 단정한 자태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 두 가지 인상은

절대 합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도허티 의사의 말에 따르면, 자기 인생은 그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옛말에도 생명을 구해 준

사람에게 목숨을 바치는 게 당연하다고 하지 않던가. 갑자기 몸이 바늘로 찔리듯 불편해졌

다. 몇 년 전에는 병든 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남자를 차 버린 여자였다. 그리

고 지금 자기 잘못 때문에 또 같은 일을 하게 됐다. 죄책감이 일었다 그녀에게 커다란 은혜

를 입었는데, 자기 탓으로 남자 친구인 멜처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그녀를 당황하게 하거나 혼란에 빠뜨리는 걸 그만둘 수가

없었다. 몸 속 어디선가에서 그를 마구 부추겼다. 빨개진 뺨을 보거나, 눈을 번쩍이며 화를

내는 그녀를 보는 건 너무나 짜릿했다. 그래, 놓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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