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3화 (3/24)

3

천천히 어렴풋이, 그는 얼굴에 따스한 빛을 느꼈다. 햇살이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게 틀림없

었다.

희미하게 의식이 왔고, 나른했다. 그는 옆에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있음을 느꼈다. 굴곡 있

는 감촉으로 보아 여자가 틀림없었다.

점차, 고통이 느껴졌다. 쓰라렸다. 열에 들뜬 몸이 괴로웠다. 그러나 왜 그런지 그는 확인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심한 아픔을 느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눈을 뜨려고 눈동

자를 굴려 보았으나 눈꺼풀은 무거운 듯 올라가지 않았다.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 뜨거웠다.

눈을 뜨면 이 악몽에서 벗어나는 걸까? 아니면 이게 현실일까? 난 살아 있는 거야? 지옥에

있나? 간신히 눈을 뜬 그는 천장을 노려보았다. 천막이 아니라 지붕이었다. 여기저기 안 아

픈 데가 없었다. 윽, 젠장 눈이 시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어디 있는 거

지, 내 옆에 누가 있는 거야? 침을 삼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시 마취당한 듯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턱에서 소리가 날 때까지 이를 갈았다. 그리고 힘겹게 머리를 들어 올

렸다.

반인반수인 사티로스 종족인 듯 팔꿈치를 버티고 있는 여자의 몸통이 보였다. 그는 너무 놀

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기억나는 거라곤 미끄러졌다는 것뿐이었다. 이 노파가 가지 못하게 하려고 나를 묶었지.

그리고 그의 기억은 온통 암흑으로 뒤덮였다. 다시 그 못생긴 노파의 얼굴이 떠올랐다. 숱이

적은 머리털이 뻣뻣한 지푸라기처럼 얼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눈을 감자 노파의 얼굴이

사라졌다. 꿈속에서 그 노파는 그에게 무리한 묘기를 해보이라고 끊임없이 명령을 반복했다.

말을 해라, 굴러라, 구르지 마라, 묻는 말에 대답해라. 어떨 땐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가

금방 다시 가시 돋친 말로 강요를 해댔다.

이름을 알아내기도 전에 그의 머리가 떨궈지고 그가 다시 망각 속으로 빠져 들자 애비게일은

절망했다. 그녀가 알아낸 것이라곤, 개암빛이 서린,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그의 눈동자 색

깔뿐이었다. 그 전에는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그뿐, 그는 다시

불길한 혼수 상태로 빠져 들었다.

신음 소리를 내며 애비게일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런 몰골로 거울 앞에 서서 아침을 맞기는 처음이었다. 밤새 불편한 자세로 있는 바람에 수

축되었던 근육을 기지개로 폈다. 마비된 듯한 그녀의 얼굴도 하품으로 한껏 늘어졌다. 얽히

고설킨 머리채가 잔인했던 어제의 일을 알려 주는 듯했다.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하룻

밤새 무척 늙어 보였다.

이런 형편없는 몰골을 보니 데이비드 멜처가 생각났다.

그녀는 욕실로 가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았다. 단정하게 머리를 감아 올려 목 뒤에 붙이고

부드러운 크림빛 블라우스와 폭넓은 치마를 입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허리 부근에 장미

향수를 살짝 뿌렸다.

"애비게일 양, 오늘 아침엔 한결 사랑스러워 보이는군요!"

아침 식사를 쟁반에 들고 들어온 그녀를 보며 데이비드 멜처가 기쁜 음성으로 외쳤다.

"멜처 씨도 좋아 보이는군요."

또 다시 그는 아침을 먹는 동안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는 그래야 할 필요를 느

끼지 못했고 그의 태도가 예의 바르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그녀는 수락했다. 그는 살짝 익

힌 계란, 토스트, 애플버터 등을 먹으며 그녀의 요리를 칭찬했다.

"애비게일 양, 이러다가는 완전히 응석받이가 되어 쫓겨나게 될 것 같습니다."

산들바람이 목깃으로 스며들어 전율을 일으키듯 그의 고맙다는 표현이 그녀의 자아를 부드럽

게 흔들어 놓았다.

"아니,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멜처 씨 원하는 만큼 맘놓고 여기에 계실 수 있습니다."

"애비게일 양, 그건 너무 위험스런 제의군요. 그 말씀만 믿고 언제까지고 떠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눈빛에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다시 간지러운 느낌이 그녀의 목 뒤를 휘젓고 다녔다 더

이상 이 방에 머무르는 건 현명하지 못했다.

"저도 오랫동안 여기에 있고 싶지만, 아침의 서늘함이 사라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

"오, 애비게일 양, 마치 소네트(유럽 서정시의 한 형식. 14행으로 이루어지는 짧은 시)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참 매끄러운 말솜씨입니다."

그리고 그는 목을 가다듬고 더 정중하게 말했다.

"애비게일 양만 괜찮으시면, 오늘 다시 소네트를 읽고 싶은데요."

"네…… 네, 물론요. 제게 있는 소네트 책 중에 마음에 드시는 게 있을 거예요."

"네……, 그럼요. 마음에 들 겁니다."

의자에서 일어서서 그녀는 아직 주름이 생기지도 않은 소매가를 훑어내렸다. 데이비드의 눈

에는 하이 칼라와 긴 소매가 달린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이 무척 우아하게 보였다. 게다가

희미하게 풍기는 장미향이 더욱 그녀의 숙녀다움을 빛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대롱으로 묽은 수프를 열차 강도에게 먹였다. 그와 가까이 있으니 맥박

이 이상하게 빨라졌다. 마치 어떤 금지된 일을 하는 것처럼……. 애비게일은 자신의 감정을

들키기라도 한 듯 의식이 없는 남자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빨리 깨어나서 이름을 말하고 음식도 품위 있게 먹는 게 어때요? 당신은 정말 큰 골칫거리

예요. 당신도 알지요? 회색 곰이 겨울잠 자듯 누워만 있을 거예요! 어제처럼 당신을 먹이는

이 일을 또 시키는군요. 나도 이 방법이 점잖치 않다는 것쯤은 알아요. 하지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어요. 그리고 당신만큼이나 저도 이 일이 유쾌하지 않다는 걸 믿

어 주세요. 특히 그 콧수염도요."

수프를 다 먹이고 나서 그녀는 면도 도구를 가지러 갔다. 그녀는 그를 깨끗이 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두터운 수건을 그의 턱밑에 괸 뒤 거품을 칠하고 면도칼을 쥐었다. 수염이 없으면

어떻게 보일까?

내가 잘하는 걸까?

사실 이 열차 강도는 지저분하고 인상도 험악해 보였다. 게다가 데이비드 멜처가 수염 있는

얼굴은 전형적인 범죄자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수염의 부드러운 감촉이 생각나

자 그녀의 마음이 배신을 해 버렸다. 수염을 깍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면도를 해주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반쯤 면도를 하고 나자 죄책감이 일었다. 그러나 멈추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말끔히 면도

를 끝내고, 그녀는 수염이 없는 그의 얼굴을 평가하듯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았다. 유감스럽

게도 그녀가 그의 얼굴을 완전히 망쳐 버린 셈이 되었다! 그의 수염은 짙은 눈썹이나 까무잡

잡한 피부처럼 얼굴의 조화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일부분이었다. 아마 깨어난다면 그도 같

은 생각을 하겠지? 그녀는 희미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다행히 다음 일은 죄책감이 덜 드는 일이었다. 그를 목욕시키는 일이었다.

세면 도구를 가지고 돌아와, 우선 가볍게 그의 팔에 비누질을 했다. 그리고 비누 거품을 제

거하고 깨끗이 물기까지 닦았다.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니 겨드랑이의 검은 털이 보였다

. 일순 맥박이 빨라졌다. 그녀는 정신을 그의 어깨에 집중하고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 다른 쪽 팔은 닦기가 힘들어 침대를 방 한가운데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온 힘을 기울여

끌어 봐도, 그가 너무 무거워서 그런지 침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애비게일이 침대

위에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트만 걸쳤을 뿐 거의…….

애비게일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가 아직 의식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땀에 젖은 시트가 그의 오른쪽 다리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녀는 상처 부분을 피하면

서 주의 깊게 닦았다. 그의 다리는 길었다. 발바닥과 발가락을 닦아 줄 때는 기묘하게 즐거

운 감정이 일기도 했다. 발가락 마디마다 털이 조금씩 나 있었다. 아버지와 달리 낯선 사람

의 벌거벗은 몸을 다루는 일이 더 당황스럽고 어려울 거라던 의사의 말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 시트는 여전히 그의 은밀한 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다른 다리도 그럭저럭 씻길 수 있었으

나 그 부분은 닦지 않았다.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밀어낼 수가 없었다.

하루가 지났다. 눈은 여전히 감은 채 그대로였지만, 그는 자주 움직였다. 가끔 근육이 움직

이고 몸을 뒤척이기도 했다. 그래서 애비게일은 안전하게 침대에 그의 몸을 묶어 놓았다.

*   *   *

아침에 데이비드의 방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는 동안 애비게일은 그가 필라델피아 주변에서

일하는 구두 세일즈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돌아가면 최고급 구두 한 켤레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그의 말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빨라진 맥박을 가리려는

듯 그녀는 작고 섬세한 손을 목위에 올려놓았다.

"오, 멜처 씨,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도시에서 만든 구두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럴 순 없어

요."

"안 된다고요? 왜요?"

애비게일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단정한 숙녀는 신사에게 사적인 선물을 받아선 안 되는 법입니다. 아무리 그 신사분이…….

"원해도 말입니까, 애비게일 양?"

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멜처 씨, 어쨌든 옳은 일이 아니에요."

애비게일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어쨌든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녀는 그 얘기는 이제 끝난 줄로 알았다.

점심때가 되자 멜처는 아래층에 내려가서 점심을 먹어도 좋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애석

하게도 그가 신을 만한 신발이 없었다.

"아마 아버지께서 신으시던 슬리퍼가 어딘가 있을 거예요."

애비게일은 슬리퍼를 찾아 가지고 와서 그의 발 아래 놓았다

그녀의 동작을 시선으로 좇는 데이비드의 가슴속에선 그녀에 대한 애정이 솟아났다. 그녀는

우아했으며 세련되었고, 품위 있는 말씨나 자신을 위해 애쓰는 자상한 손길이 너무도 아름다

워보였다.  슬리퍼를 신은 그는 한 쪽 발로 중심을 잡으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녀는 멜처

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해 부축해 주었다.

"계단이 미끄러우니까, 난간을 꼭 잡으세요."

그녀가 주의를 주었다.

두 사람은 한걸음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멜처의 얼굴 가까이에 애비게일의

관자놀이가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장미 향기가 풍겼다.

그녀는 그를 부축해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갈 때마다 그의 가슴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애비게일 양, 무슨 색을 좋아하나요?"

"색요?"

그들의 걸음이 잠시 멈춰졌다. 애비게일은 얼굴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그의 얼굴을 대하자 그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떤 색 구두를 골라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요."

그들은 다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멜처 씨, 농담하지 마세요."

다시 그들은 멈춰 섰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을 들어 그를 보기가 두려웠다.

"연한 갈색 염소 가죽은 어떤가요?"

멜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싼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애비게일의 마음속에선 심한 갈등이

일었다.

"당신이 신으면 아주 멋질 거 같은데요. 부드러운 레이스가 달린 가죽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

그는 애비게일의 옷 어깨 부분에 장식된 레이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 한 발짝 떼어 보세요, 멜처 씨."

"구두를 받아 주시면 정말 영광스럽겠습니다."

그녀는 멜처의 눈길을 피했지만, 그의 팔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 위에 있었다.

"저는 그런 구두를 신을 자격이 없습니다."

"믿을 수 없어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숙녀에겐…… 틀림없이 잘 어울릴 겁니다."

"아니에요, 어울리지 않아요. 제발, 음식이 식겠어요."

애비게일은 팔꿈치로 그를 슬쩍 쳐서 주의를 돌렸다. 그도 더이상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손 아래서 멜처의 심장 고동 소리가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심장처럼.

"어느 날 구두가 배달되어 와도 놀라지 마세요. 당신께 감사드리는 제 마음이 담겨 있을 겁

니다."

멜처의 음성이 거의 속삭임에 가까울 정도로 작아졌다.

"애비게일 양."

드디어 애비게일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녀의 어깨에 두른 멜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멜처는 팔 아래 그녀의 부드러운 어깨를 느꼈

다. 애비게일은 자신을 잡고 놓아 주지 않는 그의 연한 갈색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숨결이

얼굴에 느껴졌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애비게일은 그를 부축한 손

을 통해 멜처의 내부에 이는 급격한 동요를 느낄 수 있었다. 멜처는 그녀의 입술 위에 바람

이 스치듯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촉촉한 애비게일의 눈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애비게

일의 심장은 드럼 치듯 요란스레 울렸고 무릎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그순간 그녀는 계단 아

래로 굴러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횝싸였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그러나 잠시 후

차분히 눈꺼풀을 내렸다. 그들은 한참을 계단 중간에 서 있다가 부엌으로 걸어갔다.

식탁 위엔 부드러운 바람에 살랑거리는 커튼과 조화를 이룬 노란색 체크 무늬 식탁보가 덮여

있었다. 유리 접시와 은접시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고 그 옆엔 깨끗한 리넨 냅킨이 접혀있

었다. 멜처는 시선을 돌려 애비게일 매켄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세 숟가락만 뜨면 없어질

만큼 적은 양의 향기로운 음식을 가지고 와서, 그의 접시에 노랗게 구운 비스킷을 담았다.

그리고 파란색 얼룩 무늬가 있는 그릇을 들고 와서 닭고기를 접시에 담고 그 위에 고깃국물

을 부었다.

"멜처 씨, 집을 떠난 지 얼마나 되셨나요?"

"저는 집이 없습니다. 필라델피아로 돌아가면 전 엘리션 클럽의 방에서 묵습니다."

"그러면 가족이 없으신 가요?"

"네, 전혀."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가 떨어졌다. 마당 그늘가에서 새들이 지저귀나 보다. 한련화의 짙은

향이 풍겼다. 멜처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처럼 편안한 가정의 보금자리

를 만들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말끔히 면도한 검은 머리 남자는 주변에서 코를 간지럽히는 냄새를 맡으며 서서히 의식을 회

복했다. 지난번에 열 때문에 깨어났을 때보다 냄새가 더 심했다.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지만

어디에선가 향기가 났다. 꽃 향기 같았다. 리넨 천을 빨 때 쓰는 녹말풀 냄새도 났다. 게다

가 간간히 안달나게 하는 닭고기 냄새가 풍겼다. 그는 눈을 떴다. 안개속 같은 꿈결을 떨쳐

버리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머리가 베개에서 미끄러져서 침대 매트리스에 부딪혔다. 그래,

이건 꿈이 아니야. 이 향기는 바로 저 창가테이블 위에 놓인 오렌지 바구니에서 나는 걸 거

야. 그러나 그 창가에는 커튼과 조화를 이룬 노란색 쿠션이 놓여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누군가를 부르려고 애썼다. 이 침실은 확실히 여자의 방이었다. 노란 꽃무늬

가 그려진 벽지에, 방 한구석에는 화장대가 있었다.

그는 눈을 뜨는 것 말고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왼쪽 팔이 욱신거렸다. 피가 통하지 않

아서 쑤시는 것 같았다. 손가락을 구부려 보았다. 손 안에 무언가가 만져졌다. 충격이었다.

자신이 침대에 묶여 있었다.

그래, 그 마녀처럼 생긴 노파를 본 게 꿈이 아니었어! 그 노파말고 누가 날 이렇게 묶어 놓

았겠어? 조심스럽게 그는 묶인 끈을 끊을 수 있는지 팔을 당겨 보았다. 그러나 두 손과 다리

는 단단히 묶여 있었다.

다시 눈을 뜨니 갈색 스커트가 보였다. 그것은 그에게 곧장오더니 침대 옆에 멈춰 섰다. 그

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오른손을 쓸 수만 있다면 이 여자의 배를 가격하여 넘어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몸을 뒤척이는 척하며 거의 감은 눈 사이로 그 여

자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여자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여자는 무언가 걱정거리가 있는 듯 두 손을 모아

얼굴 앞에 그러쥐고 기도를 올렸기 때문이다. 손 사이로 코만 오똑 서 있을 뿐이었다. 단 그

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단정한 머리 모양을 보니 그녀는

술집 여자도 아니었다. 긴 소매와 하이 칼라가 달린 옷을 보면 분명 댄스홀에 나가는 차림

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추측해 보건대, 이 여자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눈을 완

전히 떴다.

즉각 그녀의 손이 움츠러들더니 뺨에 손이 와 닿았다.

으, 너무 차가워.

그녀에게서는 술집 여자들이 흔히 뿌리는 진한 향수 내음도 나지 않았다.

"당신 이름요, 이름을 말해요."

그녀는 격렬한 호소문을 낭독하듯 말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 여자는 내 이름을 알고 싶어하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그

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발요. 제발, 당신 이름을 말해 줘요."

그녀가 다시 애원했다.

갑자기 그가 결박된 몸을 뒤틀며 눈을 부릅뜨고 미친 듯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이 카메라(My camera : 내 카메라)!"

그러나 그의 외침은 귀에 거슬리는, 애처로울 만큼 목쉰 소리가 되어 나왔다. 여기저기에서

아픔이 엄습해 왔다. 마치 목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의 거친 몸부림에 애비게일은 깜

짝 놀라 뒷걸음 쳤다. 그녀는 그의 입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이 카메라."

그는 다시 말을 해보았지만, 신경을 긁는 새된 소리만이 나올 뿐이었다. 가까이 귀를 기울이

며 그의 입술 모양을 읽던 애비게일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캐머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애비게일에게 다시 제대로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와 주지 않았다.

"마이크 캐머런."

그녀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기적이라도 되는 듯이 크게 말했다.

"캐머런. 딱 맞는 이름이군요!"

감격한 듯 애비게일은 두 손을 맞잡았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캐머런 씨. 드디어 알아냈어요!"

저 여자, 푼수 아냐? 가만히 보니 침대 옆에 있던 마녀랑 닮았잖아. 좀 모습이 깔끔하고 눈

빛이 순하게 생기긴 했지만. 아직도 이 여자는 조각품처럼 두 손을 맞잡고 기쁨에 겨운 표정

을 지은 채였다. 기회를 노려 이 여자한테 주먹을 날린다면 마녀의 주문에서 풀려 날지도 몰

라.

그녀는 이젠 아예 창문가로 뛰어가, 눈물을 훔쳐 냈다. 도대체 왜 우는 걸까?

그녀가 다시 다가와 그를 바라보자, 그는 다시 말하려 했다.

"내 이름은 캐머런이 아니오."

그러나 다시 목에 통증이 느껴지고 그의 입에선 알 수 없는 기괴한 소리만 흘러나왔다.

"캐머런 씨, 너무 말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입 안이 온통 헐고 부르터서 목이 무척 아프실

거예요. 제발, 아직은 그대로 계세요."

그는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그러나 애비게일이 즉시 차가운 손으로 그의 가슴을 누르며 저

지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캐머런 씨. 당신은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움직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당신을 풀어 드릴게요."

그녀가 간청했다.

애비게일은 의혹에 가득 찬 그의 검은 두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기가 막힐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녀는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보았지만, 필요하다면 한

방에 그를 굴복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 시선에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는 움직일 때마다 온몸

에 멍이 든 것처럼 아팠다. 벌새처럼 쫑알거리는 이 여자와 격투를 벌일 생각도 다 달아나고

없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희미하게 얼굴을 끄덕거렸다. 그러자 머리 위와 발 아래서

가위 소리가 들렸다. 팔다리를 다소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 다시는 묶지 못하게 하리라.

"저런, 캐머런 씨, 당신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보세요."

그녀는 위로 뻗은 팔을 아래로 내려놓으며, 능숙하게 팔을 마사지했다.

"피가 통하게 이렇게 뒤집어 놓으세요. 조금만 있으면 나아질 거예요. 절대로 움직이면 안

돼요. 당신이 먹을 만한 것을 가지고 올게요. 당신은 이틀 동안이나 의식을 잃었어요."

갑자기 막혔던 피가 폭포수처럼 돌기 시작하자, 뜨거운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

께 몸 전체가 난타당하는 듯한 아픔이 일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몸을 둥글게 구부렸다.

그러나 숨을 내쉬자 목 안이 따끔거렸고 몸을 구부리자 다시 몸이 아파 왔다. 욕설을 내뱉

으려 했으나 아픔만 심해질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피부를 뚫고 나와 폭발하려는 자신의 경

솔한 감정을 가라앉히며 모든 동작을 중단했다. 통증 때문에 여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잠

시 뒤 눈을 떠보니 손은 시트 위에 놓여있었고, 그녀는 없었다.

그의 오른쪽 무릎이 세워져 있었다. 발을 약간 움직이자, 징울리는 소리와 함께 살이 저려왔

다. 젠장! 내려다보니 자신은 옷을 전혀 입지 않았다. 오른쪽 허벅지에 하얀 헝겊 조각이 덮

여 있을 뿐이었다.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그 붕대를 살펴보려 했으나 새로운 통증이 팔

을 마비시켰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무지막지한 발톱으로 몸 여기저기를 소름 끼치도록 섬뜩

하게 쓰다듬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왼손을 조심스레 움직여 보았다. 마치 자신의 사타구니

를 보호하듯 바로 옆에 달라붙은 붕대는 눅눅했다. 주위를 의식하며 그는 시트를 끌어 올렸

다. 그리고 은밀한 부위를 가리며 배꼽 위에 시트를 접어 놓았다. 알몸으로 여자 침실에서

깨어나는 것이 전혀 낯선 일은 아니지만, 이런식은 아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낯선 여자에게

감금당한 듯한 느낌을 그로서도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그릇이 부딪히는 가정적인 소리가 문 너머로 아늑하게 들려왔다. 얼마 동안이나 여기에 있었

던 걸까? 이 방은 마치 늙은 가정부의 정원 같았다. 온통 꽃 투성이였다! 틀림없이 저 여자

의 방이리라. 벌새 같은 저 여자에게 딱 어울리는 방이다. 꽃 바구니 옆에 경첩이 달린 초상

화 액자 한쌍이 있었다. 창가에는 책한 권이 펼쳐져 있었고, 책장 사이에는 코바늘 뜨개로

만든 책갈피 꼬리가 보였다. 작은 흔들의자에는 자수가 놓인 쿠션이 있었고, 바로 옆 바닥에

는 뜨개질 바구니가 있었다. 한쪽 벽에는 장롱이, 다른 벽에는 화장대가 있었다.

문을 통해, 초록색 벨벳으로 싸인 긴 의자가 보였다. 이 문 밖이 거실인가보다. 작은 테이블

이 그 옆에 있고, 불투명 하얀유리에 장미 무늬가 새겨진 원형 기름 램프도 있었다. 세상에,

꽃이 더 많네! 레이스 커튼이 걸린 창에는 자잘한 술이 달린 차양이 달려 있었다. 완전히

착한 공주의 집이군.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곳에 있는 거

지.

"캐머런 씨, 여기 있어요."

눈을 뜬 그가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묽은 수프와 차를 준비했어요. 당신 식욕을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이걸로 일단

목을 축이세요."

그녀가 나무로 만든 쟁반을 들이댔다. 쟁반에는 삼각형의 하얀색 리넨이 깔려 있었다.

아니, 이것 좀 보게! 직접 자신이 뜨개질했나 본데.

그녀는 몸으로 쟁반을 받치고 침대 옆의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 블라우스 속

의 건강하고 탄력 있는 가슴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세상에 의심이 전혀 없는 여자처

럼 옷을 입었다! 그의 눈은 계속 애비게일의 가슴을 보다가 그녀가 장롱에서 베개를 꺼내는

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는 장롱에서 꺼낸 베개로 그의 머리 뒤를 받쳤다. 또 다시 녹말

풀을 먹인것 같은 상쾌한 냄새가 주위를 맴돌았다. 축축한 텐트 안에서 곰팡내 나는 담요를

덮고 잤던 밤들이 생각났다. 그녀는 손을 그의 머리 뒤에 대고 약간 일으켰다. 그의 몸 속으

로 통증이 물결 치듯 파고들었다. 고통이 가라앉자, 그녀가 말했다.

"입 안을 개운하게 할 거예요. 소다수예요."

수건이 그의 턱 주위에 놓이고 유리잔이 입술에 와 닿았다. 그리고 쌉쌀한 액체가 입 안에

들어왔다.

"입에 머금었다가 양치질을 하세요. 거품이 날수록 깨끗이 행귀지는 거예요."

그는 그녀와 논쟁을 벌이기에는 너무나 약했다. 그는 말없이 그녀가 양칫물을 뱉을 그릇을

가지고 오는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양칫물을 뱉어 내느라 그의 뺨이 젖자, 그녀는 턱에 있

던 수건으로 즉시 말끔하게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꼭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옆으로 몸을 돌려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또 다시 심한 통증이 찾아와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냅킨을 그의 턱에 받쳐 놓고, 수저로 수프를 떠서 그의 입 안에 넣

어 주었다.

애비게일은 그가 왜 얼굴을 찡그리는지 의아했다.

"당신은 행운아예요, 캐머런 씨. 총에 맞아 거의 죽을 뻔했다구요. 운좋게 도허티 의사 선생

님을 만나서……."

자신이 총상을 입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장황한 그녀의 말을 저지하려 했다. 오른손을 치켜

들려고 했으나 다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왼손으로 수저를 막았다. 그의 손이 수저와 부딪

쳐 수프가 얼굴에 쏟아져 목으로 흘러내렸다. 젠장할! 그러나 그의 이 말 또한 제대로 나와

주지 못했다. 그녀는 꼼꼼하게 스펀지로 두드리며 그의 얼굴과 목을 닦았다.

"캐머런 씨, 조심하세요. 당신이 한 짓을 좀 보세요!"

애비게일은 자신이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처음 듣는 사람의 심정이 어떨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목이 타는 듯 아파도 묻고 싶으리라! 이번에는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

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고 수프를 여기저기 튀기고 말았다.

"누가 날 쏘았소?"

그는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뾰족한 칼날이 목구멍을 쑤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말했다.

"느느가…… 나나아알…… 쏴아?"

그녀는 벙어리가 된 채 그를 보기만 했다. 잠시 후 정신을 수습한 그녀는 주먹을 쥐고 손을

비틀면서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마치 연약한 작은 새가 사냥꾼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려

고 하려는 것 같았다.

"캐머런 씨, 이것 놔요."

그리고 소리를 쳤다.

"나한테 물어도 아무 소용 없어요!"

그의 손이 느슨해지자, 그녀는 손을 비틀어서 빼냈다. 화가난 그의 힘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당신을 너무 빨리 풀어 준 것 같군요."

애비게일은 시선을 내리깔며 빨갛게 자국이 난 자신의 손목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한번도 누군가에게 거칠게 다뤄진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상

처 입힐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단지 대답을 듣길 원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베개도 받쳐 주고

얼굴도 닦아 주는 등 자신을 만족시켜 주려고 많은 시간 애를 썼다. 그가 다시 손을 뻗자,

그녀는 겁을 먹은 듯 주춤거렸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난폭하게 그녀의 손을 움켜쥐거나

하지 않았다. 살짝 건드리기만 하고는 자신의 입술을 보라고 손짓했다.

누가 날 쏘았소?

그는 다시 입으로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굳히고는 소리 쳤다.

"나도 몰라요!"

그리고 수저를 그의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수저가 그의 이에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저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고, 그는 억지로 수프를 삼켜야했다. 이 계집애가 날 익사시킬

작정인가. 젠장, 지옥에나 가라! 그는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그가 다시 공중에서 손으로

수저를 막자, 얼룩 한 점 없던 애비게일의 블라우스에 닭고기 수프국물이 뿌려졌다. 그녀는

숨을 들이켜며 벌떡 일어나 두 눈을 감았다. 마치 신께 참을성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보

였다.

눈을 뜬 애비게일은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뺨을 실룩거리며 수프 그릇을 가리켰

다. 그녀가 수프 그릇을 얼굴 가까이 가져다 줄 때까지 그는 그녀를 격노한 눈길로 노려보았

다. 처음엔 몰랐는데 수프를 먹고 있자니 자신이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왼손을 들어 서투르게 어리석은 시도를 해보았다. 수저를 던져 버리고 수프 그릇을 왼손으로

움켜쥔 뒤 후르륵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마셔 버렸던 것이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놀라는

그녀를 보니 야릇한 즐거움까지 생겼다.

원시인 같으니라고! 내가 지금까지 이 원시인의 생명을 구해주려고 사투를 벌였단 말인가!

그는 짐승처럼 침을 흘리며 수프접시를 비워 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입술을 움직여 그녀에게

물었다.

"누가 나를 쏘았소?"

애비게일은 고집스럽게 대답하길 거부하며 그에게서 수프 접시를 세게 당겼다. 그러자 그는

아픔도 감수하며 접시를 뺏아 옆으로 내던졌다. 창문 옆으로 날아간 접시는 산산이 부서졌다

. 그는 격분을 두 눈에 가득 담고 그녀를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목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 아

픈 데도 거친 말을 내뱉었다. 심한 통증으로 인해 그의 얼굴이 검푸르게 변해 있었다.

"제기랄, 이 암캐야, 지옥에나 가라구!"

오, 목이 너무 아팠다.

애비게일이 너무 놀라 뒷걸음질 치자 그는 고통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지금까지 애비게일 매

켄지에게 이런 무례한 말을 내뱉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 이런 추악한 사람을 간호했다니. 의식이 돌아오게 하려고, 이름을 말하게 하려고 그

렇게 고전 분투를 했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나한테 욕하고, 암캐라고까지 했다. 자기를

쏜 사람을 말하지 않는다고 심한 비난을 퍼부으며……. 경멸하듯 그녀의 입꼬리가 주름 잡

히며 올라갔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데이비드 멜처의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애비게일 양! 애비게일 양! 아래층에 있어요? 누구요!"

거친 목소리가 물었다.

드디어 애비게일은 그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엄청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네, 선생님, 당신을 쏜 남자예요!"

그녀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시 멜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짐승이 당신을 괴롭혔나요?"

애비게일은 얼른 방을 나섰다. 멜처가 계단 아래 있는 것이 보였다.

"전 괜찮아요, 멜처 씨. 자, 침대로 돌아가세요. 그냥 수프 접시를 떨어뜨렸을 뿐이에요."

멜처? 도대체 멜처라는 사람은 왜 날 짐승 취급 하는 거지? 게다가 저 여자는 왜 수프 접시

를 떨어뜨렸다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나를 감싸는 거지?

그녀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깨진 유리를 줍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벌떡 일어나 여자를 마구 흔들어서 얼이 빠지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접시를 집어던지

느라 몸을 움직인 것만으로도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그녀가 거만한 태도로 침대 옆에 와서

설 때까지 계속 그녀를 노려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케머런 씨, 욕은 얼간이들이나 하는 겁니다. 더구나 난 암캐가 아니에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이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도록 가만히 내버려 뒀을 거예요. 그리고 물론 내 집에서 쫓

아냈을 거구요.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난 누구처럼 야만인이 아니에요. 그래서 마음속

으론 당신을 질식시키고 싶지만, 참고서 있는 거예요!"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을 강조라도 하듯 덜거덕거리며 쟁반을 내려놓았다. 먹을 것이 조금 남

아 있는 쟁반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가 지금 당장 알고 싶은

것만도 수천 가지는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머런 씨, 당신은 총상을 입었어요. 열차를 강탈하려고 하다가……."

애비게일의 한 쪽 눈썹이 휘어졌다.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나요?"

그리고 그녀는 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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