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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햇빛이 더욱 따가웠다. 도허티 의사는 미치 필드의 사료 상점 앞에 있는 평상을 향
해 걸어갔다. 그곳에서 사람들 몇 명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며 사료를 푸대에 담았다. 아니,
일을 한다기보다는 차라리 빈둥거린다고 하는 것이 정확했다. 그들은 한 번도 불쌍한 미치가
장사를 할 만큼 사료 푸대를 만든적이 없었다.
"이봐, 팔자 좋은 한량들, 손이나 좀 빌리세."
의사가 말을 던졌다.
그들은 천천히 웃고는 태양을 슬쩍 쳐다보았다. 힘을 써도 괜찮은지 더위의 불쾌지수를 측정
하는 것 같았다. 그 중 두 얼간이가 의사를 따라 나섰다. 늙은 본스 빈레이는 날이 무딘 나
이프로 잿빛 턱을 문지르며 느리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 저도 끼워 주시죠."
그의 말에 도허티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본스가 애비게일을 사모한다는 것은 이미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았다. 본스(Bones: bone은 '뼈'라는 뜻임)는 뼈라는 이름 그대로 몸이 앙상했
는데, 미치와 세트 카터의 일을 조금 봐 주며 홀로 살았다. 환자 이송 정도는 사고 없이 처
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관 앞에서 기다리던 애비게일은 데이비드 멜처를 둘러멘 도허티 의사와 미치를 2층의 남쪽
끝방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아래층 방으로 안내했다. 아마도 그 열차 강도를 계단 위로
운반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열차 강도는 몸집이 너무 커서 발이 침대 발치의 받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래서 그를 감싼
시트가 허리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본스와 세트, 애비게일은 그의 털이 무성한 맨가슴
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문 쪽으로 돌리고, 사람들이 다른 말을 하지 않도록
냉정한 목소리로 서둘러 말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사료 상점에서 일하시는 분들이지요?"
"어떻게…… 네, 맞습니다, 애비게일 양."
본스는 세트가 팔꿈치로 찌르며 나가자고 재촉하는 데도 웃고만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세트가 말했다.
"어휴, 밖은 화씨 99도는 되는 것 같은데, 애비게일 매켄지 양 주변의 사방 14피트에서는 사
람이 얼어 죽겠군."
"그래도 그녀는 대단해, 그렇지?"
침을 꿀꺽 삼키느라 본스의 목젖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너를 손끝으로 비틀어 버릴 수도 있다는 걸 마을 전체가 다 알아. 애비게일 양의 친
절한 말에 멍청하게 굴지 말라고. 달콤한 설탕 밑에는 시디신 식초가 숨어 있는 법이야!"
"세트,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휘, 내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방금도 마치 우리가 자기침실에 들어가 소란을 피운 것
을 용서해 준다는 듯한 말투였잖아."
"아하, 하지만 애비게일 양은 그 방을 열차 강도한테 빌려 주었잖아."
"그건 돈 때문이라고 들었어. 아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어떤 여자가 낯선 남자에게 자
신의 침대를 빌려 주고 싶겠어? 마을 사람들은 저 사람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죽지 않은 걸
유감스럽게 생각해. 간신히 애비게일 양의 도움으로 간호를 받게된 거라고."
마을 사람들은 세트처럼 애비게일을 어렵게 여겼다. 그녀는 항상 친절한 말투와 행동을 보였
지만, 그뿐이었다. 더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항상 그대로였다. 그녀의 고상한 몸
가짐이나 언행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리감을 느끼도록 했지만, 모두들 그녀를 존경하는 마음
을 지녔다.
환자들을 살펴본 의사는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롭 넬슨을 보내겠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
리고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후, 사람들과 함께 마차에 올라타고 그녀의 집을 떠났다.
2층 방에 조용히 들어가 보니 멜처라는 사람은 곤히 잠들어있었다. 한 팔을 이마 위에 올리
고 두 눈을 감았는데, 멋진 입가엔 밤새 수염이 자라 있었다. 입가가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
던 그녀의 할아버지를 닮았다. 그는 대략 20대 후반으로 보였다. 눈이 감겨서 나이를 추정하
기가 힘들었다. 대충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창가에 있는 책상 아래 그의 옷가방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다가가 옷가방을 열고 그의 잠옷을 찾아냈다. 몸을 돌리
자 멜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깨어나셨군요."
당황한 그녀는 탄력 있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네, 매켄지 양이시지요? 당신이 간호 일을 자원했다고 도허티 의사 선생님께 들었습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천만에요. 혼자 살기 때문에 시간도 공간도 여유가 있어서. 당연한 일을 하는 것뿐인 걸요.
그리고 그녀는 그의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아침엔 어떠신가요?"
"약간 쑤십니다."
정직한 그의 대답에 어제 도허티 의사가 하던 말이 생각나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공연히
들고 있던 그의 잠옷을 털었다.
"네, 그래요. 하지만 저희도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요, 단지 지켜 보는 것말고는
요. 우선 양복을 벗으시는 게 좋겠군요. 밀가루 세탁을 해야겠어요."
갈색 울 양복은 심한 구김살 투성이였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품위 있게 그의 양복을 벗길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밀가루 세탁도 당황스런 마음을 숨기기 위해 얼결에 튀어나온 말이
었다.
"밀가루 세탁요?"
"네, 밀가루를 묻혀서 빨면 때도 잘 빠져서 깨끗해져요. 옷을 빨아 드릴 게요."
이마에 놓인 팔을 치우며 그는 웃음 지었다. 그도 숙녀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이 불편했다
.
"멜처 씨, 앉으실 수 있겠어요?"
"글쎄요, 일어나 보죠."
머리를 든 그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서 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그의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무리하지 마세요. 곧 돌아올게요."
잠시 후에 그녀는 주전자와 대야, 수건과 목욕용 큰 수건, 그리고 비누를 조심스레 들고 들
어왔다. 그녀는 그것들을 내려놓고 멜처 옆에 서서 말했다.
"이제, 재킷을 벗기로 해요."
너무나 능숙한 솜씨에 놀란 멜처는 그녀가 어디서 이런 기술을 배웠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그럭저럭 그의 재킷과 조끼, 셔츠를 벗겼다. 그리고 서로의 당황스러움을 최소한으로 줄이려
고 애쓰면서 그의 상체를 닦았다. 그가 소다수로 입을 헹구도록 대야를 들고 서 있었고, 그
가 바지를 벗기 전에 잠옷 셔츠를 입혔다. 일을 하는 동안 애비게일은 서로의 어색함을 조금
이라도 덜 수 있도록 계속 잡담을 늘어놓았다. 옷에 밀가루를 묻혀 몇 시간 정도 그냥 두었
다가 옷걸이에 걸어서 거품기로 밀가루를 털어 내면 옷이 말끔해져서 데이지처럼 신선해진다
는 등의 얘기였다. 멜처로서는 난생 처음 들어 보는 생소한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이런 식으
로 여자와 함께 있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녀의 유창한 목소리는 시중
드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말수가 적었거나 덜 능숙했더라면 곤란한 상황
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마을의 영웅이 되신 것 같은데요, 멜처 씨?"
그녀는 처음으로 웃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영웅보다는 바보가 된 느낌입니다. 발가락에 총을 맞다니요."
"마을 사람들에겐 새로 놓인 철도가 최대의 관심사예요. 아직도 열차 시간만 되면 열 일 제
쳐놓고 기차를 구경 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철도가 놓인 후 처음 일어난 사고에서 당신이 열
차를 구한 거예요. 그러니 바보 같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다른 일이 생기면 곧 잊혀질 거예
요, 멜처 씨."
"제 이름은 데이비드입니다."
그는 애비게일을 바라보려 했으나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네, 이런 상황이어서 유감이지만, 어쨌든 당신을 만나서 기뻐요. 어디에서 오셨나요, 멜처
씨?"
애비게일이 그를 성으로 부르자, 그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동부에서 왔습니다."
그는 애비게일의 행동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물었다.
"애비게일 양, 당신은 간호사인가요?"
"아니에요."
"그럼, 간호사가 되셔야겠어요. 매끄럽고 능률적으로 일을 하시더군요."
마침내 그녀는 밝게 웃음을 지었다.
"아, 고마워요, 멜처 씨. 이런 상황이라서 제가 더 나아 보이는 거겠죠. 배고프시지 않나요?
"시장하군요. 언제 음식을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요."
"시련을 겪는 중이라고 생각하세요. 곧 완쾌되실 겁니다. 음식을 드시면 나쁜 기억도 빨리
잊게 되실 거예요."
그녀의 말은 행동만큼이나 우아하고 세련되었다. 멜처는 눈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그
녀는 그가 벗어 놓은 옷가지와 목욕 용구들을 챙겼다. 그녀가 알아서 자신을 돌보아 주니 안
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남편이 아내를 바라보며 느
끼는 것이 아닐까.
"아침을 준비한 뒤에 옷을 빨 거예요. 아! 머리 빗겨 드리는걸 잊었군요."
문으로 걸어가던 그녀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 정도는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빗은 있으세요?"
"아니오, 손으로 빗어도 괜찮아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앞치마 속에 있는 빗을 가져다 드릴게요."
잠시 후 그녀는 빗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빗을 받기 전에 주저하는 그녀에게 뭔가 말을
건네려고 했으나 결국 한 마디도하지 못했다. 그녀는 데이비드 멜처를 신사라고 생각했다.
애비게일은 한결 즐겁게 그의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베이컨과 달걀, 커피를 쟁반에 들고
가면서 아주 잠간 동안이나마 자신이 그의 부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자
신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환자가 있었다.
침실 문가에서 그녀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는 낯선 남자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아직까지
는 혼수 상태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못하긴 하지만, 그가 범죄자라는 사
실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의 머리와 수염은 칠흑같이 검었다. 피부는 오일을 바른 것
같았다. 살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와 가까이에서 그를 살펴보았다. 그의 맨가슴과 팔은 땀으
로 빛났다. 주저하며 그를 살짝 건드려 보니 심한 열 때문에 몸이 뜨거웠다.
그녀는 재빨리 식초를 탄 물을 가져와 그의 얼굴과 목, 팔, 가슴을 스펀지로 닦아 냈다. 그
리고 열을 내리기 위해 이마에 찬수건을 올려놓았다. 그의 상처를 보아야 하는 줄을 알았지
만, 그녀의 손은 망연히 아래로 떨궈질 뿐이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내쉬고 기운을 돋운 후
에 살며시 시트를 들었다. 그의 나신을 본 애비게일은 온몸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 내기까지 한 그녀였지만, 이런 상황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떨리는 손으
로 조심스레 그곳이 안 보이도록 시트를 그의 왼쪽다리 위에 젖혀놓고 쿠션 두 개를 가져와
그의 오른쪽 무릎 아래에 받쳤다.
그녀는 상처에 대려고 거즈를 잘랐으나 도허티 의사가 처치한 붕대가 그의 다리에 찰싹 달라
붙어 있었다. 그래서 질산칼륨을 식초물에 타서 상처에서 떨어지지 않는 붕대에 몇 방을 떨
어뜨렸다. 상처에서 붕대가 떨어졌지만, 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출혈을 막지 못하면
그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 백반 한 숟가락을 프라이팬에 놓고 볶았다. 시꺼멓게 되어 연기가 날 때
까지 뜨겁게 달궜다. 뜨거운 백반을 깨끗한 거즈에 싼 습포제를 들고 서둘러 침실로 들어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려 이름 모를 열차 강도의 검은 사타구니
아래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벌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얼마나 서 있었는지 몰랐다. 갑자기 그가 아니라 자신이
총에 맞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뒷걸음 치는 자신을 끌어당기며, 그녀는 상처
를 닦고 출혈을 멈추게 하려고 애쓰며 미친 듯이 기도를 올렸다. 한 시간 가량 그녀는 저승
사자와 사투를 벌였다. 그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될지도…….
그녀는 스테이크 한 조각을 다져서 소금물에 넣고 끓여 비프차를 만들었다. 그는 여전히 피
를 흘렸다. 차를 마실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화살에 맞은 상처에 말린 맥각(맥각균이 벼과
식물에 기생하여 생긴 번식체)을 붙이면 피가 멈춘다던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녀는
서둘러 호밀균을 가루로 만들어 습포제에 싸서 상처에 붙였다. 아직도 그의 검은 얼굴은 죽
은 듯이 표정이 없었고,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그녀는 알코올로 그의 몸을 닦아 냈다. 그러
나 그녀가 닦다가 멈추면 즉각 다시 뜨거워졌다. 피부를 닦아 내는 것만으로는 열을 내리기
힘들 것 같았다.
야생 생강차!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서둘러 생강차를 들고 돌아왔으나 그는 여전히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한 숟가락을 그의 입술에 떨어뜨려 주었지만 귓가로 흘러내릴 뿐이었다. 베갯잇에 희미한 얼
룩이 생겼다. 이번에는 입 속으로 넣어 주었지만 잠시 기침을 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마셔요! 마셔!"
애비게일은 의식 없는 사람에게 화난 음성으로 속삭여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강제
로 마시게 하면 질식할 뿐이었다.
애비게일은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을 참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문을
밀치고 집 밖으로 달려나갔다. 옆집의 롭 넬슨이 마당에 나와 있었다.
"로버트!"
그녀가 울부짖듯 소리 치자 롭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정신이 나간 듯한 그녀의 모습도,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는 음성도 처음 겪는 것이었다.
"네, 애비게일 양?"
소년의 두 눈이 너무 놀라 긴장으로 커졌다.
애비게일은 뼈가 부러질 정도로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로버트, 빨리 말 보관소로 가서 퍼킨스 씨에게 짚 한 다발을 달라고 해. 깨끗한 짚으로, 알
겠니? 눈썹이 휘날리게 빨리!" 그리고 그녀는 롭이 넘어질 정도로 힘껏 밀었다.
"네, 알겠어요."
롭은 어리둥절했지만 최대한 빨리 퍼킨스에게 달려갔다.
길가를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얼마 동안이 한시간은 되는 것 같았다. 롭이 오자
마자 그녀는 고맙다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낚아채듯 짚을 받아들고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강도의 검은 얼굴 위로 몸을 숙인 애비게일은 그의 얼굴을 기울인 후 손가락으로 그의 입을
강제로 벌렸다. 그의 혀는 뜨겁고 건조했다. 불길한 징조였다. 지푸라기를 그의 식도와 연결
하려고 했으나 짚이 너무 약해 계속 부러지기만 했다. 급한 마음에 귀중한 시간이 그냥 흘러
갔다.
부들풀!
그녀는 응접실에 한 묶음 말려 놓았던 부들풀을 뽑아 들고 바늘로 줄기 가운데를 파냈다. 그
의 머리를 받쳐 드는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의 입을 벌리고 식
도로 부들풀을 힘껏 집어넣었다. 상대에게 재갈을 물리듯 하는 자신의 무지막지한 행동에 속
이 매스꺼워졌다.
그러나 마침내 해냈다! 작은 성공이었지만, 그녀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생강차가 순조롭
게 그의 식도로 흘러들어 갔다. 우아한 태도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녀는 다시 한 입 가득 생
강차를 머금고 부들풀을 통해 그의 입 속으로 흘려 보냈다. 부들풀을 그의 입에서 빼내자 그
는 반사 작용으로 생강차를 들이켰다. 그의 입 속에 있던 그녀의 손가락이 꽉 물렸다. 그녀
는 아픔에 소리를 지르며 얼른 손을 빼냈다. 살펴보니 손가락의 첫째 마디와 둘째 마디 사이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쓰라리는 아픔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입 속에 손가락을 넣고 빨았다.
손가락엔 그의 침이 묻어 있었다. 이런 세상에! 그녀는 얼른 주머니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세심하게 자신의 혀와 손가락을 닦아냈다. 그러나 곧 아직도 의식이 없는 그
의 얼굴 쪽으로 시선이 돌려지자,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거의 정오가 다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남자를 남겨 놓
고 데이비드 멜처의 점심을 만들러 나갔다. 그리고 점심상을 들고 멜처의 방에 들어갔다.
"애비게일 양! 무슨 일이 있었나요?"
스테이크를 다지면서 생긴 핏방울이 그녀의 가슴 부근에 튀었거나, 아래층 남자에게서 묻은
것이리라. 애비게일이 머리를 손으로 쓸어 보니 비바람에 시달린 풀처럼 머리가 흩어져 있었
다. 오늘 아침에는 한 치 구김도 없었던 말쑥한 파란 블라우스도 소매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 게다가 그녀의 손가락에는 이빨자국이 있었지만, 그것만은 치마로 가려졌다.
이런! 자신이 이런 꼴일 줄은 전혀 몰랐다! 세상에!
"애비게일 양, 괜찮아요?"
"그럼요, 물론 괜찮습니다, 멜처 씨. 한 남자의 생명을 구하려고 애쓰다 이렇게 된 거예요.
전 괜찮아요. 제가 이런 꼴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 사람을 간호하는 데 너무 힘을 들
였나봐요."
멜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럼, 아직도 그가 살아 있다는 겁니까?"
"거의 간신히요."
데이비드 멜처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참 안됐군요!"
그녀는 그의 음성에 가득 찬 불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분노는 당연했다. 아래층에 있
는 남자가 그의 엄지발가락에 총상을 입힌 사람이었다.
"너무 과로하지 마세요. 당신이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는 줄은 몰랐어요. 단순한 도둑 때문에
당신이 병이 나는 건 원치 않아요."
그의 말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멜처 씨. 저는 오히려 당신이 걱정되는걸요."
그가 음식을 다 먹자 그녀는 면도 도구를 가져다 주었다. 그가 턱에 거품을 바르는 동안 그
녀는 거울을 받쳐 주었다. 그녀는 은밀히 그를 관찰했다. 부드러운 입가와 곧게 뻗은 코, 갈
라지거나 움푹 들어간 흔적이 전혀 없는 단단해 보이는 뺨……. 그러나 그녀는 그의 눈이 가
장 마음에 들었다. 밝은 갈색 눈으로, 그가 웃으면 소년처럼 반짝였다. 그는 머리를 이쪽 저
쪽으로 돌리며, 턱을 들어 올려 목까지 말끔하게 면도했다. 그를 보는 애비게일의 가슴속 깊
은 곳에서 낮게 고동 치는 심장 박동소리가 들려 왔다. 느닷없이 두껍고 긴 목과 검은 얼굴
을 지닌 강도가 떠올랐다. 그녀는 데이비드 멜처와 그 강도의 얼굴을 비교하는 자신을 발견
하고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 강도는 수염이 있어요."
데이비드 멜처의 얼굴에서 부드러운 표정이 싹 가셨다.
"전형적이군!"
그가 외쳤다.
"네?"
"확실해요! 대개 악명 높은 범죄자들은 수염을 기르잖아요!"
그녀는 거울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생각 없이 한 말이 그를 화나게 한 것 같아 미안
했다.
"그 사람을 좋게 생각하지 않으시는군요. 아래층에 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아예 잊어버리
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는 편이 당신에게 더 나을 것 같군요. 자, 의사 선생님께서 발의 붕
대를 갈아 드리라고 하셨어요. 고통이 느껴지면 말씀하세요. 고약을 발라 드릴 테니까요."
"점점 나아지고 있어요. 일부러 그러실 거 없어요."
그가 거절하자 그녀는 재빨리 방을 나왔다. 열차 강도 얘기를 꺼내서 그를 화나게 한 것이
마음 쓰였다. 게다가 멜처는 스테이크와 감자 요리, 그리고 깨끗한 리넨 냅킨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강도가 그럭저럭 살아난다면 이 집안에 새로운 알력이 조성될 것이 명백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간호하는 일을 맡은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아래층 침실로 들어간 그녀는 환자가 오른손을 움직였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손은
지금 배 위에 놓여 있었다. 길고 가는 손가락에 털이 나 있었다. 손은 얼룩이 묻어 지저분했
다. 침대가에 다가가 환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발에 밟힌 듯 검푸른 멍 자국이 확실히 보였
다. 조심스레 손목을 들어 상처를 살펴보고는, 다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손이 시트에 닿는
순간, 그가 몸을 약간 뒤척였다. 손에 통증이 느껴진 듯 그는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본능
적으로 그녀는 그가 뒤척이지 않도록 그의 몸을 손으로 눌렀다. 그의 단단하고 넓은 가슴에
놓인 자신의 손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작아 보였다. 다행히 그는 좀 전의 자세로 돌아가 반
듯이 누웠다.
손이 부러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의 손에 맞는 작은
나무 조각을 가져다 붕대로 감았다. 어느 뼈가 부러졌는지 알 수 없어, 거즈를 손목 주위와
엄지손가락에 감고 준비한 부목을 댔다. 붕대를 감는 동안, 깨끗이 다듬어진 그의 손톱과 굳
은 살이 박인 손바닥을 볼 수 있었다.
다시 그의 이마를 짚어 보니 아까보다는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열이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
려고 컬페퍼를 찾아 온 마을을 돌아다녔던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어쨌든 일을 구하긴 했다.
전혀 생각도 못 해본 일이긴 하지만. 컬페퍼의 식당에서 일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 무겁게 발걸음을 부엌으로 옮기는 그녀의 뒷모습이 축 처졌다. 솜과 알코올을 들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방 안의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찢긴 거즈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솜이 한 무더기 물그릇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식초병과 소금 그릇, 약초 자루, 가위, 접시
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벽과 장롱에는 피가 튀었고 뜨겁게 달군 백반이 바닥에 쏟아
져 있었다.
등을 돌려 나가고 싶었지만 애비게일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모든 것을 무시하고 침대로 다
가갔다.
세상에! 돌아누워 버렸다. 그가 오른쪽 다리를 깔고 엎드려 누웠다!
애비게일은 그를 다시 돌아눕게 하려고 무거운 몸과 힘겨운 실랑이를 해야 했다. 간신히 그
의 어깨와 몸, 다리를 다시 반듯이 눕혔더니 방 안에 들어섰을 때부터 우려하던 대로 그의
상처에서 다시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다시 지혈을 하고자 사투
를 벌였다. 상처를 소독하고 백반을 팬에 달구고 맥각을 바르고 출혈이 멈추길 수도 없이 기
도했다. 그는 아까보다 더 심하게 반응했다. 그가 팔다리를 움직일때마다 애비게일은 그의
몸 위에 눕다시피 하며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게다가 높은 열이 그를 괴롭혔다. 애비게일
의 얼굴에서도 땀이 흘렀으나, 그녀는 그의 몸에서 땀을 닦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날이 저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깨어나 비프 차를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고, 다시 대롱으로 그에게 차를 먹였다.
때때로 애비게일은 밖으로 드러난 그의 하얀 엉덩이를 넋 나간 듯 바라보곤 했다. 다행히 시
간이 흐르자 출혈도 멈추었다. 마침 도허티 의사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진 맥진
한 그녀는 들어오라고 응답했을 뿐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할 것 같았다.
도허티도 힘든 하루를 보내고 오는 중이었으나 애비게일을 보자 자신의 피로는 신경 쓸 겨를
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애비게일 양, 왜 자신을 이렇게 터무니없이 혹사한 거요?"
그녀의 몰골은 지독했다! 빨갛게 충혈된 그녀의 눈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같이 보였
다.
"생명을 구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어요."
그녀는 쉰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의사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거의 난장판이 된 부엌으로
데려갔다. 그가 의자에 강제로 앉히자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헛웃음소리를 냈다.
"왜 당신 집이 이 모양이 되었는지 알겠군."
그녀는 이제 시작을 한 것에 불과했다. 환자도 환자지만, 우선 간호하는 그들부터 힘을 내야
했다.
"애비게일 양, 커피 한 잔 마시고 잠을 푹 자도록 해요."
"커피는 마실 수 있지만, 잠은 그 사람이 깨어날 때까지 보류할게요. 그는 깨어날 거예요."
의사는 그녀에게 커피 한 잔을 따라주고, 환자들을 보러 갔다. 부엌을 나가며 그는 의지가
굳건한 애비게일의 등을 믿음직스럽게 보았다. 그녀가 도움을 제의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
다. 그러나 열차 강도가 있는 침실에 들어서며, 그는 얼핏 상처난 부위가 다루기 묘한 곳이
라 애비게일이 세심하게 살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평소 상식 있고
예의바른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육체적인 긴장이 너무 심해 도리어 그녀의
몸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애비게일의 처치를 본 도허티는 경이를 느꼈다. 기특할 정도로 교묘히 약을 조제해
상처에 붙인 그녀의 노력과 인내가 대단했다. 이 남자가 결국 죽는다면,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모르고 갈 것이다. 상처는 한결 나아졌고 열도 많이 내렸다. 출혈도 없고 화
농도 없다. 그녀는 의사만큼이나 처치를 잘해 놓았다.
도허티는 2층으로 올라갔다.
"멜처 씨, 당신은 유능한 애비게일 양의 간호를 받고 있습니다.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빈
약한 저의 의학적 도움을 드릴까하는데요."
"아, 의사 선생님, 만나서 기쁘군요."
멜처의 얼굴은 거짓말처럼 좋아 보였다.
"통증은 심하지 않습니까?"
"참을 만합니다. 가끔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지만, 선생님이 애비게일 양에게 주신 고약이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아편 성분이 있는 고약입니다. 애비게일 양에게 그 진통제를 좀더 주고 가겠습니다. 애비게
일 양과 고약, 매우 효과적인 결합 아닙니까?"
멜처가 웃음 지었다.
"그녀는 대단해요.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음, 전 이 집에
있게 되어 너무 행복합니다."
"멜처 씨, 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걸요. 그녀가 자원했습니다! 정해진 보수보다 더 많이
보상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두사람 모두 능력 있는 그녀의 간호를 받으니……."
또 다른 환자를 생각하자 멜처의 얼굴이 불쾌한 듯 찡그려졌다.
"말씀해 주세요. 그는 어떤가요?"
"그는 살아 있고 출혈도 없어요. 두 가지 사실 모두가 믿기지 않을 정도죠. 애비게일 양이
어떤 처치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놀라워요."
그리고 의사는 멜처의 얼굴을 살펴보며 한결 나아진 그의 상처 부위를 두드려 보았다.
"기운 내요! 불한당과 같은 지붕 아래 있는 것도 이제 멀지 않았어요. 이 발가락을 들어 보
세요. 회복이 놀랍군요. 여기에서 오랫동안 힘들게 지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멜처의 음성에서는 따스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래층에 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신경 쓰이면 차라리 잊어버리라고 충고하고 싶군요."
떠날 준비를 하며 의사가 말했다.
"애비게일 양이 그곳에서 간호해야 하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 그래서 이렇게 냉랭해지셨군.
"애비게일 양은 당신에 대한 인상이 무척 좋은 것 같습니다."
"그녀에 대한 제 인상도 그렇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멜처가 인정하듯 말했다.
의사는 짧게 웃었다.
"애비게일 양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입니다. 다시 오겠습니다.
그 동안 몇 번 발을 움직이다보면 차차 나아질 겁니다. 생각보다 상태가 아주 좋아요."
도허티는 웃으며 말했지만, 자신의 말이 아래층에 가 있는 멜처의 관심을 돌려놓을 수 없다
는 걸 알았다.
커피 한 잔이 애비게일을 다소 살려 놓은 것 같았다.
"저도 한 잔 마실 수 있겠지요?"
의사는 부엌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니, 그대로 앉아 있어요. 내가 따라 먹겠소."
그는 애비게일을 살펴보았다.
"애비게일 양, 내가 어제 바보처럼 당신의 능력을 의심스러워했던 거 미안해요. 당신은 누구
보다도 훌륭하게 두 사람을 간호했어요. 뿐만 아니라 멜처 씨를 열애가로 만들었더군요."
"열애가요?"
그녀는 깜짝 놀라 커피잔 너머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도허티는 찬장에 몸을 기대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애비게일을 보는 눈빛이 밝게 빛났다.
당황한 그녀가 다시 잔으로 시선을 떨궜다.
"선생님, 농담 마세요. 그는 단지 깨끗한 침대와 따스한 음식을 칭찬한 것뿐이에요."
"애비게일 양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겠죠."
그러나 여전히 의사의 눈빛엔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그가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전신으로 들은 소식에 의하면, 철도 쪽에서 이 이방인을 심문할 사람을 보낼 때까지 우리가
데리고 있기를 원한다고 하더군요."
"살아서 말을 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어요."
꺼져 가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서 피로를 느낄 수 있었다.
"살아날 거예요. 상처를 보니 정말 많이 좋아졌더군요. 애비게일 양, 도대체 어디서 그런 찜
질약을 구했소?"
"맥각을 가루로 만들었어요. 인디언이 화살에 맞은 상처에 쓰던 처치예요. 그래서 혹시 약효
가 듣지 않을까 해서 써 본 거예요."
"그가 심하게 움직일 때 왜 날 부르지 않았소?"
그녀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혀 부를 생각도 못 했어요."
도허티는 껄껄거리며 웃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누가 치료를 더 잘하나 나와 시합을 벌일 생각이었소?"
그는 눈을 찡긋거리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