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1화 (1/24)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 라빌 스펜서.

1.

9시 50분이 되면, 스튜어트 정크션 역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아직까지 사람들은 커다란 기적 소리를 내며 달리는 기차를 낯설어 하는 동시에 신기해 했다. 마치 교외에 무성히 난 풀숲이나 갈대밭 속의 메추라기떼처럼 맨발의 아이들이 역 주변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잠시 뒤, 아이들이 소란스러운 함성과 함께 얼굴을 찡그리며 힘차게 달려나갔다. 400여 미터 근방의 정거장까지 경주를 하는 중이었다. 술주정뱅이 어니 터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곳에 있었다. 그는 요란한 트림을 해대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선술집을 나오는 참이었다. 그는 항상 기차역 주변의 벤치에 누워 잠을 자다가 마지막 기차가 떠나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나곤 했다. 역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스퍼드 스위딘이 대장간에서 으랏차 고함을 지르며 나무 망치를 내리 찧는 것이 보인다. 망치로 힘껏 가격을 한 후, 잠시 그는 더러워진 앞치마 위로 시커먼 손을 팔짱 긴 채 삽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쇠에 부딪히는 망치 소리가 멎으면 콜로라도 주 스튜어트 정크션 주민들은 모두 귀를 쫑긋 세운다. 그리고 이 시간만 되면 기차역과 가까운 길가의 상점 주인들은 손해를 무릅쓰고 가게 문을 뛰쳐나와 길가의 보도 블록을 달렸다. 1879년 6월의 이른 아침도 여느 때와 같았다. 스퍼드가 소란스러운 망치질을 멈추고, 이발소 의자가 비고, 은행 직원은 창구를 떠나고, 광물의 함량을 재는 분석소의 저울이 갑작스레 흔들린다. 모두 북부 행 9시 50분발 기차를 보려고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9시 50분 열차는 오지 않았다. 역에 모인 사람들은 오랫동안 초조하게 호주머니 속에 있는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기다렸다. 몸시계가 주머니 속에서 꺼내지고 뚜껑이 열렸다. 사람들은 불길한 생각이 고개를 들기 전에 얼른 시계를 닫아 버린다. 마침내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커지고, 불안한 시선들이 엇갈린다. 그러나 곧 마을 사람들은 힘없이 하나 둘씩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저마다 창문 너머를 내다보며 기차가 왜 늦어지는지 궁금해 했다. 기차의 기적 소리가 울리기만 을 고대하며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서서히 지나갔다. 기다려도 기다려 도 기차는 오지 않았다. 한시간 가량이 지나자 스튜어트 정크션 마을은 경건할 정도로 적막이 감돌았다. 그곳에서 누가 죽더라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11시 6분이 되자 다시 사람들의 머리가 하나 둘씩 올려졌다. 역 주변의 상인들은 또다시 문 가로 다가갔다. 쾌활한 여름 바람사이로 기차의 힘찬 기적 소리가 들려 왔다.

[기차다! 하지만 다음 기차치고는 너무 빨리 왔잖아!]

[터크 할러웨이가 기관장이라면 역에서 한껏 벗어나서 정차할 거야! 물러서라고, 기차가 선로 밖으로 튕겨져 나오기 전에 말이야!]

안전을 위해 앞에 세워 둔, 쇠그물로 만든 구조망이 움푹 팼다. 자욱한 연기와 먼지가 가라앉자, 창 밖으로 빨간 격자 무늬셔츠를 입은 손이 나와 기차를 두드려 댔다. 예상대로 터크 할러웨이 였다. 쇠를 두드려 대는 시끄러운 소리와 삐 삑 거리는 증기 소리로 사람들의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기차는 100야드나 앞으로 나가 섰다. 아직까지 선로 위에 서있다는 것이 기적이었다. 그러나 터크는 역에 몰려든 사람들의 불만에 찬 웅성거림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총소리가 한발 들리자 왁자지껄하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새로 임명된 역 장인 맥스 스미스가 아직 연기가 나는 권총을 들고 서있었다. 터크가 정적을 깨뜨렸다.

[도허티 의사 어디 있소? 이 기차는 북부로 20마일은 더 가야 하니 빨리 서둘러야 돼요. 환자가 두 명이나 있소. 한명은 총에 맞았는데 중상이오.]

[어디 사람들이오?]

맥스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소. 둘 다 처음 보는 사람이오. 한 사람이 기차를 약탈하려고 했는데, 다른 한 사람이 그를 막으려 했던 것 같소. 그러다 열차 강도가 자신의 총에 맞은 것 같소. 어쨌든 그 사람들을 날라야 하니까 두 사람만 이리 와요.]

몇 분 후, 의식이 없는 두 사람을 은행 직원과 마부, 금은방주인, 그리고 대장장이가 안아 들었다.

[누가 마차 좀 불러와요!]

사람들이 4륜 마차를 가져오고, 미동도 하지 않는 두 사람을 실었다. 선술집에서 멀지 않은 모퉁이를 돌아 콧김을 내뿜으며 숨차게 달려오는 클리블랜드 도허티 의사가 보였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들고 있는 검은 가방이 그의 살찐 종아리를 쳤다. 잠시 후 그는 창백한 얼굴의 환자 옆에 앉았다.

[이 사람은 살아 있소. 간신히 숨을 쉬는 정도지만.]

의사가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의 상태도 살폈다.

[이 사람은 정확히 알 수가 없군. 빨리 내 집으로 옮깁시다. 이봐, 스퍼드, 마차가 흔들리지 않게 돌이나 웅덩이를 피해 달리자고.]

마을 사람들의 그날 낮 시간은 이렇게 지나갔다. 마차와 사람들은 선술집과 말 보관소를 지나쳤다. 마차를 따라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고 말 보관소를 운영하는 젬 퍼킨스가 달려 나왔다. 의사의 집 옆에는 커다란 너도밤나무가 있었다. 그 그늘 아래에서 마을 주민들은 의사의 방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모두 9시 50분 기차를 기다리던 마음처럼 초조해 보였다. 그들은 죽음이란 불길함을 애써 떨쳐내려 했다. 애비게일 매켄지는 고상한 빅토리아 양식의 블라우스로 뒤덮인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목을 죄는 레이스 칼라 주변을 훑었다. 끈적거리는 살갗이 느껴졌다. 왼쪽으로 살짝 몸을 돌려 파란 눈으로 슬쩍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턱에 갖다 대고 탄력성을 시험하기 위해 살갗을 잡아당겨 보았다. 그래, 피부는 여전히 팽팽해, 아직 젊다고. 그녀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다짐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재빨리 고급스럽게 테두리가 장식된 모자에 커다란 장식 핀을 꽂았다. 그 모자 아래엔 등까지 내려오는 긴 갈색 머리가 주의 깊게 손질되어 업 스타일로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소박한 흰 장갑을 집어 들었다. 의자 옆에는 커다란 우산이 세워져 있었다. 지팡이처럼 구부러진 우산의 손잡이가 그녀의 손으로 잡기엔 커 보였다. 잠시 장갑을 매만지며 다시 생각해 보았다. 정면의 문을 통해 어른거리는 아지랑이의 잔물결이 햇빛에 반짝이며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장갑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단호하게 다시 장갑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의무를 수행하듯 장갑을 매끄러운 두 손에 끼었다. 아무리 더워도 적절하지 않은 옷차림으로 마을을 나가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꾸짖었다. 그녀는 집 안쪽으로 가서 남쪽 창에 드리워진 차양을 다시 보았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다른 사람들도 모두 기진맥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엌 안을 둘러보았지만 깨끗이 정돈되어 더 이상 손길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집은 그녀가 입은 옷만큼이나 까다로울 정도로 세심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사실, 애비게일 매켄지의 삶도 항상 정돈, 정밀, 정확, 그리고 올바름 그 자체였다.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부엌에서 식당, 거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현관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갑자기 뒤 돌아서서 다시 문고리를 덜그럭거리며 살펴보았다.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사랑스러운 둥근 창아, 이제 안전해.]

그녀가 큰 소리로 문을 향해 말했다. 그 아름다운 창은 그녀의 자랑이자 즐거움이었다. 문고리가 제대로 잠기는 것을 확인한 애비게일은 만족감에 싸여 밖으로 나가며 살며시 문을 닫았다. 그녀는 베란다를 지나 오솔길로 접어들어서는 울타리 옆에 핀, 잘 다듬어진 장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냈다. 그녀는 교양 있는 숙녀의 권리인 양 턱을 땅과 수평이 되게 치켜 들고 곧장 걸어갔다. 애비게일은 마을에서 구부정하거나 힘없이 축 처지는 걸음걸이로 다닌 적이 없었다. 절대로! 그녀의 몸가짐은 항상 말끔했다. 간간이 스커트 아래로 그녀의 세련된 구두가 보였다. 그녀는 절대 서두르지도 않았다. 달리는 것은 가장 품위 없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교양 있는 여성이 더위를 핑계로 거리에서 쉬어 가서는 안 되겠지. 어차피 즐기려고 외출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경쾌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거리를 걸었다. 그런 애비게일 매켄지를 감히 뚫어져라 응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사실 마을 사람들은 늘 그녀를 주목했다. 그런데 얼마 걷지 않아, 그녀는 평상시와 다른 광경을 보게 되었다. 도허티 의사의 잔디밭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길가의 벤치에는 부인들이, 바위 위에는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아이들이 먼지를 피우며 놀았고, 고삐가 매인 말이 서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애비게일이 다른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날도 그녀는 사람들을 흘끗 보고는 왼쪽으로 빙 돌아 큰길 쪽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곳을 따라 마을을 산책하는 그녀의 짧은 도보 여행이 곧 끝나려 했다. 아마도 도허티 의사 집 주변의 어수선한 광경이 그녀를 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교양 없는 사람들이나 그런 소란스러움에 시선을 빼앗기는 법이다. 그녀는 그런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애비게일은 늘 마을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좀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루이스 컬페퍼의 식당은 평상시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루이스는 깔끔하고 정갈하게 간이 식당을 운영했다. 그 점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한가지 흠이라면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다는 점이다. 너무나 늦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을 찾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루이스 컬페퍼의 식당에 가든지 아니면 굶어 죽든지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애비게일 매켄지는 굶어 죽기엔 너무나 고집이 센 편이었다. 그녀는 구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환영한다는 팻말이 붙은 곳으로 들어섰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며 손으로 블라우스를 매만졌다. 블라우스 끝 자락을 너무 단단하게 잡아당겨 스커트 안으로 집어넣은 모양이다. 그녀는 몸을 틀며 한숨을 쉬었다. 식당 안은 휑뎅그렁하니 사람이 없었다. 어제 메뉴였던 양배추 스튜의 냄새가 희미하게 코 가를 스쳤으나, 오늘 저녁 손님을 위해 만들어야 할 고기 스튜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아직 저녁을 들기 위해 찾아온 손님도 전혀 보이지 않지만. 왜 아무도 보이지 않을까!

[계세요?]

그녀는 사람을 부르고 귀를 기울였다. 저 뒤편 어딘가에서 작은,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주방 쪽으로 다가가 살며시 좁은 문을 열어 보았다. 자루가 긴, 커다란 스튜 냄비들이 뜨거운 열기에 시달려 검게 그을은 채 나무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을 뿐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설마, 아무도 없어요?]

애비게일은 식당 안에 사람이 한명도 없다는 사실에 의아해 하며 소리 쳤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식당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어요?]

루이스에게 일자리를 부탁하자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데 몇 주나 소비했는데 그의 식당은 텅 비어 있다. 애비게일은 당황했다. 구슬 같은 땀이 흐르는 이마를 장갑 낀 손가락으로 닦아 내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짜증이 났다. 땀을 닦은 손가락을 보니 장갑이 축축하니 젖어 있었다. 여기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우선 루이스를 찾아야 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모자를 매만지고 큰길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도허티 의사의 집이 있는 블록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곳에서 두 블록을 더 가면 그녀의 집이 나온다. 모퉁이를 도니, 도허티 의사의 마당에 여전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소매를 걷어 올린 도허티 의사는 나무 아래에 서서 주위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우선 상처를 소독하고 수술을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좀더 경과를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람이 살아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든, 제 의무는 다할 생각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애비게일은 혹시 루이스 컬페퍼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이웃에 사는, 황갈색 머리카락의 남자아이가 애비게일을 보았다. 그녀는 속삭이듯 인사를 건넸다.

[안녕, 로버트.]

[안녕하세요, 애비게일 양.]

[로버트, 컬페퍼 씨 못 봤니?]

그러나 곧 로버트의 머리는 다시 의사 쪽으로 돌려졌고, 그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음.]

[도허티 선생님이 누구 이야기를 하시는 거지?]

[저도 잘 몰라요. 다른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 기차에서 총싸움을 벌였나 봐요.]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는 말에 그녀는 안도했다. 사람들이 흩어질 때까지는 루이스를 찾으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의사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다른 한 사람은 좀 나은 편입니다. 그래도 며칠 치료를 해야됩니다. 그 두 사람 때문에 제가 무척 바쁘게 되었군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거티는 사촌 결혼식 때문에 집을 비웠는데, 저도 이 환자들에게 묶이게 되었습니다. 조금 불편하게 되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이 두 사람을 간호해 주실 지원자가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우리가 저런 쓰레기 같은 범법자를 간호하는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우리 열차를 강탈하려고 죄 없는 젊은이에게 총을 쏜 사람에게 말이에요. 만일 그 사람이 터크를 쏘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도허티 의사는 손을 들어 그 여인의 말에 맞장구 치는 사람들을 저지했다.

[자, 자, 그만 하세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옳은 일을 했다는 걸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한 사람은 치료하고 다른 한 사람은 죽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 중 몇 명은 시선을 떨어뜨리며 의사의 말에 동조했으나 대부분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한결 분위기가 사그러든 가운데 의사는 사람들에게 계속 말했다.

[한 사람 정도면 그럭저럭 저 사람들을 보살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여러분을 왕진하러 나간 동안에도 말입니다. 이건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로키 산에 철도가 놓이기를 얼마나 바랐습니까? 물론 우린 장하게 그 일을 해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모여 우리공동의 일을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수정, 구리, 은 등을 밖으로 내보내고 서부의 편리한 일상 용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작은 문제를 가지고 우리가 고심해야 합니까? 얼굴 붉히며 언성을 높일 필요도 없습니다. 돈이 드는 문제도 아니지않습니까?]

그러나 여전히 지원자는 없었다. 도허티 의사의 말은 어김없는 진실이었다. 철도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이로움을 주었다. 산등성이에 가려졌던 이 마을에 기차역이 들어서자 서부로, 동부로 길이 활짝 열린 셈이었다. 철도로 인해, 물자 부족으로 허덕이던 이 마을에 상업과 운송업이 번창하여 안정된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허티 의사가 그렇게 부탁하는 데도 마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애비게일은 사람의 목숨을 도외시하는 마을 사람들의 무정함에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저를 도와 주시는 분께는 얼마간 사례를 드리겠습니다. 거티가 받던 것과 같은 액수로 말입니다.]

도허티 의사는 그렇게 제안하며 희망에 찬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사의 눈을 좇아

주위를 둘러본 애비게일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당신이나 실컷 하시오."

누군가의 불만에 찬 음성이었다.

"거티가 이 마을에 있는 유일한 간호사요. 의사 선생님은 거티를 대신할 사람을 찾지 못할

겁니다."

"맞아요, 거티만큼 숙련된 간호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사람

이라도 자격이 충분합니다. 자, 어떻습니까?"

애비게일은 혀로 입술을 촉촉하게 적셨다. 예상치도 않은,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한

번 더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냉담한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보니 형언할 수 없는

분노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분노의 기운을 타고 등을 꼿꼿이 세워 당당하게 섰다! 환자

두 명을 자신이 돌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은 거티 버트슨처럼 능숙

하게 간호할 줄도 몰랐다. 맥박 수가 급증하면서 칼라가 목을 더욱 압박해 왔다. 그녀는 고

개를 빳빳이 들고 단호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 오르는 걱정

을 애써 눌러없애며 사람들 속으로 들어섰다.

"의사 선생님,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애비게일은 교양 있는 숙녀답게 낮은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한

부인이 시끄럽게 소리를 쳤기 때문에 도허티 의사는 애비게일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횐 장갑을 긴 애비게일의 손이 들어 올려지자, 주위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애비게일 양, 자원하시는 겁니까?"

의사의 말에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네, 의사 선생님, 자원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도허티는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잿빛 손으로 벗어진 머리를 쓸어 내렸다. 그

리고 나직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이런, 세상에……."

애비게일이 의사 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모세 앞에 펼쳐졌던 홍해처럼 사람들이 둘로 갈라

지며 길을 내주었다. 그녀는 항상 그랬듯이 품위 있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녀가

지나칠 때마다 남자들은 모자를 살짝 들어 예의를 차렸다.

"잘 있었소, 애비게일 양."

"안녕하십니까, 애비게일 양."

"안녕하시오, 애비게일 양."

숙녀들은 조용히 입가에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사람들 대부분은 차분하고 단정

한 애비게일을 존경했다. 그녀는 고귀한 사람들의 예법대로 예의 바르게 답하며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의사 옆으로 다가갔다. 나무 그늘 아래였지만 푹푹 찌는 더위를 쫓고자 많은 사람

들이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애비게일 양, 이쪽으로 오시오."

도허티는 그녀에게 손짓하고 목소리를 높여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이제 댁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다른 변동 사항이 없으면 저는 역으로 가서 맥스

에게 이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애비게일의 팔꿈치를 잡고 집 안으로 안내했다.

남자 홀로 사는 그의 집은 잡동사니와 수집품들로 뒤범벅이었다. 한 번도 정돈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넓은 방 안은 볼기를 맞은 아이가 앙갚음을 하려고 일부러 어지럽혀 놓은 것처럼

난장판이었다. 다만 어지럽혀진 물건들이 어른 것이라는 점만 달랐다. 도허티는 팔걸이 의

자 위에 펼쳐진 잡지와 신문 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바닥에 뒹구는 슬리퍼 한 짝을 구석으로

차며 자리를 권했다.

"앉아요, 애비게일 양, 앉아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연단 위에 마련해 둔 왕좌에라도 앉듯 얼룩이 선명한 의자에 우아하게 앉았다.

그의 아내 에머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집안이 지저분해지는것을 늙은 도허티 의사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밤이든 낮이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달

려가기 때문에, 집안 청소를 할 여유나 짬이 없었다. 거티 버트슨은 그의 간호사로만 고용된

것이지 가정부는 아닌 것 같았다. 집 안을 보면 그 사실을 너무나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도허티는 다리를 벌린 채 앉아, 낡아서 표면이 울퉁불퉁해진 말갈기 소파를 마디가 굵은 손

으로 쓸어 내렸다. 애비게일은 도허티 주변에 말의 털이 지저분하게 날리는 것을 볼 수 있었

다. 그는 입을 열기가 어려운 듯 한참 동안이나 마룻바닥을 응시했다.

"애비게일 양, 당신의 제안을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는 딱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애비게일 양, 당신이 지원할 줄은 정말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저……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이 날카롭게 애비게일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녀는 분명한 어조로 물었다.

"선생님, 제 도움을 거절하시는 건가요?"

"아니, 난…… 거절한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군요. 저는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

해 보라고 권유하는 겁니다."

"저도 신중하게 생각해서 간호를 하겠다고 한 겁니다. 하지만 제가 안 되는 뭔가 납득할 만

한 이유가 있다면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불쾌한 듯 애비게일은 무뚝뚝하게 말을 맺었다. 원래 그녀는 설득력 있는 유창한 달변가였다

. 그런 그녀가 짤막하게 말을 끊는다는 건 마음이 꽤나 상했다는 증거였다. 일어선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며 방패를 점검하듯이 손에 낀 장갑을 다시 잡아당겼다.

당황한 도허티가 그녀를 다시 의자에 앉히자, 그의 주변에서 먼지가 소용돌이 치며 피어 올

랐다. 허둥대는 그를 보자 애비게일은 어느 정도 상한 기분이 수그러들었다. 지금이 그를 혼

란스럽게 만들기엔 적당한 때였다!

"진정하세요, 그렇게 흥분하는 건 당신답지 않습니다."

"제가 흥분했다고요? 도허티 선생님, 그 표현은 좀 심한 것 같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곧추세우며 눈썹을 둥글게 구부렸다.

곁에 서 있던 도허티는 그녀의 응수에 빙그레 웃으며, 보닛을 바삭바삭한 데이지꽃으로 장식

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미안합니다, 애비게일 양. 이제까지 당신이 흥분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만. 제가 하려는 말은 단지 애비게일 양이 두 사람을 간호하게 놔 둘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무슨 이유로요?"

"음, 그건…… 당신이 미혼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미혼이라는 말 한 마디가 서른세 살의 노처녀인 애비게일 매켄지의 심장을 날카롭게 파고들

었다.

"미혼 여성이어서라구요?"

되뇌는 그녀의 입가가 찡그려졌다.

"네, 애비게일 양."

"그러니까 제가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님을 도울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전 결혼한 여자분이 지원하길 바랐습니다."

"어째서요?"

도허티는 몸을 돌려 몇 발자국 걸었다. 이 민감한 사항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심하는 중이었

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이 일을 하다 보면 업무상 어느 정도 남자들의 노출된 몸을 대해야 합니다. 에……

그러니까, 당신 같은 숙녀가 하실 일이 못 됩니다."

애비게일이 불편해 할까 봐 신경 쓰면서 그는 머뭇거리듯 말을 끝마쳤다.

애비게일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처녀들의 민감한 신경 때문인가요, 선생님?"

그러고는 부정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저한테 처녀들의 민감한 신경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당신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몸을 돌려 애비게일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

"의사 선생님, 제가 몇 년 동안 제 아버님을 병간호했다는 사실을 잊으셨나요?"

"아니에요, 애비게일 양. 하지만 그분은 당신의 아버님이셨지, 총을 쏜 젊은 이방인은 아니

지 않습니까?"

그녀는 감정을 조절하고자 단어 하나 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흠, 의사 선생님, 제가 왜 두 신사분을 간호해서는 안 되는지 합당한 이유를 대세요."

그는 낭패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신사라고요! 그 사람들이 신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신사가 아니면 어떻게

할 텐가요? 내가 이 마을에서 14마일쯤 떨어진 곳에 왕진이라도 나갔을 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요? 그 사람들이 신사라면 열차 강도를 나섰겠습니까? 나도 그 사람들을 믿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만일 당신에게 완력을 쓰거나 달아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좀 전에 제게 흥분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의사 선생님께 하고 싶군요. 선생님께선

지금 거의 고함을 지르셨어요."

"죄송합니다, 애비게일 양. 제가 좀 과했던 것 같군요. 하지만 당신이 위험에 빠진다면 모두

내 책임이 됩니다."

"그래요, 도허티 선생님 그렇지만 선생님께선 지금 그런 걸 생각하실 처지가 아니에요. 도와

달라는 선생님의 요청에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도움을 주겠다는 제 제의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선택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요."

도허티는 당황스러운 듯 실밥이 드러난 카펫을 내려다보며 예전에 애비게일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우리 애비는 늙은 노인의 눈을 가졌다네.

애비게일은 마음을 먹은 듯, 낡은 팔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제 비위는 강한 편이에요. 그리고 은행 잔고도 비어 가요."

그녀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해 나갔다.

"의사 선생님께도 간호가 필요한 환자 두 명이 있고요. 제 생각엔 두 환자가 지금 당장 저한

테 해를 끼치거나 도망칠 정도로 건강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그러니, 이제 시작해 볼까요

?"

그녀는 지금 자신의 빈약한 경제 사정을 그에게 알림으로써 더 압력을 가했다.

"애비게일 양, 당신을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군요. 당신을 받아들이기로 하지요. 하지만 알

다시피 보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거티와 똑같이 1주일에 30달러 드리겠습니다."

"37달러라, 좋아요. 음,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

그녀는 의자 모퉁이를 문지르며 덧붙였다.

"뭐죠?"

"환자들을 어디서 어떻게 보살피실 건가요?"

애비게일은 심사하듯 방 안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도허티 의사의 집은 병원 구실을 하기에

역 부족으로 보였다. 그때까지 도허티는 자기 집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그녀가 이 집의 2층이나 부엌까지 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들 모두 애비게일의 말이 집 안의 청결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새삼스레 집

안을 둘러보던 도허티 자신도 환자의 요양을 위한 거처로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환자들을 2층에다 옮기는 게 어떨까요?"

쓸모없는 물음이었다.

"그곳이 가장 좋은 장소라고는 말할 수 없군요.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의사 선

생님께서 허락만 하시면 그들을 우리 집으로 옮겼으면 하는데요. 가능한 빨리요. 제 부엌이

딸린 저의 집에서 그들을 간호한다면 저로선 무척 편할 것 같습니다."

"네, 좋은 생각입니다."

그가 흔쾌히 동의하자, 애비게일은 갑자기 한 발 내디뎠다.

"지금 환자들을 봐도 괜찮겠지요?"

"물론입니다 한 명은 수술대에 있고 또 한명은 대기실 소파에 있습니다. 6월이니 추위를 느

끼진 않을 겁니다. 내일 두 사람을 보내지요."

그들은 대기실로 가는 복도를 구부러져 들어갔다. 대기실은 거실보다 좁았다. 삼중 창문 아

래 쿠션이 푹 꺼진 소파에 한 남자가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그는 도시풍 신사복을

입었는데, 조끼와 재킷의 단추는 풀어져 있었다. 갈색 양말을 신은 한쪽 발이 보였다. 다른

발은 맨살의 뒤꿈치가 드러난 채 붕대에 감싸여 베개 위에 올려져 있었다. 잠든 그의 얼굴은

상냥해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갈색에 가까웠다. 그리고 앞머리는 아이들처럼 살짝 웨이

브가 졌다. 귀는 평편하고 콧속은 깨끗했다. 그 정도면 애비게일이 간호하기에 그리 나쁜 편

은 아니었다.

"이 사람이 열차 강도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아니에요, 다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멜처가 이 사람의 이름인 것 같은데, 그 일을 방해

한사람입니다. 터크 말에 의하면 잘못 발사된 총 한 방을 여기에 맞았답니다."

의사는 그제야 피곤함을 느끼는지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승객들 한 무더기가 난투극을 벌였답니다. 터크가 기차를 세우고 객차 안으로 들어갔을 때

도 난장판이었대요. 두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모두들 하는 얘기가 달랐답니다.

살펴보니 총 한 방이 멜처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깨끗이 명중시켰답니다."

"엄지발가락을!"

그녀는 그렇게 소리 치고 나서 급하게 입술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웃음을 숨겼다.

"조금만 높게 발사되었어도 큰일날 뻔했어요. 이런 얇은 도시풍 구두 말고 부츠를 신었다면

좀더 나았을 텐데 말입니다."

애비게일은 도허티가 지적한 곳을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멋진 현대풍 구두

한 짝이 마룻바닥에 있었다.

"나머지 구두 한 짝은 잘라 내야 했어요. 끝부분을 맞았기 때문에 다른 좋은 방법이 없었어

요."

그가 설명하듯이 말했다.

애비게일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허티가 이제는 소용이 없어진 구두 한 짝을 여전히

보관한다는 사실이 그랬고, 또 총격에서 열차를 구한 이 마을의 영웅이 하필이면 엄지발가락

에 총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웃음을 자아냈다.

"애비게일 양, 뭐가 그리 재미있나요?"

곧 제정신을 차린 애비게일은 한 남자의 불행을 경솔하게 웃음거리로 삼은 자신을 질책했다.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발가락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니까, 살아가는 데 지장

을 주지는 않나요?"

"네, 괜찮습니다. 발가락이 없어지면 발톱을 깎을 일도, 파우더를 바를 일도 없어지겠죠. 이

사람은 심한 쇼크 상태입니다. 피도 많이 흘렸고요. 잠든 상태에서 상처를 꿰맸어요. 이제

곧 나아질 겁니다. 깨어나면 발정난 암캐가 날뛰듯이 발가락이 쑤셔 죽으려고 할 거요. 그리

고……."

갑자기 말문을 닫은 도허티는 자신이 누구와 얘기를 나누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런, 미안해요, 애비게일 양.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군요."

애비게일은 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저는…… 음, 불쌍한 멜처 씨에게 동정심이 느껴지는군요."

"네, 음……."

도허티는 목을 가다듬었다.

"멜처 씨는 곧 완쾌될 겁니다. 아주 잘못된다고 해봤자 약간다리를 저는 정도일 겁니다. 이

환자는 발 아래 받침대를 놓아주고 이틀에 한 번 붕대를 갈아 줘야 합니다. 상처에 바를 고

약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자연스럽게 통풍이 잘되면 꿰맨 상처는 아문답니다. 그리

고 당신 말이 맞아요, 멜처 씨에게는 무엇보다도 따스한 위로와 동정심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붕대를 감으셨군요. 그리고 다른 사람은 어떤가요?"

그녀는 원래의 침착함을 되찾고 안도감을 느끼며 물었다.

도허티는 수술실 문 쪽으로 두어 발을 내디였다.

"그쪽도 한 방을 맞았지만 아주 끔찍해요. 그 불한당은 오늘 RMR 열차에 발을 올려놓은 것을

무척 후회할 겁니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지만."

애비게일은 그를 따라 크림빛이 도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재빨리 사방을 훑어보았다. 적어

도 그곳은 청결했다. 네모난 탁자위에 생기 없는 사람이 시트에 덮여 누워 있었다. 탁자가

문을 향해 있어서 그의 왼발이 먼저 보였다. 애비게일은 무척 큰 발이라고 생각했다. 시트

아래 오른쪽 무릎이 세워져 있었다.

"이 사람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총상으로 너무 많은 피를 흘

려서 상처를 닦아 내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어요. 총알이 몸 속에 있는 게 더 좋았을 텐데

. 총알은 처음 들어간 구멍보다 나온 구멍이 20배는 더 크답니다. 총알이 몸 속에 박혔다면

커다란 메스로 금방 해결했을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죽게 되나요?"

환자의 커다란 발을 내려다보면서 애비게일은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녀는 한 번도 남자의 맨

발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발과는 달랐다.

"속삭일 필요 없어요. 그는 죽은 거나 다름없어요. 잠시 이렇게 있다가 갈 거예요. 아니, 그

건 제 추측일지도 몰라요. 이런 불쌍한 개자…… 아니, 불쌍한 멍청이가 죽을지 살지, 아직

아무도 모르죠. 전에는 말처럼 건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도허티는 방 한가운데로 걸어가 수술대 옆에 섰다.

"이리 와서 봐요."

주저하듯 머뭇거리던 애비게일은 용기를 내서 환자의 맨어깨가 보일 만큼 다가갔다. 겨드랑

이 부분부터 시트가 덮여 있었다. 새하얀 시트와 대조적으로 검게 곱슬거리는 체모, 검게 그

을은 넓은 어깨, 악마처럼 기른 검은 콧수염 등 온통 검은색뿐이었다. 그녀가 서 있는 위치

에서는 수염 때문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트의 반쪽 모양처럼 생긴 콧구멍과 아

랫입술만 보일 뿐이었다. 면도한 흔적이 있는 뺨에 새로 거뭇하게 자라난 수염이 보였다. 깨

끗한 발과 최근에 면도한 흔적만 없었다면 그는 확실히 열차 강도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깨 아래부터 발목까지 시트에 덮여서 어디에 상처를 입었고 얼마나 심한지 아무것도 확인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팔을 내뻗을지도 모르니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 안전했다.

조용히 잠들어 있었지만, 그래도 어딘가 안심할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 사람은 사타구니에 총상을 입었어요."

의사의 말에 새하얗게 질린 그녀는 갑자기 뱃속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총, 총을……."

그녀는 말을 더듬다가 중단했다.

"정확히 그 부분은 아니지만 아주 근접해요. 아직도 이 일을 원하나요?"

잠시 생각할 여유가 필요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에 자신이 마음을 바꾼 이유에

대해 숙덕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서서히 임종이 다가오는 남자에 대해

서도 생각해 보았다. 이 의식 없는 사람에게도 얼마간의 죄책감이 느껴졌다.

"이 열차 강도는 차라리 최악의 결말을 원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지만 누구라도 생명을 저

버려선 안 돼요."

"맞습니다, 애비게일 양. 몇 인치만 빗나갔어도 하마터면 그는…… 잃을 수도 있었어요. 음,

그러니까, 죽을 수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곤란한 대화로 애비게일은 다시 얼굴이 하얗게 변했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도허티를 바라보

았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 불행한 열차 강도조차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이 환자를 간호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던 선생님의 말씀을 이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강도라도 동정받을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선생님도 동의하실 거예요."

"애비게일 양, 이미 난 이 남자를 측은하게 여기고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치료는 뭐든 할

거요. 하지만 미리 말해 두는데, 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만일 이 남자가 살아

난다면 그건 순전히 눈이 먼 망할놈의 기적 때문일 거요."

"선생님, 전 이 사람을 위해 뭘 해야 하나요?"

그녀는 그렇게 물으면서 누워 있는 남자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죽

기엔 젊은 나이였다.

"진짜 이 일을 할 생각인가요? 진심이에요?"

"뭘 해야 하는지 말씀이나 해보세요."

도허티는 그녀의 꿋꿋한 눈빛에서 몇 년 전 그녀가 아버지를 간호하던 때를 떠올릴 수 있었

다.

"무릎을 세워 놓아야 해요. 그래야 공기가 잘 통할 테니. 그럭저럭 출혈은 막았지만 다시 피

가 터질지도 몰라요. 그러면 당신은 백반(白礬 :황산알루미늄)을 이용해서 출혈을 막아야 해

요. 그리고 상처를 깨끗이 소독하고, 소독하는 방법은 나중에 일러줄게요, 상처가 곪는지 잘

살펴봐야 해요. 고양이가 불에 올려진 자신의 꼬리를 살피듯 사소한 곳이라도 아주 꼼꼼히

살펴야해요. 게다가 심한 열도 내리도록 도와야 하구요. 의식이 회복돼서 그가 고통을 호소

해도 우리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어요. 옆에서 지켜 보는 수밖에. 그리고 또, 뭔가 먹을 수

있게 도와줘야 하고. 애비게일 양,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부 다요. 하지만 제 꼬리는 불에 올려놓지 않았는데요?"

건조한 음성이었지만, 그녀의 재치에 의사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이제 집으로 가서 푹 쉬도록 해요. 앞으로 며칠 동안은 그런 휴식을 취할 수 없을

거요. 내일 아침에 보기로 하죠. 이 두 남자를 데리고 갈게요. 마을 사람들의 속눈썹이 밤새

쑥쑥 자라기를 기도하세요. 내일 이 환자를 옮기는 동안 사람들이 이 환자의 상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말이오."

"아 예, 저도 그 행운을 나눠 가졌으면 좋겠군요. 그러면 이 두 사람한테 가까이 다가설 때

유용하겠어요."

애비게일의 입가에 스치듯 웃음이 지나갔다.

"빌어 줄게요.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침에 뵈요. 도착하기 전에 준비가 다 될지 모르겠어요."

"잘될 거요, 애비게일 양."

그녀는 몸을 돌려 나가다가 문 앞에서 다시 뒤돌아보았다.

"그…… 그 열차강도 이름은 뭐라던가요?"

"몰라요. 멜처 씨처럼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아…… 아, 네."

그녀는 대답한 뒤에도 한동안 머뭇거리며 서 있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면 그가 죽는다면 유감스런 일이 되겠군요. 그도 어딘가에 가족이나 이웃이 있을 텐데.

도허티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따스한 마음을 가진 한 여성이 그의 죽음을 생각하겠지요."

"그럴까요?"

애비게일은 활발하게 대답하고 의사의 집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말이 옳았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도 그녀의 가슴은 못된 장난을 하다 들킨 아이

처럼 두근거렸다. 그의 커다란 맨발과 검은 털이 뒤덮인 가슴, 그리고 상처난 부위가 머릿속

을 어지럽혔다.

지금까지 애비게일 매켄지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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