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사랑 에반젤린-18화 (완결) (18/19)

18장

에비가 없는 것으로 그의 인생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이렇게 한 여자를 그리워하거나 그녀가 없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외롭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로버트는 지금 그런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혼신청을 그녀가 대놓고 거절한 그 다음날, 그는 뉴욕으로 돌아와 회사에 복귀하고 사교활동에 다시 참여했다. 하지만 전에 즐겼던 사교적인 모임은 모두 의미 없고 지루하기만 했다. 오페라나 파티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오로지 늦은 밤, 호수가 보이는 베란다에 나가 잔잔한 강물소리와 까만 하늘에 펼쳐진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밤의 향기를 맡고 싶을 뿐이었다. 넓은 안락의자에 에비와 단둘이 누워 서로의 몸이 연결된 채,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쾌감으로 변해서 미칠 것 같은 절정에 오르기까지 그렇게 있고 싶었다.

그에게 섹스는 언제나 잘 조정된 중요한 인생의 한 부분이었지만, 이제 그는 그런 유혹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성욕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가 전에 익숙했던,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그런 부분적인 쾌감의 만족에는 흥미가 없어졌다. 에비와 사랑을 나눌 때 그는 전혀 냉정할 수 없었다. 몇 번씩이나 그는 이성을 잃었었다. 그녀가 그의 밑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힘으로 그를 조이고 그의 품안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녀를 느끼는 것은...

그 정열적인 이미지는 그를 완전히 흥분시켜 그는 발정기의 짐승처럼 광분한 채 아파트 안을 걸어다녀야 했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그를 흥분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에비 생각만 하면 그는 즉시 단단해졌다. 그녀를 너무 원했고 그녀가 없다는 사실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답이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것은 천국의 진리처럼 떠다니며 그에게 다가와 주지 않았다.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에비에 대한 그의 욕구불만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는 항상 모든 것의 이면을 즉시 알아채고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빨리 본질을 이해하던 그의 두뇌가 이 문제에 대해선 실패하자 그는 더욱 답답했다.

집에 관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상처를 받았지만 그의 설명을 이해했다. 국가안보에 관한 문제에 비추어 볼 때 그녀의 집은 아주 작은 것이고, 그가 압류할 작정은 아니었다고 말했을 때 그를 믿었다. 그 문제에 대해선 그녀는 그를 용서했다. 그가 그녀를 반역자로 오해한 것도 이해했다. 그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와 결혼하는 것을 거부했을까? 그녀의 눈에 떠오른 표정이 지금까지도 그를 괴롭혔다. 그는 한밤중 침대에 누워 그녀의 얼굴에 다시 빛을 가져다주고 싶다는 생각을 되풀이해서 했다. 황금처럼 빛나던 에비가 재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것은 지금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를 거절했다.

‘로버트, 제발 가요’ 라고 말하는 그녀의 음성이 너무나 확고해서 그는 놀랐다. 그래서 그는 떠났고, 그녀로부터 떠난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 가는 것 같았다.

매들린은 몇 번이나 그에게 전화를 해서 목장을 방문하라고 성화였다. 여동생의 성격을 잘 아는 터라 그는 즉시 몬태나로 가지 않으면 매들린이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그의 아파트로 들이닥치리란 것을 알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 정도로 매들린 역시 그에 대해 잘 알았고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로버트는 답답해서 욕설을 지껄이곤 결정을 내렸다. 에비 말고 매들린은 그가 알고 있는 여자 중 가장 영리한 여자였다. 어쩌면 매들린이 그가 모르고 있는 사실을 집어낼지도 몰랐다. 그는 매들린에게 전화해서 목장으로 출발한다고 말했다.

시차 때문에 그가 공항에 내린 시간은 여전히 이른 아침이었다. 목장은 공항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장시간 차를 운전해 가기보다 그는 경비행기를 빌려서 타고 갔다. 활주로에 비행기를 착륙시키려 할 때 멀리서 매들린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봤다. 그녀의 머리색은 에비의 황금빛 금발보다 밝은 색이었지만 놀랄 정도로 비슷해서 그는 가슴이 에이는 것을 느꼈다.

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매들린이 다가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느긋하고 매혹적이었다.

"오빠가 와서 정말 잘됐어요. 오빠가 온다고 하니까 저 꼬마도깨비 같은 아들녀석들이 얼마나 보채던지... 두 번만 더 들으면 로버트 삼촌이라는 소리를 천 번은 들을 거라구요."

"이런..."

그는 중얼거리며 조카들이 자신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그의 볼에 키스하며 그를 포옹했다. 목장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는 언제나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곳 역시 자연이 가까워서 그런 것 같았다.

매들린은 호기심으로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간신히 점심때까지 참았다 말을 꺼냈다. 아이들은 낮잠을 자러 갔고 로버트는 리스와 함께 식탁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오빠,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죠?"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오래 기다리지 못할 줄은 알았다. 항상 고양이처럼 호기심이 많은 너니까."

"그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그러니 얘기해 보시죠."

말을 꺼냈지만 이상한 기분이었다. 결정을 내리는 것에 남의 도움이 필요한 적은 없었다. 그는 머서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정확히 설명하고 에비가 의심을 받은 정황과 문제를 풀기 위해 그가 취한 행동들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는 에비의 용모를 설명하는 자신의 눈에 보기 안쓰러울 정도의 욕망이 드러나 있다는 것은 몰랐다. 그는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에비가 계류장의 압류를 막기 위해 집을 팔았고, 그가 배경인물이라는 것을 에비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 그리고 머서를 체포하게 된 순간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결혼신청을 에비가 거절한 부분까지도.

매들린은 그가 설명하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에 그는 깜짝 놀랐다.

"정말 어쩌면 그렇게 멍청한 거지?"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고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쓰러졌다.

"그녀가 오빠의 결혼신청을 거절한 것은 당연해요! 나라도 거절할 거라구요!"

화를 내면서 그녀는 식당을 나갔다. 놀란 로버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매들린이 저렇게 빨리 걸을 수 있는지 몰랐는데."

그는 중얼거렸다. 리스가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알고 있었지. 그녀가 처음으로 성질을 잃고 화를 낼 때 나도 매우 놀랐었소."

로버트는 매부를 돌아봤다. 그 만큼이나 큰 키에 검은머리, 그 보다 약간 흐린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왜 그렇게 화가 났었소?"

"지금 처남처럼 내가 멍청해서 그랬소."

얘기하는 리스의 눈동자에는 즐거움이 넘쳤다.

"자세히 설명을 해주면 좋겠는데."

로버트는 다소 심각하게 요청했다. 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멀쩡한 것 같았지만 속에선 조금씩 죽어 가는 자신을 느끼는 요즘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이런 일은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그는 완전히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리스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손에 든 컵을 만지작거렸다.

"나도 하마터면 매들린을 잃어버릴 뻔했었소."

그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처남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매들린이 나를 두고 떠난 적이 있었소. 멀리 가진 않고 가까운 읍내에 있었지만, 수천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소."

"언제 일어난 일인 거요?"

문제가 있었는데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기분이 상한 로버트가 심각하게 물었다.

"타이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돌아오게 하려고 별 짓을 다했지만, 제일 중요한 한 가지를 말하지 못했을 정도로 어리석었던 적이 있었소."

리스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꽤 힘든 속내를 보이는 것이란 것을 로버트는 깨달았다. 자신만큼이나 리스 역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한 가지가 뭐였소?"

리스는 눈을 들어 로버트를 바라봤다. 차분한 초록빛 눈동자와 얼음처럼 차가운 초록빛 눈동자가 마주쳤고 둘 모두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그 정도의 힘을 갖게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지."

리스가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내 자신도 인정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오. 그리고 처남의 경우엔 아마 더 힘들 테지. 당신처럼 지독한 남자는 사실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보다 더 위험한 구석이 있고 그걸 아주 비밀스럽게 감추고 있지 않은가 말야. 당신 주위의 모든 것을 조정하는 데 익숙해 있겠지만 이 문제만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을 거요. 그리고 이유도 모를 테고. 나도 빛을 보기 전에 정말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충격을 받아야 했으니. 로버트, 당신은 그녀를 사랑해, 그렇지 않소?"

로버트는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충격으로 어두워졌다. 사랑이라고? 그는 그 단어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에비를 원했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고 아이도 가지고 싶었다. 정말 그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하면 자신이 망가진다고 느낄 정도로 그것들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생각에는 모든 반항심이 발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약해질 것이다. 자신을 그녀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도 없을 테고 자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영원히 상처입지 않게 지킬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본성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그 야만스런 본능에서 모든 정열이 새어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에비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 그 또한 충격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그를 제대로 보고 있었다. 화날 정도로 정확한 직감으로 그녀는 그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못 보게 감출 수 있었지만 에비가 들여다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이 함께 한 동안 그는 자신이 상황을 조절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그녀는 그가 하는 일들을 모두 알면서도 어쨌든 그를 사랑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진실은 바로 그의 눈앞에 있었다. 만일 그의 야성적인 강렬함이 없었다면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매트와 함께 진정한 사랑을 알았던 여자고 그것을 잃었다. 오직 그와 똑같이 강렬한 것만이 그녀에게 다시 사랑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에반젤린을 이성으로 조정하며 사랑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했다. 그녀는 영혼과 마음으로부터 그를 원했고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다.

집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를 범죄자로 의심한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수백 채의 집을 사 주어도, 돈이 줄 수 있는 어떤 권력으로도 그녀를 유혹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그는 주지 못했고 그것은 바로 그의 사랑이었다.

"바로 그거였소."

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매디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소.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 그 사실을 인정한 것이지."

로버트는 충격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분석했다.

"어떻게 알았소?"

그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리스는 낮고 거친 소리를 냈다.

"그녀를 가지면서도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오? 그녀를 너무 사랑하고 싶어서 당신의 그 녀석이 통증을 느낄 정도로 그녀를 갖고 싶소? 항상 보호해 주고 싶고, 비단 쿠션에 소중하게 올려놓고 다니고 싶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 싶다고 느끼오? 함께 있으면 그녀의 음성과 달콤한 냄새와 부드러운 손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만족이 되고, 때론 그녀가 너무 그리워서 당신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느끼오? 매디가 떠났을 때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는 제대로 살아가기가 어려웠소.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지.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그녀를 봐야 살 것 같았지. 그렇게 느끼는 거요?"

로버트의 초록빛 눈동자에 뜨거운 감정이 흘러 넘쳤다.

"속에서 피가 흐르며 죽어 가고 있을 정도로..."

"알겠소? 바로 그게 사랑이라오."

리스는 동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불쑥 자리에서 일어난 로버트의 얼굴은 방금 한 결심으로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매들린에게 대신 키스해 주고 내가 전화한다고 말해 주시오."

"아침까지 못 기다리겠소?"

"못 기다리겠어."

로버트는 말하고 계단을 한꺼번에 두 계단씩 뛰어내려갔다. 1분도 더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앨라배마로 당장 달려가야 했다.

에비는 새로운 집이 싫었다. 조그만 공간에 갇힌 것처럼 느껴졌고 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끝없이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아파트 빌딩이었다. 이웃의 움직임이 얇은 벽을 통해서 들렸고 아이들이 시시때때로 울고 소리지르는 것을 들어야 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밤 1, 2시는 되어야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돌아오는 가족이었다. 그 소리에 잠을 깨면 한동안 다시 잠들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어야 했다.

다른 집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에너지가 없었다. 매일 계류장에 가는 것이 그녀의 한계였다. 억지로 움직이긴 했지만 하루하루가 힘들었고 곧 스트레스로 쓰러질 것 같았다.

추웠다. 따뜻해지지가 않았다. 마음속이 텅 비어 생기는 한기였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그녀는 칼로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고, 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검은머리를 보기만 해도 그녀의 머리는 빙빙 돌아가고, 낮게 울리는 음성만 들어도 그가 돌아왔나 싶어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는 전보다 더욱 절망을 느꼈다.

햇빛은 여전히 타오를 듯 뜨거웠지만 그녀는 그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세상은 온통 차가운 회색이었다.

전에도 이런 일을 겪었다고, 그녀는 그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야 할 이유를 생각하지 못하자 억지로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다시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전에도 거의 죽을 것처럼 느꼈는데, 이번의 우울증은 매일매일 더욱 깊게 그녀의 영혼을 파먹고 있었다. 어떻게 이 우울을 떨쳐 버려야 할지 몰랐다.

베키는 로버트가 떠났다는 것을 알자 엄청 화를 냈다.

"결혼해 달라고 네게 신청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베키는 소리를 질렀고, 정말 머리끝이 서는 것 같았다.

"결혼하자고 말했어."

에비는 조용히 말했다.

"근데 내가 거절했어."

그리고 다른 질문에 대해선 대답하기를 거절했다. 그녀는 베키에게 집을 팔았다는 말도 아직 안 했다.

여름은 끝나려고 하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새 학기가 시작될 터였다. 달력으로는 한 달은 더 있어야 가을이지만 벌써 아침저녁의 공기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지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조차 별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그녀는 어두워지면 일찌감치 침대에 누워 시끄러운 이웃이 오기 전까지 몇 시간이든 자 보려 했다. 별 소용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그 노력마저 않으면 곧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침대에 누우면 그녀 옆에 누워 있는 그의 따뜻한 몸이 느껴질 정도로 기억은 생생해서, 어떨 땐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려 하기까지 했다. 그의 손길을 갈망하고 그를 그녀 안에 맞아들일 때의 그 미칠 것처럼 달콤한 안도감이 모두 기억났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던 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젖가슴은 욕망으로 부풀었다.

그는 떠났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오늘밤도 별다르지 않았다. 사실 더욱 심했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뜨거워진 살결과 젖가슴이 아픈 것을 무시하려 했다. 티셔츠를 벗을까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벗은 채 자려 할 때마다 그녀의 피부는 더욱 민감해졌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봤다.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그녀는 일어나서 가운을 걸쳤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마치 부술 것처럼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거실의 등을 켜고 소리를 질렀다.

"누구세요?"

"로버트요. 에비, 문 열어요."

손잡이를 잡고 선 그녀는 잠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핏기가 얼굴에서 사라졌다. 잠시 동안 그녀는 자신이 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뭘 원해요?"

그녀는 물었지만 너무 작은 소리라 그가 자신의 말을 들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들었는지 곧 이어 말했다.

"당신과 얘기하고 싶소. 문 열어요."

그 깊고 낮은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녀는 문에 기대고 선 채 그를 다시 보낼 힘이 있는지 생각해 봤다. 뭘 더 말할 것이 있을까? 집을 주겠다고 고집하려는 걸까? 너무 많은 추억이 있는 그의 집에서 혼자 살아갈 수는 없었다.

"에반젤린, 문 열어요."

그녀는 천천히 문을 열어 줬다. 그는 즉시 안으로 들어섰고, 그의 큰 키와 체구로 현관이 꽉 차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반응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남성적인 활력에 그녀는 마치 주먹으로 복부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는 문을 닫아 잠그곤 돌아섰다. 검은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턱은 수염이 자라 거뭇거뭇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은 마치 초록불꽃 같았다. 그는 아파트 내부에는 아예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꼭 한 번만 다시 묻겠소."

그가 갑자기 말했다.

"결혼해 주겠소?"

에비는 몸을 떨었지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주 조금 그녀를 좋아한다고 느꼈을 때는 결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이용했다는 것을 알고 나선 아니었다. 그럴 수 없었다.

그의 턱 근육이 움직였다. 마치 무서운 짐승이 안에서 깨어나듯 그의 몸이 잔뜩 긴장하는 것을 봤다. 하지만 다시 말하는 그의 음성은 아주 조용했다.

"왜 안 되는데?"

그의 음성과 몸에서 풍겨 나오는 에너지가 너무 대조적이어서 마치 속임수 같았다. 그 동안 그녀 안에 가둬 두었던 슬픔의 끈이 갑자기 풀렸다.

"왜 안 되냐구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정말이지... 당신을 봐요. 아무것도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죠. 그렇지 않나요? 내가 주는 것을 갖고는 진정한 당신이 있는 그곳에 나를 들여 주지 않잖아요. 진정한 남자가 살고 있는 그곳에. 그 차가운 벽안에 당신을 가두고 있잖아요. 그 벽에 나를 부딪히는 것에 지쳤어요."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를 사랑하오?"

"그래서 온 거예요?"

눈물이 넘쳐흘러 볼을 따라 내렸다.

"당신의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래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니 이제 가요."

그의 강한 근육이 수축되고 그의 눈에 잠시 광포한 표정이 도는 것을 봤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너무 늦게 그녀는 위험을 감지했다. 도망치려 했지만 로버트가 그녀를 붙잡아 그를 보게 했다. 혼란스러운 에비는 처음엔 그가 의도적으로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의 눈을 봤다. 그의 눈동자는 까만 점 같았다. 주위를 둘러싼 초록빛 안구는 불처럼 타올랐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광대뼈 부위만 약간 붉은 기가 있었다. 아무리 로버트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행동을 위장할 수는 없었다.

그의 손이 거칠게 그녀의 허리를 부여잡고 부드러운 살결을 파고들었다.

"당신이 맞아."

그는 아주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 누구도 내게 다가오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소. 그 누구도 그렇게까지 원한 적이 없고, 그 누구에게도 나를 지배할 힘을 주고 싶지 않았소."

그의 이가 악물어졌다.

"당신을 들여놓지 않았다고? 그래, 노력은 했지. 하지만 불가능했소. 에비, 진짜 남자를 원한다고 했소?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어."

그는 거칠게 말을 계속했다.

"그 누구보다 당신에게 많은 것을 줄 테지만, 그보다 더 많이 당신의 모든 것을 가질 거야. 당신이 좋아하는 것만 선택해서 가질 수가 없단 말이오. 이건 모든 것이 다 포함된 패키지 계약이야. 내 장점과 단점을 모두 함께 상대해야 할거요. 경고하지만 나는 절대 신사가 아니야."

"네, 아니죠."

그녀가 속삭였다.

"당신은 절대 신사가 아니에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의 이마에 서린 땀과 난폭한 표정을 봤다. 심장이 천둥처럼 두근거렸고 그녀는 기뻐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가 말한다고 해도 그것을 믿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녀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 그 격렬한 눈동자를 그저 올려다보기만 했다.

"나는 질투가 심해."

그는 여전히 격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다른 남자를 바라보는 것이 싫어. 만일 어떤 바보녀석이라도 당신을 유혹하려 한다면 그냥 죽여 버리겠어."

그는 이가 부딪힐 정도로 그녀를 흔들었다.

"항상, 언제나, 어디서든 당신을 원하고 가질 거야. 하루에 네 번, 다섯 번씩 당신을 가질 거야. 내가 당신 안에 있지 않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아예 잊게 해줄 거야. 신사 노릇을 하느라 하루에 두 번만 제한을 두고 당신을 갖는 건 사양이야."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커졌다.

"알았어요. 나도 당신이 자제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에게서 이제 자제심이란 것은 없어졌다. 그녀는 그의 내부에서 난폭하고 미칠 것처럼 광포한 정열이 풀린 것을 느꼈다.

"당신은 항상 내 곁에 있어야 해. 내 사업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당신이 스케줄을 내 것에 맞춰야 해. 내가 집에 있으면 항상 내 곁에 있어 줘."

말하면서 그는 그녀를 뒤로 밀어 거칠게 벽에 붙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팬티를 잡아끌어 벗겼다. 자신의 팬티를 벗는 동안에도 그는 그녀를 벽에 꼭 붙이고 있었다. 그녀는 이웃이 외출하고 없다는 것에 안도하며 그가 자신의 엉덩이를 잡고 들어올리자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녀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피가 미친 듯이 혈관을 타고 돌기 시작했고 그녀가 허벅지를 열자 그가 미친 듯이 안으로 밀어닥쳤다. 그의 침입은 신속하고 거칠었다. 그녀는 신음을 억지로 참고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젖가슴을 통해 그의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육체가 다시 한 번 합쳐지자 밀려오는 쾌감과 안도감에 감동해서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를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녀는 몸을 약간 움직였고 그는 그녀가 조이는 느낌에 크게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갑자기 감정적인 자유를 회복한 야만인의 즐거움으로 무자비하게 그녀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콘돔을 쓰고 싶지 않소."

그는 뜨거운 숨을 토하며 그녀의 귀에 대고 격렬하게 말했다.

"피임약을 먹는 것도 싫소. 당신이 내 아기를 갖고 집안을 온통 우리 아이들로 채우고 싶어."

그는 말을 할 때마다 그녀 안에 더욱 깊숙이 자신을 밀어 넣었다. 그녀는 쾌감이 밀어닥치자 신음을 흘리며 그를 감싸고 경련을 일으켰다.

"좋아요."

드디어 그녀는 한 남자의 감정의 덮개를 열었다. 이 남자는 완전히 독재자였지만 그녀는 그의 힘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이 남자야말로 바로 그녀가 사랑하는 진정한 로버트였고 그녀는 자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모든 세포에 새로운 에너지가 돌았고 온몸에 활력이 넘쳤다.

"결혼하고 싶소."

그의 이는 악물려 있었고 그의 이마에선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당신을 내게 꽁꽁 붙들어매고 싶소. 법적으로, 재정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내 이름을 당신에게 붙이고 싶고... 에반젤린, 내 말 알겠소?"

"네, 로버트. 알았어요. 좋아요... 좋다구요!"

그녀는 넘치는 기쁨에 소리쳤다.

그는 절정에 오르자 격렬하게 몸을 떨며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에비는 다리로 그를 감싸서 그녀 안에 그를 깊이 가두었다. 그녀의 모든 감각은 빙빙 돌고 의식은 희미하게 멀어져 오직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그만이 의식되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그녀는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고 그가 그녀 옆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절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오직 그의 존재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오래 떨어져 있던 시간을 생각하니 새삼 그가 그리워 그에게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자신의 몸 위에 그녀를 올리고 가슴과 가슴, 배와 배, 허벅지와 허벅지를 최대한 밀착했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었고 그녀는 그가 다시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빨리 아이들을 집 안에 채울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그의 가슴을 쓸었다.

"당신이 떠난 다음부터 피임약을 먹지 않았거든요."

"잘됐소."

그는 그녀의 엉덩이와 허리를 만지며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당신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그는 벌써 그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음성에서 걱정을 들었고 로버트가 그렇게 오래도록 가두어 뒀던 힘이 풀린 것에 불안해하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에게 키스하며 그의 부드러운 움직임이 쾌감을 자극하자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사랑하는데 어떻게 나를 아프게 하겠어요?"

그녀의 말이었다. 거실에 켜진 불빛이 새어 들어와 그의 눈빛이 희미하게 빛났다.

"다행이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신만이 아실 테니."

그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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