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사랑 에반젤린-17화 (17/19)

17장

로버트는 그녀를 쫓아가다가 멈췄다. 대신 욕설을 지껄이며 테이블 위를 주먹으로 쳤다. 아직 그녀에게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의 본능은 그녀를 붙잡으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녀를 가게 내버려뒀다. 그 자리에 조각처럼 굳은 듯 서서 트럭의 문이 닫히고 시동이 걸리는 소리를 들었다. 바퀴가 헛도는 소리도 없이 차도에서 후진해 떠나가는 소리가 점점 멀리 들렸다.

빌어먹을! 집을 팔았다고 했다. 복부를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그는 갑자기 명백하게 진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머서와 아무 관련이 없었다. 간첩행위로 돈을 번 여자라면 절대로 집을 팔아서 빚을 갚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계류장에서 보트를 타고 나가 머서와 만났을 수도 있지만 우연의 일치로 에비는 완전히 결백했다. 그의 냉혹한 계획으로 그녀는 희생양이 되고 집을 대가로 바쳤다.

지금 설명한다고 이해할 에비가 아니었다. 간첩행위를 하는 조직을 잡아내고 머서를 감옥에 가둔 다음, 그 다음에 대출금 상환을 요구해야 했던 이유를 강제로라도 이해시킬 것이다. 그녀를 간첩 일당으로 의심했다는 부분은 좀더 조심스럽게 설명해야 하겠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쉬우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녀가 그를 완전히 거부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놓쳐 본 적이 없었고, 이 세상에서 지금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에비였다.

물론 사과와 설명에 덧붙여 그 이상의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그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돈에 대해 관심을 덜 보이는 사람이 에비였지만, 그녀는 경우가 바른 사람이므로 보상금을 준다면 그를 용서해 줄지도 몰랐다. 새로운 집주인으로부터 도로 집을 사서 돌려주는 방법도 있었다. 새 주인이 도로 팔기를 원하지 않을 테지만, 두 배를 쳐준다면 마음이 바뀌지 않을 리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녀가 살던 집보다 더 크고 좋은 집을 주고 싶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지금 이 집의 명의를 그녀 앞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집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사는 건 어디서나 살 수 있지만, 에비는 때로 혼자 있을 수 있는 그녀만의 장소가 필요할 것이다. 뉴욕 생활에 지쳐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별장으로 쓸 수도 있고, 베키를 방문하고 싶을 땐 머무를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이다.

그는 문제를 일으킨 그 빌어먹을 팩스를 쓰레기통에서 꺼내 읽었다. 역시 팰리스다운 간단한 문장이었다. 에비가 대출금을 상환하면 그가 더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팰리스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팩스를 보내 그가 편한 시간에 읽을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하지만 팰리스의 그 뛰어난 능력이 그에겐 재난이 되었고 덕분에 에비를 잃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에비를 떠나게 할 수는 없었다.

에비는 기계적으로 차를 몰았다. 마음을 비우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멍한 상태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지? 마치 두들겨 맞은 것처럼 몸이 아픈데도 육체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멍한 상태였다. 지금처럼 현실과 괴리된 것 같은 느낌은 처음이었다. 너무 춥고, 생각이 텅 빈 것 같았다. 바깥 공기는 찔 것처럼 더웠지만 그녀는 느낌이 없었다. 뼛속까지 한기가 전해졌다.

왜? 그녀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진실은 사랑이나 매혹과는 상관없는 이유로 고의적으로 그가 접근했다는 것이고, 육체적인 관계를 미끼로 원하는 정보를 구하고 그 정보를 이용해서 그녀에게 해를 입혔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대출금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까? 그녀에 대한 신용조사를 했을 수도 있지만, 집 책상에 놓여진 서류들을 봤다는 게 더 가능성 있어 보였다. 그럴 기회는 충분했다. 처음 그가 그녀 집에 왔던 날, 제이슨과 그녀가 물에 빠진 바로 그날,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느라 그를 오래도록 거실에 혼자 남겨 뒀었다.

그녀의 계류장을 목표로 삼고 움직인 이유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재산에 대한 탐욕이 지나쳐 다른 사람의 것을 무조건 뺏으려 하는 것이라고 단순히 결론을 내렸다.

그를 너무 몰랐던 것이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여전히 냉정했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열쇠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익숙한 가구들을 바라보다가 마구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억지로 조금 마셨던 커피를 게워 냈다. 그리고 끅끅거리며 신물이 흘러나올 때까지 구역질을 계속했다.

발작적인 구토가 잦아들자 욕실 바닥에 숨도 쉬지 않고 웅크리고 앉았다. 얼마나 거기 있었는지 시간의 흐름을 몰랐지만 어느새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녀는 공처럼 몸을 구부리고 다리를 가슴에 꼭 붙인 채 격하게 흐느꼈다. 다시 구토가 나올 때까지 계속 울었다.

한참이 지나 떨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났다. 그녀의 눈꺼풀은 부풀어오르고 쓰라렸지만 마음은 가라앉았다. 자신이 다시 어떤 감정이라도 느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정말이지 감정 같은 것이 없었으면 싶었다.

그녀는 옷을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중에 내다 버릴 생각이었다. 그 치마를 보기 싫었고 나머지 옷들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면서도 한기로 그녀는 몸을 떨었다. 뜨거운 물이 피부 위로 흘러내리고 또 흘렀지만 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이라도 그렇게 멍하니 마비된 사람처럼 서 있었을 테지만 뜨거운 물 대신 찬물이 쏟아지자 정신이 들어 나왔다. 침대로 들어가 눕는 것 외에 하고 싶은 일이 없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잊을 수도 없었다.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쏟아지는 물줄기 밑에 영원히 서 있어도 피부에서 그의 손길을 씻어 낼 수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의 이미지를 몰아낼 수도 없었다.

그는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단지 계류장을 원했을 뿐이다.

계류장. 아직 계류장이 그녀의 수중에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계류장의 소유주는 여전히 에비였고 로버트 캐넌이 만든 황폐해진 삶 속에서 살아갈 희망이었다. 그는 승리하지 못했다.

오랜 습관대로 그녀는 다시 계류장에 갈 준비를 하고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질린, 감정이 사라진 얼굴이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한없이 깊어 보이는 검은 연못 같았다. 매트를 잃어버린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그때는 그래도 그의 깊은 사랑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로버트가 보여준 관심은 환상이었고 그녀를 속이기 위한 계략이었을 뿐이었다. 모든 게 잘 짜여진 계략의 일부였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한 수 가르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수년 동안 지켜 온 방어벽을 그렇게 쉽게 망가뜨렸다. 다시 아픔을 느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자신이 상상을 초월한 아픔을 감당하는 능력이 있음을 오래 전에 배웠다. 그러니 적어도 가슴의 상처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방패를 앞에 두르면 되니까. 전보다 더 강한, 그래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그런 강한 방어벽을 세우면 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건 그녀에게 충분한 것이었다. 그녀는 일생 동안 로버트 캐넌을 기억하고 그가 어떻게 그녀를 이용했는지를 생각하며 다시 방패를 세울 것이다.

울어서 부어오른 눈을 선글라스로 가리고 천천히 계류장으로 운전해 갔다. 자동차 사고로 죽어서 로버트 캐넌에게 만족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계류장에 도착했을 때, 모든 사물이 이상하게도 똑같았다. 그녀는 트럭에 앉아 하나도 변하지 않은 주변환경을 쳐다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나서 하룻밤이 지났다기보다는 몇 주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그래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계류장은 그녀의 것이었다.

로버트는 마치 우리에 갇힌 표범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집안을 돌아다녔다. 기다리는 건 그에겐 생소한 감정이었다. 그의 이성은 냉혹할 정도로 정확한 결정을 내리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하면 그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에비가 느낄 고통과 상처 입은 그녀의 마음을 생각하자 그는 마치 염산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집이야 나중에 보상해 줄 수 있겠지만 그녀가 느끼는 고통은 어떻게 할까? 그가 배신했다고 생각하며 보낼 시간들은 그녀의 상처를 더욱 깊어지게 할뿐이었다. 지금 그녀가 그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사실만이 그녀를 쫓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막았다. 머서가 감옥에 들어가면 증거를 가지고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그녀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것이다. 그의 따귀를 때릴지 몰라도 그녀는 그를 이해해 줄 것이다.

전화가 울린 시간은 3시가 다 되어서였다.

"머서가 일찍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사설정보원이 소리를 질렀다.

"공포에 질려서 사무실에서 전화를 하더군요. 이번에는 확실합니다. 즉시 돈이 필요하다고 그들에게 말했고 현장에서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그는 어디 있소?"

"건터스빌로 가는 고속도로 위입니다. 뒤를 추적하는 차가 따로 있지만 저도 지금 계류장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25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것 같습니다."

"알겠소. 추적장치를 따라서 가능한 빨리 접선 장소로 오시오. 나는 지금 계류장에 가서 그보다 먼저 호수로 나가 있겠소. 내 보트를 본 적이 없으니 나를 알아차리지 못할 거요."

"조심하십시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는 그쪽 수가 더 많아서 불리합니다."

로버트는 전화를 끊으며 음울하게 미소지었다. 필요한 것은 모두 보트 안에 있었다. 무기, 카메라, 망원경, 그리고 녹음기까지. 머서는 이제 덫에 걸린 것이다.

그는 계류장까지 과속으로 달려갔다. 에비가 그를 보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는 시간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는 것이 싫었다.

물론 그녀는 그렇게 시끄럽게 굴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를 무시할 것이다. 그래도 계류장에 도착한 그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곧장 자신의 보트가 묶여 있는 곳으로 가서 보트를 몰고 호수로 나갔다.

에비는 그의 차가 오는 소리를 들었다. 지프차소리를 자신의 심장고동만큼 명확하게 들었다. 그녀는 동작을 멈추고 피할 수 없는 일전을 기다렸으나 시간이 흘러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간신히 창 밖을 내다보니 그가 사무실 쪽은 보지도 않고 자신의 보트를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보트의 강력 모터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를 들었고, 날씬하게 빠진 검은 보트는 곧 호수 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안전선 밖을 벗어나자 그는 속도를 올렸고 보트의 머리 부분이 발을 들고 일어선 종마처럼 들려서 강물 위로 미끄러져 갔다.

그를 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랜든 머서는 10분 후에 도착했다. 오늘 그는 이전의 유혹하는 것 같은 태도는 조금도 없이 창백하고 긴장한 표정이었다. 바지와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것이 보였다. 역시 낚시 도구 상자를 들고 있었으나 낚싯대와 릴은 없었다.

"에비, 임대보트가 있소?"

그는 초조한 듯 다급히 물었다. 그녀는 열쇠를 건네줬다.

"저쪽 끝에 있는 보트예요."

"고맙소. 돌아올 때 돈을 줘도 되겠소?"

질문과 상관없이 벌써 몸은 문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 내부에서 뭔가 폭발했다. 이제 충분히 참을 만큼 참았다. 머서는 분명히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고 있고 오늘은 낚시하러 나간다는 최소한의 꾸밈마저도 없었다. 계류장은 이제 그녀가 가진 유일한 것인데 그 사기꾼 같은 녀석이 마약 거래를 하면서 계류장을 진흙탕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죽어도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이제 참는 것은 끝났다.

트럭으로 가서 운전석 아래에 있는 권총을 꺼내 들고 보트로 가는 그녀의 머리 속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생각이 있었다면 경찰서나 수상경비대에 전화를 걸었을 테지만 그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그녀는 오직 한 가지만 머리에 떠올렸다. 머서를 멈추게 해야 한다.

로버트는 머서가 계류장에서 출발하는 것을 보고 그의 시선을 끌지 않게 조심하면서 멀리서 쫓아가기 시작했다. 추적장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너무 가까이 가서 머서와 그의 패거리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그는 천천히 거리를 두고 달렸다.

갑자기 왼쪽에서 다른 보트가 한 대 빠르게 다가왔다. 로버트가 비키지 않아도 될 정도의 공간은 있었다. 그 보트가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운전자의 긴 금발머리가 출렁거리는 것을 봤다.

에비!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놀란 그는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그는 순간 진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머서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가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그 뛰어난 직감으로 머서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테고, 직접 조사를 하려 했을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도 알았다. 그녀의 보트를 사용하는 것으로 머서는 계류장을 위험에 빠뜨린 것이다. 이 계류장을 구하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에비였다. 그렇게 사랑하던 집도 포기한 마당에 위험을 무릅쓰는 것쯤이야.

거칠게 욕설을 퍼부으며 그는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나오자 보트의 속도를 올리면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에비가 머서를 따라가고 있소. 그녀는 우리편이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실수로 그녀에게 총 쏘는 일은 하지 않게 하시오. 알았소?"

피가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그의 편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총 쏘는 일이 없겠지만, 그들의 적은?

머서는 다시 군도 사이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그가 섬에 다가가서 속도를 늦추면 그때 거리를 줄일 생각이었다.

권총이 무릎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총기소지 면허증도 있었고 사용법도 숙지하고 있었다. 머서가 무슨 일을 하든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두 개의 섬 사이에 두 명의 남자가 타고 있는 보트가 있었다. 머서는 평소처럼 섬 사이를 왔다갔다하지 않고 곧장 그 보트 쪽으로 다가갔다. 에비도 속도를 올리고 따라갔다.

머서는 그 보트 옆으로 다가가더니 즉시 낚시도구 상자를 건넸다. 두 남자 중 한 명이 그녀가 다가가자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봤고 머서가 뒤돌아보는 것도 봤다. 모자나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않아서 그녀가 여자인 걸 쉽게 알았을 것이다. 머서가 알아차려도 상관없었다. 이제 모든 것에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 되었다.

아마 여자 혼자라는 것이 그들의 의심을 누그러뜨린 것 같았다. 머서는 가만히 서서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봤다. 그들에게서 의심스러운 행동은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 그는 두 남자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 다음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에비, 뭐 잘못된 것 있소?"

그녀는 의심을 없애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아직 충분한 거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모터의 기어를 중간으로 해 놓고 천천히 보트를 움직여 갔다. 그리고 무릎에 있던 권총을 집어들고 낚시도구 상자를 들고 있는 남자를 향해 총을 겨냥했다.

"그 상자 내려놔!"

그녀가 크게 말했다.

남자는 망설이며 자신의 파트너를 봤고, 머서는 동작을 멈추고 그녀와 그녀의 손에 들린 커다란 총을 바라봤다.

"에비."

머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당신에게도 몫을 떼 주겠소. 이 일에는 굉장한 돈이 걸려있단 말이오."

그녀는 그를 무시하고 상자를 붙들고 있는 남자를 보고 말했다.

"상자를 내려놓으라고 말했잖아."

그녀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곤, 남자가 상자를 물 속으로 빠뜨리면 증거물은 가라앉을 테고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세 명의 남자를 상대로 세 대의 보트를 끌고 무사히 계류장에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오늘은 호수에 나와 있는 보트들이 많으니 누군가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보트가 그녀 뒤쪽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머서의 주의가 그쪽으로 쏠리고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지만 에비는 낚시도구 상자를 들고 있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검정 보트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고, 그 보트는 두 명의 남자가 타고 있는 보트로 다가갔다. 로버트였다. 그는 보트의 운전대를 무릎으로 누르고 역시 권총을 들어 세 남자를 겨냥했다. 흔들리는 보트였지만 양손으로 잡고 있는 권총의 겨냥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꼼짝 마!"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그를 돌아봤다. 도회적인 이미지는 아예 사라지고 그는 이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권총이 손의 일부인 양 들고 있는 그에게 권총은 아주 익숙한 무기인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고 눈빛은 사냥감을 앞에 둔 표범의 표정 그대로였다.

물결이 로버트의 보트를 밀었고 에비의 보트 역시 파고의 영향을 받았다.

"조심해요!"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후진기어를 넣었다. 두 보트는 서로 꽝 하고 부딪혔고 머서는 그 여파로 강속으로 빠졌다. 상자를 들고 있던 남자는 손을 들고 균형을 잡으려 하다가 상자를 떨어뜨렸다. 상자는 보트의 바닥에 떨어졌다. 로버트의 주의가 분산된 그 순간을 노려 상대편 보트를 운전하던 남자가 권총을 꺼내 들고 먼저 발사했다. 에비는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총을 다시 쳐들고 목표를 겨냥했다. 로버트는 얼른 옆으로 몸을 피했고 총알은 운전대를 가로막고 있던 유리창에 구멍을 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로버트도 총을 발사했고 상대편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두 번째 남자는 머서가 몰던 임대보트로 뛰어들었다. 머서는 보트 옆에 매달려 있다가 자신의 보트로 올라탄 남자가 시동을 켜자 공포에 찬 소리를 질렀다.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보트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움직이는 목표물을 제대로 쏠 것 같지 않자 그녀는 총을 내려놓고 모터를 전진기어로 바꾼 다음 뒤를 쫓아갔다. 곧 두 대의 보트는 운전대를 가로막고 있는 방풍 유리창이 부서질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부딪혔고, 그녀의 보트가 임대보트를 덮치듯이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자리에서 퉁겨 나와 물 속으로 떨어졌고, 충격으로 잠시 의식을 잃었다.

그녀는 곧 의식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충격으로 멍했다. 물 속으로 잠수한 그녀는 표면으로 떠오르려고 했지만, 그때 귀에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고 머리 위로 다가오는 진동이 느껴졌다. 보트였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 위험에 처했는지 알았다. 만일 운전자가 그녀를 보지 못한다면 보트는 그녀 위로 지나갈 것이고 그녀는 프로펠러에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수면 위로 떠오르려고 허우적댔다. 머리가 수면 위에 떠올랐고 그녀는 잠시 공기를 들이마셨지만 가까운 곳에 보트가 있어 다시 옆으로 잠수했다. 보트에 탄 사람이 크게 소리를 질렀고 로버트의 목소리도 들렸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귀속으로 물이 들어가고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여 두 대의 보트가 파손된 쪽을 보았다. 그쪽으로 움직여 임대보트의 옆구리를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붙들었다. 30분 정도 지나면 완전히 물 속에 잠길 테지만 지금은 어쨌든 물위에 떠 있었다.

그녀를 칠 뻔한 보트가 천천히 다가왔고, 거기에는 청바지와 셔츠차림의 두 남자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 옆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청바지 주머니에 달린 배지가 햇빛에 반짝였고 그녀는 비로소 임대보트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는 그녀를 보트 위로 끌어올렸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남자가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쇼 부인, 괜찮습니까?"

그녀는 완전히 지쳐서 헉헉거리며 숨을 쉬느라 대답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부상을 입은 건 아니고 그저 충격으로 혼미한 상태일 뿐이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남자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아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괜찮습니다!"

남자가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다.

천천히 혼란스러움이 진정되고 점차 의식이 또렷해졌다. 그녀는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바닥에 누워서 두 남자가 물 밖으로 건져지고 수갑이 채워지는 것을 봤다. 로버트의 총을 맞은 남자는 응급조치를 받고 있었다. 부상으로 신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의식이 있으므로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네 대의 보트가 더 도착했고 각각의 보트에는 두 명씩 남자들이 타고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청바지나 목 근처에 배지를 달고 있었고 그들 중 한 명이 머서에게 자신들이 FBI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소동을 보고 몰려든 낚시꾼과 어부들은 그들의 정체를 눈치채고 약간 떨어져서 구경하다가 어부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이 보트들을 끌고 가는 걸 도와 드릴까요? 원한다면 계류장까지 끌어다 드리죠."

그녀는 수사요원 중 한 명이 허락을 구하듯 로버트를 보는 것을 봤고 그러더니 대답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다른 어부들도 다가와 구조작업을 도왔다.

에비는 로버트가 몇 번이고 자신을 심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느꼈지만 그를 바라보고 싶은 충동에 저항했다. 죽을 때까지 그 남자가 로버트에게 총을 쏜 순간 느꼈던 공포를 기억할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눈앞에서 죽는 것을 다시 봐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날 하루 종일 느꼈던 절망은 그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게다가 그녀를 이용하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그는 살아있었다. 그녀는 다시 몸에 감각이 돌아오고 피가 도는 것 같았다.

뒷수습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총상을 당한 남자는 다른 보트에 옮겨져 두 명의 요원에게 맡겨졌고 머서와 다른 남자는 수갑을 찬 채 옮겨졌다. 파손된 두 대의 보트를 끌고 가려는 부산한 움직임이 있었고 그녀는 간신히 힘을 긁어모아 일어나 앉았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나자 로버트는 그의 보트를 에비가 탄 보트 옆에 댔다.

"괜찮소?"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그녀는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리, 이 보트를 가져가시오. 에비는 나와 함께 갈 거요."

이름이 불린 요원이 그녀의 보트에 옮겨 탔고 에비는 운전대를 넘겨야 했다. 로버트와 함께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 상황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리 오시오."

그녀는 바보처럼 굴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의 말을 따랐다. 그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사적인 문제를 말하고 싶어한다면 사적인 장소에서 말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그녀도 알았다.

계류장까지 가는 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보트는 매끄럽게 물위를 미끄러져 갔지만 보트가 조금만 흔들려도 그녀는 머리가 아프고 욕지기가 올라왔다.

로버트는 계류장에 보트를 정박시키고 그녀를 돌아봤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이런 젠장. 당신, 아프잖아!"

눈을 뜨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충격을 받아서 그래요."

아드레날린이 과다하게 분출되면 욕지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로버트는 일단 조용히 있으면서 주의 깊게 그녀를 살폈다.

에비는 선착장 갑판으로 올라섰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사무실로 걸어갔다.

에비가 들어갔을 때 카운터 뒤에 있던 버트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에비의 상태를 보곤 곧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원래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이지만, 걱정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트가 뒤집힌 거야? 몸은 괜찮고?"

버트가 한꺼번에 질문을 두 개나 하다니? 그녀는 잠시 달력에 오늘을 기록해 놔야겠다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괜찮아요, 그냥 좀 놀랐을 뿐이에요."

그녀는 오늘 하루 종일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해야 할까 잠깐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보트는 망가졌어요. 사람들이 끌고 올 거예요."

로버트가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버트의 표정이 다시 편안해졌다.

"그럼, 수리창고로 돌아가겠어. 보트가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한 시간쯤?"

로버트가 대신 대답했다.

"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는 자판기로 가서 동전을 넣고 음료수를 뽑았다.

"뭐, 상관은 없지.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니까."

버트는 그의 편안한 일터인 기름냄새 밴 수리창고로 갔다.

에비는 카운터 뒤로 걸어가서 앉았다. 로버트와의 사이에 장애물을 두고 싶었다. 물론 로버트에겐 통하지 않겠지만. 그는 카운터를 돌아와서 그녀에게 콜라를 내밀었다.

"자, 마셔요. 충격을 받았으니 단 것을 마실 필요가 있소."

그가 옳았다. 물 속에서 그녀를 구해 낸 뒤 설탕을 잔뜩 넣은 뜨거운 커피를 마시게 하던 그를 기억했다. 어깨를 으쓱한 그녀는 그의 앞에서 기절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억지로 콜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가 마시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보고 말했다.

"머서는 헌스빌에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 제작회사의 책임자요. 나사를 위한 프로그램을 제작 중이었는데, 그 프로그램은 국가기밀로 분류되는 것이었소. 그런데 그것이 나타나서는 안 될 곳에 나타났소. 머서가 훔쳐냈다는 확신은 있었는데 물증이 없었소."

"그 낚시도구 상자에 있었던 것이 그것이었겠군요."

그녀는 놀라서 말했다.

"마약이 아니라 컴퓨터 디스켓이었군요..."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가 마약 밀매자라고 생각한 거요?"

"그게 가장 그럴듯해 보였어요. 강 한가운데라면 누구도 그들 몰래 다가갈 수 없으니까. 경비대나 추적자의 눈도 피할 수 있고. 그럼 상자를 무겁게 해서 섬 사이 얕은 곳에 던져 놓아 다른 사람들이 나중에 그것을 가져가게 했겠군요."

"그랬을 거요. 하지만 그가 마약밀매자라고 생각했으면 왜 오늘 그를 따라간 거요?"

그는 위험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방 압수법 때문에요."

그녀는 간단히 대답했다.

"머서는 내 보트를 타고 있었고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었으니까요. 그 남자 때문에 계류장의 명성이 나빠지고 손님이 떨어질 테니까."

계류장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가 무슨 일이든 할거라는 생각에 그는 화가 치솟았다. 집을 팔고 그 위험한 남자 뒤를 쫓고. 그녀에게 일어날 수도 있었던 위험을 생각하자 그는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남자 세 명에 여자 한 명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가 다가가며 물결을 일으키기 전까지 그녀는 멋지게 현장을 장악하고 있기는 했다.

"그렇게 보트를 부딪히다가 죽을 수도 있었단 말이오."

"속도가 죽어 있어서 괜찮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내 보트가 더 크고요. 가스탱크가 터질까 봐 겁이 나긴 했지만 그건 뒤쪽에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까지 할 시간이 없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만큼 그녀가 한 행동은 즉각적이어서 그는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행동할 만큼 그녀의 보트에 대한 상식은 전문가였다. 그곳에 수사요원들이 밀어닥칠 것을 몰랐던 그녀로서는 범인들이 도망치려 한다고 생각했고 탈출을 막아야겠다는 결심뿐이었을 것이다. 로버트는 그녀가 바보인지 용기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쳐다보지도 않는 그녀였으므로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FBI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합해서 일하기 시작했고, 내 사설정보원들이 머서를 잡기 위한 덫을 놨소. 그가 투자한 부분에 문제가 생기게 만들고 그에게 재정적인 압박을 가해서 움직이게 하려는 계획이었소."

더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의 계획을 그녀가 이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겠군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가 계류장의 보트를 이용하고, 내가 그를 쫓아 나가서 공범이라고 생각했겠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신이 무고하다는 것은 알았소. 하지만 당신의 계속되는 의심스러운 행동 때문에 당신에 대한 압박을 멈출 수가 없었소."

"어떤 의심스러운 일이요?"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갑자기 물었다.

"그를 따라가려고 대낮에 계류장을 비운 일, 은행을 떠난 뒤 갑자기 공중전화로 전화를 한 것, 우리는 그 통화를 도청할 수가 없었소. 어제 당신을 따라갔던 사설정보원은 당신이 갑자기 유턴을 해서 사라지자 뒤를 쫓지 못했고..."

에비는 웃었지만, 그 웃음은 씁쓸한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의심스러운 마음은 정말 의심을 불러일으키는군요. 담보대출이 두 번째로 거부되었을 때 나는 누군가 대출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절대로 계류장을 잃을 수는 없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을 파는 것뿐이었죠. 그때 바로 전화를 하지 않으면 그럴 용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공중전화를 보자마자 곧바로 전화를 한 거예요. 내 집을 사고 싶다고 몇 번이나 물어 온 부부가 있었거든요. 그들은 너무나 그 집을 원해서 혹시 내가 마음을 바꿀까 봐 즉시 현찰을 지불했어요. 그리고 어제는..."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살 곳을 알아봐야 했어요. 더 오래 끌면 상황만 나빠질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집을 보러 다니다가 마침내 결정을 했고,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가서 계약을 했어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면서 그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끝없이 고통을 받는 것보다는, 때론 아프지만 단번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나았다. 절박한 상황에서 내린 아무 죄 없는 행동 때문에 의심을 받아야 했다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계류장을 원한다고 생각했어요. 이유는 몰랐는데... 내게는 소중하지만 투자할 사업을 찾자면 훨씬 크고 수입도 좋은 계류장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반역자라고 생각했군요. 그래서 나를 감시하려면 우리가 거짓으로라도 연인 사이가 되어서 함께 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건가요?"

이 부분은 정말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거짓의 연인 사이는 없었소."

"달도 항상 동그랗지만은 않죠."

그녀는 대답하면서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지켜 낸 자신의 왕국을 창 너머로 바라봤다.

"압류를 실행에 옮길 생각은 전혀 없었소."

그는 말했다.

"그저 압박의 수단이었을 뿐. 그리고 당신이 죄가 있더라도 고발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소."

"정말 친절하군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를 마주보고 서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당신이 상처를 입었고 화가 난 것은 알지만, 머서가 잡힐 때까지는 압박을 늦출 수가 없었소."

"이해해요."

"그런 거요? 정말 감사할 일이군."

그는 안심이 되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국가안보는 개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 분명 중요해요. 달리 방법이 없었을 테니."

그녀의 음성에는 여전히 아무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아직 넘어야 할 장애물이 더 있음을 알았다. 집 문제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당신 집에 대해선 미안하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의 계획을 알았다면 어떻게든 막았을 텐데."

그는 그녀의 볼을 잡고 그녀를 쳐다봤다.

"당신 집을 다시 돌려줄 순 없지만 대신 내 집을 당신에게 주겠소. 당신 이름으로 명의를 양도하겠소."

그녀의 몸이 굳더니 그의 손에서 얼굴을 빼냈다.

"아니, 싫어요."

그녀는 차갑게 말하고는 다시 등을 돌리고 창 밖을 내다봤다.

그녀가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한 그는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집에 대해 먼저 얘기한 것에 화가 났다.

"동정에서는 아니오."

그는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등뒤에 서서 뒷목덜미에 손을 대고 단단하게 뭉친 근육을 풀어 주듯 부드럽게 문질렀다.

"가족 소유가 될 것이니 전혀 문제될 것도 아니고. 에비, 나와 결혼해 주겠소? 당신이 이곳을 사랑한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 서로 양보합시다. 당신 언니 가족에게서 당신을 완전히 결별하게 하지는 않겠소. 이곳 집은 휴가 때 이용하고 매년 여름이 되면 이곳에서 긴 휴가를 갖는 거요. 그리고 때때로 방문할 수도 있고."

그녀는 그에게서 떨어져서 그를 마주 보고 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 아예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는 광채가 없었다. 매트가 죽고 난 뒤 그녀의 표정을 설명하던 베키의 말을 떠올린 그는 한기가 돌았다. 에비의 눈동자에서 본 것은 감정적인 황무지였고 그는 뼛속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다른 모든 일들처럼 이 일도 역시 당신 편할 대로 협상하자고 하는군요. 그보다 더 나은 해결책을 알려 드리죠. 당신은 그냥 뉴욕에서 살면 돼요. 나는 여기서 계속 살 테니. 그러면 우리 두 사람 모두 더 행복할 거예요."

"에비..."

그는 말을 멈췄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물론 오늘 일어난 일들 때문에 아직 정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는데 그는 그녀에게 상처를 줬다. 어떻게든 그녀가 다시 그를 믿을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안 돼요!"

그녀가 격렬하게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를 조정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아요. 당신은 지나치게 똑똑하고 너무 교묘해요. 당신에게 소중한 것이 있나요?"

그녀는 손을 벌리며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있는 곳은 그쪽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저쪽에 있죠. 어떤 사람도, 그리고 그 무엇도 당신에게 가까이 가지 못해요... 당신은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요. 여전히 당신의 마음은 깊은 곳에 숨겨 두고 멀리서 나를 지켜보면서 꼭두각시 움직이듯 나를 조정하려 들겠죠. 매트와 내가 한 사랑은 진짜였어요. 진정으로 사랑과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였다구요! 어떻게 당신이 주는 그 가짜로 내가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잠시 몸을 떨었다.

"로버트, 제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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