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사랑 에반젤린-16화 (16/19)

16장

월터와 헬렌 캠벨은 육십대 중반의 은퇴한 중산층 노부부였다. 에비의 집은 튼튼하게 지어진 소형주택으로 호숫가에 새로 지은 다른 집들처럼 비싸지 않아 그들에게 딱 알맞았다. 기대하지 않은 이 커다란 행운에 그들은 아이들처럼 기뻐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에비에게 집을 팔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에비가 워낙 확고해 내심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약속보다 30분 일찍 계류장에 도착했고, 부동산 중개인도 두툼한 서류봉투를 들고 동행하고 있었다. 한 번도 집을 팔아 본 적이 없었던 에비는 작성해야 할 서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에 놀랐고 중개인이 하루만에 이 모든 서류를 준비했다는 것에 더욱 경탄했다.

모두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모두 카운터 주위에 모여 섰고, 중개인이 각 서류의 용도를 설염하고 먼저 에비의 사인을 받고 그 다음 캠벨 부부가 사인하는 식으로 계약은 진행되었다. 한 시간쯤 지난 뒤 모든 서류의 사인이 끝나고 계약은 성립되었다. 에비는 집을 팔았고, 손에는 대신 수표를 쥐었다.

그녀는 기쁨에 넘치는 캠벨 부부를 미소를 띈 채 배웅했지만, 문이 닫히자 그녀의 미소는 씻은 듯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어제 전화를 걸고 나서부터 생긴 슬픔을 이기려는 노력으로 온몸에 경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아무 곳에서나 살아도 된다고 자신에게 말했지만 그녀가 방금 결별한 것은 자신이 꾸민 가정이고 바로 그녀의 일부분이었다.

하지만 계류장은 보다 중요한 생활의 터전이었고, 지금 손에 들린 수표는 바로 그 계류장을 구하는 자금이었다.

그녀는 눈에서 새어나오는 물기를 억지로 닦으며 어깨를 곧추세웠다. 버트에게 전호를 걸어 은행에 갔다가 30분 후에 돌아올 테니 그 동안 사무실을 봐 달라고 말했다. 언제나처럼 그는 아무런 질문 없이 알았다고 했다.

은행에서의 절차는 더욱 간단했다. 월터에게서 받은 수표를 그녀 계좌에 입금하고 다시 대출 금액만큼의 수표를 끊었다. 토미 파울러는 그녀가 출납계에 서있는 것을 보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에비, 상황은 어때?"

그녀는 그의 음성에서 걱정스러움을 듣고는 캠벨 부부에게 보였던 것 같은 미소를 억지로 지었다.

"괜찮아. 대출금을 상환할 자금이 생겼어."

토미의 표정이 밝게 펴졌다.

"잘됐다! 오래 걸리지 않았군. 다른 은행에서 담보대출을 받은 거야?"

"아니, 집을 팔았어."

그는 충격으로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

"집을 팔았다고? 에비, 하지만...왜?"

주변에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누군가 악랄하게도 자신의 대출 통로를 막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최근에 계속 생각하던 것이었어. 이제 계좌에 예금도 충분하고 계류장은 아무 빚이 없으니 이익이 생기면 다른 집을 찾아보면 돼."

토미의 얼굴에 여러 가지 표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마지막에 떠오른 안심하는 표정을 보고 에비는 그가 자산의 거짓말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일이 잘됐다고 해야겠네."

그가 말했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띈 채 말했다.

"응, 그렇다고 해야겠지."

출납원이 그녀에게 수표를 내밀었고, 그녀는 그것을 봉투에 넣었다.

"오늘 수표를 특급우편으로 부칠 예정이야."

그녀는 토미에게 말했다.

"한 일이 없는데..."

그가 대답했다.

"아니, 그래도 노력해 줬잖아."

그녀는 은행을 떠나 곧장 우체국으로 차를 몰았고 그 소중한 봉투는 특급우편으로 부쳐졌다. 모든 일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고비를 넘겼고, 쉽지는 않았지만 이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로버트는 계류장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오는 거요?"

그녀가 트럭에서 내리자 그쪽으로 걸어와서 물었다.

그녀는 그의 격렬한 목소리에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로버트는 침대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좀체 감정을 드러내는 적이 없었다.

"은행과 우체국이요, 왜요?"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입술이 거칠고 애타게 그녀를 찾았고, 그건 반응을 끌어내려 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 같은 키스였다. 에비는 놀라서 억눌린 소리를 지르며 그의 가슴에 손을 댔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혀를 밀어 넣었고 그녀의 입술은 그의 입술에 삼켜졌다.

온통 근육질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힘에 그녀는 속절없이 그에게 끌려들었다. 힘들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난 후 소용돌이치듯 돌아가는 그녀의 인생에 비해 그는 굳건한 바위처럼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의존하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경계하고 거부하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의 존재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됐다.

그의 친숙한 몸에서 위로를 받았다. 따스하고 미묘하게 느껴지는 그의 향이 그녀를 흥분시켰다.

사방이 트인 주차장에 서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는 몸을 뒤로 뺐다. 사무실에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들락날락해서 별로 나을 것도 없었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면서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리고 스치는 표정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자세히 살펴봤다. 그녀의 눈에 떠오른 욕망의 그림자에 만족했는지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빌어먹을! 여기선 안 되고 집에 가자마자..."

굳이 말을 끝낼 필요도 없었다. 그의 얼굴과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격렬하고 강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을 생각한 에비는 반쯤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돌아보고 그의 손안에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집으로 갈 수 있을까?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있을지...

그녀의 몸이 기대감으로 떨려왔다.

나머지 오후 시간은 자제력을 시험하는 긴 시간이었다. 여름의 낮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으면 싶기까지 했다. 그녀는 로버트가 필요했다. 그녀 안으로 미칠 것 같은 정열로 밀고 들어와 모든 현실을 잊게 해주는 망각의 마법이 필요했다.

마침내 시간이 되어 계류장의 문을 닫았지만 평소 스케줄대로 움직이기는 어려웠다. 로버트는 즉시 그의 집으로 그녀를 데려가고 싶어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계류장에 트럭을 밤새 새워 두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말했다.

"이른 새벽에 이곳까지 나를 데려다 주거나, 아니면 내가 일하러 갈 오후 시간까지 줄곧 같이 있으면서 시간을 낭비해야 하잖아요."

"시간낭비라니, 그럴 리 없소."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고 그녀는 그가 그 아침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상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혹이 마음을 약하게 했지만 그녀는 다시 머리를 저었다.

"여기 밤새 트럭이 서 있으면 너무 속이 뻔히 보여요. 게다가 당신이 나를 데려다 줄 테고 크레이그가 그걸 보면..."

"우리가 함께 자는 것을 크레이그가 알까 봐 걱정하는 거요?"

재밌다는 듯 그가 물었다.

"에비, 크레이그는 벌써 열일곱 살이란 말이오, 일곱 살이 아니라..."

"알아요. 하지만 이곳은 뉴욕이 아니라구요. 이곳 사람들은 보수적이기도 하고..."

그는 계속 미소지었지만 곧 기분 좋게 양보했다.

"좋소, 크레이그의 민감한 감수성을 생각해서 내가 양보하지. 비록 사춘기 남자애들의 감수성이란 잔뜩 흥분한 코뿔소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웃어 버렸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다소 나아졌다.

"그럼 그냥 내가 편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 두죠."

그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럼 집에 가 있으시오. 아까 쇼핑 가서 안심 스테이크를 사 왔는데 당신을 데리러 가기 전에 해동해 놓겠소."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먼저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해요. 내가 직접 차를 몰고 가면 시간이 더 절약될 거예요."

그는 미소지으며 그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애무하듯 매만졌다.

"당신과 있으면 내가 바로 그 호르몬 왕성한 사춘기 소년 같은 코뿔소가 된 느낌이오."

그는 중얼거렸고 그녀는 얼굴이 빨개졌다.

집까지 운전해 가는 동안 그녀의 피는 기대로 뜨거워졌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녀는 슬픔을 잊었고, 그의 이름을 속으로 되새기는 심장은 빠르게 고동쳤다.

너무 날씨가 더워서 긴 바지를 입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반바지도 싫었다. 그녀는 대신 얇은 하늘색 치마와 소매 없는 셔츠를 입었다. 글 하늘색 치마는 속이 훤히 비치는 것으로 시원하고 몸에 달라붙지 않는 천이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라면 도저히 입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로버트의 집에서라면...한 번 입어 볼 만했다.

그는 트럭소리를 듣고 직접 현관문을 열어 줬다. 그를 향해 걸어오는 그녀를 보는 그의 얼굴이 팽팽하게 긴장됐다.

"오, 이런..."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문을 쾅 닫고 그녀의 팔을 잡고는 곧장 복도를 가로질러 침실로 향했다.

"스테이크는 어떻게 하구요?"

그녀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스테이크 따윈 개나 줘 버리자구."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고 팔을 둘러 그녀를 안고 침대로 쓰러졌다.

그의 육중한 체중이 그녀를 그대로 매트리스에 내리눌렀다. 그는 단번에 그녀의 치마를 허리까지 밀어 올리고 팬티를 벗겨 옆으로 던졌다. 그리고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고는 그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전신이 찌릿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성급한 손가락으로 찢어 버릴 듯이 허리띠를 풀고 지퍼를 더듬어 내렸다. 그리고 채 옷도 벗지 않고 자신의 남성을 그녀의 다리 사이에 갖다 댔다.

그녀는 헉 소리를 내며 충격으로 몸을 들어올렸다. 아침의 고삐 풀린 것처럼 거칠었던 섹스의 여파로 다소 얼얼한 상태였는데도 밀려들어오는 그의 남성이 그녀의 속을 가득 채우자 강렬한 쾌감 때문에 온 몸을 버둥거려야 했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그의 등에 손톱을 박았다고, 폭풍처럼 몰아닥치는 쾌감이 계속되자 지금 멈추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가가을 했다.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귀에 뜨거운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다.

갑자기 경력을 일으키며 그가 절정의 순간을 맞이했다. 잠시 후 그는 그녀 위에 널브러졌고, 두 사람 모두 깊이 숨을 몰아쉬며 지친 여운을 나누었다. 나른해진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려다가 갑자기 그가 웃음을 터뜨리자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정말 사춘기 소년처럼 행동했어."

중얼거리며 로버트는 그녀의 귓바퀴를 이 사이에 물고 가볍게 깨물었다.

"아무리 당신을 가지고 또 가져도 몸을 떼자마자 다시 당신을 원해. 내가 만족하는 순간은 우리가 이렇게 이어져 있을 때뿐이오."

그는 나른하게 몸을 앞으로 밀었다.

"그럼, 이렇게 하고 있어요."

그녀는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셔츠 아래로 전해지는 그의 열기를 느꼈다.

"2주쯤 지나면 사람들이 우리를 발견하겠죠."

그가 웃으며 키스했다.

"아마 정말 멋지게 죽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는 생생하게 살아서 이 기쁨을 오래도록 나누는 것이 좋으니 당신의 위장을 먼저 채워 줘야겠지?"

그는 다시 키스를 하고 몸을 굴려 일어났다.

오후의 고통스러웠던 욕구불만이 풀리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비록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가슴속의 공허함이 어느 정도 희미해졌다. 그의 뼛속 깊이까지 연결된 그런 느낌이었다.

그들은 이어지는 저녁 시간을 스테이크를 구워 먹고 뒷정리를 한 후 바깥 베란다에 나가 밤하늘을 보며 보냈다. 밤 기온은 여전히 높았다. 로버트는 베란다에 놓인 안락의자에 몸을 길게 뻗고 에비를 자신의 몸 위에 올려놨다. 집에 불을 켜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 주위는 마치 어둠이 담요처럼 감싼 것 같았다. 그렇게 평화로운 침묵 속에 가만히 누워서 그의 손은 천천히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그의 손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할수록 에비는 그에게 녹아들었다. 그녀의 셔츠가 머리 위로 벗겨지고 베란다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속옷을 입고 있지 않은 상태여서 그의 손이 치마 밑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그녀의 맨 허벅지와 엉덩이 살을 그대로 만질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탄력 있는 엉덩이를 손으로 감싸고 어루만졌다.

"당신은 너무 많이 옷을 입고 있어요."

그의 턱 아래에 키스하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고."

"누가 저지른 일이죠?"

그녀의 입술이 그의 목덜미를 살며시 깨물었다.

"여기 도착했을 때 나는 제대로 차려입고 있었어요."

"에비, 그렇게 말하면 안 돼지. 포도알처럼 셔츠위로 튀어나와 있진 않았어도 당신이 걸을 때마다 그 달콤한 봉우리가 흔들려서 브래지어를 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너무 확실했다고. 그리고 이것...이것은 치마라고 부르기가..."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입술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에 그는 그녀를 위로 올려 깊은 키스를 했고, 그 동안 그의 옷도 벗겨졌다. 기쁜 듯한 한숨을 쉬며 그녀는 치마를 들어올리고 그의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안으로 밀려들어오자 그녀는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그렇게 다시 서로 연결된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어져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호수 위에는 밤낚시를 나가는 보트들의 불빛이 켜져 있었지만 그들은 어둠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렇게 가만히 있기가 힘들어졌다. 깊숙한 곳에서 물결치는 것 같은 충동이 점점 켜져 갔다. 참으려고 했지만 그도 같은 충동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점점 단단해지는 그가 가득 그녀를 채우고,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는 그의 전신이 점점 탱탱하게 긴장했다.

그녀는 이마를 그의 턱에 밀어붙이고 마구 움직이고 싶은 충동과 싸웠다. 그가 그녀 안에서 떨었고 그녀는 부드럽게 신음을 흘렸다. 그를 감싼 그녀의 속살이 참을 수 없는 쾌감에 조여들었고 다시 또 경련처럼 떨려 오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작은 신음을 흘렸다. 엄청난 자제력으로 로버트는 그녀의 엉덩이를 세게 붙잡았지만 참을 수 없는 욕망이 몰아치자 이를 악물었다. 죽은 힘을 다해 참느라 그의 이마에선 땀이 솟아났다.

그녀의 떨림이 진정되자 그는 그녀를 들어올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거세게 몰아붙이자 그녀는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그녀 안에 뜨거운 자신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꼭 안 채 숨이 잦아들고 심장이 제대로 뛸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흩어진 옷가지들을 주워 그녀의 팔에 안겨 준 뒤 그녀를 들어올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넓은 침대에 누웠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잠을 잤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고, 로버트는 그녀를 세게 끌어안은 뒤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워 줬다. 평소처럼 새벽에 잠시 깨어 침묵 속에서 천천히 사랑을 나누고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던 그들이었다.

그는 재빨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녀의 엉덩이를 살짝 두들겨 준 뒤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러 갔다. 에비는 다시 하품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셔츠를 입고 부엌으로 커피를 만들러 갔다.

"로버트, 예약이 되는 커피메이커를 사는 게 어때요?"

그녀는 커피를 필터에 떠 넣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물론 침대로 가기 전에 미리 예약 타이머를 켤지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햇살이 밝게 들어오는 부엌에서 커피가 부글거리며 걸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진 것을 알았다. 그 기분을 오래 간직하려는 듯 그녀는 팔로 자신을 감싸 안았다.

자신이 행복하다는 생각에 잠시 놀랐다. 집을 팔았지만, 그녀는 행복했다. 계류장을 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녀에겐 로버트가 있었다.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깊어져졌다. 그는 복잡하고 자제력 강하고 사생활을 숨기는 남자였다. 자주 그녀를 사랑해 주면서도 여전히 깊은 내면을 보여주지 않았고 그녀를 포함해 그 누구도 안으로 들여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는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끝까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한 여자에게 줄 수 있는 감정이 그것뿐이라면 그녀는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었다.

벨 울리는 소리가 침묵을 깼다. 전화 벨소리 같았지만 부엌에 있는 전화는 아니었다. 로버트가 사무실로 쓰고 있는 서재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샤워 중인 그는 듣지 못했고, 한 번 울리더니 소리가 멈춘 것을 보면 응답기가 대신 전화를 받은 것 같았다.

그녀는 복도를 지나 사무실로 가서 문을 열었다. 팩스에서 위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가 아니라 팩스였구나.

종이가 나오자 소리는 멈췄고 다시 조용해졌다. 몸을 돌려 나가려다 그녀는 언뜻 종이에서 자신의 이름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호기심에서 그녀는 몸을 돌렸다.

내용은 간단했다.

보로위츠 씨가 에반젤린 쇼의 수표를 받았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대출금 전액이 특급우편으로 그에게 도착했다는 소식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의를 해 왔는데, 어찌할까요?

마지막에는 쿠어리란 사인이 있었다.

에비는 종이를 들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녀는 멍청하게 그냥 내용만을 읽었다. 이 쿠어리라는 사람이 왜 로버트에게 그녀가 대출금을 상환했다는 보고를 한 걸까? 왜 보로위츠라는 사람은 그것을 보고해야 했던 걸까? 로버트는 그녀가 대출금 독촉을 받은 것은커녕 대출금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이 갑자기 중지되고 숨도 함께 멈췄다. 욕지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지 못하게 방해한 사람이 로버트이니, 당연히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라는 진실이 그녀의 뇌리를 쳤다. 그가 바로 그녀의 은행에서 처음 대출금 채권을 사들이고 보로위츠에게 대출금을 상환하라는 편지를 보내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녀의 연인이 바로 그녀의 적이었다니.

가슴에 통증이 왔다. 숨을 몰아쉬었지만, 고통스러워 그녀는 헉헉거렸다. 배신감으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생각한 것보다 로버트는 아주 많이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이 정도의 일을 꾸민 걸 보면.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가 정말 그녀의 계류장을 원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상황이 좀더 명확해지면 그때는 모든 사실이 이해될는지.

지금 현재 이해할 수 있는 건 로버트가 그녀의 계류장을 빼앗으려했고 그 결과 그녀의 집이 없어졌다는 사실뿐이었다.

그에게 느꼈던 거리감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에겐 모두 사업일 뿐이었으므로 당연히 그의 마음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기 위해서 그녀를 유혹했던 걸까? 그가 한 일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세게 깨문 탓에 그녀의 입술에선 감각이 없어졌고 문을 닫고 사무실을 나가는 그녀의 다리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그 재수 없는 팩스는 손에 들려 있었다.

비통함이 그녀를 짓눌렀다. 자신을 냉혹하게 파괴하려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으니, 이 얼마나 비꼬인 운명인지! 그는 이 문제를 그녀와 같은 시각으로 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겐 한 편의 사랑이야기가 아닌, 그저 성공적인 사업의 일환일 뿐일 테니.

샤워소리가 멈추었다. 그녀는 천천히 팩스 종이를 접어 쓰레기통에 넣고 커피를 따랐다. 절실하게 카페인이 필요했다. 자극을 줘서 몸을 움직여야 했다. 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잠시 후 로버트가 청바지만 입고 맨 가슴을 수건으로 문지르면서 부엌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그는 전신의 세포가 반응하는 것을 느끼며 멈춰 섰다. 황금빛 금발이 헝클어진 채 등뒤로 쏟아져 내린 모습은 숨을 앗아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그의 셔츠만을 입고 있었고 단추도 열린 채였다. 그는 남자의 셔츠를 입은 여자보다 더 섹시해 보이는 여자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조각처럼 굳은 얼굴에 무언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는 타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녀에게 가서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고 그녀가 마시던 컵을 빼앗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는 커피 잔에 묻은 입술 맛만으로도 수많은 군중 속에서 눈을 가리고 그녀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 곡선을 매만지며 그 실크처럼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을 즐겼다.

"에비, 당신도 샤워하시오."

"알았어요."

자동적으로 답했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그녀의 관심을 끄는 것이 뭔지 보기 위해 창 밖을 내다봤다. 몇 개의 보트가 떠다니는 것 외엔 늘 그렇듯 넓고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뭘 보고 있는 거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호수를 봤어요."

그녀는 그의 품을 벗어나 부엌을 나갔다.

로버트의 눈썹이 어리둥절해서 올라갔지만, 그는 배가 고팠고 아침식사 준비를 해야 했다.

에비가 옷을 다 차려입고 차 열쇠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막 베이컨을 구우려던 참이었다.

"당신이 샤워하는 중에 팩스가 왔어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는 몸을 돌려 그녀의 얼굴에서 전에 보지 못하던 표정을 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창백하고 표정 없는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갑작스런 소름과 함께, 차 사고에 대해서 베키가 한 말이 기억났다. 이런 표정이었을까?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 보여서 마치 그 자리에 그녀의 영혼이 없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서 온 거요?"

그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꼽아 보면서 가능한 차분하게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그녀가 머서와 연관된 것이 들통났다는 것과, 그들에게 덫이 점점 조여들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아 버린 것이었다.

"쿠어리라는 사람에게서요."

"아."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도하는 숨을 감췄다.

"내 비서요."

머서와 상관없는 업무에 대한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왜 에비는 저렇게 차갑게 얼어붙은 것일까?

"거기 쓰레기통에 있으니 봐요. 하지만 내가 말해 줄 수도 있어요."

그는 수납장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좋소, 말해 보시오."

"보로위츠 씨가 에반젤린 쇼의 수표를 받았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대출금 전액이 특급우편으로 그에게 도착했다는 소식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의를 해 왔는데, 어찌할까요?"

로버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는 속으로 격한 욕설이 튀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보안의 관점에선 머서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으므로 피해가 덜했지만 연인에게 해야 할 설명으론 최악이었다. 이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기를 정말 원하지 않았다. 압박은 진짜 같았지만, 그녀의 계류장을 정말로 압류할 생각은 없었다. 설명보다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선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에비가 그 돈을 마련한 걸까?

"내가 집을 담보로 돈을 마련할 수 없게 한 배후인물이 당신이죠?"

그녀의 음성은 너무 작아서 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녀는 모든 일을 추측하고는 사실들을 꿰어 맞춘 것 같았다. 처음부터 만만치 않은 영리한 여자였다.

"그랬소."

거짓말로는 해결이 안 된다고 생각한 그는 진실을 말했다.

"처음에 대출금 채권을 사들인 사람도 당신이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기다렸다.

열쇠를 너무 세게 쥐어서 그녀의 손가락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그녀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녀는 잠시 숨을 들이쉬더니 다시 얘기하기 시작했다.

"오늘 중으로 당신의 보트를 계류장에서 가지고 가 주길 바라요. 임대보증금을 돌려주겠어요."

"아니."

그는 반대가 허용되지 않는 목소릴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계약을 그대로 지켜 주길 바라오."

그녀는 이길 수 없는 논쟁을 하느라 헛수고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그 정도의 양심은 있기를 바랐지만 그의 냉혹함을 고려하면 소용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럼 마음대로 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눈빛만큼이나 공허했다.

"하지만 다시는 전화하지 말아요. 당신과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보기 싫으니 곁에 다가오지도 말아요."

그녀가 쌓는 벽을 허물 수 있는 길을 찾아 그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그렇게 쉽게 나를 버릴 수는 없소. 당신이 화났다는 것은 알지만..."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공허한 소리였다. 로버트는 주춤했다.

"어떻게 나를 처리할 건지 결심한 건가요? 당신이 나를 살피는 것을 알아요. 어떻게 나를 달랠 건지, 어떤 각도로 내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그녀는 말했다.

"그냥 반응을 보인 적이 없죠? 먼저 관찰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그들을 조정하죠?"

목소리가 갈라질 것처럼 느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뇨, 단순히 화가 난 게 아니에요. 아마 50년쯤 지나면 그때는 화가 좀 났다고 느낄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돌아서서 문 쯕으로 향했다.

"에비!"

그의 음성이 채찍처럼 날카롭게 들려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서서 몸을 떨었다. 지금 말하는 사람은 냉정한 책략가가 아닌 무자비한 정복자였다.

"어떻게 대출금을 상환한 거요?"

음성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천천히 어깨 너머로 그를 돌아보는 에비의 눈은 어둡고 고통으로 황폐했다.

"집을 팔았어요."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걸어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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