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사랑 에반젤린-15화 (15/19)

15장

"아침에 같이 낚시하러 가겠소?"

로버트는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은근하게 그녀에게 물어봤다.

"함께 보트 타고 나간 적은 없잖소."

아침 6시30분이었다. 불볕더위가 연일 계속되고 수은주는 35도를 오르내려 며칠 내로 40도까지 올라갈 것 같았다. 이른 아침 시간인데도 상당히 더울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버트는 방금 그녀를 절정에 오르게 했고 그녀의 마음은 그 여운으로 나른한 상태였다. 새벽이 되기 전 그녀를 깨워 평소보다 더 오래 시간을 끌며 사랑해 주었다. 그녀의 전신은 아직도 쾌감이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그는 단단한 팔에 그녀의 머리를 안고 있었고 다른 팔은 그녀의 복부에 소중한 듯 놓여 있었다.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다시 그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잠을 자거나 로버트가 그녀를 사랑해 줄 때만 그녀는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쾌감이 잦아들기 시작하자 다시 평상시처럼 가슴이 아련하게 아파 왔다.

"그럴 수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오늘 할 일이 있어요."

살 곳을 찾아야 했다. 월터와 헬렌 캠벨 부부는 그녀의 집을 사는 기회를 단번에 수락했다. 먼저 현찰을 지불하고 계약서를 서명하겠다고 했다. 혹시라도 그녀의 마음이 변할까 걱정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에비는 2주 내에 집을 비워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직 로버트에게는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 먼저 임대 아파트나 살 집을 계약하고 나서 그에게 말하는 것이 나았다.

베키에게도 역시 말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이직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사를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눈물이 솟았다. 이 문제 대해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또 자신에게 재정적인 압박을 가하는 인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먼저 계류장을 구하고 살 집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문제가 해결되면 그때,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을 꼭 찾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무슨 일인데?"

그는 그녀의 귀를 이로 애무하며 물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복부를 사랑스러운 듯 매만지다 다시 왼쪽 젖가슴 쪽으로 옮겨갔다. 그녀의 숨소리가 깊어지기 시작했다. 익숙해지게 되면 반응이 좀 약해질 법도한데 그녀는 점점 더 깊이 그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영수증 지불할 것이 있고, 쇼핑도 해야 해요."

그녀는 그가 왜 묻는지 궁금해하며 거짓말을 했다. 그녀의 생활 속에 점점 깊숙이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오는 그였지만 그들이 함께 있지 않을 때 그녀의 행동에 대해서 물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내일까지 미루면 안 되겠소?"

그는 더욱 뜨겁게 그녀의 귀를 애무했고, 다시 쾌감에 떨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럴 수 없어요."

그녀는 아쉬운 음성으로 같은 대답을 했다. 그는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유두를 잡아 빙빙 돌리며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날카롭게 욕망이 밀려오자 숨을 멈춰야 했다.

"확실하오?"

그는 중얼거리며 그녀의 목 아래 움푹 파여 맥박이 뛰는 곳에 입술을 대고 중얼거렸다.

이런 더위에 낚시를 하러 가는 것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 내내 그와 함께 침대에 누워 사랑을 나누는 것에는 마음이 끌려 그녀는 모든 힘을 긁어모아 거절을 해야 했다.

"음, 확실히 안 돼요."

그녀는 강하게 말했다.

"오늘 꼭 해야하는 일이에요"

다른 남자라면 데이트 신청이 거절된 것에 대해 기분이 상했을 텐데 로버트는 단지 한숨을 쉬고 머리를 그녀의 몸에서 들어 베개로 옮겼다.

"그럼, 일어나야겠군."

"그래요."

그녀는 몸을 돌려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고 말했다.

"하지만 먼저 잠시 꼭 껴안아 줘요."

그는 강한 팔 힘으로 그녀를 안았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요?"

"아뇨, 아무것도."

그녀는 속삭였다.

"그저 당신이 꼭 안아 줬으면 싶을 뿐이에요."

그녀는 그의 근육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그가 그녀 위로 몸을 굴려 올라갔고, 그의 허벅지가 그녀의 다리를 넓게 벌렸다. 놀란 그녀는 그의 가늘어진 초록빛 눈동자를 올려다봤다.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그의 내부에 잔뜩 억제된 난폭한 힘을 느꼈다.

"왜..."

그녀는 질문을 꺼내려 했다.

그는 단번에 그녀 속으로 들어왔고 그 강한 힘에 그녀의 몸은 활처럼 휘며 진동했다. 조금 전에 절정을 넘은 그였지만 그녀 안에 들어온 그의 남성은 처음 시작하는 것처럼 단단해서 그녀는 살이 부딪히는 충격에 멍이 들 것 같았다. 그녀는 헉 소리를 내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첫날밤 이후 이렇게 강한 힘으로 그가 그녀에게 들어온 적은 없었다. 여성 본연의 두려움 밀려왔지만, 동시에 본능적인 쾌감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두렵다 해도 실제로 상처가 날 정도는 아니었고, 그녀는 이 위험할 정도로 난폭하고 야성이 넘치는 남자를 자신이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도전의 기회로 삼기로 했다.

욕망이 봇물 터지듯 밀려왔다. 그녀는 손톱을 그의 근육이 뭉쳐진 엉덩이에 찌르듯 박고 그를 더욱 깊이 끌어당겼다. 그의 전부를 받아들이기 위해 엉덩이를 더욱 높이 들어올렸다. 미칠 것 같은 쾌감이 몰려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에비는 그를 더욱 꼭 붙잡고 그의 강한 남성적인 힘 못지 않은 강한 힘으로 그를 조이며 더욱더 안으로 끌어들였다. 쾌감이 미칠 것처럼 소용돌이치자 이성을 잃은 그녀는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는 낮고 거칠게 소리지르면서 팔을 그녀의 엉덩이 아래로 밀어 넣어 더 위로 들어올렸다.

절정에 오르자 그녀는 거칠게 경련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 역시 절정의 순간이 휘몰아치자 모든 동작을 멈추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둘은 마치 한 몸이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절정에 올라 정신을 잃었다.

빙빙 돌던 방안이 제자리에 멈췄고 천천히 그녀는 제정신이 들었다. 그들이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점차 잦아드는 것도 들었다. 그의 심장박동은 거세게 고동치다가 천천히 그녀와 똑같은 리듬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들의 육체는 뜨거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온통 땀범벅이 되었다.

이번 사랑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강력한 힘의 분출과 속도로 그녀는 어느 때보다 더 지쳐 버렸다.

왜 그렇게 그는 흥분이 되었을까? 그들이 함께 보낸 첫 밤 이후로 로버트는 자상하고 다정하게 그녀를 배려하는 연인이었다.

그가 계속 위에서 누르고 있어 그녀는 숨쉬기가 곤란했다. 그녀가 답답한 신음을 흘리자 그는 체중을 옮겨 옆으로 내려왔다. 초록빛 눈이 떠졌지만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그의 입술에는 냉혹한 표정마저 감돌았다.

"오늘 나와 함께 있어 주겠소?"

그가 다시 강하게 요구했다.

"오늘은 안돼요. 정말."

말을 하는 그녀의 음성에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 났다.

잠시 찌를 것 같은 날카로운 표정이 그의 눈에 스쳐 갔다.

"노력은 했소."

이해라 술 없는 말을 남기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기지개를 켜고 어깨를 돌리며 머리 위로 팔을 들어올렸다. 에비는 그의 근사한 육체를 기쁨과 자랑스러움으로 쳐다봤다. 넓은 어깨로부터 날렵한 근육들이 층을 이루며 탄탄한 허리까지 역삼각형으로 조여들었고, 그녀는 그 근육 사이 움푹한 곳마다 키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밑에는 애타게 그녀의 손길을 부르는 단단하고 단단한 엉덩이가 있었다.

그는 어깨 너머로 그녀가 미소짓는 것을 보더니 몸을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하품을 하며 샤워를 하러 갔다. 그녀는 욕실 문이 닫힐 때까지 그를 바라보며 황홀할 정도로 남성적인 육체미를 감상했다. 유치하지만 휘파람소리를 내며 그의 멋진 몸매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이지 훌륭한 체격이었다. 맨몸으로 느긋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 그를 덮치고 싶은 욕구를 참는 것도 고역이었다. 샤워소리를 들으며 그를 침대에 묶어 놓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그를 차지하는 달콤하고 부도덕한 상상을 해봤다.

시계를 보니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셔츠를 입고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준비했다.

침실로 돌아오자 그는 욕실에서 나오는 중이었고, 목에만 수건을 걸친 여전히 눈부실 정도로 멋진 모습 그대로였다. 피부에는 물기가 남아 번뜩였고 검은 머리는 물기를 머금어 더욱 검어 보였다.

"커피를 올려놨어요."

그녀는 이어서 욕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침식사 준비를 하겠소. 오늘 아침은 뭘 먹고 싶소?"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니 벌써 입맛이 떨어지는 그녀였다.

"배고프지 않아요. 그냥 커피만 마시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샤워하고 옷을 입은 후 부엌으로 가 보니 그는 이미 그녀의 아침식사를 마음대로 차려 놓고 있었다. 시리얼과 오렌지 주스, 커피가 그녀 자리에 놓여 있었다.

"배고프지 않은데..."

그녀는 커피 잔을 들며 말을 꺼냈다. 향기로운 커피 향을 기분 좋게 음미하며 마셨다.

"조금만 먹어요."

그는 달래듯 말하며 그녀 옆에 앉았다.

"오늘밤을 위해서라도 당신 힘을 비축해 둬야 하오."

그녀는 나름대로 지신의 판타지를 즐기며 끈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왜요? 오늘밤 특별한 스케줄이라도 있나요?"

"그럴 것 같소."

그가 묘하게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그녀는 잠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수저를 들어 그녀의 손에 쥐어 줬다.

"자, 먹어요. 요즘 날씨가 더워서 당신 식욕이 많이 떨어진 걸 알고있소. 체중도 줄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좋아한다구요."

그녀가 말했다. 그의 검은 눈썹이 들렸다.

"당신의 통통한 엉덩이 그대로가 좋소. 그리고 당신 가슴은 내 손에 맞춤한 크기고. 막대기와 자는 것은 재미없으니 자, 빨리 먹어요."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시리얼을 떠먹기 시작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제품이었다. 그녀의 수납장에 있는 시리얼을 보고 똑같은걸 그도 산 모양이었다.

그녀는 몇 번 더 떠먹었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장에 들어간 시리얼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한 시간 후 그는 그녀를 집에 내려 주며 키스했다.

"에비, 저녁에 봅시다 몸조심하시오."

집으로 들어가면서 그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할거라고 생각한 거지?

우울한 상태로 그녀는 계류장에 가기 전에 다시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지 않으려고 일하러 갈 복장을 하고 나섰다. 이제 몇 번이나 더 이 거울 앞에서 머리를 땋게 될는지. 오늘 오후가 지나면 이 집은 더 이상 그녀 소유가 아니게 된다. 캠벨 부부는 부동산 중개인을 대동하고 와서 즉시 양도절차를 거행하고 싶어했다. 에비는 집의 등기권리증을 갖고 나갈 것이었다. 등기를 확인하기도 전에 계약부터 하려는 것만 봐도 캠벨 부부가 그녀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뉴욕 은행 주소가 쓰인 봉투도 함께 챙겼다. 월터에게서 수표를 받으면 즉시 자신의 계좌에 입금한 다음 대출금 금액만큼 수표를 발행해서 특급우편으로 뉴욕은행의 보로위츠라는 사람에게 부칠 작정이었다. 그러면 그녀의 재정저거인 문제는 다 해결되는 셈이었다. 살집은 없어질 테지만 사는 건 어디서나 살 수 있었다. 계류장은 생활수단이니 더욱 중요했다. 계류장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디시 집을 장만하면 될 것이다. 비록 지금 집처럼 추억이 많이 서려 있지는 않겠지만, 가정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집으로 만드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더 보고 ‘여기 이렇게 서 있는다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지’ 라는 혼잣말을 한 후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

건터스빌 주위를 드라이브하며 아침나절을 보냈다. 신문에 실린 몇 개의 임대주택이 눈에 들어왔지만 직접 전화는 하지 않았다. 먼저 주변환경과 집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상황이 급하긴 했지만 어쩐 일인지 그 날 본 어떤 집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점심이 다 되서야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갑자기 차를 돌리는 바람에 뒤따라오던 차의 타이어가 끼익 스치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경적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다는 말을 입으로 중얼거리며 그녀는 달리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선택한 아파트 건물은 지은 지 2년이 안 된 새 건물로, ‘샬레 아파트’ 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임대사무소 밖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20분 후 그녀는 17호의 새로운 임대계약자가 되었다. 아파트는 복층으로, 아래층엔 거실과 부엌이 있고 부엌 옆에는 세탁실로 쓸 수 있는 조그만 다용도실이 붙어 있었다. 위층엔 두 개의 침실이 있었다. 그녀가 원래 찾던 원룸형은 빈속이 없었다. 그녀는 임대보증금을 수표로 지불하고 아파트 열쇠를 받아서 트럭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다 끝났다. 자신이 이 아파트에서 행복하게 살지 궁금했지만, 적어도 한동안 몸을 눕힐 지붕은 구한 셈이었다.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고, 로버트는 건터스빌 시내로 들어가는 교차로에서 운전을 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저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된 거요?"

그는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처음엔 그냥 이곳저곳 마을 주위를 드라이브하는 것 같았습니다. 눈에 띄지 않도록 약간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는데, 몇 번 속도를 늦추었지만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뭔가 찾는 것이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더니 고속도로로 접어들어서 남쪽으로 가던 중에 갑자기 신호등도 켜지 않고 유턴을 했고, 하마터면 뒤따라오던 트럭과 충돌할 뻔했습니다. 쫓아가려고 했지만 다른 차선에 있던 터라 즉시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방향을 돌려 그녀가 차를 돌린 곳에 가 보니 벌써 사라졌더군요."

"빌어먹을."

로버트는 피곤하고 화도 났다. 에비가 무고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터에 갑자기 그녀가 의심스런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류장에 대해서 걱정하는 듯 보였지만, 뭔가 다른 것도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어느 것도 그에게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지만. 오늘 아침 그는 그녀를 하루 종일 그의 곁에 붙잡아 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가 어리석은 짓을 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자신의 요구를 거절하는 여자에 익숙하지 않은 그의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에비는 쉽게 거절했다.

화가 난 그는 그녀를 섹스로 유혹해 붙잡으려 했지만 자제심을 잃고 미칠 것처럼 된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녀는 역시 거절했다.

"계류장에 그녀가 오면 다시 뒤를 쫓겠습니다."

그 남자가 말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잖소. 항상 예기치 못한 상황은 끼여드는 법이니."

"네. 하지만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더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다음 번에는 두 대의 차량을 동원하시오. 한쪽이 실패하면 다른 쪽에서 커버할 수 있게끔."

"네. 알겠습니다."

로버트는 전화를 끊었다. 당장 계류장으로 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가 오자마자 마구 흔들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하찮은 일이긴 하지만 오늘은 식료품을 사러 슈퍼에 가야 했다. 그런 일들을 전에 해본 적은 없었지만 지겹지는 않았다.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할 만했다. 남부사람들은 평소 생활습관 그대로 쇼핑도 천천히 했다. 슈퍼마켓의 통로를 오가다 아는 얼굴을 만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친근하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때론 낯선 얼굴과도 쉽게 이야기를 나눴다. 공원에서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뉴욕 사람들이 쇼핑하는 남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을까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그들은 유유자적하게 쇼핑을 즐겼다. 하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법. 그도 곧 이곳 사람들처럼 천천히 물건을 고르며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뉴욕에서처럼 서두르다간 앞에서 천천히 쇼핑 카트를 밀고 가는 할머니와 부딪히고 말테니까.

하지만 오늘 그는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머서와 에비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덫을 놓고 있는 상황에서 에비를 그대로 나가게 한 건 그의 보호본능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가능하다면 납치라도 해서 그녀를 이곳에서 데리고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머서와 그녀가 연관 되었다면 그들은 놀라서 숨어들 테고, 그러면 영원히 놓쳐 버릴 수도 있었다. 어느 경우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틀만 더 지나면 모든 일이 끝날 것이다. 전화 도청으로 그들은 머서가 훔쳐낸 데이터를 모레 전달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에비는 매물로 내놓은 임대보트를 한 대도 팔지 못했기 때문에 로버트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았다. 모드 전자장치가 장착되었기 때문에 머서가 어떤 보트를 선택해도 상관없었다. 이틀이면 마지막 마무리를 빼고는 모든 일이 끝날 것이다. 3일째면 뉴욕으로 갈 수 있을 테고, 에비는 그와 함께 갈 것이다.

그는 3일치의 식료품만 사면되므로 살 품목이 별로 많지 않았지만, 커피가 다 떨어졌고 3일 동안 계속 밖에서 식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른 식료품들도 사야 했다. 평소의 효율적인 방식으로 그는 15분 안에 모든 쇼핑을 끝냈다. 식료품 봉투를 안고 자동문을 지나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한 여자가 출입구 쪽의 문으로 들어오다 그를 보고 멈춰 섰다.

"로버트."

에비의 언니 베키였다. 뒤따라오던 사람을 나가게 하기 위해 그는 옆으로 비켜서서 베키에게 인사했다.

"아,베키. 반갑습니다."

그는 살짝 미소지었다.

"제이슨은 어떻습니까? 그 후 계류장에서 만난 적이 없어서."

"에비가 말하지 않았어요? 남은 여름방학 동안 계류장 출입금지예요. 벌을 받고 있는 중이죠."

베키가 냉정하게 말했다.

"계류장에 가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녀는 그가 있은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여기서 사람들을 방해하며 서 있으면 안 되겠어요. 같이 차까지 걸어갈게요."

그들은 아스팔트가 녹을 듯이 뜨거운 주차장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숨이 막힐 정도로 더운 날씨여서 즉시 그의 피부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 보호본능 강한 큰언니가 에비를 보호하기 위해 그와 마음속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지프차까지 함께 왔고 그는 식료품을 뒷좌석에 실은 다음 비스듬히 차에 기대섰다.

"에비가 걱정됩니까?"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녀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환히 속이 들여다보여요?"

"에비가 말하길 언니가 다소 과보호 경향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는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베키는 따라서 웃고 얼굴에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을 떼어 냈다. 에비의 것보다 검었지만 언뜻 두 자매가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웃는 모습이나 허스키한 목소리는 아주 비슷했다.

"큰언니 노릇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겠네요. 지나친 편은 아니었는데, 그때 이후로..."

그녀는 말을 멈추었고 로버트는 호기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때 이후?"

베키는 즉각 대답을 하지 않고 대신 고속도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대답을 할지 시간을 벌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에비와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가요?"

갑자기 베키가 질문을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질문 받는 것에 전혀 익숙하지 않아서 잠시 짜증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베키는 어쨌든 에비의 언니고 걱정해 주는 거니까. 그는 아주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비와 결혼할 생각입니다."

베키는 눈을 감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네요."

"우리 관계가 그렇게까지 걱정해야 할 일인지는 몰랐는데요"

그는 차가움마저 느껴지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키의 눈이 열리고 그녀는 한참 동안 진지하게 그를 쳐다봤다.

"당신은 꽤 위압감을 주는 편인 것 알죠?"

그는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다. 그가 정말 위압감을 준다고 해도 그녀에게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역시 같은 자매다. 에비도 전혀 위압감을 못 느끼는 것 같았는데.

베키는 한숨을 쉬고 다시 고속도로를 봤다.

"많이 걱정했어요. 당신이 에비를 소중하게 여기는 지도 몰랐고, 그리고 당신들 관계가 이뤄지는 것은 에비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어서."

그의 호기심이 점점 커졌다.

"어떤 면에서죠?"

베키는 직접 대답하지 않고 다시 질문을 했다.

"에비가 매트에 대해서 얘기하던가요?"

로버트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많이 얘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에비와 그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던 때가 떠올라 목소리가 많이 낮아졌다.

"그럼 매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땀이 그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사실을 알 때까지는 이 태울 것처럼 뜨거운 주차장의 아스팔트에서 벗어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는 자동차 사고로 죽지 않았습니까?"

에비가 그 사실을 이야기하지는 않은 듯했지만, 아마도 매트 쇼에 대한 보고서에서 읽었던 것 같았다.

"맞아요. 결혼식을 올린 다음날이었죠."

그녀는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에비가 열다섯 살 되었을 무렵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나는 스무 살이었고 이미 결혼해서 막 엄마가 되려던 참이었죠. 그리고 1년 후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지만 우리 자매가 받은 충격은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겠어요? 부모님을 무척 사랑했지만 난 폴과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아들도 태어났어요. 부모님과는 별개의 인생을 살고 있었죠, 하지만 아빠를 잃고 난 에비는 흔들렸고, 그 후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에비는 어머니만 잃은 게 아니라 가정도 잃었죠. 에비는 우리 집으로 와서 살기 시작했고, 그 애를 많이 사랑했지만 그래도 똑같지 않았을 거예요. 아직 어린데 갑자기 생활환경이 변했으니..."

로버트는 조용히 서서 에비의 과거 모습을 상상하는데 모든 신경을 쏟았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대해선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밤중에 잔교 베란다로 나가서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이불처럼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는 밤에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했지만, 매트가 죽기 이전의 생활에 대해선 아예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에비에게는 매트가 있었어요."

베키가 조용히 말했다.

"정말 착한 아이였어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들은 항상 같이 붙어 다녔죠. 처음에는 소꿉 친구로, 나중에는 연인 사이로. 동갑이었는데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참 믿음직하게 에비의 곁을 지켜 주더군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아마도 매트는 에비의 삶 속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나는 내 가족이 있었고 에비는 매트가 있었죠. 그는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웃음이 떠오르게 했고, 그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에비는 부모님을 잃고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시절의 에비는 지금의 제이슨처럼 깔깔거리고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아주 말괄량이였어요."

"에비가 말괄량이라...상상이 안 되는군요."

베키가 목이 메인 듯했기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약간의 여유를 주고 싶었다.

"그녀는 항상 심각해 보입니다."

"지금은 그렇죠."

베키도 순순히 동의했다. 순간 사라졌다고 생각한 질투심이 흉한 머리를 쳐들었다.

"매트의 죽음 때문입니까?"

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같이 차에 타고 있었어요."

눈물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남은 평생 동안 에비를 생각하면 두 개의 그림이 떠오를 거예요. 하나는 결혼하던 날의 모습이고, 그때 에비는 정말 아름답고 젊었어요. 너무나 빛이 나서 쳐다보기가 눈부실 정도였죠. 매트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어요. 그 다음 에비를 본 것은 바로 병원 침대에 무표정한 눈으로 부러진 인형처럼 누워 있는 모습이었어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그들은 근처 호텔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파나마로 신혼여행을 가려고 했죠. 비가 왔어요. 일요일이어서 차도 많이 다니지 않았어요. 그때 고속도로로 개 한 마리가 달려들었대요. 매트는 차를 멈출 수가 없었고 도로를 벗어나서 두 번을 구른 다음 나무가 무성한 곳에 오른쪽으로 처박혔어요. 에비가 있는 쪽이 밑에 깔린 거죠. 매트는 안전벨트에 묶인 채 에비 위에 있었고, 빠져 나올 수도 없고 위에 매달린 매트에게 갈 수 도 없는 상태에서 매트가 에비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갔어요. 그 피가 에비한테 모드 흘러 떨어지고...그는 죽기 전까지 의식이 있었다고 에비가 말했어요."

볼에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손으로 훔친 베키는 흐느끼며 말을 계속했다.

"너무 한적한 길이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없어서 아주 오래 있다가 구조됐어요. 비도 계속 왔고 무성한 나무들 틈이라 도로에서 잘 보이지도 않았죠. 그는 자신이 죽으리란 것을 알고 에비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대요. 잘 있으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곤 사람들이 발견하기 한 시간 전쯤에 숨을 거뒀다고 했어요.

로버트는 자신이 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에비가 어느 비오는 일요일날 아침에 겪은 비극을 눈앞에 사진처럼 떠올리자 눈이 타는 것처럼 아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베키를 품에 안고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

"이런, 미안하네요."

그녀는 겨우 눈믈을 멈출 수 있게 되자 머리를 들고 말했다.

"그 사건에 대해서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요."

"압니다."

그는 그녀를 위로하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줬다.

"그리고 나선 어느 누구도 다시 사랑한 적이 없어요."

그녀는 격렬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다시 사람을 가까이 받아들인 적이 없다고요. 사고가 나기 전 이미 사랑하고 있던 사람들은 예외예요. 폴과 나, 그리고 제이슨과 페이지, 아주 극속수의 친구들 몇 명, 그리곤 아무도 없어요. 당신이 제이슨과 에비를 강에서 구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제이슨과 같이 물 속에서 죽었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을 또 잃고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렇게 마음을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킨 채 외롭게 살았어요."

"제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가 말했다.

베키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을 듯 말 듯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래요,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내가 가진 것들,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 누군가 죽어도 그 사람 때문에 다시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는 그런 것들은 그녀가 갖기를 원해요."

로버트에 눈에 갑자기 스쳐간 두려움을 읽은 듯 베키가 서둘러 말했다.

"아, 아니요, 매트가 죽고 난 후에 에비가 자살에 대해서 말 한 적은 결코 없어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상처는 시간이 지나니 회복되더군요. 두 다리가 다 부러지고 갈비뼈도 금이 가고 뇌진탕 증세도 있었죠. 그저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았어요. 오래도록 사는 건 그냥 시간의 연속이고, 매일 억지로 살았던 것 같아요. 어느 정도 평안을 얻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안았어요. 에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요. 내가 에비였다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자신이 없네요."

온 마음을 다해서 여동생을 사랑하는 베키의 마음이 고마워서 그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베키 같은 처형이 생긴다니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에비를 지키느라고 휘둘렀던 칼과 방패를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이제 쉬십시오. 이제부터 제가 그녀를 돌보겠습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는 게 좋을 거예요."

베키는 여전히 격정적으로 감정을 드려낸 채 말했다.

"에비는 사랑 때문에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어요. 당신을 다시 사랑할 용기를 어떻게 냈는지, 정말 놀라워요. 여름이 끝나면 당신이 떠나 버릴까봐 정말 두려웠어요. 그렇게 되면 에비는 끝장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로버트의 눈이 반짝였다.

"이곳을 떠날 때면 그녀도 함께 데려갈 겁니다."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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