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랜든 머서는 요즘 거울을 볼 때마다 보는 습관적인 심난한 표정을 다시 보게 됐다. 뭐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모든 것이 아주 잘 되어 간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모조리 엉망이 됐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일들이었다. 그 빌어먹은 캐넌 녀석이 갑자기 등장해서 심장마비라도 걸리는 줄 알았는데, 이제 그건 걱정할 만한 일 취급도 못 받을 정도였다. 그 높으신 어른의 명성은 순전히 굴러가는 깡통이었다. 부유하게 태어나서 뭔가를 가지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생은 해본 적도 없는 게으른 바람둥이일 뿐이었다. 때로 캐넌의 눈빛이 마치 귀신처럼 번뜩여 자신의 마음속까지 뚫리는 것 같은 섬뜩함을 느낄 때가 있긴 하지만.
머서는 쇼의 계류장에 갔다가 캐넌에게 들켰을 때의 공포를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피가 얼어붙을 것 같던 몇 분 간 머서는 자신이 영락없이 들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캐넌의 관심이 생판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다시는 자리를 비우지 않으려 주의했다. 정말 재수 없었다! 건터스빌에 그렇게나 많은 계류장이 있건만, 왜 하필 캐넌은 쇼의 계류장을 골라 들어왔단 말인가? 규모가 큰 곳도 아니고 시설이 좋은 곳도 아닌데. 사실 머서가 쇼의 계류장을 선택했던 이유는 그곳이 작은 편이고 비교적 외진 곳인데다 혼자서 운영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에비 쇼는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모조리 신경을 기울일 여유가 없어 보였다.
물론 캐넌이 왜 그곳을 얼쩡거리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긴 했다. 머서는 몇 달을 두고 에비 쇼를 유혹하려고 시도해 봤지만 그녀는 마치 석고상인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의 돈이 없어 보였나 보다고 그는 추측했다. 캐넌을 보고선 마치 끈끈이처럼 달라붙은 걸 보니.
일이 제대로 풀렸다면 그녀의 관심을 끌 충분한 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는 대가로 받은 돈을 다 써 버리지 않고 투자를 했다. 그가 선택한 벤처기업은 꽤 전망 좋고 튼튼해 보였다. 그는 이율은 높지만 변동이 심한 금융시장을 피해 보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쪽으로 투자를 했다. 몇 년이 지나면 더 손쉬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단기시장을 공략해 보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그렇게나 전망 좋아 보였던 그 벤처기업의 주식이 하루아침에 불투명해졌다. 불과 1주일 만에 그가 미래를 위한 씨앗이라 생각하며 투자했던 주식의 가치가 투자시점의 반도 안 되는 가치로 하락했고, 그는 손실을 감수하고 그냥 팔아야 했다. 손실을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고 그는 전액을 금융시장에 투자했다. 그렇지만 정말 하루아침에 수직으로 낙하한 경기 탓에 그는 완전히 거덜났다. 그는 자신이 마이더스 왕과는 반대된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 쓰레기로 변하는 그런 운명.
다시 구매자를 찾아 접선을 시도했을 때 그는 구매자가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곧 은행계좌로 돈이 입금되지 않으면 자동차에 대한 할부금 지불도 못하고 신용카드 지불연체로 신용불량자가 될 신세였다. 사랑하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정신을
잃게 할 정도였다. 더 비싼 차들도 많았지만 그는 벤츠를 소유함으로써 처음으로 상류사회에 진입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다시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에비는 자신이 별개의 인격체로 나뉘는 기분이 들었다. 하나는 로버트를 연인으로 가지게 되어 황홀할 정도로 감격하고 행복한 여자였다.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곤 꿈도 꾸지 못했고 그렇게 오래도록 비어 있던 마음 한구석이 채워져 다시 온전한 감정을 소유하게 되리란 것 역시 언감생심이었다. 로버트는 정열적이면서도 자상하게 그녀를 챙겨 줘서 그녀는 마치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결코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고 그녀에 대한 것은 그 어느 것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없었다. 그는 마치 그녀가 가장 관능적이고 섹시한 여자인 것처럼 대해 줬다. 그들이 외출을 할 때면 그의 관심은 한 번도 다른 여자들에게 돌려진 적이 없었다. 비록 그 여자들의 관심은 온통 그에게 집중돼 있었지만.
매일 그를 만나고 매일 밤 함께 잠을 잤다. 자신의 육체에 그가 불지르는 정열에 익숙해졌지만, 그럴수록 쾌감은 더욱 강렬하고 깊어져서 그녀는 때때로 크게 소리 지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경험 많은 그는 새로운 체위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그녀에게 새로운 쾌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그런 시도를 하면서도 경험 없는 그녀의 무지를 탓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그녀를 사랑했다. 오직 단 한 번의 길고 완벽한 섹스였다. 만족한 그녀를 곧 잠으로 빠져들게 하는.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아직 의식이 확실하게 돌아오지 않은 꿈결같은 상태에서 조용히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의 몸을 다루는 그의 기교는 너무나 완벽해서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그녀는 곧장 흥분이 될 정도였다. 저녁의 강렬한 사랑과 이른 아침의 꿈결같은 사랑 중 어느 것이 더 좋은지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놀랄 정도로 빨리 그녀의 몸은 성적인 즐거움을 알게 되어
오후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기대와 욕구로 안정을 취할 수가 없었다. 그도 분명히 알 것이다. 때로 그녀는 그를 마룻바닥에 눕히고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그에게 욕망을 풀고 싶은 격렬한 욕구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침묵 속에 안전하게 가둬 두는 것에 익숙했는데 로버트는 그 감정들을 끌어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주제들에 대해서 깊고 광범위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한밤중에 호수가 보이는 잔교 베란다에 나와 별들을 올려다보면서 그들은 천문학과 여러가지 이론들, 블랙홀의 대폭발 시간의 상대성 이론 등 별의별 주제에 대해 다양하게 토론했다. 그의 지성과 관심 범위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주의가 산만하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로 그의 정신은 항상 작업 중이어서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이미 아는 사실에 더 보충하는 것들을 찾는 것 같았다. 그들은 신문을 나눠 보며 정치와 사회면, 경제면 등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다. 자라날 때의 이야기들도 교환했다. 베키처럼 장녀 기질이 넘치는 언니를 손위로 둔 것의 장점과 단점을 이야기했고, 그는 그만큼이나 고집이 센 여동생 매들린에 대한 농담과 그녀의 남편인 리스 던컨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몬태나의 목장, 장난꾸러기 두 조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로버트와 가까워진다는 생각은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웠다. 그의 육체뿐 아니라 그의 정신과 가까워지면서 만들어지는 친근감은 그녀가 이제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는 강력한 유대감을 갖게 해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를 자기 생활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때로 그녀
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가 자신을 떠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일었지만, 그녀는 그 미래의 시간보다 현재를 생각했다. 그를 잃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겁이 나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걱정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지금 그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모든 에너지가 필요했다.
동시에 다른 한쪽의 그녀는 끊임없이 은행 대출과 집에 대한 담보에 대해 걱정했다. 토미에게서는 전화가 없었다. 은행으로 두 번이나 전화를 했지만 처음에는 아직 승인이 나지 않았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말했고, 두 번째는 출장 중이었다.
오래 기다릴 수가 없었다. 벌써 11일이 지났고 이제 상환기일은 19일밖에 남지 않았다. 만일 그 은행에서 담보대출을 해주지 않는다면 해줄 만한 다른 은행을 찾아봐야 했고, 은행 절차가 시일이 많이 소요되는 것을 고려하면 정말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늦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대출금이 제때 나오지 않을 것을 대비해 다른 경우도 생각해 놔야 했다. 그녀의 보트를 매물로 내놓을 수도 있지만 그래 봐야 필요한 돈의 반도 못 받을 테고, 또 제시간 내에 팔릴지도 의문이었다. 베키와 폴에게 돈을 꾸는 것은 아예 열외로 생각했다. 그들도 나름대로 집을 사느라 지불해야 하는 대출금이 있었고 두 명의 사춘기 아이들을 양육하는 경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임대용보트들을 판다면 상환금은 충분하겠지만 매달 들어오는 수입이 눈에 띄게 줄어들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융자금을 상환하고 나면 월부 상환금이 없어질 테니 곧 다시 보트를 장만할 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문제는 역시 시간이었다. 경험으로 봐서 사람들은 보트를 살 때 꽤 시간을 들이는 편이었다. 건터스빌처럼 강변마을에서도 보트는 생활 필수품은 아니었다. 보트를 보고 구입할까 생각해 보고 저녁식사를 하면서 열심히 의논을 한 뒤 재정상태를 몇 번씩 점검한 뒤에나 살 결심을 하는 품목이었다. 그러니 제시간 내에 보트가 모두 팔리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가능한 선택 사항 중에서 최선책이었다. 그녀는 계류장 입구에 '중고 보트 판매'라는 광고지를 붙이고 낚시 기구들을 진열해 놓는 곳에도 붙여 놨다. 한 대만 팔 수 있다고 해도 그녀가 빌려야 할 자금이 줄어들 수 있을 테니.
로버트는 즉시 그 광고지를 알아챘다. 그는 그날 오후 늦게 왔고, 선글라스를 벗고는 평상시와 다른 심각한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입구에 걸린 저 광고지는 뭐요? 중고 보트를 판매한다고?"
"임대용보트들이요."
그녀는 침착하게 대답하고 기다리고 있는 손님에게 다시 주의를 기울였다. 보트를 팔아 버리기고 일단 결정을 내리고 나자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카운터 뒤로 가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창 밖을 내다봤다. 손님이 가고 나서야 그녀를 돌아보고 다시 물었다.
"왜 팔려고 하는 거요?"
잠시 그녀는 망설였다. 금전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에게 말한 적이 없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도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과묵한 편이었고, 세상을 향해 걱정거리들을 떠벌릴 생각은 없으니까. 또 한편으론 계류장에 대한 집착이 남다른 그녀로선 이곳의 재정이 불안하다는 소문이 돌게 할 수 없었다. 또 그녀가 그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로버트가 하는 것이 싫었고, 그가 빌려준다고 해도 걱정이었다. 그가 부유한 것은 확실했지만 그들 사이에 금전적인 문제가 개입되는 것이 싫었다. 그녀가 그의 돈을 보고 끌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이 계류장의 소유권을 나눠 갖게 하는 것도 싫었다. 은행과 개인은 별다른 문제였다. 계류장은 그녀의 것이고 황량한 자신의 삶을 일으켜 세운 기반이었다.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연수가 오래돼서 좀 불안해요. 신형을 구입하려구요."
로버트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를 안아 줘야 할지, 아니면 마구 흔들어 줘야 할지 알지 못했고, 사실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이 명백해 보였고,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괜찮다고 달래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충동을 참아야 할 때였다. 머서의 간첩행위에 크게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그의 생각이 틀릴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곧 그는 확실한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임대용 보트들을 팔아 버리면 머서는 어떻게 물품을 전달할 것인가? 현재 에비의 계류장에 있는 모든 임대용 보트에는 추적장치와 도청장치가 장착되어 있었다. 만일 머서가 다른 곳의 보트를 임대하거나 전달 수단을 변경하면 로버트는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보탬이 되는 사실은 머서가 곧 행동을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의심스러운 통화내용을 도청했으며 사설정보원들이 현재 대기 중 이었다. 에비가 몇 대의 보트를 판다고 해도 그건 사실 별문제가 아니었다. 대부분이 팔려도 오직 머서가 사용할 수 있는 한 대만 남아 있으면 되었다. 다 팔리기 전에 그가 끼여들어 한 대 정도는 남겨 놓도록 설득하면 된다.
그는 큰소리로 물었다.
"구매하려는 사람들은 있었소?"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그녀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아침에 붙였을 뿐이에요."
"신문에 광고는 냈소?"
"아직. 하지만 곧 낼 거예요."
신문광고를 내게 되면 더 많은 구매자가 생길 테고 그가 차단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수도 있었다. 광고를 막는 가장 손쉬운 길은 아예 인쇄를 막는 것이고, 이 지역에서 발간되는 신문들은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계류장과 에비의 집 전화는 모두 도청되고 있으므로 그녀가 전화를 거는 신문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일으킬 수 있으리란 것은 생각지 못했다. 에비는 놀랍게도 상당한 수완가였다.
5일이 지난 후, 에비는 가스 주입을 마치고 전화를 받기 위해 사무실로 뛰어와야 했다. 수화기를 들며 그녀는 흘러내린 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계류장입니다."
"에비, 토미야"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결과를 짐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천천히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됐어?"
대답을 알면서도 그녀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에비, 미안하다. 이사회에서 부동산 담보대출이 너무 많다고 승인을 안 해주네."
확 다문 입술에서 감각이 없어졌다.
"네 잘못도 아닌데, 뭘"
"어쨌든 고마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는 아니야. 우리 은행에서 대출을 안 한다고 다른 은행에서도 거절을 할 리는 없으니까."
"알았어. 하지만 이제 상환 일까지 14일밖에 안 남았어. 너희 은행에서도 안 된다고 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잖아. 다른 은행에선 얼마나 걸릴까?"
"글쎄, 우리 은행에서 좀 시간을 끌었다고 봐야겠지, 정말 미한데, 아무리 찔러 봐도 통하지가 않더라구. 다른 은행을 알아봐. 오늘이라도 시간 낭비하지 말고 물론 집의 담보 설정에 대해서 감정사사가 가치를 매기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호숫가에 위치한데다 상태도 좋으니까 원하는 금액보다 훨씬 높은 금액이 나을 거야. 그러니 빨리 시도해 봐."
"그럴게, 토미. 고마워."
그녀가 말했다.
"고맙기는‥‥‥‥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해서 오히려 미안해. 에비, 그럼 잘 있어."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눈앞에 다가온 재난 같은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갑자기 난감했다. 대안으로 보트를 팔겠다는 대책도 세워 뒀지만 집을 담보로 융자를 받을 수 있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 대의 보트도 팔지 못한 상태였다.
이제 시간이 없었고, 다른 은행에서 융자를 받을 수 있다는 장담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갑자기 악랄한 유령들이 그녀를 상대로 문제를 만들고 은행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게 일을 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노력해 봐야 했다. 여기서 포기하고 계류장을 잃을 수 없었다. 계류장을 지킬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지키고야 말 것이다. 집을 담보로 융자를 받을 수 없고 보트도 팔리지 않는다면, 최후의 카드가 있었다. 최악의 경우이긴 했지만 여전히 방법은 있었다.
그녀는 평판이 좋은 은행을 선택한 다음 전화를 걸어 대출담당자와 다음날 아침 상담 약속을 했다.
다음날 아침 외출 준비를 할 때부터 벌써 더위는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피부가 끈적거려서 옷이 달라붙었다. 그녀는 연속해서 3일 밤을 그의 집에서 보내고 아침에 식사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아침 그녀는 평소처럼 그의 집에서 샤워를 했고 그에게 좀 일찍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유도 묻지 않고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녀는 금고에서 집의 소유권리증을 꺼내 챙기고 마치 전장에 나가는 군인의 심정으로 집을 나섰다. 이 은행에서도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면 다른 은행으로 가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계류장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느니 다소 성급한 결정을 내리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트럭의 창문을 내리고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얼굴을 식혔다. 날씨는 점점 참기 어려울 정도로 더워져 갔고, 곧 집에 에어컨을 틀지 않고는 지내기 힘들 정도까지 수은주가 상승할 것이다. 그녀는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라면 틀어도 상관없을 컷이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전기요금을 지불할 돈은 생길 테니까.
월드롭이라는 대출담당자는 사십대의 키가 작고 몸집이 단단한 은발머리의 남자였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로 그녀를 안내하면서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살폈다. 에비는 그의 책상 앞에 자리한 의자에 앉았고, 그는 책상 뒤 그의 의자로 가서 앉았다.
"쇼 부인, 무슨 일로 이렇게 오셨습니까?"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그녀는 자신이 찾아온 동기를 설명했고 지갑에서 권리증을 꺼내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증서를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부동산 담보대출을 원하신다는 말씀이죠?"
그는 서랍을 열고 몇 장의 서류를 꺼냈다.
"자, 이 서류들을 읽고 작성해 주시면 우리 은행에서 대출이 가능한지 곧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에비는 서류를 들고 로비 쪽의 작은 대기실로 가서 앉았다. 서류에 써 있는 여러 가지 질문에 답을 작성하는 동안 누군가 월드롭을 만나러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새로 온 사람이 누군지 봤다. 건터스빌처럼 작은 마을에선 서로를 다 알게 되는 법이었다. 그는 카일 브루스터로 작은 할인점을 경영하는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은 남자였다. 그는 도박꾼으로 알려져 있었고 불법 도박 단속에 걸려 체포된 적도 있었다. 에비는 카일이 도박으로 꽤 돈을 벌었다고 추측했다. 할인점을 경영해서 얻는 수익으로만 살기엔 그의 소비성향이 상당히 과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월드롭의 사무실 문은 열려 있었으므로 그녀는 카일과 월드롭이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자, 여기 수표가 준비돼 있습니다. 현찰로 가져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계좌에 넣어 드릴까요?"
서류를 작성하던 에비는 갑자기 용기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카일 브루스터 같은 남자에게 돈을 빌려준다면 그녀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사업은 수익도 더 좋았고 자신의 평판도 훨씬 나았으니까.
카일은 몇 분 후 은행을 나갔다. 에비는 서류를 다 작성했지만 다른 사람이 월드롭과 상담 중이었으므로 잠시 기다렸다. 그녀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10시 30분이 되자 자리가 비어서 서류를 가지고 들어갔다.
"앉으시죠."
그는 그녀가 작성한 서류를 훑어보며 말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서류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에비는 대출에 대한 승인이 그날 아침에 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하루에 열 번을 전화해서라도 은행의 감정사가 빨리 나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게 할 작정이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그녀는 불편하게 의자에서 몸을 움직이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의아해했다. 월드릅이 상의하러 간 사람이 상담중이라 월드롭도 기다려야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45분 후에 월드롭이 돌아왔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손가락을 책상 위에 두드리기 시작했다.
"쇼 부인, 죄송합니다. 지금 시기에 부동산 담보대출을 할 때가 아니어서 말입니다. 요즘 경제 상태를 볼 때‥‥."
에비는 똑바로 앉았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충분했다.
"경제 문제 때문이 아니겠죠."
그녀는 날카롭게 말을 가로막았다.
'다른 지역처럼 이곳까지 경기가 후퇴된 것도 아니구요. 이 은행은 재무구조가 다른 은행들에 비해서 튼튼한 걸로 알고 있어요. 지난주 신문에 플로리다에 있는 은행을 사들였다는 기사가 난 것을 봤어요. 내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전과기록까지 있는 유명한 도박꾼인 카일 브루스터 같은 남자에게는 돈을 빌려주면서 대출금의 여섯 배 가치가 넘는 부동산을 담보로 왜 대출을 해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월드롭은 얼굴이 벌개졌다. 그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쇼 부인, 브루스터 씨의 사업에 대해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출을 승인하는 일은 제게 권한이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요."
"알고 있어요, 월드롭 씨"
그녀는 갑자기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황당했지만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대출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거죠? 그렇지 않나요? 내게 서류를 작성하라고 한 것은 그냥 요식 행위였죠? 누군가 내가 대출을 받지 못하게 압력을 가하고 있어요. 그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겠어요."
그의 얼굴이 더 짙게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그녀는 일어서서 그의 책상에 놓인 권리증을 집어들었다.
"그렇겠죠 할 수 없을 거예요 당신 목이 달린 문제일 테니. 월드롭씨, 그럼 이만."
밖으로 나오는 동안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어지러울 정도였다. 후덥지근한 열기가 훅하고 몰아닥쳤지만 그녀는 무시하고 데일 것처럼 Em거운 트럭 운전석에 앉았다. 그녀는 운전대에 손가락을 두들기면서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계류장을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구매를 하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누구든 그녀는 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비밀스런 누군가는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로 이 지역의 은행뿐 아니라 뉴욕의 대형 은행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그 정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악랄한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조그만 계류장을 원하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보수를 많이 한 상태고 사업수익도 매년 좋아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그렇게까지 탐을 낼 만한 사업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인지도 상관없었다.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명확한 진실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 라도 계류장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차단되지 않은 방법이 한 가지 있었다. 베키에게 조차 아무소리 하지 않았으니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녀는 트럭을 출발시켜 도로로 접어들었지만 편의점의 공중전화를 보자마자 즉시 차를 돌려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녀의 심장은 쿵쿵거려 갈비뼈가 시큰거릴 정도였다. 생각만 하다 보면 일을 저지를 용기를 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그 사랑스럽고 친근한 환경에 각오가 풀어져서 전화를 걸지 않을 위험도 있었다. 지금 처리해야 했다. 선택은 간단했다. 계류장을 잃으면 그녀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고, 지금 집을 회생하면 계류장은 건질 수 있다.
그녀는 트럭에서 내려서 공중전화로 갔다. 머릿속 생각과는 달리 다리는 혼자 잘도 움직였다. 전화번호부는 없었다. 그녀는 안내전화를 걸어서 교환원에게 전화번호를 물었고, 다시 동전을 넣고 원하는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바깥의 소음을 막기 위해 도로변에서 등을 돌리고 한 손으로 전화기를 감싸쥔 채 말했다.
"월터, 에비예요 강가에 위치한 제 집을 사고 싶다고 하셨었죠 아직도 그럴 생각이 있다면‥‥‥."
"은행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편의점으로 가더니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로버트에게 사설정보원이 보고를 했다.
"전화한 번호를 알아봤소?"
"알 수 없었습니다. 등을 돌리고 전화를 걸어서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대화 내용은?"
"그것도‥ 죄송합니다. 계속 등을 돌리고 통화를 한데다가 도로변이라 시끄러웠습니다. "
로버트는 턱을 만지기 시작했다.
"계류장에 전화 걸었는지 는 확인해 봤소?"
"제일 먼저. 하지만 아니더군요. 머서에게도 역시 전화를 걸지 않았습니다."
"좋소 걱정은 되지만, 달리 방법이 없겠군. 지금은 어디에 있소?"
"편의점에서 곧장 집으로 향했습니다."
"다른 곳에 전화를 하면 즉시 보고하시오"
"잘 알겠습니다."
로버트는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겨서 호수를 내다봤다. 도대체 누구에게, 그리고 무슨 내용의 전화를 한 거지? 그는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의심의 불꽃이 이는 것이 싫었다. 머서가 훔친 프로그램을 판매할 다른 구매 선을 확보하기 위한 전화였을까? 그렇게까지 깊숙이 관련이 된 걸까? 확실한 진실을 알기 위해 그녀를 재정적인 궁지에 몰아 넣었지만 그 결과를 전혀, 조금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냉혹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