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사랑 에반젤린-12화 (12/19)

12장

순전히 육체적인 욕망의 세계에 빠져 있던 로버트는 멍한 가운데 천천히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방금 경험한 그 강렬한 절정에 그는 충격을 받아 아직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자신의 육체를 느꼈다. 심장이 한 번 될 때마다 뜨거운 피가 혈관을 돌며 공급되고,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가쁘게 헉헉거리던 허파가 제 기능을 찾아가는 과정과, 강렬한 만쪽 끝에 그의 근육이 기분 좋게 이완된 것을 느꼈다. 만족하긴 했지만 아직 성이 난 채인 자신을 뜨겁게 조여 주는 그녀의 속살도 느꼈다. 바라던 대로 그녀는 벌거벗은 채 자신의 아래에 누워 있었다.

갑자기 멍한 상태가 사라지고 현실이 냉혹하게 다가왔다. 로버트는 자기 자신에게 놀랐다.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던 일이 일어났다. 그는 에비를 안는 순간 아예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사랑을 했어야 했는데 약탈자처럼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서 그 실크처럼 부드러운 몸을 마음껏 정복하고 소유하며 그녀를 가졌다. 그의 관심을 피하듯 그녀는 아무 움직임 얼이 그의 아래에 누워 있었다.

그의 심장이 아플 정도로 욱죄어졌다. 그녀의 처녀성에 대한 건 나중에 그 수수께끼를 풀면 되고 지금은 그녀를 안심시키는 작업에 열중해야 했다. 그의 마음이 바빠졌다. 지금 그녀를 붙잡지 못하면 그녀 옆에 다시 가기까지 지옥처럼 긴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꺼린다고 해도 나무랄 수 없었다. 빌어먹을. 꺼리는 정도면 괜찮았다. 아마 말 그대로 겁에 질려 있을 것이다.

이유는 충분했다. 쉬지도 않고 밀어붙이며 그 어떤 여자도 두려워할 정열만을 보여주고 쾌감은 전혀 주지 않았다. 이미 저울은 위험할 정도로 기울어졌다. 빨리 그녀가 느끼는 고통을 쾌감으로 바꿔 주지 않으면 그녀를 영영 잃게 될까 겁이 났다. 이런 두려움을 느낀 것 역시 처음 있는 일로, 그는 사실 당황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여자를 절정에 오르게 하는지는 너무나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가 싸울 힘을 내기 전에 빨리 행동에 옮겨야 했다. 그녀에게 쾌감을 느끼게 해서 고통스런 좀 전의 기억을 지워야 했다. 부드러운 곳으로 단단한 그의 남성이 삽입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를 받아들여 쾌감을 발견하게 해야 했다.

그는 다시 천천히 그녀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굳히더니 손을 가슴에 대고 그를 밀어내려는 것 같았다.

"아니, 멈추지 않을 거요. 지금 당신을 아프게 하고 있다는 걸 아오. 하지만 나를 당신 안에 가두는 즐거움을 꼭 알게 해줄 거요"

그는 거칠게 말했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은 괴로움으로 어두웠다. 그는 그녀를 안고 체위를 변화시켜 그녀가 최상의 감각적인 쾌감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녀의 허벅지가 자신의 엉덩이를 강하게 조여 오고 안쪽의 살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당신을 즐겁게 해줄 수 있소. 에반젤린, 나를 믿으시오"

그는 키스로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처음에 그의 이름을 작은 소리로 속삭인 이후 에비는 여태껏 아무 말도 안 했다. 로버트는 잠시 숨을 멈추고 그녀의 손을 들어 그의 목에 가져다 댔다. 잠시 후 그녀의 손가락이 살짝 그의 목덜미를 만졌고 그 허락하는 것 같은 작은 몸짓에 그는 안심이 됐다.

에비는 다시 눈을 감고 고통스런 그의 움직임을 참으려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움직일 수도 생각할 수도 없고 단지 참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충격과 고통, 그리고 실망으로 울고 싶었지만 그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가눌 수 없었고 그녀의 몸은 침범 당했다. 전적으로 그의 자비에 매달린 몸이 되었다.

처음에는 또다시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통증이 아닌 다른 날카롭다고 할 감각이 찾아왔다. 그녀는 놀라서 몸을 일으켰고, 곧 이어 통증이 점차 쾌감으로 변해 가 그녀는 크게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그는 다시 같은 동작을 반복했고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구 몸을 움직였다.

한기를 느꼈던 그녀였지만 이제 열이 올라 짜릿한 쾌감이 발끝까지 전달돼 마치 전신에 불이 붙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다리 사이 감각은 더욱 강해지고 커졌다. 그녀의 손은 그의 목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그의 어깨에 매달리고 손톱은 단단한 근육에 꽂혔다. 그는 거세게 그녀의 엉덩이를 붙잡고 들어올리며 삽입과 후퇴를 반복했다. 눈앞이 빙빙 돌 것처럼 소용돌이치며 정상을 향해 끝없이 올라가는 느낌이었고, 그녀는 오로지 그곳에 오르기 위해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헉헉거리며 애타는 신음을 흘릴 때까지 자신을 그녀에게 주었다 거두어들이기를 반복했다. 에비는 자신의 모든 감각이 조각조각 나는 것 같은 쾌감을 느끼면서 큰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버둥거렸고 그의 살 속으로 녹아드는 것 같은 쾌감에 이어 전신의 감각이 맹렬하게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로버트는 이를 악물고 그녀 안에 깊숙이 머물러 있었으나, 그녀가 정상에 오르자 자신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큰 신음을 지르며 그도 이성을 잃고 자신을 분출했다. 절정에 이른 그의 거친 신음소리를 멀리서 들으며 그녀의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에비가 전에 멍하게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면 이번엔 더 했다. 그녀는 온몸의 힘을 빼고 지쳐 탈진해 가수면 상태였다. 완전히 지쳐 버린 그녀의 육체와 정신은 모두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잠시 잠이 든 것 같았다. 안개 같은 의식의 세계로 떠오르기 전에 그녀는 희미한 꿈을 꾼 것 같았으나 정확한 기억은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서 몸을 떼는 것을 느꼈고 그의 남성이 빠져나가는 고통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는 부드럽게 속삭이며 그의 남성을 완전히 빼냈다. 그녀는 즉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옆으로 누워 몸을 구부리고 싶었으나 사지가 너무 무거웠다. 다시 검은 안개가 그녀를 휘감았다.

갑자기 감은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빛이 켜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빛을 피하려 몸을 돌렸지만 그가 그녀를 붙잡았다. 침대에 앉는 그의 체중으로 매트리스가 흔들렸고 그는 곧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에비는 거부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서려 했으나 그럴 힘이 없었다.

"쉬‥‥‥."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에비, 좀더 편하게 만들어 주겠소. 잠이 더 잘 올 거요"

차가운 젖은 헝겊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 닿았다.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그는 그들이 나눈 사랑의 흔적을 닦아 내고 마른 타월로 다시 닦아주었다. 에비는 조용히 만족한 신음소리를 냈다. 일을 끝낸 그는 욕실에 타월과 헝겊을 갖다 두고 돌아와 전등을 끄고 그녀 옆으로 조

심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가 그녀를 품에 끌어당겨 안아도 그녀는 깨지 않았고 그는 그렇게 소중하게 그녀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에비는 새벽이 되기 전 침묵의 어둠 속에 깨어났다. 달빛이 기운 지는 오래됐고 별빛은 반짝거리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은 그런 시간이었다. 태양이 떠올라 여명이 밝기 전 가장 어두운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로버트의 품에서 맛본 지난밤의 거친 정열의 대가로 아직 지치고 졸린 상태였다. 자신의 몸이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고 마치 그의 의사대로 반응하는 인형 같았다.

로버트는 깊고 고르게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한쪽 팔은 그녀의 머리 아래에 구부려져 있었고 다른 손은 그녀의 허리에 감겨 있었다. 그의 체온이 그녀를 감쌌고 서늘한 밤 그 온기는 반가웠다. 하지만 옆에 누운 그의 존재가 낯설게 느껴져 그녀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함께 보낸 지난밤이나 그들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피곤하고 충격을 받은 상태라 머릿속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상념과 잔상들을 정리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저절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떨쳐 버릴 수도 없었다. 그녀는 노력을 포기하고 그저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려 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신을 주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일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힘들었다. 육체적인 통증은 오히려 이해할 수 있었고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그의 세련된 도회적인 매너 뒤에는 정복자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자제력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자제력이 그렇게 완벽하게 무너질 것은 예상치 못했고 공평하게 말하자면 그도 일이 그렇게 전개될 줄은 예측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이 처녀라고 미리 말했어야 했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하기가 어려웠다. 매트와의 그 짧은 결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로버트가 곧 설명을 요구할 것을 알고 있으므로 두려움으로 목이 죄어 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녀는, 그녀가 처음이라는 것을 그가 모를 수도 있거나 무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미리 말했더라면 그렇게 심한 통증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비밀을 지킨 대가를 심하게 치른 셈이었다.

로버트와 자는 것이 자신의 방어벽을 완전히 부수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생생하게 매트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할지는 몰랐다. 자신을 슬픔으로부터 괴리시킬 수가 없었다. 매트를 사랑하고 그렇게 잃어버린 것은 그녀의 삶과 영혼에 그늘을 만들었다. 지금의 자신은 바로 매트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여자였다.

12년 동안 그녀는 정절을 지켰고 매트의 추억은 보이지 않는 방패가 되어 그녀를 보호했다. 이제 그녀는 마음과 육체 모두를 다른 남자에게 줘 버렸고 돌이킬 길은 없었다. 가슴이 벅차서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강렬하게 로버트를 사랑했다. 좋든 나쁘든 그는 그녀의 인생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 매트를 보내야 했다. 자신과 세상 사이에 놓인 방파제가 아닌, 그녀만의 조그만 추억으로 남게 해야 했다. 그를 두 번씩이나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매트, 잘 가요"

그녀는 마음속에 갖고 다녔던 밝게 웃는 검은머리의 소년에게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나는 이제 로버트의 것이 되었고 그를 너무 많이 사랑해요"

매트의 웃는 모습이 잠시 사라지고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를 축복하는 미소가 서서히 사라져 가는 젊은 얼굴에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찢어질 것 같은 소리를 지르며 그녀는 침대 밖으로 뛰쳐나왔고 그 바람에 로버트가 깼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그를 피해 방의 중앙에 가서 섰다. 손으로 입을 막아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막고 그녀는 어두운 방 안을 미친듯이 훑어보았다.

"무슨 일이오?"

그는 온 신경이 긴장해 터질 것 같았지만 부드럽게 물었다.

"에비, 침대로 돌아와요."

"집에‥‥‥ 집에 가 봐야 해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지금 상태에서 그의 날카로운 눈길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전등을 켜지 않았다. 옷을 찾아 입어야 했다. 바닥에 뭔가 거무스름한 것이 보였고 그녀는 그것을 집어 올렸다. 감촉으로 보아 자신의 옷이었다. 지난밤 격렬한 사랑의 결과로 움직일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뻐근하게 반항했다. 그가 자리했던 깊은 그곳의 아픔도 여전했다.

"왜?"

그의 음성은 조용했지만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직 너무 이르고, 시간이 많이 있소"

무엇을 위한 시간? 물어 보고 싶었지만 이미 답을 알았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면 그는 그녀를 가지려 할 것이다 그녀는 슬픔으로 몸을 떨며, 만일 그가 다시 자신을 만진다면 자신은 산산조각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한 페이지에서 아주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는 건 어떤 경우에도 충격적인 일일 텐데, 하물며 안전한 성채를 떠나 곧장 알지도 못하는 위험으로 뛰어든 그녀의 경우는 더 그랬다. 그녀는 감정을 추스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가야 해요."

울음 섞인 유령 같은 목소리로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그는 침대를 나와 섰고 그의 벌거벗은 육체가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하게 드러났다.

"알았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집에 데려다 주겠소"

그녀는 그가 침대에서 시트를 벗기는 것을 보았다. 그의 다음 동작은 너무 빨라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단 두 걸음에 그는 그녀 옆에 와서 섰고 시트로 그녀를 단단히 휘감아 자신의 품에 들어올렸다.

"조금 있다가."

그는 잔교 쪽 베란다로 나가는 문을 열고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이른 아침은 조용했다. 첫 여명의 빛이 떠오르길 기다리는 동안 신의 창조물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귀뚜라미조차 울지 않았다. 오직 둑에 부딪히는 강물만이 실크 드레스가 스치는 것 같은 희미한 소리를 낼뿐이었다. 로버트는 베란다에 놓여진 의자 중 하나에 그녀를 무릎 위에 껴안은 채 앉았다. 시트가 서늘하고 축축한 밖의 기운에서 보호해 주었다.

에비는 모든 감정을 억제하려고 했다. 몇 분 동안은 참을 수 있었다. 로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강물 쪽을 바라보며 새벽의 동이 트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의 침묵이 그녀를 낭패감에 젖게 했다. 그가 말을 꺼냈다면 대답할 말을 찾느라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야 하게 되자 그녀는 전투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자 얼굴을 그의 목에 묻고 몸을 떨면서 흐느꼈다.

그는 그녀의 울음을 달래거나 말을 걸려고 하지 않고, 단지 더 가까이 끌어안고 그의 체온으로 위로해 주었다. 혼란스런 감정 상태에서 그의 그러한 몸짓은 상당한 위로가 되었다. 지난밤 서로의 육체로 맺어진 결속은 새롭고 강한 것이어서 그녀의 감각은 그대로 그에게 조율되어 마치 그의 숨결이 그녀의 것인 것처럼 느껴졌고 점차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그녀가 조용해지자 그는 시트의 끝자락으로 얼굴을 닦아줬다. 감정을 비워 내자 완전히 지친 그녀는 너무 울어서 아픈 눈으로 호수의 먼 곳을 바라봤다. 가까운 나무 위에서 새 한 마리가 시험삼아 지저귀자 그게 신호인 듯 갑자기 수백 마리의 새가 함에 미친 듯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날의 시작을 기뻐하듯. 그녀가 우는 동안 아침은 희뿌옇게 밝아져 이전에 감추어져 있던 사물들의 신비를 드러내 주었다. 강물에 떠있는 어두운 물체는 나무 등걸인지, 아니면 바위인지, 혹은 해가 뜨면 사라지는 마법의 바다 요정인지 그녀는 멍한 상태에서 궁금증을 느꼈다.

로버트의 따뜻한 온기가 시트를 통해서 그녀에게 전해졌고 강철처럼 단단한 허벅지와 탄력 있는 가슴, 그리고 안전한 팔 힘을 느꼈다. 그녀는 머리를 넓고 매끈한 근육질의 어깨에 기대었고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랑해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어리석었다. 그의 품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같은 고백을 했을까? 그에겐 조금도 새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녀가 얻는 것은 또 무얼까? 그가 떠날 때 겉치레는 될 것이고, 그는 그저 여름날의 즐거운 정사였다고 생각하고 떠날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을 위해서도 자신을 속일 순 없었다. 그녀의 가식을 용납할 정도로 그가 신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속을 바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침착함이 반가웠다. 그는 앵무새처럼 그녀의 말을 반복하지도 않았고, 만일 거짓말을 했으면 더 싫었을 것이다. 또 그녀의 말을 듣고 불편해 하거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그녀를 살피는 표정으로 쳐다보고는 차분하게 물었다.

"그런데 왜 우는 거요?"

에비는 한숨을 쉬고 다시 강물을 바라봤다. 그는 설명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도 자신의 영혼을 드러내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 오래도록 로버트의 연인으로 남는다고 해도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생각하기만 해도 고통스런 기억들이 있었다.

"에비."

그는 부드럽게 대답을 요구했다.

슬픔이 그녀의 입가와 눈에 떠올랐다. 그것은 지난 12년 간 그녀와 함께 걸어다니고 밤에는 함께 침대로 갔으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침 함께 깨어난,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한 감정이었다. 친구나 가족들도 물리칠 수 없는 그런 깊은 고독과 슬픔은 그녀의 보이지 않는

동반자였다. 하지만 로버트는 대답을 원했다. 그렇게 서글프게 울어대는 여자를 한동안 안고 있던 남자라면 적어도 그 이유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정말 매트가 가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잠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는 오래 전에 가지 않았소?"

"네, 그랬죠."

그녀만이 그 12년이 얼마나 긴지 알았다.

"하지만 지난밤까지 나는 여전히 그의 아내였어요."

"아니오."

그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아니었소"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올려 그를 보게 만들었다. 그의 강렬한 눈빛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날이 밝아 있었다.

"당신은 결코 그의 아내가 아니었소. 그와 함께 자지도 않았고, 처녀가 아니었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기를 바라오. 나는 바보도 아니고 시트에 묻은 혈흔은 당신이 생리 중이기 때문도 아니니까."

에비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비밀을 똑바로 끄집어내는지 놀라웠다.

"당신은 그와 결혼했잖소"

그는 무자비하게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당신을 가진 유일한 남자가 된 거요?"

슬픔이 그녀의 눈을 어둡게 했지만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는 6월에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 짧은 말 속에 슬픔과 운명에 대한 풍부한 감성이 묻어 났다. 그는 그녀가 말을 계속하길 재촉하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1년 전에 미리 예약을 하지 않고 6월에 교회에서 식을 올리는 것은 불가능했어요."

그녀가 설명했다.

"매트와 나는 아직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에 미리 날짜를 잡았어요. 그러니 개인적인 사정 같은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죠"

에비는 다시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호수의 물을 내려다봤다.

"정말 아름다운 결혼식이었어요. 날씨도 화창했고 케이크도 완벽하게 준비됐죠. 모든 것이 다 완벽했어요. 그런데 그날 아침 생리가 시작됐어요."

로버트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그녀가 말을 계속하길 기다렸다. 에비는 그 순진했던 소녀를 기억하면서 잠시 말을 멈췄다.

"그날 매트에게 우리가 사랑을 나눌 수 없다는 말을 할 때, 정말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우리는 둘 다 비참했죠"

"왜 못했지?"

말을 시작했지만, 사춘기 시절의 연인들이 그렇게 편하게 성인들처럼 사랑을 나눌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맞아요."

에비가 그의 생각을 읽고 말했다.

"우리는 한 번도 사랑을 나눈 적이 없었어요. 매트도 나만큼이나 경험이 없었고, 우리는 그저 젊은애들이 경험할 정도의 키스나 애무를 빼고는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거든요 열여덟 살짜리 부부가 결혼식을 올린 밤에 그냥 키스를 하고 껴안고 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어요. 잠시 키스하던 것도 매트가 너무 실망한 바람에 별로 오래 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매트는 원래 성격이 밝았고, 별로 오래 마음속에 담아 두지 않아서 다음날 아침엔 벌써 그 문제로 농담을 했죠.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절대로 이 얘기는 하지 말자고 약속까지 했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더니 곧 말이 멈췄다.

"그리고 그날 매트는 죽었어요."

로버트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에서 머리카락을 떼 주었다. 그녀는 젊은 남편과 한 번도 사랑을 나누지 않고 12년이 넘게 그를 위해 정절을 지킨 것이다. 특유의 날카로운 분석으로 그는 상황을 눈앞에 그린 듯 짐작했다. 매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에비는 그들이 한번도 사랑을 나누지 못한 것을 비관해 그녀 자신을 다른 남자들의 손길로부터 아예 봉인한 것이다. 처음 순간을 매트와 함께 하지 않았으니 그 어떤 남자도 소용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치 숲 속의 잠자는 공주처럼 감정을 감추고 산 것이다.

로버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야만스런 만족감을 느꼈다. 그 엄청난 벽을 그는 뛰어넘은 것이다. 그녀의 첫 경험은 바로 그의 것이 되었다. 고로 그녀는 그의 것이었다.

성적인 문란함을 혐오했지만, 그렇다고 처녀성을 숭배한 적도 없다. 자신도 동정이 아닌 터에 여자에게 처녀성을 요구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의 세련됨 속에 숨은 도덕심은 에비를 사랑한 사람이 오직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의 강렬한 원초적 소유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와 랜든 머서의 관계는 이런 낭만적인 감정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른 아침 에비를 무릎에 앉히고 그는 신속한 결정을 내렸다. 나사의 보안이나 국가 안보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그녀에게 경고하거나 조사를 멈추진 않을 것이지만, 이 사건이 해결되면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해서 에비가 고발되는 것을 막을 것이다. 그녀도 처벌을 받을 테지만, 그것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내리는 것이었다. 그녀가 감옥에 가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놀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왜 그녀가 이렇게 악랄한 범죄에 개입됐는지 의아했다. 그는 사람을 잘 판단했고 그녀의 성격이 곧다는 것은 내기해도 좋았다. 그녀가 정말로 이 일에 관련되었다면 그녀가 생각하는 뭔가 옳은 이유가 있을 것이고, 어쩌면 정확한 이유도 모르게 개입되었을 가능성이제일 높았다. 그는 더욱 굳세게 그녀를 보호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전에 말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것을 잘 돌보는 사람이고 지난밤 에비는 가장 원초적인 면에서 그의 것이 되었다.

그는 오래 전 그녀의 결혼식날 밤 운명에 간섭한 자연의 리듬이 반가웠다. 매트로 보자면 안됐지만, 그 소년에 대한 그의 질투심은 많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신 동정심이 자리잡았다. 매트 쇼는 이렇게 아름다운 아내의 완벽한 몸매를 채 즐기지도 못한 것이다.

로버트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가 완전히 맨몸인 상태에서 그녀의 몸매를 보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녀의 몸매는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탄탄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의 풍만한 봉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크림빛 피부는 달빛 아래서 은빛으로 빛났다. 모델처럼 마른 여자들을 선호했던 그로서는 그녀의 곡선미가 더욱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를 취하지 않고 견딜 수가 없었다.

신사라면 좀더 그녀를 배려해야 했었지만, 그의 많은 친구들이 아는 것과는 달리 그는 사실 신사가 아니었다. 그는 자제력이 강하고 뛰어난 지성을 갖고 있었고 절대로 일부러 잔인하게 구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 신사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에비에 관해서

그의 자제력은 창 밖으로 날아갔다.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그의 본능적인 소유욕과 정열의 순간을 기억하자 그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졌다.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고 콘돔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런 보호 수단을 무시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번처럼 아예 피임을 생각하지도 않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임신했을 수도 있었다. 일단 가능성을 고려하자 그는 마치 산의 정상에 황금빛 서광이 비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놀랍게도 그는 당황하거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혐오스런 감정이 들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기쁘고 그 가능성에 매혹됐다. 그는 시트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차갑고 평평한 복부에 손을 올렸다.

"우리는 벌써 부모가 됐을 수도 있소. 피임을 하지 않았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눈물과 슬픔은 이제 다시 그녀의 통제하에 있었다.

"헌스빌의 의사에게 가서 피임약을 처방 받았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그다지 마음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안심을 했어야 했지만, 그보다는 이상하게 실망스런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상식이 이겼다.

"언제?"

"당신을 만나고 나서 얼마 안 돼서"

그녀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로버트는 사설정보원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코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헌스빌에 갔던 날 그들은 완전히 헛 다리만 짚은 셈이었다. 그는 이 일에 대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약간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나와 잠잘 생각은 없다고 말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럴 생각은 없었죠.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중요한 일을 운에 맡길 수는 없잖아요. 당신이 너무 확고해서 내 의지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어요"

"당신이 나를 원하지 않았다면 당신의 의지력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데."

그가 말했다.

"나도 알아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새벽이 찬란하게 밝아 오기 시작하더니 황금빛으로 수면 위에 빛나기 시작했다. 호수 위를 지나가는 보트의 모터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곧 강은 어부들과 낚시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붐빌 것이다. 아직 에비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이곳에서 계류장을 운영하고 있고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 일어나서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지금처럼 만족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에비는 머서가 진짜로 하는 일이 뭔지 모를 수도 있고 너무 깊이 연관되어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별 어려움 없이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갖고 나자 그 비밀스런 슬픔 아래 무엇이 숨어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에비가 매트에 대해서 완전히 잊게 되는 날이 올까 싶었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이제 매트 쇼의 유령은 사라지고 그녀의 감정은 자유롭게 풀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본능적으로 그는 그들이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눈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를 아예 유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전에 알았던 대부분의 여자들도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 고백은 그녀들이 가엾다는 감정 이상의 감동은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들과의 시간을 즐겼지만, 아무도 그의 벽을 뚫지는 못했다. 그 벽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들은 몰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에비의 단순한 고백은 그를 만족시켰고 그는 맥박에 피가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에 대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고 의존하며 그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그로서는 그녀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에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는 그렇게 많이 내줄 수 있는 것일까?

그는 그녀를 침실로 안고 들어가서 침대에 내려놓고 시트를 풀었다. 그녀의 벌거벗은 크림빛 피부는 다시 그를 흥분시켰고 그는 그녀의 가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유두를 희롱해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입술 한 끝이 미소로 바뀌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

"당신이 나아질 때까지 참겠소. 욕조로 들어가요. 커피메이커 스위치를 켜고 올 테니. 목욕하면 쓰라린 게 좀 나아질 거요."

"좋은 생각이네요"

진지하게 그녀는 동의했다.

그녀가 욕실에 들어간 뒤 그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모든 게 더욱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이제 그의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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