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사랑 에반젤린-10화 (10/19)

10장

저녁을 함께 하는 동안 그녀는 로버트보다 더 완벽한 데이트 상대를 구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세련됨은 나무랄 데가 없어서,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선 고풍스런 예절과 보호본능이 느껴졌다. 그는 그녀에게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기 위해 모든 배려를 다했고, 태어나면서부터 남부 숙녀인 그녀는 그의 배려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로버트 캐넌은 그녀에게 구애하고 있으니 오늘 저녁에는 그녀를 즐겁게 해주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의 관심은 온통 그녀에게 집중되었고 다른 여자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비록 여자들은 그를 쳐다보느라 바빴지만.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그녀가 테이블로 돌아오면 의자를 빼서 앉혀 주었고, 끊임없이 와인을 채워주고는 그녀가 몸을 떨자 웨이터에게 실내의 온도를 올려 달라고 주문했다. 댄스플로어로 걸어나갈 때 그의 손은 항상 그녀의 자그만 등에 보호하듯 놓여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그녀를 아주 편안하게 만들었다. 이 저녁 데이트에 그대가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지난 12년 간 데이트라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열여덟 살일 때와 서른 살인 지금 데이트하는 기분은 분명히 달랐다. 과거에는 햄버거를 먹고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친구들과 어울리는 가운데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는 자신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도회적이고 세련된 남자와 데이트를 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그의 거무스름하고 잘생긴 얼굴을 보면서 그가 진정으로 세련된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헌스빌에서 제일 훌륭한 레스토랑이었지만 뉴욕이나 파리의 최고 장소들에 비교할 만한 곳은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이 레스토랑이 보잘것없다는 그런 기미를 조금도 내

보이지 않았다. 덜 세련되고 예의가 부족한 남자였다면 더 훌륭한 장소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을 거라는 말로 그녀를 압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버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 집처럼 편히 있을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고 등급을 매기거나 비교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즐길 줄 알았다. 금식기에 하얀 냅킨으로 우아하게 식사를 하는 것만큼이나 맨손으로 바비큐를 먹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로버트였다.

불공평했다. 아이들과도 잘 놀아 줄 뿐 아니라 그녀가 속한 세계에도 완벽하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라니. 그의 사랑스런 또 다른 일면이었다.

그가 그녀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을 흔들었다.

"지난 5분 간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잖소? 보통이라면 우쭐했겠지만 어째 좀 불편해지는데"

그가 농담을 하듯 말했다. 포크를 집어들면서 그녀는 말했다.

"불편해하지 말아요. 우쭐해도 괜찮은 생각이었으니까. 아주 다른 환경에서도 당신이 편해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조용히 말했다.

"차이가 있다면, 이쪽이 더 좋은 쪽이오. 이곳의 더위는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이곳의 30도와 뉴욕의 30도는 확실히 다르오"

그녀는 우아하게 눈썹을 들어올렸다.

"30도를 더운 날씨라고 하기는 좀 그렇죠‥‥‥."

그는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그를 웃게 만드는 그녀의 능력에 대해 생각했다.

"바로 그 차이요. 생각의 차이. 뉴욕 사람들에게 30도는 더운 날씨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저 참 좋은 날씨이니‥‥‥."

"덥지 않다는 것은 아니에요. 30도는 물론 여기 사람들에게도 더운 날씨죠. 하지만 35도에 비하면 그렇게 더운 날씨가 아니라는 거예요"

"거 보시오, 역시 생각의 차이라니까"

그는 와인을 음미했다.

"뉴욕을 그 자체로 좋아하오. 같은 이유로, 이곳도 이 모습 그대로 좋소. 뉴욕에는 흥분과 에너지가 가득하고 오페라나 발레 그리고 박물관들이 즐비하지. 대신 이곳엔 교통지옥도 없고 맑은 공기와 한가한 여유가 있고"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멈췄고 그의 음성이 조금 더 깊어졌다.

"물론 당신들이 그 유명한 ‘당신들 모두'라는 말을 별로 쓰지 않는 것 같아 약간 실망은 했지만."

그녀는 웃음을 참았다.

"흠, 왜 그 말을 당신에게 써야 하죠? 당신은 혼자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요? 그걸 생각 못했군,"

"당신이 혼자라는 거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그가 오늘 오후 그랬듯이 그의 사생활에 대한 질문으로 생각할 수 있음을 알았다.

"결혼한 적이 있었나요?"

그는 와인을 마시면서 잔 너머로 그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아니오"

그는 편하게 대답했다.

"한 번 약혼한 적은 있었소. 대학 시절에.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결혼할 때가 아니고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깨어졌소"

"몇 살이에요?"

"서른여섯. 당신의 다른 궁금증을 풀어 준다면‥‥‥. 성적인 관심 대상은 전적으로 여성이오. 마약은 해본 적 없고 전염병 같은 질환도 전혀 없소.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매들린이라는 여동생이 있소. 몬태나 주에서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소. 먼 친척들이 약간 있지만 왕래는 안 하오"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삶의 이력을 말하는 그는 별로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해서 그런 걸까? 그럼에도 그녀는 그 사실들을 주의 깊게 기억했다.

"베키와 나는 전국에 친척들이 퍼져 있어요. 삼촌 중 한 분이 몽고메리라는 곳에서 커다란 농장을 경영하는데 매년 6월이 되면 가족들 모임을 열어요. 특별히 가깝지는 않지만 사이가 좋은 편이고, 제이슨과 페이지에게 외가 쪽 식구들에 대해서 알게 하고 싶어서 그곳에 자주 가요"

"부모님은 돌아가셨소?"

사설정보원들의 보고서를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물었다.

"네."

그녀의 눈에서 황금빛 반짝임이 어두워졌다.

"베키가 유일한 가족이에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매트와 결혼할 때까지 베키네 집에서 함께 살았어요."

매트 얘기를 할 때 그녀의 음성이 잠시 떨렸다.

"그 후엔 어떻게 됐소?"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리곤 매트의 부모님과 함께 살았죠"

작게 들릴 듯 말 듯 그녀가 말했다.

"지금 사는 그 집이에요. 그분들 집이었어요. 계류장도 시부모님 것이었고, 매트가 외아들이라 돌아가시곤 모든 것을 내게 물려주셨어요."

로버트는 다시금 질투의 화살을 맞은 것 같았다. 그녀는 매트가 자란 집에서 여태껏 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집에서 살면서 어떻게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사할 생각은 안 해봤소? 다른 집을 살 생각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가정은 내게 소중한 곳이에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가정을 잃었어요. 물론 베키와 형부 폴이 반갑게 맞아 줬지만, 그래도 그곳은 내 집이 아니었어요. 매트와 나는 처음엔 부모님과 따로 살 예정이었지만 매트가 죽고 나선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시부모님이 같이 살자고 하셨어요. 사람이 그리운 나만큼이나 그분들도 내 존재가 필요했어요. 나를 필요로 하셨기 때문에 그곳에서 사는 게 편안했어요. 그래서 결국 내 집이 됐죠"

그녀는 단순하게 말했다.

그는 그녀를 생각에 잠긴 눈으로 바라봤다. 장소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가족의 뿌리에 대해선 더더욱. 어린 시절을 보낸 코네티컷에 커다란 저택이 있었지만 그곳은 단지 장소에 불과했다. 지금은 뉴욕에 있는 펜트하우스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넓은공간과 완벽하게 장식된 곳이지만 에비가 그곳을 좋아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그곳에서 편안하게 살았고, 무엇보다 보안이 잘된 곳이었다.

레스토랑에는 라이브밴드가 음악을 연주했고 실력이 뛰어났다. 장소에 걸맞게 그들은 오래된 팝송들을 연주했고, 춤추기에 적당한 음악이었다. 그는 에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춤추고 싶소?"

그의 손에 손을 얹는 에비의 얼굴에 환하게 미소가 피었지만, 잠시 그녀는 망설이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오랜만이어서요"

그녀는 정직하게 말했다.

"리듬을 맞출 수 있을지."

"나를 믿으시오"

그는 그녀의 걱정을 달래면서 말했다.

"내가 이끌 거고, 춤이란 건 자전거 타기처럼 한번 배우면 잊혀지지 않는 거요."

그녀는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 처음에는 뻣뻣했지만 몇 번 회전하면서 점점 리듬에 맞춰 저절로 몸이 움직여졌다. 로버트는 훌륭한 춤솜씨를 갖고 있었다. 그로선 당연한 것이겠지만. 너무 가까이 몸을 겹치지 않고도 충분히 안기는 느낌이 들도록 선 채 스텝을 밟았다. 역시 뛰어난 매너였다.

음악이 계속되면서, 그녀는 드러내 놓고 유혹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알았다. 춤추는 것 자체가 유혹이었다.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은 그의 손, 머리카락에 스치는 그의 입김, 코를 간질이는 그의 청결한 체취, 가까이서 보니 거무스름한 피부에 면도 자국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가끔 그녀의 젖가슴이 그의 가슴을 스치고 그들의 허벅지가 우연히 닿았다. 그것은 그대로 간접적인 섹스를 하는 것 같았고, 그녀는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자정에 레스토랑을 나섰다. 건터스빌까지 45분간의 드라이브 동안 에비는 그가 능숙하게 지프차를 운전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녀의 집 앞 차도에 차를 멈추고 시동을 끌 때까지 그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들은 집 뒤로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을 볼 수 있었다.

"내일은?"

그가 그녀 쪽을 보며 물었다.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안 돼요. 크레이그에게 얘기도 안 해서, 언제나처럼 아침에 문을 열거예요. 어쨌든 내일은 안 돼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좋소, 그럼 이렇게 합시다. 크레이그의 근무시간을 1주일에 한 번 바꾸면 어떻소? 어쨌든 그가 당신을 위해서 일하는 거지, 반대의 경우가 아니잖소"

"우리는 친구예요. 그리고 그 애는 정말 여러 가지 일을 많이 도와주죠. 크레이그를 이용하는 짓은 하지 않겠어요"

차가운 목소리에 그녀의 마음이 상했음을 알았다. 그는 내려서 차문을 열어 줬다. 바닥에 그녀를 부축해 내려 주며 그는 다시 애원하듯 말했다.

"어쨌든 나를 위해서 조금은 시간을 내주겠소?"

"크레이그에게 얘기는 해보겠어요"

그녀는 확실하지 않게 얘기했다.

"부탁이오"

그녀는 지갑에서 집 열쇠를 꺼냈고 로버트는 열쇠를 받아 대신 문을 열어 줬다. 그리곤 현관의 등을 켠 뒤 곧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녀를 그가 잠시 붙잡았다.

"잘 자요, 에비."

그는 중얼거리며 입술을 덮었다.

키스는 따스하고 여유 있었다.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있는 손과 입술 위에서 움직이는 입술 외에 다른 신체적인 접촉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쁜 신음을 흘린 그녀는 입술을 열고 그의 따스한 숨결과 밀려들어오는 혀를 받았다.

그가 머리를 들었을 때 그녀의 가슴은 쿵쿵 울리고 평소보다 더욱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숨결도 거친 것을 확인한 그녀는 다소 마음이 풀렸다.

"그럼 내일 봅시다."

다시 가볍게 키스하고 그는 지프차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닫고 잠근 뒤 그녀는 문에 등을 대고 차가 떠나는 소리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젖가슴이 단단해지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울고 싶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싶기도 한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녀는 얼른 구두를 벗어 던지고 부엌으로 물을 마시러 갔다. 왼발에 뭔가 차갑고 젖은 것이 닿자 깜짝 놀란 그녀는 부엌의 전등을 켰다. 바닥에 냉장고 바닥에서 새어나온 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문을 홱 열었지만 냉장고의 전등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지금은 안 되는데."

절로 탄식이 나왔다. 냉장고가 고장난 타이밍이 너무 나빴다. 금전적인 여유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신용카드로 새 냉장고를 살 생각을 해봤지만, 은행 대출금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냉장고가 오래되긴 했지만 한 해쯤 더 견뎌 줘도 좋았을 텐데. 그렇게 되면 두어 가지 지불을 끝낼 수 있고 현찰 여유도 생길 텐데. 적어도 6개월만 지나고 고장났어도.

새벽 1시에 고장난 냉장고를 붙들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피곤으로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그녀는 바닥을 닦고 냉장고 밑에 타월을 대서 새어나오는 물을 막았다.

그리고 침대에 들었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잠깐 생각해 본 파트타임 일이 이제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돼 버렸다. 다시 아랫배가 아파 왔다. 하루 중 로버트와 함께 한 저녁 시간이 가장 즐거운 일로 기억됐다.

아침 7시에 베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베키가 주위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보는 동안 에비도 신문에 실린 벼룩시장 물품들을 전화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이라 전화를 받지 않는 곳들이 많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광고의 냉장고는 벌써 팔렸다고 했다.

9시쯤 베키와 그녀는 괜찮은 냉장고를 찾았다. 백 달러는 현재 에비의 재정상태를 고려하면 상당한 부담이었지만 새것에 비하면 훨씬 쌌다. 베키가 그녀를 데리러 와서 두 사람은 냉장고를 보러 갔다.

"10년 썼는데요, 앞으로 6,7년은 더 버틸 거예요"

주인 여자는 부엌으로 그들을 안내하면서 말했다.

"고장난 곳은 없고, 새 집을 짓게 돼서 문이 두 짝인 대형 냉장고를 구입하려고 파는 거예요. 원하는 모델이 마침 세일 중이어서 이 냉장고를 팔면 곧바로 새것이 들어올 거예요."

"사겠어요"

에비가 대답했다.

"집에 어떻게 가져가려고?"

현실적인 베키가 물었다.

"싣고 갈 트럭이 없잖아."

하지만 문제를 제기한 베키는 역시 해결책도 마련해 주었다. 픽업트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이리저리 연락하자고 했다. 에비도 많은 어부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30분쯤 지나자 도와줄 수 있는 친구를 찾을 수 있었다.

냉장고를 집에 들여 논 에비는 크레이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성격 좋은 크레이그의 대답이었다.

냉장고를 날라다 준 친구 서니는 에비와 베키가 냉장고에서 상한 음식들을 꺼내 옮기는 동안 가스를 충전해 줬다. 냉동음식들은 상태가 괜찮았지만 계란이나 우유 같은 제품은 이미 상했을 것 같아 내다 버렸다.

"고장난 냉장고 버려 줄까?"

서니가 물었다.

"아니, 일하러 가야 하잖아. 그냥 잔교 쪽 베란다에 내다 줄래? 트럭이 고쳐지면 내가 갖다 버려야지. 서니,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오늘 어떻게 했을지‥‥‥."

"언제든지 불러."

서니는 사람 좋게 대답하고는 냉장고를 바깥으로 끌어내 줬다. 그일이 끝난 뒤 서니는 떠났고, 베키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계류장에 서둘러 가야 하는 걸 아니까 지금은 그냥 간다. 하지만 로버트와의 끈적끈적한 데이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좀이 쑤신다는거 잘 알지?"

에비는 흘러내린 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괜찮았어"

그녀는 말하면서 자신의 대답이 베키를 실망시킬 것을 알았다.

"괜히 걱정했지 뭐야. 저녁 시간 내내 정말 신사처럼 굴더라구."

"이런 빌어먹을."

한때는 보호의 화신이었던 큰언니가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머피의 법칙은 계속됐다.

계류장에 도착하자, 수리 일이 잔뜩 늘어나서 버트가 트럭은 아예 손도 대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수리비 수입이 생계에 직결된 문제이므로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수리 요청이 더 많이 들어오면 재정도 좀더 나아질 테니, 어쩌면 보트의 모터 교체 비용을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크레이그가 선착장까지 나와 그녀를 보고 놀렸다.

"보스, 밤에 돌아다니지 말고 잠을 좀 자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심하니?"

"그렇지는 않아요. 그저 눈 주위가 약간 검다고나 할까‥‥‥."

"다른 물건이 더 고장나면 아예 총으로 쏴 버리겠어"

그녀는 답답해서 말했다.

크레이그가 팔을 들어서 그녀의 어깨에 올려놨다.

"아, 보스, 괜찮을 거예요. 피곤해 보일 뿐이니, 잠시 낮잠을 잘 거면 내가 몇 시간 더 있어도 돼요. 오늘 저녁 데이트까지는 약속이 없으니까요."

그의 제안에 감동을 받은 에비는 미소지었다.

"아니, 괜찮아. 집에 가서 쉬어. 이 지긋지긋한 혼란 상태를 해결할 만한 일을 찾아봐야겠어"

"무슨 일?"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렸다. 크레이그와 그녀는 동시에 돌아봤다. 호수에서 오가는 보트소리에 로버트가 도착하는 소리를 못 들었다. 그녀와 달리 그는 맘껏 휴식을 취한 듯 보였다. 표정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크레이그가 그녀의 몸에 팔을 두르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엿보였다.

"냉장고가 고장이 났어요"

그녀가 말했다.

"아침에 쓸 만한 중고품을 찾아서 집까지 배달해 놓고 오는 길이에요"

그 말은 왠지 그를 머뭇거리게 한 것 같았다. 한참 그녀를 보다 그가 다시 말했다.

"거의 잠을 못 잔 것같이 보이는데"

"거의 못 잤어요. 오늘밤에는 아마 시체처럼 잘 것 같네요"

크레이그가 말했다.

"더 있지 않아도 되면 지금 가 볼게요."

"그래, 내일 보자."

"네."

그는 휘파람을 불며 갔다. 로버트는 체격 좋은 그 젊은이를 한참 쳐다봤다.

"크레이그를 질투할 이유는 없어요."

에비는 그를 스쳐 에어컨이 시원한 사무실로 가며 차갑게 말했다. 뒤를 따라가는 로버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안에 들어서자 그가 중얼거렸다.

"아무 말도 한 기억은 없는데."

"말이야 하지 않았죠. 그래도 당신 생각이 뻔히 보여요."

그는 당황했다. 그녀의 관찰력은 이제 생각을 읽는 수준까지 확대됐다. 자신이 속이 들여다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크레이그를 봐 왔고, 성적인 관심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당신은 안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내 사춘기 시절 경험으로 볼 때‥‥‥."

"그 주체하지 못하는 호르몬 이야기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아요. 흠이나 잡으려면 가 버려요. 너무 피곤해서 상대할 힘도 없어요"

"피곤해 보이오‥‥‥."

그는 그녀를 안아 머리를 움푹 파인 그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금발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난밤에 우아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는 오늘은 한 가닥으로 가지런히 땋아져 있었다. 언제, 아니 가까운 밤을 골라서 그 머리를 풀어 그의 베개에 펼쳐놓으리라 다짐했다.

그녀를 흔들어 주며 그는 부드럽게 다리를 움직였다. 그의 단단하고 따뜻한 육체에 안전하게 안긴 느낌에 에비는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다 자신이 깜빡 잠이 든 것을 안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들고 몸을 떼어 냈다.

"아, 이제 됐어요. 더 있다간 아예 당신 품에서 잠이 들어 버리겠어요"

"언젠가는 내 품에서 잠이 들 거요. 물론 장소는 다르겠지만."

그의 대답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너무나 간단히 흥분시키는 그의 섹시한 매력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매트의 품에서 잠들었던 단 하룻밤이 생각났다. 그 달콤함은 다음날 그 젊은 생명이 짧게 끝남으로써 비극이 되었지만 로버트와 자는 것은 오래 전 그 밤과는 너무 틀릴 것이다‥‥‥.

그는 그녀의 눈이 다시 슬픔으로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욕설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 진전이 되었다고 느끼면 다시 매트 쇼의 유령과 마주쳐야 했다. 믿기 어려웠지만 그녀가 줄곧 정절을 지켰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랜든 머서와 그녀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는 없는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와 그녀의 관계는 확실히 육체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일이 있어서 온 거예요?"

그녀는 물었다.

"잠깐 당신을 보러 왔을 뿐이오. 집에 가기 전에, 저녁에 같이 식사하겠소?"

"아뇨. 너무 피곤해 집에 가서 그냥 자고 싶어요."

"좋소."

부드럽게 그는 그녀의 볼을 만졌다.

"그럼 내일 봅시다. 오늘밤 보트로 집에 갈 때 조심하고"

"그럴게요. 날이 훤해서 집에 갈 때도 아마 그렇게 어둡진 않을 거예요."

"어쨌든 조심하시오"

그는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 키스하곤 떠났다.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그의 검은 눈썹은 일자로 모아졌다. 지난밤의 계략도 그가 의도한 대로 잘 이뤄지질 않았고, 그는 점점 참을성이 없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유복하게 태어났고 스스로 엄청난 부를 이룩한 그로선 중고 냉장고를 산다는 생각은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얼마를 지불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새 것보다는 당연히 쌀 테고, 금전적으로 압박을 가하려는 그의 계획은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머서도 최근에 금전적인 면에서 곤란을 겪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직 걱정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곧 그는 현찰을 손에 쥐어야 하는 곤궁에 몰릴 것이디. 그가 다시 일을 저지를 때면 로버트는 준비를 할 테고 덫은 점점 조여지고 있었다.

앞으로 2주나 3주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으로 보였다. 물론 더 신속히 일을 진행할 수도 있었지만, 너무 빨리 마무리짓는 것에 대해 망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머서가 다시 거래를 한다면 그때는 행동을 해야 했지만, 그때까지는 에비를 유혹하기 위한 것에 시간을 사용할 작정이었다.

그것도 물론 그녀를 죽은 남편에 대한 생각에서 멀어지게 해야 가능할 것이지만. 질투에 사로잡힌 감정은 억눌려져 있었지만 여전히 뜨겁게 억제된 채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질투를 느끼다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이었고, 그런 감정을 느낄 만큼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경멸하던 그였다. 하지만 에비를 원하는 것처럼 어떤 여자도 원한 적이 없었다. 이런 모든 것이 그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를 만나면 그는 단순히 관심의 대상을 옮겼다. 여자의 애정을 차지하기 위해 라이벌과 경쟁하는 따위의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그는 아주 단순하게 일을 처리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에반젤린을 만났다. 그녀의 이름이 마음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우아한 음악처럼 메아리쳤다.

에반젤린‥‥‥.

그 시적인 이름은 끝나지 않는 사랑을 뜻했다.

그녀가 매트 쇼를 영원히 사랑해서 그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빌어먹을. 그 어린 사춘기 소년의 매력이 그렇게나 대단했단 말인가? 그는 감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크레이그의 턱을 부셔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젊은 황소처럼 억세게 보이는 크레이그였지만 그의 능력으론 한 방에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매트가 너무 젊은 나이에 죽어 버려서 에비의 취향은 그 나이에 영원히 고정된 것일까?그런 생각 자체가 혐오스러웠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역겨웠다. 에비와 크레이그사이에 성적인 감정은 전혀 없고 그저 질투심에 사로잡힌 자신의 망상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는 그녀를 가져야 했다. 아주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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