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사랑 에반젤린-9화 (9/19)

9장

다음날 아침은 최악이었다. 에비는 거의 잠을 못 잤다. 4시 30분에 자명종을 맞춰 놓았는데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을 때는 두 시간도 채 자지 못한 상태였다. 로버트를 생각하느라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의 정열적인 애무를 생각하다가. 그가 얼마나 능숙하게 사람들을 조종하는지에 생각이 이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의 여러 가지 행동을 찬찬히 분석해 본 결과, 악의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한밤중 어둠 속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그를 보면 불편해지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로버트가 자신의 극히 일부분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실제의 그와 가장 근접한 내면의 그는 주의깊게 상황을 추측하고 분석하여 어떻게 압박을 가해서 자신이 원하는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내면의 남자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지성으로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갖추고 모든 사람들을 멀리 한 채 스스로 고립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고립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인생에 그녀가 차지할 자리가 있을까? 그녀를 원하는 그였다. 그가 원하는 동안은 그의 중심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하지만 육체적인 관계만을 허용할 것이고, 그렇게 완벽하게 보호되는 그의 내부에 다가가지 않고는 그의 감정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겠지만 그의 방어벽을 뚫다가 그녀는 심장이 부서질 것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그 감정적인 고립의 세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혼자서 설 수 있을 정도로 가슴의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그 벽 안에 머무르고 있다고 그를 나무랄 수 있을까? 그의 벽을 뚫고 들어가는 노력을 해야 할지도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어찌 됐건 아주 작은 계기로 그는 그녀의 방어벽을 뚫고 들어왔다. 물 속에서 그녀를 구해 준 것보다 아이를 안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자신과 제이슨의 목숨을 구해 준 그에게 약해졌지만, 그래도 그때까지 그녀의 마음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뒤로 물러설 일도, 무시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로버트의 방어벽을 뚫고 그의 심장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노력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겨우 잠이 들었지만 곧 울린 자명종소리로 일어나야만 했다. 졸린 눈으로 커피메이커 스위치를 올린 뒤 샤워를 했다. 시리얼과 커피를 마실 즈음 갑자기 아랫배에 불편함이 느껴졌다.

"정말 지겨워."

그녀는 중얼거렸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로버트와 처음으로 외출하는 밤에 생리가 시작되다니. 이틀 정도는 더 있어야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내로 의사가 처방해 준 피임약을 복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리 중에 특별히 몸이 안 좋은 적은 없었는데,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여러 가지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인지 집을 나서 트럭에 올라타자 통증이 느껴졌다.

게다가 평소 아무 고장 없이 잘 나가던 픽업 트럭에서 갑자기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 이런‥‥‥. 지금 고장나면 안 돼!"

혼잣말이지만 자동차에게 경고했다. 겨우 장부의 숫자를 맞춰 나가며 경제적인 자립을 하려는 마당에 이런 수리비는 재난이었다.

431번 국도로 들어설 무렵 트럭이 갑자기 쿨럭거리더니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차를 천천히 몰면서 계기판을 살폈다. 온도는 정상이었고 기름은‥‥‥. 이럴 수가‥‥‥. 유량계를 보니 적색 경보등이 켜져 있었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갓길로 갔지만 벌써 엔진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툴툴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시야를 가릴 정도로 무럭무럭 연기가 솟아올랐다.

에비는 차에서 내려 빈사상태에 빠진 자동차를 봤다. 저절로 욕설이 나왔다. 알고 있는 모든 욕을 있는 대로 다 지껄였다. 모터가 되살아나지도. 통장의 잔고가 늘지도 않을 테지만 어느 정도 속은 풀렸다. 더는 욕이 생각나지 않자 고속도로 쪽을 살폈다.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고 교통량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아는 사람이라도 지나가면 3킬로미터쯤 떨어진 공중전화까지 걷지 않아도 될 텐데. 그녀는 한숨을 쉬며 트럭의 운전석 아래 넣어 둔 권총을 꺼낸 뒤 가방에 넣고 트럭을 잠근 다음 걷기 시작했다.

1분도 채 안 돼서 트럭 한 대가 서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보트가 뒤에 매달린 트럭이었다. 두 남자가 트럭에 타고 있었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창을 내리고 말을 걸었다.

"문제가 생겼어?"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비?"

그녀는 동네의 아는 어부들인 러스 매클로이와 짐 헤인즈를 알아봤다.

"러스, 짐! 트럭의 모터가 멈춰 버렸어요"

러스가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이리 올라타. 계류장까지 데려다 주지. 요즘 세상은 너무 험해서‥‥‥"

고마워하면서 그녀는 트럭의 중간석에 올라탔다. 러스가 타고 나서 문을 닫자 짐은 트럭을 출발시켰다.

"정비기술자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

"계류장의 기술자인 버트에게 봐 달라고 해야겠어요. 모터에 대해서 잘 알거든요"

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버트 마르디스는 잘 알지. 뛰어난 기술자야. 만일 버트가 손을 못 본다고 하면 마을에 아주 훌륭한 기술자가 있는데, 이름이 로이 심즈야. '심즈의 자동차 정비소'라는 이름을 전화번호부에서 찾으면 될걸."

"고마워요 기억할게요."

짐과 러스는 근처의 뛰어난 정비사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곧 계류장에 도착했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그녀를 내려 주기 위해 러스가 먼저 내렸다. 에비의 계류장까지 온 김에 두 사람은 에비의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고 강으로 나갔다. 사무실을 열쇠로 막 열려고 할 때 버트가 출근했고, 그녀는 트럭의 고장에 대해 그에게 말했다.

새벽 시간인데도 전화 벨이 울렸다. 로버트는 한쪽 눈을 뜨고 창 밖의 하늘을 쳐다보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네."

"트럭을 타고 가다 중간에서 엔진 고장이 나서 차에서 내렸습니다. 계류장까지는 차를 얻어 타고 갔습니다."

로버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뒤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걱정이 되고 동시에 화가 났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녀가‥‥‥ 그러니까 히치하이킹을 했단 말이오?"

"예. 저도 걱정을 하다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문제는 없었고요,두 명의 어부가 그녀를 태워다 줬습니다. 아는 사이인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건터스빌이 범죄소굴은 아니어도 혼자 다니는 여자에겐 언제든지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간 사람이 있었다 해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일어나질 말았어야 했다.

"시간 계산이 왜 잘못된 거요?"

"기름 탱크에 낸 구멍이 웨스트가 생각한 것보다 컸던 것 같습니다. 그녀 집 앞 차도에 기름이 엄청 새어나와 있을 겁니다. 너무 어둡지 않았더라면 집을 떠나기 전에 알았겠죠,"

차갑고 조용한 음성으로 로버트는 말했다.

"그의 실수로 만일 사고가 생겼더라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요."

상대방은 잠시 조용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자신의 의사가 제대로 전달된 것을 안 로버트는 그 문제에 대해선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오늘밤 그녀의 집을 조사할 때 조심하시오. 그녀가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소."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로버트는 침대에 누워 머리에 깍지를 끼고 창 밖으로 펼쳐지는 산의 일출을 봤다. 어제 사건으로 머서와 에비의 관계에 대해서 점점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호수의 어딘가에서 머서와 그녀가 접촉을 했다는 심증이 갔지만, 자신이 와 있다는 것을 머서에게 말하지 않았다. 파워넷과 그의 관계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은 분명했다. 오래도록 수사망에 걸리지 않은 것을 보면 잘 조직된 스파이 망으로 보였는데. 그렇다면 에비는 그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했다. 적어도 머서가 에비에게 그에 대한 정보를 줬어야 했다. 그의 정체에 대해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역할이 너무 하찮아서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다른 가능성은, 에비가 그의 정체를 알았다 해도 그가 계류장에 보트를 계류하고 있다는 사실과 에비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그녀만의 어떤 이유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에비가 조직의 일원들과 가까운 사이가 아님을 추론할 수 있었다. 한편으론 이용할 수 있는 약점이고, 그쪽에서 볼 땐 그녀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사실이었다.

에비는 레커차로 계류장까지 트럭을 들어오도록 조치를 취했다. 자동차가 도착하고 버트가 차의 뚜껑을 열고 검사를 시작했다. 후드 안을 본 다음 이동 롤러를 타고 차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검사를 하고 난 버트는 모터 수리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너무 손상이 많이 가서 차라리 다른 모터를 사는 게 나을 거야"

예상한 일이었으므로 그녀는 은행의 잔고를 생각했다. 이번 달 융자금 상환을 조금 늦게 한 뒤, 다른 쪽 지출을 줄여 융자금을 상환하면 될 것이다. 집까지는 보트로 출퇴근하면 자동차 없이도 며칠은 지낼 수 있었다. 꼭 가야 할 곳은 레베카의 자동차를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걸어서 새로운 모터를 구해 보도록 하겠어요."

그녀는 말했다.

"교체할 시간은 있겠어요?"

"그럼."

버트는 금세 말했다.

"요즘 조금 한가해진 편이니."

크레이그가 도착해 그녀가 다른 일을 볼 즈음에는 모든 방편이 마련됐다. 엔진이 있는 곳도 알아 놨고 모터가 도착하면 곧장 교체에 착수하기로 했다. 버트의 형편에 따라 빠르면 내일 오후쯤 집으로 차를 몰고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에비는 경험상 회의론자였다. 갑자기 버트의 일이 넘칠 정도로 많아져서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호수를 보트로 가로질러 가는 길은 걱정거리들이 있어도 즐거웠다. 맑은 초록빛 물과 푸른 안개에 휩싸여 있는 산, 하늘에는 천천히 흘러가는 횐 뭉게구름이 떠있었다. 햇빛은 화창하게 내려 쬐고, 갈매기들은 수면 위를 평화롭게 날아다니고, 멀리서 독수리 한 마리가 높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실내에 있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그런 화창한 날씨였다.

집에 도착해서 돈 걱정을 그만두고 잔디 깎는 기계를 꺼낸 뒤 마당의 잔디를 깎기 시작했다. 그녀는 트럭이 주차되어 있던 곳에 기름이 잔뜩 고여 있는 것을 보자 인상을 썼다. 계류장에 출근할 때가 새벽이 아니었다면 알아차렸을 거고, 그랬다면 모터가 망가지지도 않았을 테고 수리비도 적게 들었을 텐데.

어쩌면 그렇게도 타이밍이 어긋난 건지.

잔디를 다 깎고 집 안으로 들어가 땀을 식힌 뒤 집안 일을 하기 시작했다. 3시가 되었을 때, 그녀는 잔교로 나와 앉아 물 속에 다리를 담그고 아이스티를 옆에 두고 있었다. 걱정을 해도 풀리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그래 온 것처럼 지출을 줄여 경비를 마련하는 길밖에 없었다. 착한 요정이 그녀의 무릎에 돈을 던져 주지 않는 한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쩌면 아침나절 잠시 패스트푸드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방법도 있었다. 1주일에 40달러면 한 달이면 160달러고, 그 정도면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을 지불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잔교에서 다리를 물 속에 담그고 앉아 산의 경치를 바라보며 만족하는 것 외엔 원하는 것이 없었다.

로버트가 본 것은 바로 그런 그녀의 모습이었다. 낡은 잔교에 앉아 다리를 물 속에 담그고 태양을 향해 얼굴을 들어올린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 길고 숱 많은 황금빛 머리는 둘로 땋아 앞쪽으로 늘어뜨려져 있어 그녀의 아름다운 목 선을 강조해 주었다. 색이 바랜 면 반바지와 소매 없는 흰 셔츠를 입고 있는 그녀는 세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맥박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우아한 어깨의 곡선과 껴안아 주고 싶은 멋진 팔, 그리고 날씬한 다리라니. 달콤한 복숭아처럼 그녀의 피부는 연한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는 다른 어떤 여자에게도 이런 강렬한 욕구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바로 그 자리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갖고 싶었다.

그가 잔교 위로 올라가느라 나무판이 울리지 않았으면 그의 존재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누가 오는지 돌아보다가 처음의 나른한 호기심이 곧 따스한 환영의 표정으로 바뀌는 그녀에게서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옆에 앉아 신발을 벗으면서 그는 대도시에 사는 다섯 살짜리 아이도 이곳 사람들보다는 더 경계심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안녕!"

그 짧은 말을 길게 늘여 말하며 그녀는 달콤하게 미소지었다.

가슴이 쿵쿵거린 그는 자신이 진짜로 미소를 짓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녀를 갖고 싶었다. 그는 욕망과 매혹의 양쪽을 왔다갔다하며 더욱 강하게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순간들을 값비싼 드레스와 보석을 걸친 아름다운 여자들을 품에 안고 댄스플로어에서 춤을 추었고, 그 여자들을 좋아했다. 그녀들과 사랑을 나눌 때면 천천히 부드럽게 사랑해 주었다. 가끔 위험한 일을 하다 보면 더 강렬한 끌림이 있다는 것도 경험해봤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한 여자에게 강하게 매혹된 순간은 없었다. 여기 에비 옆에서 햇살이 반짝이는 이 순간은 모든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순수한 빛의 세계였다. 찌는 듯한 열기로 등과 가슴에 땀이 흐르고 있어도 그의 전신에는 생명이 용솟음쳤다. 손가락 끝마저 찌릿거렸다. 그의 그 대단한 자제력이 아니었다면 지금이라도 그녀를 뒤로 넘어뜨리고 다리를 벌려 그녀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욕망을 참고 기다려야 하겠지만, 그는 곧 그녀를 가질 것이다. 지금은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와 빛이 나는 것 같은 피부, 그리고 따스하고 여성스런 향기에 취해서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는 신발을 벗고 카키색 면바지를 무릎 위까지 접어 올린 후 그녀처럼 물 속에 발을 담갔다. 물은 미지근했지만 살갗을 태울 것 같은 열기에 비하면 시원했다. 이상하게 편안한 느낌이었다.

"아직 7시가 안 됐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미소지었다.

"당신이 겁을 먹고 취소할까 걱정이 돼서 와 봤소."

"아직은 아니에요. 두 시간 정도 기다려 보면 혹시 모를까‥‥‥."

장난스런 농담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바람맞히진 않으리라 확신했다. 어색해하고 망설이기는 했지만, 동의한 이상 그녀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에 대한 그녀의 육체적 반응이 강한 것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가 머뭇거리는 것을 모욕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를 꺼리는 이

유가 무엇이든 그녀의 육체는 그에 상관없이 반응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발을 앞뒤로 흔들며 발목에 휘감기는 물결을 바라봤다.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문제를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그녀는 말을 꺼내기로 결정했다.

"로버트, 당신과 진정으로 가까운 사람이 있나요? 진실한 당신을 아는 사람이 있어요?"

잠시 얼어붙은 것처럼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그녀는 눈치챘다. 그는 곧 가볍게 말을 받았다.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당신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소"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초록빛 눈동자에는 표정이 없었다.

"진실을 잘 피해서 말했지만, 역시 내가 생각한 것이 맞는 것 같군요"

"내가? 어떻게?"

입술을 그녀의 맨 어깨에 대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 타오르는 것 같은 작은 애무에 마음을 뺐기지 않으려 하며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대답하지 않고 질문을 해서 화제를 돌려 버려요. 그리고 항상 거리를 두고 사람을 대하죠 사람들을 관찰하고 조종하면서 당신의 진정한 감정이나 생각은 내보이질 않아요"

그는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스핑크스 같은 당신도 나를 아는 것이 어렵다고 꾸짖는 거요?"

"우리는 방어벽이 단단한 사람들이에요"

그녀는 금세 대답했다.

"내가 같은 질문을 해도 되겠소?"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그가 물었다.

"당신도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진심을 알도록 허락한 적이 있소?"

후회가 그녀를 휩쓸었다.

"물론이죠. 내 가족 그리고 매트‥‥‥."

그녀는 곧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고 구름에 가린 햇빛처럼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덮이는 것을 봤다. 다시 매트였다! 12년 전에 열여덟 살이었던 소년에게 그의 이름만 들어도 슬픔이 묻어 나게 하는 특별한 점이 있었을까? 그는 죽어 버린 소년을 격하게 질투하는 자신이싫었다.

그녀는 이제 침묵 속에 가만히 앉아 발을 물 속에 담그고 주위 풍경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로버트는 그녀를 내버려두었다.

그녀의 질문은 당황스러웠다. 너무 핵심을 찌른 말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내면을 비밀스럽게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바깥 세상에 드러난 부유하고 세련된 도회적인 사업가의 모습은 그가 선택해서 보여주는 아주 작은 부분이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사업을 하고 원하는 여자들을 유혹하고 구애하는데, 그리고 사업과 관련이 없는 세계에서도 통했다.

가까운 친지들도 그가 냉정하고 자제력이 강한 사업가라는 것 외의 기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가 모험과 위험을 즐기는 것도 모르고, 애국심을 떠나서 정부 부서와 FBI를 위해서 해치운 극히 위험한 행동들도 알지 못했다. 육체적인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한 훈련 방법으로 체력을 기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냉혹한 자제력 밑에 활화산처럼 터지는 성격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 혼자만이 자신의 무서운 능력에 대해서 온전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그 강력한 힘에 대해 자신만이 아는 것이 좋았다.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도 불만이 없었다. 차라리 그게 안전하니까.

그의 마음을 건드린 여자도 없었고 자제력까지 잃게 만드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한 번도 낭만적인 감정으로 여자를 사랑해서 자신의 마음을 열고 그녀에게 약한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결흔할 것이고, 그의 아내는 최고로 행복한 여자가 될 것이다. 모든 배려를 다해서 그녀를 대할 것이고 침대에서 그녀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족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부드럽고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의 완벽한 역할을 할 것이니, 그의 내면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는 것도 전혀 모를 것이다. 그의 마음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어야 할 자신의 것이었다.

매들린도 물론 그가 깊숙이 숨기고 있는 보이지 않는 내면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추궁하진 않았다. 그녀는 그가 여동생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고, 그것으로 충분해했다.

그런데 에비는 어떻게 그 짧은 기간 동안 남들이 알지 못한 사실을 알아차렸을까? 그는 갑자기 자신이 벌거벗은 것처럼 느껴졌고 불쾌해졌다. 그녀와 있을 땐 더욱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등에 내리쬐는 햇빛은 더욱 강해졌고 그의 등은 땀으로 젖었다. 너무 오래 침묵이 흘렀다 고 생각한 그는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트럭은 어딨소?"

"새로 모터를 달기로 했어요"

그녀는 대답했다.

"내일 오후면 교체될 테지만, 그때까진 보트로 계류장과 집 사이를 왕복해야 해요."

기다려도 부가적인 설명은 없었다. 에비가 모터가 터진 것 때문에 겪은 곤란을 얘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문제의 신속한 해결을 위해 의논을 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또 수리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에비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할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다. 그의 재산에 대해서 얘기한 적은 없었지만 새 보트와 지프차, 강가의 저택을 산 것만 봐도 그가 돈이 넘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에비는 영리한 여자였다. 물론 계획이 틀어지므로 돈을 빌려주진 않았을 테지만, 그녀의 요청에도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에비는 그것에 대해 더 말이 없었다.

"갈 곳이 있으면 내게 전화하시오."

그가 먼저 제안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트럭이 고쳐질 때까지 미룰 수 없는 긴급한 일은 없어요"

"미루지 말고 내게 전화하시오"

그는 부드럽게 권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지만, 전화하지 않을 것이 명백해 보였다. 트럭이 고쳐질 때까지 그가 줄곧 계류장에 있어도 자신에게 굳이 부탁할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그는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오늘 저녁 어디 갈 것인지 묻지도 않는군."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질 않아서‥‥‥."

사실이었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 거라는 사실만이 그녀의 뇌리를 차지했다.

"그리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군,"

그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과 외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단 얘기는 아니에요. 단지 장소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다는 거지."

뉴욕이나 그 밖의 대도시에서 그가 데이트했던 세련된 여자라면 지금 에비가 한 것 같은 솔직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하더라도 유혹이 포함된 끈적한 대사였을 것이다. 에비는 그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키스하고 싶었지만 그는 참았다. 그가 매번 유혹하려 들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와 있을 때 좀더 긴장을 풀 것이다.

그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당신의 질문에 대답했어요. 자! 당신 차례예요"

그녀가 말했다.

"아."

대답을 듣는 것을 기다려 줬을 뿐이지 잊은 것은 아니었군. 진실한 자신을 내보이지 않고 그녀가 만족할 만한 대답에 대해서 재빨리 생각해야 했다. 어느 정도 진실은 드러나야 했다.

"나는 비밀스런 사람이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사람들이 물어 본다고 살아온 이야기를 줄줄 털어놓진 않소. 당신도 그런 타입이니 이해할 거요"

황금빛 눈동자가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더니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가 다시 질문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포기해야 하는 느낌이 좋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삶을 그녀가 들여다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시계를 봤다. 그녀를 데리러 오기 전에 전화할 데가 있었고, 샤워하고 옷도 갈아입어야 했다. 그녀의 어깨에 다시 키스하고 그는 일어섰다.

"지금 떠나야지 아니면 약속에 늦을 거요. 너무 오래 있지 마시오. 화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 당신 어깨가 이미 너무 뜨겁소"

"좋아요. 7시에 봐요"

그녀는 잔교 위에 그냥 앉아 있었고 로버트는 그녀의 금발머리를 억제된 욕망의 눈으로 내려다봤다. 조금 진도가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다시 뒷걸음질쳤고 거북이처럼 목을 집어넣어 버렸다.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감상적인 것과 체념, 그리고 긴장이 묘하게 뒤섞인 것이었다. 트럭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들의 첫 데이트에 대해 긴장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반쯤 벗은 것을 이미 봐 버린 그 앞에서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수수께끼인 것처럼 그녀도 비밀스러웠다. 그는 항상 책을 보듯 사람들 마음을 읽었지만, 에비의 마음은 닫혀 있었고 늘 그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 예측이 안 서는 터라 그는 서서히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억지로 그 자리에서 걸음을 옮겼다. 서 있는다고 해결될 일은 없었고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떠나기가 아쉬웠다. 같이 있을 때만 그녀에 대해서 겨우 안심이 되다니.

지프차에 올라탄 그는 미치도록 원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지켜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여자라는 것에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차가 멀리 사라지고 난 뒤에도 에비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위처럼 단단한 벽이 느껴졌고, 그가 그녀를 그 안에 들여놓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페스트균처럼 달라붙어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는 더욱 단단히 문을 닫아 걸 것이다. 그를 원한다면 그가 줄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매트를 뼛속 깊이 사랑하고 그에 대해 잘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그녀가 다시 사랑에 빠진 남자가 겨우 겉모습만 그녀에게 보여주는 남자라니‥‥‥‥

그녀는 물 속에서 발을 빼고 일어섰다. 오늘 하루는 이상하게 핀트가 어긋난 하루라고 생각했다. 오늘의 마지막 커다란 이벤트인 데이트를 위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오늘밤 데이트에 그녀의 모든 에너지가 필요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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