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사랑 에반젤린-8화 (8/19)

8장

에비가 계류장으로 천천히 보트를 몰아갈 때 로버트는 선착장에 서 있었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눈이 가려져 있었지만 보지 않아도 그 눈이 얼음처럼 차가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몸짓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떨림이 지나갔다. 그가 마구 화를 내는 것보다 경직된 분노를 완벽하게 억누르는 냉혹한 자제력이 더 두려웠다. 자신이 만나 본 중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라는 평가를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번엔 왜 저렇게 화가 났을까?

그녀는 보트를 정박하고 선착장으로 뛰어올랐다.

"버질 할아버지가 즐거워하셨나요?"

로버트의 곁을 스쳐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면서 물어 봤다. 자제력을 가진 사람이 로버트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문제로 더 마음이 복잡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보트소리를 듣자 머서일 것 같아 빨리 사무실로 들어가서 평소처럼 있고 싶었다.

"잠깐만."

딱 부러진 음성으로 로버트가 그녀의 팔을 잡고 말했다. 에비는 그의 손을 피했다.

"나중에 얘기해요."

그녀는 서둘러서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사무실 문을 여는 에비를 서둘러 따라갔지만 말을 건넬 기회는 잡지 못했다. 버질이 그녀의 보트를 봤는지 수리창고에서 나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사무실까지 걸어올 시간을 계산해 보니 나중에 얘기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답함과 분노를 억눌렀지만 여전히 분노의 불은 뜨겁게 탔다. 아니, 점점 더 화가 났다.

버질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에어컨으로 시원한 실내가 좋은 것 같았다.

"나이인가 들다보니 너무 편한 것만 찾게 되네. 예전에는 이런 더위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잖아요"

에비는 미소지었다.

"에어컨이 아예 없을 때니 그냥 견디는 수밖에요."

노인은 흔들의자에 가서 앉았다.

"버릇이 나빠진 거지."

그는 만족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비는 사무실에 들여놓은 자판기로 가서 콜라를 세 잔 뽑았다. 더위에 지친 손님들을 위해서 항상 얼음이 얼 정도로 차갑게 온도를 설정해 놓았다. 로버트와 버질에게 한 개씩 건네주곤 자신도 숨쉬지 않고 그 차가운 음료수를 들이켰다.

로버트가 콜라를 받아 들고 인상을 쓰는 것을 봤지만. 곧 그도 마시기 시작했다. 콜라 같은 것을 마시기에는 너무 세련된 취향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려면 이곳 사람들처럼 청량음료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트 한 대가 선착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언뜻 보니 입대용 보트였다. 머서가 그녀를 봤다 해도 정체를 알아차리진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야구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머리를 옷 속에 집어넣은 그녀를 일반 낚시꾼들과 구별하기는 어려웠을 테고 아마 여자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로버트는 카운터 위로 훌쩍 뛰어올라 앉은 뒤 양말도 신지 않은 발을 흔들거리며 손에 든 콜라 컵을 만지작거렸다.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뭔가 기다리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녀와 대화를 할 시간? 그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다급한 무엇이었다.

그녀는 머서가 보트를 정박하고 천천히 낚싯대와 도구상자를 들고 사무실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지켜봤다. 문이 열리더니 그 지나치게 자만심 강한 남자가 휘파람을 불며 들어왔다.

"오늘도 허탕이오, 인형 아가씨."

그는 아주 명랑하게 말했다.

"당신이 함께 갔더라면 운이 좋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해요?"

"낚시에는 별 소질이 없어서요"

그녀는 거리낌없이 거짓말을 했고, 버질이 콜라를 마시다 컥 하는 소리를 들었다.

로버트는 등을 반쯤 돌리고 있다가 머서를 향해 다시 몸을 돌렸다.

"랜든, 잘 있었나?"

로버트는 차갑게 말했다

"언제 오후에 다시 회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으면 같이 낚시하러가고 싶군."

에비는 로버트가 머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놀랐다. 갑자기 경고의 종소리가 머리 속에서 울렸다. 로버트가 이 남자를 어떻게 아는 걸까?

그녀가 놀랐다면 머서는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로버트를 멍하니 쳐다보는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캐, 캐넌 회장님,"

그는 버벅거렸다.

"저‥‥ 어떻게, 아니 이곳에서 뭐 하시는 겁니까‥‥."

로버트의 눈썹이 획 치켜 올라갔다. 로버트를 만나 완전히 질린 머서를 보자 에비는 긴장이 누그러졌다. 그들이 어떤 사이이든 로버트는 머서와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머서는 너무 경악하고 있었다.

머서의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은 그의 보트가 이곳에 계류중이라는 것일 테지만 로버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에비를 지그시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이곳은 정말 매력적이어서 말이오'

바보같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머서는 무슨 이유에선지 더욱 당황한 것 같았다.

"아‥‥‥."

그는 말을 더듬었다.

"아‥‥‥ 그렇죠."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아, 캐넌 회장님, 시간 되시면 언제든지 전화 주십시오 전에 얘기하신 골프 게임 나가시죠."

"아니면 낚시도 괜찮소."

로버트는 실크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 그것도 좋죠. 그렇게 하시죠 언제든지 좋습니다."

머서는 보트의 열쇠를 카운터에 내려놓고 서둘러 나갔다.

"왜 저렇게 서두르는 거야?"

버질이 궁금한 듯 물었다.

"업무시간에 몰래 빠져 나왔다가 계류장에서 상사에게 걸렸으니 그럴 만도 하죠"

로버트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버질은 흔들의자에 등을 자대고 껄껄 웃었다.

"나라도 그러겠어. 그래, 당신이 저 녀석 보스야? 오늘 하루 완전히 죽을 맛이겠군."

"확실히 그럴 겁니다. "

에비는 가만히 서서 머서와 로버트가 주고받은 말들을 떠올리며 상황을 다시 돌아봤다. 실크처럼 부드럽게 말은 했지만 로버트는 머서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즐기는 듯 보였다. 그리고 계류장에 와 있는 것이 마치 에비 때문인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머서가 당황하는 것을 보려고 한 듯‥‥ 보스 앞에서 보스의 여자에게 했던 행동들을 돌이켜 생각하고 편안할 남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사무실에서 몰래 빠져 나온 뒤이니.

머서는 깨닫지 못했을 테지만 에비는 로버트가 그를 싫어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말투야 다정했지만, 싫은 감정이 드러났다. 잠시 동안 로버트가 머서의 불법행위에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끔찍했지만, 동료를 만난 사람치곤 머서는 지나치게 얼어 있었다. 하지만 머서가 로버트의 회사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자 걱정이 되었다. 머서가 계류장에 더러운 물결을 끌어들이는 것이 싫은 것처럼 로버트의 회사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싫었다.

이번에도 머서가 하는 일을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머서는 잠시 여러 곳의 작은 섬들 사이를 유람하듯 다니더니, 그 중 좀 큰 섬에 보트를 댔다. 그녀가 있는 곳에선 그가 하는 일을 볼 수가 없었다. 무소음 모터보트였다면 가까이 갈 수 있었겠지만. 잠시 후 머서는 다시 섬들 사이를 이러저리 다니기 시작했다. 가끔씩 그를 시야에서 놓치다가 그가 섬들 사이를 완전히 빠져 나왔을 때 에비는 최대 속도로 달려서 머서보다 먼저 계류장에 도착했다.

여전히 의심은 가지만 증거가 없었다. 확실한 증거 없이 로버트에게 말하기는 더욱 망설여졌다. 그때 버질의 증손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등에는 11개월 된 아기가 업혀 있었고 그 뒤로 네 살 여섯 살 소년 둘이 쫄래쫄래 따라 들어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이들은 동시에 소리 지르며 흔들의자로 달려가 버질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래, 어땠니?"

버질은 아이들의 작은 몸뚱이를 껴안아 주며 물었다.

"치과의사 선생님이 사탕을 주시더냐?"

"예."

나이 든 소년이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며 대답했다.

"무설탕 사랑이니까 괜찮다고 엄마가 그랬어요 할아버지 줄까?"

그의 표정에는 무설탕 사탕이라는 불만이 보였다.

"먹음직스럽지만 네가 먹어라."

버질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고손자들과 말을 주고받는 버질을 보며 미소를 지은 에비는 곧 아이들의 엄마를 돌아봤다.

"셰리, 이분은 로버트 캐넌 씨야. 오늘 버질 할아버지와 함께 잠깐 강으로 보트를 몰고 나가셨어. 로버트, 버질의 증손녀인 셰리 퍼거슨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셰리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전에 계류장에서 로버트를 본 것을 기억하는 듯,그녀는 아기를 한 손으로 잡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로버트가 셰리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으나, 아기는 자신을 안으려 한다고 생각했는지 셰리의 블라우스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두 팔을 벌려 로버트의 품으로 몸을 던졌다. 셰리는 놀라서 아기를 잡으려 했지만 로버트가 더 빨리 아기를 두 손에 안아 들었다.

"앨리슨 로즈!"

세리는 아기를 보고 나무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아기를 받아 들려고 손을 내밀며 로버트에게 사과했다.

"도대체 얘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원래 낮선 사람에겐 다가가지도 않는 앤데."

앨리슨 로즈는 들은 체도 안 하고 소리를 꽥꽥 지르며 엄마의 손을 피해 로버트의 셔츠에 꼭 매달렸다.

"아. 괜찮습니다. "

로버트는 다정한 목소리로 딸과 엄마를 동시에 안심시켜 주었다. 그는 셰리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힘센 손으로 아기의 등을 받쳤다.

"제가 항상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어서요"

그보다 더 진실은 없다고 에비는 생각했다. 로버트는 마치 열두 명의 아이 아빠라도 되는 듯 편하게 아기를 품에 안았다. 이 남자가 못하는 일이 과연 있을까? 셰리는 그의 미소에 녹아든 것처럼 보였고 조그만 앨리슨은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의 팔에 안긴 앨리슨은 마치 여왕이 자신의 왕국을 돌아보는 것처럼 오만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버트는 코를 아기의 금발머리에 묻고 비비면서 여자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남자아이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매들린의 두 아들들을 갓난아기 시절부터 안아 주고 놀아줬지만 지금 품에 안겨 있는 아기처럼 가만히 안겨 있지도 알았고, 확실히 여자 아기의 냄새는 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아기가 입은 프릴이 달린 원피스는 정말 예뻤고 그 통통한 팔이 목을 감고 있는 것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오, 하느님. 에비는 가슴이 아파와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에 떠오른 절망적인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아기들 곁에서 그는 왜 불편해하지 않는 것인지. 그렇게 강한 남자가 어떻게 저토록 부드럽게 앨리슨을 안고 달콤한 냄새를 맡으며 행복하게 눈을 감는 것인지. 가슴속 감정이 너무 벅차서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기가 어려웠다.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그녀는 자신이 로버트 캐넌을 사랑하게 된 이 순간을 언제까지나 기억할 것이다.

그녀는 서류의 내용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바쁜 척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저쪽에서 세리가 보트를 타고 나간 버질의 소감을 묻는 소리를 들었고, 흥분한 버질의 열광적인 대답과 로버트가 거드는 소리를 들었다.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다정했다. 그 음성을 들은 세리는 로버트가 버질의 안전을 눈치채지 않게 충분히 배려했으리라는 확신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에비는 로버트가 의도적으로 대화에 끼여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버트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대가여서 그가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조정하기 위해 음성과 행동을 알맞게 사용했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술사처럼 교묘하게 사람들의 줄을 끌어당겨, 그들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을 조종한다면, 그녀도 아마 조종되고 있지 않을까?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갑자기 귀에서 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비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으므로 천천히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크게 숨을 들이쉬자 허파가 욱신거렸고, 그녀는 자신이 한동안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있었음을 알았다. 로버트가 앨리슨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비비는 순간부터 숨을 쉬지 않았으니 기절할 것처럼 느낀 것도 당연했다.

감정적인 안정을 찾아 그녀는 단단하게 발을 디딜 곳을 찾고 있었고 마침 꼭 붙잡을 수 있는 뭔가가 닿는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명 줄을 빼앗긴 듯,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로버트는 그녀에게 진실을 말했을까? 아니면 그녀 또한 그에게 미묘하게 조종되고 있는 것일까? 그의 의도는? 단지 그녀를 침대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는 그저 사냥에 스릴을 느끼는 것일까? 어떻게 봐도 그는 뛰어난 전문가였다. 그녀가 과연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을까?

가슴 아프게도 대답은, 지금의 그녀로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의지할 만한 사람인지는 오직 시간만이 말해 줄 것이고, 이미 심장을 빼앗긴 그녀는 과연 자신에게 그럴 여유가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는 여름 동안 이곳에 있을 거라고 했고, 벌써 여름은 반이나 지났으니 앞으로 기껏해야 6주나 7주 정도가 있을 것이다.

"에비."

귓가에 조용히 그녀의 이름이 들려 왔다. 그의 체온과 함께 신선하고 청결한 땀 냄새가 났다. 그가 그녀의 팔을 만졌다.

"세리와 버질이 가려고 하오."

그녀는 미소를 띄고 자제력을 긁어모아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을 몰랐지만 로버트는 눈치챘고, 그것 역시 그의 날카로운 관찰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빨간 사탕으로 꼬드겨 엄마 품으로 돌아간 앨리슨은 막대사탕을 이리저리 돌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셀로판 포장지를 메어 내려고 애를 쓰던 앨리슨은 맘대로 되지 않자 그냥 셀로판이 붙은 채 사탕을 입 속에 넣었다. 버질은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뒤를 따라간 아이들은 찌는 것 같은 날씨에 대해 불평하며 차라리 눈보라가 휘날렸으면 좋겠다고 투덜댔다. 그 소리를 들은 세리는 눈보라 속을 운전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지만 버질마저 눈보라가 차라리 낫겠다는 소리를 하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에비는 그들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버질에게는 몸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아이들은 우당탕거리며 선착장 위를 뛰어갔다. 세리가 뒤따라 나가며 큰소리로 아이들을 불렀다.

"너희들 당장 이리로 못 오니?"

엄마의 큰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입이 비쭉 나왔지만 어쨌든 돌아왔다. 차에 모두 올라타서 출발할 준비를 하느라 다시 몇 분이 지나는 동안 에비는 로버트가 계속해서 자신의 등에 손을 대고 가까이 서 있는 것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세리나 버질도 로버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같은 몸짓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갑자기 귀가 먼 것처럼 적막했다. 그녀는 문을 닫고 그를 지나치려고 했지만 그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그녀를 카운터 위에 올리고 자신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섰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그녀는 그의 가슴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충격으로 정신이 없는 지금 그를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를 믿기가 더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를 보시오."

"왜요?"

"당신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얘기하고 싶진 않기 때문이오"

"지금도 당신 말 듣는 데는 아무 지장 없어요"

욕설 비슷한 소리를 지껄이더니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잡아 그를 마주 보게 했다. 상처를 주지 알을 정도의 힘이었지만 저항할 수는 없었다. 그의 콧등만을 바라보려고 했지만 강렬한 초록빛 눈동자는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거기에는 차가운 분노가 거세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온 거요?"

그는 너무 대수롭지 않게 질문을 했다. 그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가 분노로 들끓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그녀는 속았을 것이다.

"할 일이 있어서요"

"아."

얼굴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랜든 머서를 만난 거요?"

그가 갑자기 물었다.

"그와 관계를 맺고 있소?"

너무 놀라서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잠시 동안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머리 속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어떻게 머서와 그녀를 연관시켰을까? 그녀가 강으로 나갈 때 그는 이미 호수로 나가 있었고, 머서와 그녀는 같이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얼굴이 달아올라 마치 뭔가 죄지은 듯 보이겠지만 뭐라고 당장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겨우 그의 질문이 이해되자 그녀는 당장 대들었다.

"그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냐구요? 그 남자는 혐오스러워요."

로버트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그럼 왜 그를 만나러 몰래 나간 거요?"

"이곳에서 몰래 다닌 적은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그를 만나러 간 적도 없구요."

"하지만 바쁜 오후에 문을 닫고 나갔지 않소?"

그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손님들이 전혀 없는 비오는 날에도 닫지 않았잖소?"

"할 일이 있었다고 말했잖아요"

"그래서 보트를 타고 나갔다‥‥‥."

"나는 물에서 평생을 산 사람이에요"

그녀는 점점 황금색으로 변해 가는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집까지 차로 운전해서 가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호수를 가로질러 갈 수 있어요 날씨가 좋거나 기분이 내킬 때는 보트를 타고 가요"

그의 눈에선 위험스런 표정이 가시지 않았다.

"그럼 집에 다녀왔다고 말하는 거요?"

그녀는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아서 얼굴에서 떼어 냈다.

"할 일이 있었어요."

반복해서 말했다.

"머서를 만난 적 없어요. 그와 연애를 하고 있지도 않고 그리고 그렇게 취조하듯 질문할 권리가 어디 있어요?"

그를 뿌리치려 하면서 그녀는 큰소리로 대들었다. 그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내 권리요"

그는 억눌린 소리로 말하곤 앞으로 움직여 머리를 그녀 쪽으로 숙였다.

그녀는 짓누르듯 압박해 오는 뜨거운 입술의 열기에 숨이 멈춰졌다. 그의 움직임으로 인해 허벅지를 더 넓게 벌려야 했고. 그는 그녀의 비밀스런 삼각지대에 자신의 허리를 안착시키듯 밀어붙였다. 에비는 자신의 연약할 정도로 부드러운 그곳에 그의 남성이 세게 밀려들자 비록 옷들이 가로막고 있다고 해도 충격으로 몸을 떨었다. 그의 정열은 의지대로 그녀를 마음껏 맛보고 있었다. 그의 팔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그녀를 조여 왔고 밀어내려 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움직이지 마시오"

그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중얼거리면서 한쪽 팔로 그녀의 엉덩이를 껴안아 더 가까이 끌어당겨 그의 청바지 사이 불룩 솟은 단단한 곳에 대고 거세게 비볐다.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쾌감이 느껴지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질렀지만 얼른 입술 안으로 삼켰다. 그는 움직임을 반복했고 질투와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아랫도리를 계속 그녀에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쾌감은 점점 더 강해졌고, 그녀는 정신없이 그의 어깨에 매달려 등을 활처럼 뒤로 휘는 수밖에 없었다. 분노에서 욕망으로의 변환은 너무 급작스러워 도저히 억제할 수 얼었고 쾌락의 전류가 혈관 속을 뛰어다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감각은 증폭되었고, 마치 등산을 하다 정상을 밟은 후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공포감에라도 사로잡히듯 그를 꼭 부둥켜안았다.

매트와의 포옹에선 이런 감각이 없었다고 그녀는 희미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젊은 열정은 달콤했지만, 수줍고 훈련되지 않은 어설픈 것이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무슨 일을 할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 성인이었다.

그가 만지지도 않았는데 도 젖가슴은 부풀어오르고 유두는 단단해졌다. 그녀는 등을 더 휘어서 그의 가슴에 자신의 젖가슴을 비벼 댔고, 그녀의 입에선 헉헉대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는 그 단단하게 솟아오른 언덕으로 손을 가져가며 그녀를 달랬다.

그녀는 달콤한 압박감과 열기에 칭얼대듯 중얼거렸다. 그를 멈추게 해야 하는 것은 알지만, 지금 같은 황홀경에선 도저히 멈추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은 뼈가 없는 듯 흐물대고 욕구로 터질 것 같았으며 점점 뜨거워졌다. 그는 그녀의 셔츠 아래로 손을 넣어 브래지어의 앞 후크를 열었다. 브래지어가 벌어지고 마침내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맨살을 만졌다. 비단처럼 매끄러운 살갗을 만지며 올라가 그녀가 신음을 흘리면서 괴로워할 때까지 뾰족한 유두를 희롱했다.

"이게 당신이 원하는 거요?'

그가 중얼거리며 잔뜩 성난 것 같은 유두를 가볍게 꼬집었다. 허벅지 사이가 젖어 들면서 뜨거운 열기가 강물처럼 넘실대자 그녀는 다시 신음을 흘렸다.

그가 그녀의 등을 자신의 팔에 기대게 하자 그녀의 젖가슴은 더욱 위로 치켜올려졌다. 셔츠는 완전히 밀려 올라가 풍만한 가슴이 노출되었고 유두는 그의 입술을 유혹하듯 달콤하고 빨갛게 변해 있었다.

카운터 위에서 그녀를 가지기라도 할 것처럼 강한 그의 욕망이 느껴졌다. 그녀는 피임약을 먹지도 않은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밀려드는 욕망으로 자신의 심장을 보호할 마지막 방어벽마저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은 유두를 잡아당기며 번갈아 두 개의 봉우리를 희롱했다.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청바지 허리를 헤매며 지퍼를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이성의 힘으로 그녀는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말했다.

"안 돼요"

숨이 가쁜 그녀의 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로버트, 안 돼요! 그만해요!"

잠시 동안 그는 전신의 근육을 잔뜩 긴장한 채 아무 움직임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고 뒤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호흡은 정신없이 가빴으며 거칠었다.

에비는 카운터 위에서 내려왔지만 차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브래지어를 잠그고 셔츠를 내리고 청바지 지퍼를 잠그는 동안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

"두려워할 필요 없소"

그가 말했다.

"당신이 원하면 언제라도 멈춘다고 했고, 그럴 거요"

그의 자제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그녀의 의지가 너무 약한 것이 문제였다. 계류장 사무실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그녀는 자신이 '안 돼요'라는 소리를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할 말 없소?"

그녀가 여전히 말이 없자 그가 물었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없어요"

"좋소."

그는 여전히 너무나 냉정하게 자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일 얘기합시다. 7시에 데리러 가겠소"

"7시‥‥‥."

그녀는 그가 떠나고 난 뒤 메아리처럼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로버트는 주차장으로 나와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머서가 회사에서 나왔을 때부터 뒤를 따랐소?"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물었다.

"네, 회장님, 그랬습니다. 계류장에 회장님 지프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물러났습니다."

"빌어먹을. 그때 나는 보트를 타고 나간 상태였소 그도 보트를 임대해 호수에서 누군가를 만난 것 같소 아마도 에비이지 싶은데‥‥ 그녀도 역시 보트를 타고 나갔다 왔소 사무실을 나갈 때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 있었소?"

"특별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디스크 같은 것은 주머니에도 가볍게 들어가니까요"

"양복에 집어넣은 것 같지는 않소 그가 어디서 옷을 갈아입었소?"

"그의 집입니다. 집에 들어갔다가 5분도 채 안 돼서 낚시도구 상자와 낚싯대를 들고 나왔습니다."

"만일 디스크를 가지고 있었다면 당연히 그 상자에 들어 있었겠군."

"그럴 것 같습니다. 다만 안을 들여다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알고 있소. 당신들 잘못이 아니오. 하지만 이제 어디서든 핸드폰으로 연락해 주길 바라오 언제든지."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머서의 집을 뒤졌는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빌어먹게 약은 놈이군. 좋소, 계속 그를 감시하시오 그리고 오늘밤 에비의 집에 사람들을 보내시오"

"의논한 대로할까요?"

"그렇소"

로버트는 대답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압박을 가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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