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사랑 에반젤린-6화 (6/19)

6장

에비는 음식이 가득 담긴 두 개의 접시를 테이블로 가져와 하나는 레베카 앞에 놓아주고 나머지는 자신의 자리에 놓은 뒤 커피를 따랐다.

"고맙다."

레베카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포크를 집어들었다. 병원에서 제이슨을 간호하느라 눈 밑이 검게 그늘져 있었다.

에비도 자리에 앉았다. 일어나자마자 의사와 내일 검진 약속을 하고 제이슨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병원에 전화했었다. 제이슨은 괜찮았지만 레베카는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제이슨을 두 시간마다 깨워야 했을 뿐 아니라, 아기 시절에도 그랬듯이 제이슨은 아프면 까다로워지는 아이였다. 두 시간에 한 번씩 깨울 때마다 신경질을 부리고 화를 냈다고 했다. 의사와 레베카가 깨우는 이유를 설명해도 막무가내로 통증을 호소하며 치고 떼를 쓰자 지치고 화가 난 레베카는 막 울화통을 터뜨릴 참이었다.

그런 이유로 에비는 병원에 와서 제이슨을 퇴원시키는 수속을 대신 밟아 주고, 그들을 따라 집으로 와서 투덜대는 소년을 침대에 눕힌 다음 레베카를 식당 의자에 앉힌 뒤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자신의 부엌처럼 레베카의 부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순조롭게 식사 준비를 마쳤다. 그들은 곧 베이컨과 계란 그리고 토스트를 먹기 시작했다. 제이슨은 소파에 등을 대고 왕처럼 앉아 무릎에 음식 쟁반을 올려놓고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속에 깊이 빠져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난 레베카는 다시 큰언니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커피 잔 너머로 에비를 살펴보면서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어제 저녁식사는 어디서 한 거니?"

"계류장에서. 샌드위치 먹었어"

에비가 대답했다. 레베카는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몸을 뒤로 빼고 앉았다.

"저녁식사에 데려갔다가 집에 잘 데려다 준다고 말했었는데."

"내가 나가고 싶어하지 않았어."

"정말이지‥‥‥‥."

레베카는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뼈대가 더 단단한 줄 알았더니."

그가 더 강한 남자였더라면 어제 밤 그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웠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외출하기엔 너무 피곤해서 그가 샌드위치를 계류장으로 가져왔어, 어제 그는 정말 친절했어."

"특히 너와 저 말썽꾸러기 아들을 구해준 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지."

레베카는 베이컨 조각을 입에 넣으면서 판사처럼 위엄 있게 말했다.

"너를 구해 줘서 감사하다는 표현은 다시 하고 싶은데, 제이슨의 경우는 좀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에비는 레베카의 씁쓸한 선언에 큰소리로 웃었다. 재치 있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집안 내력이어서 에비도 그런 경향이 있었고, 요즘은 페이지까지도 점점 재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먹이를 눈앞에 둔 사냥꾼을 만나면 그 정도 알아차릴 눈치는 되니까, 그 남자가 아주 친절했다는 따위로 내 관심을 돌리려 하지는 마, 친절이라니, 그 남자가 코웃음 치겠다"

에비는 자신의 접시에 놓인 계란 요리를 쳐다봤다.

"나도 알아."

"그에게 기회를 줄거니, 아님 다른 남자들처럼 투명인간 취급을 할거니?"

"어떤 다른 남자?"

에비는 궁금한 듯 물었다.

"거 봐. 그 동안 네게 남자들은 모두 투명인간이었지? 너와 함께 나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남자들을 한 번도 알아차린 적이 없잖아."

"내게 데이트를 신청한 사람이 없었다고."

"네가 아예 관심도 없고, 아니 자기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데이트 신청을 하겠어? 하지만 로버트는 데이트를 신청했다는 것에 내 피 같은 돈을 걸겠어."

"안 했어."

그녀에게 식사를 하러 가자고, 그리고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데이트 신청한 적은 없었다.

레베카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지금 나한테 장난치는 거지?"

"아냐. 다음 번 계류장에 오면 아마 신청하지 않을까? 언니, 이제 마음이 좀 놓이지?"

"정말 묻고 싶은 말은 네가 그와 데이트할거냐는 거야."

그녀는 솔직하게 물었다.

"모르겠어."

에비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 컵을 손바닥으로 감싸쥐고는 뜨거운 액체를 마셨다.

"베키, 그 남자를 보면 흥분이 돼. 하지만 두렵기도 해. 어떤 사람과도 관계를 갖기 싫은데, 그의 경우는 말려들까 봐 두려워."

"고게 나쁜 거니?"

답답하다는 듯 그녀의 언니가 말했다.

"얘, 벌써 12년도 넘었다. 이제 다시 남자에게 관심을 가져도 괜찮을 때야."

"그렇겠지."

에비는 순순히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버트 캐넌은 먼 장래를 보면 절대로 안전한 선택이 아냐. 잘 모르겠지만 뭔가 있어. 내게 관심을 보이는 그런 이유 말고 분명히 다른 이유로 내게 접근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겉으론 인상 좋은 신사인 체 굴지만 절대로 신사가 아니라구."

"잘됐다. 신사라면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관심 없다고 하면 두말도 안 하고 가 버릴 거 아냐. 하지만 점잖아 보이기도 하고 곁에서 너를 보호해 줄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소유욕이 아닐까?"

에비는 정정했다.

"그리고 무자비할 정도로 냉혹할 거야."

절대 신사는 아니었다. 다이아몬드처럼 빛L나는 초록빛 눈에서 풍겨 나오는 냉혹한 의지력은 약탈자의 심장을 가진 모험가의 것이었다. 그녀의 눈에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 떠올랐다.

레베카는 몸을 숙여 에비의 팔을 잡았다.

"알아."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후회할 만한 일에 너를 떠밀고 싶은 생각은 얼어. 하지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혹시 로버트 캐넌이 네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기회를 놓치고 그냥 두고 볼 거니?"

에비는 한숨을 쉬었다. 레베카는 사실 정반대로 알고 있었다. 이미 그녀에게서 선택의 기회는 날아가 버렸다.

다행히 크레이그를 보내려고 계류장에 돌아왔을 때 로버트는 없었다. 검은 비구름이 잔뜩 낮게 드리우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것이 여름이면 흔한 돌발성 폭풍이 지나갈 것임을 알려주었다. 여흥으로 잠시 보트를 타던 사람들과 낚시꾼들은 서서히 계류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한 시간 정도 그녀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산 저 너머에서 번개가 횐 광선을 자랑하며 검은 바닥에 내리 꽂듯이 떨어졌고, 천둥이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본격적으로 비바람이 몰아쳤다.

계류장에서 보트를 대여한 낚시꾼들은 모두 무사히 돌아왔고 보트들도 갑판과 계류장에 안전하게 닻을 내렸다. 사무실로 돌아온 에비는 두터운 유리창으로 안전하게 격리된 실내에서 흘린 듯이 내리는 비를 쳐다보았다. 약간 비를 맞아서 타월로 젖은 머리와 팔을 닦아야 했다. 10분만에 무려 5도 이상의 기온이 내려갔다. 찌는 듯한 무더위는 한숨을 놓을 수 있게 시원해졌지만 지나친 기온 저하로 몸에 한기가 돌았다.

그녀는 폭풍이 휘몰아칠 때의 그 극적인 강렬한 에너지를 지켜보는 것을 좋아해서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 호수와 산이 어울린 자연의 쇼를 즐겁게 감상했다. 빗소리를 듣다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졸음이 와서 페이지와 제이슨 때문에 들여놓은 조그만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 하단에 작은 글씨로 ‘폭풍주의보 조심'이라는 안내문이 지나갔다.

"물론 조심해야죠"

그녀는 텔레비전에게 대꾸를 해주고 다시 안락의자로 돌아갔다.

얼마 있다 천둥 번개는 그쳤지만 비는 계속 내렸다. 농부들이 좋아할 만한 단비였다. 계류장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기계수리공인 버트 마르디스만이 계류장의 수리창고에서 꾸준히 자신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가 열린 문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그녀는 창문을 통해 지켜봤다. 날씨가 갤 때까지 손님들은 오지 않을 것이다. 뉴스속보로 기상 캐스터가 나와 이번 폭풍전선은 미시시피 강 전체에 걸쳐 있으며 왜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고 통보했다. 저녁 내내 내리다 자정은 되어야 그칠 것이라고 했다.

오늘 오후는 왜나 여유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항상 책을 갖다 놓았으므로 그녀는 그 책을 꺼내 읽었다. 하지만 지난번에 읽은 지 왜 시간이 지나서 줄거리가 가물거렸으므로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끝까지 보려면 집에 가서도 계속 읽어야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졸음 때문에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차라리 나중에 읽는 것이 낫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아쉬운 듯 책을 내려놓고 뭔가 다른 할 일을 찾아서 주위를 돌아봤다. 하지만 크레이그가 아침에 모조리 일을 끝마쳐 마룻바닥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고, 상품들은 선반과 진열대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하품을 하고 뮤직비디오를 틀어 주는 채널을 찾아 텔레비전의 리모콘을 눌렀다.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면 정신이 들지도 몰랐다.

30분 후 로버트가 계류장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텔레비전 앞에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뮤직비디오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를 돌아보면서 그녀는 경이롭다는 듯 말했다.

"도대체 저렇게 배가 나온 가수들이 뭐 하러 관중들 앞에서 옷을 벗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는 크게 웃는 법이 없었다. 기껏해야 눈을 반짝이며 약간의 미소를 띄울 뿐이었다. 그런데 에비가 그를 큰소리로 웃게 만든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누구도 그녀를 간첩이라고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렇게 매력적인 성격의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저지른 일을 잘 알고 있는 그조차도 화가 날 정도로 격렬하게 그녀를 원했다. 이렇게나 자신의 반응을 조절 할 수 없다니.

그녀를 향해 걸어가면서 그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화가 날 것이고 눈치 빠른 에비는 쉽게 그의 생각을 읽을 것이다. 그녀가 있는 곳에 도달해서 그녀를 품에 안자 다른 생각을 잊는 것은 우스울 정도로 쉬웠다.

그녀는 놀라서 그를 보고 눈을 깜박이며 반사적으로 손을 그의 가슴에 대고 떠밀려 했다.

"내게 시간을 준다고 했잖아요."

그녀는 따졌다.

"그러는 거요."

로버트는 대답을 하고 그녀의 왼손을 들어 그의 뜨겁게 열린 입술에 손목 안쪽을 가져다 댔다. 갑자기 빨라진 그녀의 맥박이 느껴졌다. 그녀의 향기는 신선하고 가벼운 향이었지만 값비싼 향수로 휘감은 것보다 오히려 더 유혹적이었다. 그는 혀끝으로 가냘픈 그녀의 푸른 정맥을 애무하듯 따라 올라갔다. 맥박이 마구 뛰는 것이 느껴졌다.

에비는 그 미묘한 자극에 몸이 떨려 오고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의 떨림을 느끼자 그는 더욱 가까이 그녀를 끌어안고 엄지손가락 아래 두툼한 살집을 깨물었다. 그녀는 절로 나오는 탄성을 속으로 삼켰다. 정말이지, 그곳이 그렇게 에로틱한 곳인 줄은 몰랐다.

"함께 외출하겠소?"

그는 다시 입술로 그녀의 손바닥을 애무하고 놀리듯 혀로 핥기 시작했다. 저릿한 감각에 저절로 손이 옴찔거렸다.

"아뇨, 그럴 수 없어요."

생각해 보기도 전에 12년 동안 새겨진 습관으로 불쑥 거절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반응에 놀랐다. 마음 한구석에 그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이길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다른 데이트가 있는 거요?"

"아뇨, 그저‥‥‥."

얼마나 어려운지 그는 모를 것이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남편이 죽은 뒤로 한 번도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어요."

로버트의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살짝 찌푸렸는데도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펴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뭐라고 말한 거요?"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빼내려고 잡아당겼다. 손바닥을 청바지에 문질러 그의 흔적을 지우려 하다가 곧 다시 손가락을 움켜쥐고 그의 감촉을 간직하려는 듯 오므렸다.

"매트가 죽은 후 누구하고도 외출한 적이 없다구요."

그는 조용히 그녀가 한 말의 진위를 생각했다.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웠지만, 특히 에비처럼 생긴 여자의 경우는 더 믿기 어려웠다. 머서와 관계가 없다는 것은 가능하다고 해도 12년 동안 수녀처럼 순결하게 살았다니 될 법이나 한 소린가. 하지만 거짓말쟁이라는 말로 그녀를 화나게 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대신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 아래를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그러자 즉시 그 벨벳처럼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에 빨려 들었다.

"왜 그런 거요?"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곳의 남자들이 모두 장님일 턱은 없을 테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관심이 없어서‥‥ 그런 상황에서 다른 남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일인 것 같고‥‥‥."

"한동안이라면 말이 되지만 12년씩이나?"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그는 팔로 단단히 그녀를 감싸안아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근육질의 단단한 허벅지로 그녀를 꼭 껴안아 허리부터 무릎까지 그에게 찰싹 밀착되어 있는 상태였다. 남자의 강한 힘은 든든해서 여자들은 그 때문에 그들에게 기대고 싶은 건지

도 모른다. 로버트가 그녀를 품에 껴안아 주기 전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그렇게 껴안기고 싶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떤 남자라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오직 그의 품이므로 좋았다. 그 순간 에비는 자신이 이 전투에서 패배했음을 알았다. 그를 피하려는 것은 소용없었다. 그녀를 놓아줄 사람도 아니거니와 이젠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좋든 싫든 상관없이 그녀는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빠르게 그와의 관계에 휘말렸다. 자신에게 견딜힘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지난 12년의 세월을 그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그의 가슴에 대고 대신 그가 원하는 말을 했다.

"좋아요, 당신과 외출하겠어요 다음 순서는 뭐죠?"

"먼저 고개를 드시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수정처럼 반짝이는 눈길을 받을 준비를 했다. 그의 눈 속에서 장난스러움을 발견하길 기대했지만 그의 눈은 온통 승리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갑작스런 충격으로 그녀는 몸을 떨었다.

"추운 거요?"

따뜻한 팔로 그녀의 팔을 문질러 주며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뇨, 겁이 나요."

그녀는 솔직히 인정했다.

"당신이 두려워요 이렇게 새로 관계를 시작하는 것도."

불도저처럼 자신의 인생 속에 쳐들어온 남자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은 깊고 신비스럽게 그늘져 있었다. 단지 잠시 지나갈 낭만적인 관계를 생각하는 거라면 그는 지금이라도 몇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로버트, 나는 게임에는 소질이 없어요 진심이 아니라면 키스하지 말아요 그리고 곁에 있어 주지 않을 거면 아예 오지 말아요."

"결혼을 의미하는 거요?"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차갑게 물었다.

그의 말을 듣고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금 결혼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결혼의 합법성이나 제도 자체는 아니었다.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고 여유도 없었다.

"물론 아니죠! 다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하지만 매트와 함께 했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관계‥‥‥ 그런 것보다 덜한 것에 내 인생을 걸 생각은 얼어요 단순히 여름날 흘러가는 관계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난 당신의 여자가 될 수 없어요."

알 수 없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스쳐 가고 입술은 비틀어졌다.

"당신은 이미 내 여자요 단지 당신만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몸은 떨렸지만 그녀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감정적인 결속을 원해요. 그 조건을 알면서도 여전히 나를 원한다면 당신과 외출하겠어요.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아직 편하진 않지만 서로를 알아 가면서 변하겠죠. 당신과 잠자리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너무 위험하니까."

그는 그녀가 육체적인 것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보다 감정적인 부분이 더 두려웠다.

그는 조용히 한참 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좋소, 시간을 두고 천천히 서로를 알아 갑시다.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고 싶은데 순결 따위를 맹세하는 짓은 하지 않겠소."

그녀의 얼굴을 손에 쥐고 천천히 머리를 숙이는 그의 눈빛은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를 멈추게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안 돼요’ 라고 말하면 되오."

저녁 무렵의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신음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를 마음껏 즐길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황홀했다. 오래도록 냉동되었다가 이제 해동이 돼 다시 새롭게 살아나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그녀의 입술이 자진해서 먼저 열렸고 그는 그녀의 뼈가 흐느적거릴 정도로 능숙하게 주도했다. 키스 교습을 해도 되겠다고 그녀는 멍하게 생각했다. 그의 혀가 탐험하듯 들어와서 그녀의 혀를 희롱했고, 그들은 곧 서로를 짙게 애무했다. 놀랄 정도로 달콤하고 에로틱한 키스였다.

그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고 그렇게 한동안 깊은 키스를 했고, 그들의 몸은 여전히 서로에게 밀착되어 있었다. 그의 입술과 혀의 움직임으로 그녀는 진정제와 흥분제를 동시에 맞은 느낌이 들었다. 걱정거리는 희미해졌지만 젖가슴과 아래의 깊은 곳에서부터 퍼지는 열기로 그녀는 말랑말랑한 버터가 돼 버린 느낌이었다. 왼손으로 그의 오른 팔목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그녀는 단단하고 탄력 있는 근육들의 조각 같은 그의 육체를 본능적으로 알아갔다.

텔레비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비오는 날에는 아무도 계류장에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사무실에 단둘이 서서 들려 오는 음악이나 빗소리는 잊어버리고, 오로지 쾌락으로 무의식중에 흘러나오는 신음과 서로의 호흡소리만을 들었다. 수줍게 태양을 향해 여는 아침의 여명처럼 에비는 그의 품안에서 피어났다. 황금빛 관능의 여신이 의식을 회복한 것이다. 그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흥분이 되었지만 지독한 자제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억제했다. 그녀가 압박 받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반응은 무시했다. 그녀는 안전하다고 느꼈고 마음놓고 그의 몸을 즐길 수 있었다. 새롭게 열린 감각의 세계에서 욕망의 한계를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매트에게 느낀 것과는 아주 달랐다. 그때는 소녀였지만 이제는 성숙한 여인이고, 여인의 깊이와 관능의 풍요로움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전에 그가 키스할 때는 욕망의 위험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와의 관계를 수긍하게 된 지그, 작은 차이도 예민하게 느끼면서 그의 입술을 마음껏 탐닉했다. 넓은 어깨를 손으로 재고 근육질에 감싸인 단단한 골격과 마디들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확인했다.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두개골에 가까운 머리 피부가 뜨겁다는 것도 느꼈다. 남성적인 사향과 비누 냄새에 섞여 청결한 그의 체취와 옷에 묻은 신선한 비의 냄새까지 들이마셨다.

"오, 하느님."

그는 몸을 떼어 내며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살아나기 시작하자 그는 마치 달콤한 불길을 안고 있는 것처럼 전신의 감각이 기뻐 날뛰었다. 그녀에 대한 자신의 격렬한 반응에 그도 충격을 받았다. 그녀를 갖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그들이 지금 언제든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공공장소에 있다는 것 때문에 시도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에비, 이번에는 내가 멈춰야겠소. 지금 멈추든지, 아니면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든지 둘 중 하나요"

그의 품에서 벗어나자 그녀는 상실감이 들었다. 심장은 쿵쿵거리고 피부는 달아올라 윤이 났다. 그가 옳았다. 이런 곳에서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오지 않을 장소는 이곳에 없어요"

그녀는 텔레비전 채널을 락 음악 채널에서 컨트리 음악 채널로 돌리면서 말했다. 가슴이 에일 정도로 정열적인 사랑 노래가 흘러나오자 그녀의 신경은 더욱 곤두섰다. 텔레비전을 끄자 갑자기 조용해진 사무실에 빗소리만이 더욱 크게 울렸다. 창 밖을 보니 회색 비안개 때문에 호수 건너편은 잘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이제 더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호수로 나가지는 않을 것 같소. 일찍 문 닫고 헌스빌로 저녁식사하러 나갑시다"

그가 말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자신에게 의견을 묻는다기보다는 무슨 선언이나 명령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를 생각했다. 이 남자에게 '안돼'라는 말을 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일찍 문 닫을 수 없어요"

"오늘밤까지 비가 온다고 했소"

그는 논리적으로 말했다.

"그래도 미끼나 낚시도구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설령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해도 계류장의 영업시간은 8시까지예요"

저 고집 센 여자는 충분히 그럴 여자다‥‥‥.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내주지 않는 여자에게 화가 나서 그는 생각했다. 에비를 만날 때까지 여자를 사귀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은 없었다. 그녀와 가까워지는 일은 광산에서 금을 채굴하듯 장애물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녀와 시간을 보내려면 이곳 계류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화를 내면 그녀는 더욱 고집스러워질 거라고 생각한 그는 말했다.

"크레이그에게 미리 시간을 알리고 바꾸면 그가 가끔 저녁에 계류장을 돌봐 줄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이제야 뭔가 좀 알아 간다고 생각한 듯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 그럴 수 있을 거예요"

"내일은?"

그녀는 하마터면 크게 웃을 뻔했다.

"내일은 안 돼요"

아침 10시에 산부인과 의사와 예약이 되어 있었다. 잠자리를 같이 하고 싶지 않다고 말은 했지만 그의 육체적인 매력은 너무 강력했다. 피임을 할 거라고 그에게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건 섹스를 해도 좋다는 청신호로만 느껴질 테니까.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내일 모레는?"

"물어 볼게요, 일단."

"고맙소"

자조의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로버트는 다음날 아침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잔교 베란다에 나와 팰리스가 팩스로 보내 준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던 참이었다. 요즘 세상은 컴퓨터, 전화, 팩스를 이용해서 아주 쉽게 사무실 밖에서도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첫 전화는 매들린에게서였다.

"앨라배마는 어때요, 오빠?"

"아주 더워"

그가 대답했다. 짧은 반바지만 입고 있어도, 전날 내린 비로 주변은 더욱 푸르고 싱싱해졌지만 더위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아니, 더 심해졌다. 아침의 태양은 그의 맨 가슴과 다리를 태울 듯 내리쬐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올리브빛이어서 태양광선에 화상을 입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이곳 날씨는 완벽해요. 25도 정도. 시간 되면 주말에 놀러 와요"

"이번 주말은 안 될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이 에비가 안 된다는 말을 할 때와 같은 말투를 쓴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완벽하게 마무리지어질 때 까진 움직일 수가 없어."

"언제든지 시간 되면 들러요."

매들린은 특유의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들린과 에비의 말투가 닮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가슴 한구석이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이틀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으면. 우리 모두 오빨 보고 싶어하는 거 알죠?"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에 꼭 들리도록 할게."

그는 약속했다.

"꼭 시간을 내도록 해봐요. 봄에 보고 한 번도 못 봐서 보고 싶거든요‥‥ 몸조심 하구요."

통화가 끝나자마자 다시 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랜든 머서를 감시하라고 고용한 사설정보원에게서였다.

"지난밤 머서를 방문한사람이 있었습니다. 떠날 때 그의 뒤를 추적했고, 지금은 정체를 알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전화 통화에는 수상한 점이 없었습니다."

"알았소. 계속 감시하고 전화 통화를 지켜보시오. 그가 감시 받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소?"

"아직 아닙니다. "

"머서의 집은 어떻소?"

로버트는 그가 고용한 사람이 사설정보원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경찰이 이 임무를 맡았다면 그 복잡한 절차나 규칙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물론 사설정보원이 개인의 집을 침입한 죄로 체포되면 상황은 더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증거를 잡으려는 것보다는 정보입수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정보는 곧 힘이니까.

"백지처럼 깨끗합니다. 너무 깨끗하다고 해야 할까요? 은행 영수증 같은 것도 나돌아다니는 것이 없습니다. 안전금고가 있고 서류들을 그곳에 보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열어 보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머서의 은행계좌를 추적 중입니다."

"계속 보고해 주시오"

로버트는 전화를 끊었다. 며칠 내에 머서는 덫에 걸린 기분이 들것이다. 처음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점점 질식하는 기분이 들것이다. 에비의 경우에도 그는 또 다른 금전적인 압박을 가할 완벽한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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