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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 에반젤린-5화 (5/19)

5장

에비는 금세라도 도망갈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로버트는 약간 뒤로 물러나 손을 옆으로 내린 채 섰다. 모순된 감정으로 그의 눈은 희미하게 반짝였다.

"에비,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요 당신에게 끌리는 것이 놀랄 일이오? 당신을 얼마나 원하는지, 내가 껴안고 있을 때 당신도 확실히 느낄 수 있지 않았소?"

그의 가벼운 놀림에도 그녀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 뒤에 가려진 진실을 캐려는 듯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의심할 바 없이 세련된 도시인이었지만, 그 가면 뒤엔 무자비한 정열로 자신에게 키스를 한 진정한 남자가 숨겨져 있음에 틀림없었다. 또한 여러 가지 숨겨진 구석이 많은 남자로 그의 동기 또한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끌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방금 일어난 행위에 그녀 역시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에비는 결코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면서 미묘하게 유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부터 어떻게든 그녀의 삶에 끼여들려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자신의 삶에 들어와 있었다. 동기가 무엇이든 육체적인 것 이상의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가벼운 성관계는 갖지 않아요"

그녀는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지을 뻔했다. 잠시 그의 눈빛에 미소를 지을 것 같은 표정이 돌았다.

"에비.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면 그 어떤 것도 가벼운 것은 없을 거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는 거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녀가 머서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에도 놀라진 않았다.

"그럼, 우리 사이에 문제는 없는 것 아니오? 당신도 내게 끌리는 것을 부정하진 못할 텐데."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당당한 표정에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빛났다.

"당신의 그 벨벳 장갑은 사실 강철주먹을 감싸고 있는 거죠?"

그녀는 무관심한 어조로 계속했다.

"네, 맞아요 당신에게 끌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겠네요"

그녀의 예리한 관찰력은 그를 당황하게 했지만 그는 자신의 반응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뭔가, 혹은 누군가를 절실하게 원하면 매우 끈질기오"

그녀는 말로 하는 창술놀이에 질린 듯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잘못 말했군요 나는 연애놀음도 사양이에요"

"현명한 결정이긴 하지인 우리 경우엔 너무 답답하겠소."

그가 다가왔지만 그녀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벨벳 같은 질감이 느껴지는 그녀의 뺨을 쓸었다. 완벽한 고전적인 미모는 아니어도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이름처럼 여성적인 매력이 넘쳐흘렀다. 벌거벗은 황홀한 이브를 보고 아담이 쉽게 홀린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아담의 잘못을 되풀이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는 에비의 관능적인 유혹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달콤하고 따스한 그녀의 체취가 그에게로 밀려왔다.

"강제로 당신을 취하진 않을 거요 하지만 당신을 꼭 갖겠소"

그는 조용히 말했다.

"힘을 사용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 목적을 달성할 거죠?"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미리 경고하는 거요?"

"네, 맞아요"

"재미있겠지만, 지금 시험해 볼 생각은 없소"

그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에비, 지금은 말리 계류장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소 당신은 돌봐야 할 사업이 기다리고 있고, 나는 보트를 계류장에 넣어야 할 테니."

그가 손을 내리자 에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전쟁터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 그가 만졌던 얼굴의 신경이 떨렸다. 그의 손이 젖가슴에 닿았을 때 감전된 것 같았던 느낌이 기억났다. 그의 대범한 행동은 여자들과의 수많은 경험과 자신감을 보여주었고, 상대적으로 경험이 없는 그녀 자신의 불리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계류장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름의 낮 시간이 긴데도 벌써 석양이 지는 것을 보고 왜 시간이 지났음을 알았다. 후텁지근한 열기는 식지 않았지만 지평선의 자줏빛 노을은 한바탕 열기를 식혀 줄 소나기를 예고했다.

로버트의 고속 경주용보트는 검정 지프차의 뒤에 매달린 채 원래 주차되어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보트의 출발수로를 가로막고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크레이그가 왜 골치 아팠을 것이다. 서둘러 계류장 사무실로 들어가자 크레이그가 읽고 있던 스포츠잡지에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았다.

"모두 다 괜찮아요? 아이들이 그러는데 제이슨이 거의 익사할 뻔했다면서요?"

크레이그가 물었다.

"약간의 뇌진탕이 있지만 내일이면 집에 올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말했다.

"시간을 내줘서 정말 고마워. 오늘 네 스케줄을 망쳐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소년은 쾌활하게 말했다. 키가 크고 근육이 발달한 열일곱 살의 크레이그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 졸업반이 될 예정이었다. 지금까지 2년 동안 파트타임으로 계류장에서 일해 줬고, 이제는 그만 사무실에 남겨 두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 일에 익숙했다.

"근데요, 저기 밖에 있는 보트의 임자는 누구예요?"

"나야."

로버트가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이곳의 계류장을 임대할 예정이고."

그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로버트 캐넌이야."

크레이그는 힘차게 악수를 했다.

"크레이그 포스터라고 합니다. 캐넌 씨, 만나서 반가워요 에비 아줌마와 제이슨을 구해 낸 장본인이시죠? 아이들이 키 큰 양키라고 말해서요."

"그래, 내가 바로 그 양키다. "

로버트는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보트를 계류장에 정박시키는 걸 도와 드릴까요?"

"내가 할 수 있어."

에비가 말했다.

"네 시간을 너무 많이 했었어."

"돈을 주시잖아요,"

크레이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곳에 있으니 도와 드려야죠."

로버트와 함께 크레이그는 밖으로 나갔다.

창문으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아이들이 로버트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수줍은 페이지조차 그를 편하게 대했다. 그렇다고 그가 아이들을 어른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어른의 권위와 위엄을 갖고 아이들을 대했고, 그러면서도 무시하지 않았다. 그 넓은 어깨엔 위엄과 책임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확실히 명령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를 멀리해야 하지만, 솔직히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겨우 몇 분의 키스만으로도 그는 쉽게 그녀의 자제력을 뭉개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를 사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가장 겁나는 일이었다. 사랑을 받을 만한 육체, 정신, 영혼의 힘이 모두 강하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조심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마음 따위는 쉽게 훔쳐 갈 것이다.

그녀는 창에서 시선을 돌렸다. 12년 전에 사랑 때문에 망가질 뻔한 그녀였다. 희망이 사라진 가운데 조심스럽게 방어벽을 쌓고 새로운 삶을 꾸려 가야 했다. 다시 그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지옥 같은 경험과 싸워서 극복할 힘이 이제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떠나 보낸 에비로선 사랑이나 삶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이미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선 어쩔 수 없었다. 가족이나 버질 할아버지를 비롯해 몇 명의 가까운 친구들은 이미 그녀의 가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다시 새로운 인연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고통으로 너무 많은 것을 지불한 지금, 그저 자신의 소중한 삶을 계속하려는 마음뿐이었다. 오늘 또 제이슨을 잃을 뻔했고 그 고통은 견디기 힘들었다. 만일 제이슨을 찾지 못했으면 아들의 죽음뿐 아니라 여동생의 죽음도 같이 치르게 됐을 것을 레베카는 어렴풋이 짐작한 것 같았다. 제이슨에게 정말 화가 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에비는 로버트 캐넌이 자신의 삶 속에 강제로라도 침입하리란 것을 알았다. 여름 동안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마도 길고 나른한 여름날 몇 주 동안의 가볍고 유쾌한 연애 정도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면 분명 달콤한 연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여름이 끝나 그가 뉴욕으로 돌아가도 에비는 여전히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이고 과거의 상처에서 겨우 회복한 에비의 마음엔 다시 상처가 남을 것이다. 감정적으론 그를 받아들일 여유가 그녀에겐 없었다.

계류장을 경영하다 보면 잡다하게 할 일들이 많았지만, 지금 그녀의 머리 속에는 그 중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현실이 완전히 뒤집힌 것처럼 멍하게 넋을 잃은 상태였다.

그녀는 병원에 전화를 걸어 제이슨의 병실을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벨이 한 번 울리자마자 레베카가 받았다.

"계속 칭얼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픈가 봐."

에비가 상태를 묻자 레베카는 활달하게 대답했다.

"오늘밤 두 시간마다 깨워 줘야 하고, 만일 경과가 좋으면 내일은 퇴원해도 된대. 폴은 방금 페이지를 시어머님 댁에 데려다 주기 위해 나갔는데 곧 돌아올 거야. 너는 어떠니? 이제 놀란 마음은 진정이 됐니?"

"아직 아니야."

에비는 사실대로 말했다. 비록 충격이 제이슨의 사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떨리는 것은 멈췄어."

"지금 집이길 기대하는 것은 내 희망사항이겠지?"

"언니도 잘 알면서."

"오늘 하루 정도는 좀 쉬어도 될 텐데."

레베카는 그녀를 나무랐다.

"캐넌 씨가 너를 좀 손봐 췄으면 좋겠어. 명령하는 데는 이력이 붙은 사람 같던데."

"세계 챔피언 급이야."

에비는 동의했다.

"계류장 문을 닫은 다음 제이슨이 어떤지 보러 들릴게. 뭐 필요한 것 있어? 베개나 책이나 햄버거 따위?"

"아니. 아무것도 필요 없어. 여기 오지마. 제이슨은 괜찮고 너야말로 집에 가서 쉬어야 하잖니. 에비, 내 말 들어."

"나도 괜찮아, 언니."

에비는 조용히 대답했다.

"몇 분만이라도 제이슨을 꼭 보고 싶어."

순간 수화기가 갑자기 손에서 뽑히자 그녀는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로버트가 수화기를 그의 귀에 가져다 대는 것이 보였다.

"우드 부인? 로버트 캐넌입니다. 에비가 곧장 집에 가도록 만들겠습니다. 예, 아직 약간 힘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라구요"

에비는 눈을 흘겼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만졌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녀를 잘 돌보겠습니다."

확실한 어조로 레베카를 안심시키면서도 시선은 한 번도 에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 다시 생각해 보니 저녁식사를 먼저 한 다음 데려다 주겠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가 전화를 끊자 에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처럼 취급당하는 것을 혐오해요."

"절대 그런 의도는 없소."

그녀는 후퇴하지 않았다.

"나를 위한답시고 당신 맘대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면 내가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리라 생각한 모양인데, 절대 아니에요 이건 모욕이라구요."

로버트는 그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의 반응을 끌어내고 싶긴 했지만, 그녀가 문제의 핵심을 너무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서 오히려 그가 놀랐다. 에비는 불편할 만큼 눈치가 빨랐다.

"당신 언니에게 알리기 꺼릴 정도로 큰 위험에 처했었고 충격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도 못했잖소 당신이 지금 상태로 병원에 가 봐야 당신 언니와 제이슨을 놀라게나 할 텐데, 그럼 스트레스를 더 받지 않겠소?"

"물에 빠졌던 것보다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할 거예요."

그녀의 담갈색 눈빛은 흔들림 없이 맑았다. 그는 그녀의 통찰력이 마음이 걸렸지만 다시 설득하려고 부드럽게 달랬다.

"오늘밤은 내가 휴전을 선포해도 말이오? 키스도 안 하고 손도 잡지 않겠소. 식사만 하고 내가 집에까지 바래다주면 당신에겐 잠이라는 달콤한 휴식이 기다릴 거요 어떻소?"

"아뇨, 사양하겠어요 당신과 같이 저녁을 먹고 싶지도 않고, 나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요."

그는 지그시 그녀를 봤다.

"그렇다면 휴전 제의는 없던 일이오."

그가 너무 차분하게 말해서 실제로 그의 말을 이해했다기보다 그저 그의 어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단지 몇 초간을 망설였을 뿐인데도 그는 다시 그녀를 품에 안았고, 그녀는 그의 강철같은 힘에 압도당했다. 그는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없었고 힘을 세게 준 것은 아니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사향은 그녀의 정신을 흔들었다. 그의 입술이 내려오는 것 같은 느낌에 그 상황을 피하려고 고개를 숙여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 위에서 껄껄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니 더 혼란스러웠다.

"용감한 여자가 그렇게 겁쟁이처럼 행동해도 되는 거요?"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엔 웃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당신을 그냥 안고 있는 것도 나름대로 만족스럽소."

에비는 그의 말대로 자신이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두려웠다. 단순히 육체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그를 대하는 방법도 잘못되었음이 점점 분명해졌다. 거부당하는 것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남자인 그로서는 접근을 거부하는 그녀의 태도에 더욱 집착하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정신을 못 차리고 반한 것처럼 행동했더라면 지겨워서라도 그녀를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이미 이런 생각도 부질없게 되었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더욱 끌어당겨 안았다. 그에게 기대어 하루 동안의 피로와 충격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은 너무 쉬웠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뜨거운 육체의 활력을 느끼고 싶은 충동은 참았지만 귀를 통해서 들려 오는 심장박동은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그 소리는 놀랄 정도로 강했고 ,그 강한 힘에 끌려 여자들은 속절없이 그에게 무너졌을 것이다. 이름도 모로는 그 수많은 여자들과 그녀도 다를 바 없었다.

"로버트."

그녀는 속삭였다.

"하지 말아요"

겁에 질려 그저 애원했다. 그의 뜨거운 손은 이제 어깨뼈를 지나 목과 어깨 사이의 예민한 근육과 목덜미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에비."

그도 마찬가지로 속삭였다.

"뭘 하지 말라는 거지?"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했다.

"에비는 당신의 진짜 이름이오? 아니면 이브를 칭하는 별칭? 그도 아니면 에벌린의 애칭? 어떻든 당신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오."

그의 따스함과 강함이 그녀의 감각에 마술을 걸고 있었다. 항복하는 것은 우스울 정도로 쉬울 것이다. 그의 기교는 가히 악마의 유혹이라 해도 좋았다.

"어느 것도 아니에요 에반젤린을 줄인 말이에요"

"아. 에반젤린. 여성스럽고 성스러우며 관능적이지만‥‥ 슬픔을 나타내기도 하지."

그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가 받은 보고서 어디에도 그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에비는 이름에 대한 그의 분석에 반응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마지막 말은 그녀를 뒤흔들었다. 슬픔‥‥ 그랬다. 너무 슬퍼서 그녀는 오랫동안 태양이 뜨는지 지는 지도 몰랐다. 그녀에겐 온통 회색이었으니까. 이제야 겨우 밝은 태양을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삶의 흐름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침몰하는 것을 막았지만 그녀는 항상 그 어딘가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삶의 영원한 대위법이라고 할까. 빛이 있다면 그 반대엔 어둠이 있어야 했다. 고통은 기쁨으로 상쇄되고, 고독과 사랑은 대비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삶의 편린에서 자유롭게 인생을 항해할 수는 없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천천히 흔들었다.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의 가벼운 흔들림이었지만 그녀는 점점 깊숙이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그는 다시 흥분하고 있었다. 증거가 분명했다. 몸을 메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너무 피곤했고, 그의 부드러운 움직임은 마치 닻을 내린 보트의 흔들림처럼 편안했다. 그 태고적 리듬은 저항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자제력을 비웃듯 그들을 끝없이 육체적인 본능으로 이끌어 갔다

몇 분 후 그가 중얼거렸다.

"지금 잠들려고 하는 거요?"

"그런 것 같아요."

그녀는 눈을 뜨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의 포옹은 정말 편안했다.

"벌써 6시 30분이오. 조금 일찍 문을 닫아도 손님들이 이해할 것 같지 않소?"

"한 시간 30분은 절대 조금 일찍이 아니에요. 아뇨, 난 평소처럼 8시까지 기다릴 거예요."

"그럼 나도 그렇게 하겠소"

그는 갑자기 솟아오른 화를 억누르고 말했다. 그도 일할 때 방해받거나 참견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매들린이나 그녀의 가족들을 제외하곤 용납한 적도 없었지만. 에비가 지칠 때까지 계류장에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화가 났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필요하다고 믿소."

그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함께 저녁을 먹진 않을 거예요."

"뭐, 상관없소. 저녁식사를 이리 가지고 오면 되니까.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있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집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으면 될 것 같아요"

"내게 모든 것을 맡기시오."

그녀는 여전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책임을 떠맡는군요. 평소에도 이렇겠죠?"

"결단력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오."

"독재적인 경향이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요"

"내가 잊으면 당신이 알려줄 거라고 확신하오."

그가 재밌어하는 것이 느껴졌다. 못된 남자 같으니. 그가 이렇게 부드럽게 보호하는 사람이 아닌, 정말 못되고 형편없는 성격이었으면 싶었다. 그녀를 보호하려고 애를 쓴 레베카를 제외하곤 그 누구의 신세도 지지 않은 그녀였다. 로버트는 너무 간단하게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다그치는 건 알고 있소."

그가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오늘이 우리가 만난 지 겨우 두 번째 되는 날이군. 좀 뒤로 물러나서 당신에게 나를 더 잘 알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주겠소 좀더 편한 마음이 들도록. 좋소?"

그녀의 머리는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가 하는 말에 하나도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제안이라면 무엇이든 괜찮았다. 그녀는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로버트는 그녀의 턱을 감싸고 피난처였던 그의 가슴에서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요"

단호한 경고였다.

에비는 그날 밤 완전히 지쳐서 깊은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낚시를 나가는 낚시꾼들의 모터보트 엔진소리에 잠이 깼지만, 평소처럼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자줏빛 여명이 천천히 하늘을 밝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12년 동안 안전한 성벽 안에서 자신을 잘 지켜 왔다. 그런데 지금 로버트는 그 벽을 사정없이 무너뜨리고 있었다. 아니, 그는 단지 벽을 부순 것뿐만이 아니라 벌써 성벽 안에 들어와 있었다. 매트가 죽은 뒤 한번도 다른 남자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로버트는 계속 만나고 있었다. 육체와 정신 모두 그에게 매혹되어 있었다. 억지로 감정이 휘말리지 않게 노력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랑하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 그를 만난다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이 자명했다.

그래도 그를 계속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렇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아니, 약속이었을까? 의도한 목표를 쉽게 던져 버릴 남자가 아니므로 그녀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그녀에게 키스와 애무를 계속할 것이다. 그 강렬한 육체적인 욕망 앞에서 조심성은 사라질 것이고, 그를 멈추게 하기는커녕 자신조차도 어찌할 수가 없을 거이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가 키스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키스가 깊어지면서 그가 보여준 능숙함, 그녀의 입술을 탐했던 모습이 그려졌다. 자신의 젖가슴에 닿은 그 기다란 손가락을 생각하자 유두 쪽으로 피가 몰렸다. 매트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그녀는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의 몸을 누르는 로버트의 육중한 체중과 맨 살결 위로 미끄러지는 그의 손과 입술, 그리고 그녀를 갖기 이해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자리잡을 그 근육질의 허벅지를 생각했다. 판타지를 꿈꾸는 그녀의 전신이 욕망으로 움찔거렸다. 그가 자신에게서 떠나가 버린 후 자신에게 남겨질 고통이 두려웠지만, 그 고통만큼이나 그를 원했다.

현실적인 여자라면 피임을 위해 의사와 약속을 해야 할 때였다. 그리고 에비는 현실적인 여자였다. 적어도 그 점에선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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