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사랑 에반젤린-4화 (4/19)

4장

에비는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제이슨!"

그녀는 열네 살 난 조카 녀석을 큰소리로 불렀다.

"그렇게 위험한 놀이는 그만둬. 지금 당장!"

"아. 알았어요."

제이슨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고, 에비는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여전히 조카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조카지만 아직은 가만히 놔두면 남아도는 에너지를 주체 못해 주위가 산만할 정도로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춘기 소년의 초기 증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에 또 다른 조카인 페이지는 에어컨이 작동되는 시원한 실내에서 얌전히 에비 옆에 앉아 있었다. 제이슨의 친구녀석 두서너 명이 놀러 온 뒤 함께 밖으로 나간 녀석들은 망아지처럼 껑충껑충 선착장 갑판대 위에서 위험한 말뚝놀이를 하고 있었다. 모두 아니면 한두 명이라도 곧 물 속에 빠질 것처럼 보였다.

"아, 정말 정신없는 망나니들 같아."

페이지는 열세 살 사춘기 소녀의 오만한 태도로 한마디했다. 에비는 그녀를 보고 미소지었다.

"나이가 더 들면 나아질 거야."

"그래야 할 거예요."

페이지는 반대의 경우라면 끔찍하다는 듯 말했다. 몸에 비해 긴 다리를 흔들의자 위에 올리곤 어린 소녀들을 위한 로맨스소설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매우 아름다운 소녀였다. 에비는 그 어린 소녀의 섬세한 외모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닮아 검은 머리카락에 나이가 들면 들수록 멋있어질 얼굴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제이슨은 여동생에 비해 무척 활달한 아이였고 사실 또래에 비해서도 훨씬 장난꾸러기였다.

선착장 쪽으로 보트 한 대가 다가와 가스펌프대 앞에 정박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피부로 보아 너무 오래 햇빛에 노출된 것처럼 보이는 젊은 연인들을 맞기 위해 에비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가스비를 치르고 떠난 뒤 제이슨 일당들이 놀고 있는 곳을 보았다. 아이들은 당장은 위험한 말뚝놀이를 그만둔 상태였지만 그 얌전한 상태로 오래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살갗이 타는 것처럼 뜨거운 날씨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작열하는 태양을 흘깃 쳐다보았지만 이 더위를 식혀 줄 비가 내릴 가망은 전혀 없어 보였다. 겨우 몇 분을 바깥에 있었을 뿐인데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뒷목덜미에 머리카락이 땀으로 엉겨 붙었다. 이런 날씨에 저렇게 정신없이 뛰어 노는 아이들이 괴물처럼 여겨졌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실외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서 비교적 어두운 실내에 적응하느라 눈을 감았다 떠야 했다. 페이지가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의 새침한 조카 성격을 아는 터라 그 아이가 기분 좋게 말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에비는 카운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남자라는 것은 알았지만, 넓은 어깨 큰 키의 남자가 누군지 파악하기까지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정확하게 얼굴을 알아본 것이 아닌데도 남자의 정체를 직감으로 파악한 에비는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캐넌 씨."

"안녕."

그의 초록빛 시선이 에비의 노출된 다리로 옮겨갔다. 지겹게 더운 날씨 때문에 그녀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이 불편해진 그녀는 카운터 뒤로 재빨리 몸을 숨기고 방금 계산이 끝난 가스 주입비를 현금 보관함에 넣었다.

"뭘 도와 드릴까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녀가 물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손님 대하는 태도가 이상했던지 페이지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투를 무시하고 그는 말을 건넸다.

"내 보트를 가져 왔는데 계류할 장소가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에비는 대답했다. 그녀는 서랍을 열고 임대장부를 퍼랬다.

"이 서류의 빈칸을 채워 주시면 정박할 수 있는 계류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어요 어제 볼 때 특별히 마음에 드는 장소가 있던가요?"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그냥 보트를 정박할 수 있는 곳이면 되겠는데."

그는 서류의 내용을 훑어보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임대계약서는 계류장 임대료와 실제적인 규칙 정도를 간략하고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맨 아래 부분에는 두 사람이 사인할 공간이 있었다.

"사본은 없습니까?"

기록으로 남지 않는 서류에 사인한다는 것을 뼛속까지 사업가 기질을 가진 그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른 계약서 한 장을 더 꺼내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받아 두 종이 사이에 복사지를 끼운 뒤 다지 그에게 돌려줬다. 웃음을 참고 로버트는 재빨리 서류의 빈칸을 채워 나갔다. 이름과 주소, 계류장을 대여할 기간 등을 명시했다. 서류의 하단에 사인을 하고 그녀에게 돌려준 뒤 지갑을 꺼냈다. 카운터에 있는 게시판에는 모든 신용카드를 다 받는다고 표시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신용카드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놨다.

그녀는 신용카드를 체크하면서도 그를 쳐다보지 알았다. 로버트는 욕망을 숨긴 채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를 만난 지 3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으므로 충격을 받을 정도로 그녀가 사랑스럽게 생겼을 리가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계류장에 들어서면서 사무실 창을 통해 그녀가 밖에서 가스를 보트에 주입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그의 감각은 극도로 흥분해서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녀는 이교도의 여신처럼 매끄럽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관능 그 자체였다. 그녀를 갖고 싶었다.

지난 3일 간 그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머서를 만나 첫 번째 체스를 움직였고 보트와 강가의 별장 그리고 자동차도 샀다. 보트의 소유주가 되기까지는 이틀이란 시간이 걸렸으나 집 문제는 훨씬 빠른 시간내에 처리됐다. 부동산업자는 그의 초스피드식 결정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로버트는 일을 미루는 성격이 아니었다. 기록적인 속도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전기와 가스, 수도계량기를 다시 작동시키고 양도서류에 사인을 하자마자 헌스빌에 있는 청소업자를 시켜 집 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게 하고 필요한 가구들을 사들인 뒤 집으로 배달시켰다. 또한 에비 쇼와 랜든 머서를 잡을 덫을 마련하는 계획도 진행시켰다.

아무 말 없이 에비는 신용카드와 영수증을 그에게 사인하라고 건네줬다. 사인을 하고 영수증을 그녀에게 건네주려 할 때 밖에서 큰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홱 몸을 돌렸다.

로버트도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몇 명의 소년들이 선착장에서 시끄럽게 말뚝박기 놀이를 하는 것을 보았다.

"실례합니다. "

에비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오빠들 정말 혼날 거예요."

페이지는 흔들의자에서 무릎을 손으로 껴안고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에비가 문에 다다를 무렵 제이슨이 크게 웃으면서 한 소년을 거칠게 밀었고 친구도 맞받아 그를 밀쳤다. 그때 제이슨은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고 밀려진 몸은 앞으로 쏠렸다. 그의 운동화가 물이 젖은 바닥에 미끄러져 선착장 끝으로 위험하게 밀려갔고, 균형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가느다란 팔이 풍차 돌듯 돌았지만 그의 발은 닿을 지점을 못 찾고 공중으로 튀어 올라 물 쪽으로 쏠렸다.

"제이슨!"

그는 너무 선착장 가까이에 있었다. 에비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가면서 계속 제이슨을 주시했다. 곧 이어 제이슨의 머리가 선착장 모서리에 쿵 하고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가는 몸은 공중에서 축 늘어지더니 곧 물 속으로 빠져 수면 아래로 잠겼다.

소년들 중 한 명이 찢어질 듯한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겁에 질려 넋이 나간 것 같은 소년들의 얼굴을 잠시 보고는 후텁지근하고 끈적한 공기를 헉헉 들이쉬며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자신의 쿵쿵거리는 발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뛰어도 소년들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줄어드는 것 같지 않았다. 제이슨이 떨어진 곳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 애를 본 지점에서 곧장 다이빙을 해 물로 뛰어들었다. 제이슨을 어떻게든 빨리 찾아야 한다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제발 늦지 않기를. 하느님, 제발 늦지 않게 해주세요. 이미 죽었을지도 몰랐고 척추를 다쳐 마비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제이슨을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 애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그 애를 잃을 수 없었다. 다시 그 지옥을 경험할 순 없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면서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손에 걸리는 것을 잡으려 했다. 강물 속에서는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이를 찾기 위해선 손의 감각을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흙바닥에 닿자 이곳저곳을 뒤졌다. 여기 있어야 했다! 선착장 갑판의 검은 기둥이 보였으므로 아이가 떨어진 곳에서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허파가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지만 수면 위로 올라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 귀중한 몇 초를 허비할 순 없었다. 몇 초면 제이슨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물결을 따라서 선착장 아래로 밀려갔을 수도 있지.

격렬하게 다리를 움직이며 그녀는 선착장 아래의 어두운 강속으로 자신을 몰아갔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의 허파는 이제 타는 것처럼 아팠다. 숨을 들이쉬고 싶은 욕구는 참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는 다시 더 깊이 들어가며 그 충동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뭔가가 그녀의 손을 건드렸다.

그녀는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다른 쪽 손에는 팔이 잡혔다. 마지막 남은 힘을 이용해 그녀는 축 늘어진 몸뚱이를 어두운 선착장 아래에서 꺼내 정신없이 위로 올라갔다. 위로 올라가는 움직임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느렸다. 허파는 산소를 들이마시길 원했다.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오, 하느님! 제이슨을 찾았지만 두 사람 모두 익사할 것 같았다. 수면 위로 떠오를 힘이 없었다.

그때 강한 힘을 가진 손이 그녀를 잡아 올렸다. 멍이 들 정도로 강한 힘에 의해서 그녀는 획 위로 떠올랐다. 머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그녀는 컥컥거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붙들고 있소."

깊이 울리는 차분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 왔다.

"두 사람 다 내가 붙들고 있소 안심하고 기대시오."

그녀는 다른 행동을 할 힘이 없었다. 그녀는 강철처럼 굳건한 팔에 붙들려 있었고, 그는 한 손으로 선착장까지 의 짧은 거리를 헤엄쳐 갔다. 소년들이 무릎을 꿇고 다투어 손을 내밀었다.

"그냥 붙들기만 해라."

캐넌이 명령하는 소리를 들었다.

"물 밖으로 꺼내려 하지 말고 내가 할 테니. 누구 한 사람 911긴급구조대에 연락하고."

"벌써 했어요."

에비는 페이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들었다.

"아주 잘했어."

에비의 귓가에 들리는 음성은 좀더 다급했다.

"에비, 선착장 모서리를 붙들고 잠시 있으시오 그럴 수 있소?"

그녀는 아직도 숨을 몰아쉬느라 말할 수가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제이슨을 놔요. 아이들이 붙들고 있으니 괜찮을 거요. 자, 손을 놔요"

그의 말대로 했고, 그는 그녀의 손을 선착장의 끄트머리에 올려놨다. 그가 물에서 선착장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보며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나무 끝을 붙들었다. 그녀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메어 내며 그가 몸을 굽혀 제이슨의 가슴팍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를 들어올리는 것을 봤다.

"척추에 손상이 갔을지도 몰라요"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소."

로버트의 얼굴도 심각했다.

"하지만 숨을 쉬고 있질 않소. 만일 인공호흡을 실시하지 않으면 가망이 없을 수도 있소."

그녀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제이슨을 물 밖으로 들어올리는 그의 팔 근육이 젖은 셔츠 밖으로 드러났다. 에비는 제이슨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절망적으로 바라보고는 남아 있는 힘을 끌어 모아 선착장 위로 기어올랐다. 그녀는 제이슨 옆에 쓰러졌지만 곧 무릎으로 일어나 앉았다.

"제이슨!"

로버트는 소년의 목에 손을 대고 맥박을 짚어 보고는 희미한 울림을 느꼈다. 그는 약간 안심을 하고 말했다.

"아직 심장이 뛰고 있소."

그리고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소년 위로 몸을 굽히고 아이의 콧구멍을 막은 뒤 다른 손으로는 턱을 잡고 입을 열었다. 파랗게 질린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강제로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아이의 가냘픈 가슴 움직임이 느껴졌다. 로버트가 입을 메자 아이에게서 숨이 새어나왔고 다시 가슴이 움직였다.

에비는 손을 뻗다가 억지로 자신을 억제했다 인공호흡을 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도 없었고, 너무 지치고 힘이 빠져 그가 하는 것보다 잘할 자신도 없었다. 그녀는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절망적인 심정에 숨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죽고 싶었다.

로버트는 계속해서 같은 과정을 되풀이했다. 자신을 둘러싸고 지켜보는 겁에 질린 아이들이나 에비의 침묵과 고요함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 하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최선을 다했다. 그가 숨을 불어넣을 때마다 아이의 가슴이 튀어 올랐다. 산소가 그의 심장에 공급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이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심각한 머리손상이나 척추부상이 아니라면 아이가 스스로 숨을 쉬기 시작하면 괜찮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갔다. 1분.2분. 그러다가 갑자기 아이의 가슴이 세게 튀어 오르더니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신속하게 로버트는 뒤로 물러섰다.

제이슨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더니 몸을 옆으로 구부리며 기침과 구역질을 시작했다. 옆에 붙어 있던 에비는 몸을 옮겼지만 균형을 잃어버렸다. 로버트의 손이 제이슨 위로 그녀를 붙잡았고 물 속으로 도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강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그는 그녀를 제이슨의 다리 위로 끌어올린 뒤 자신 쪽으로 몸을 붙였다.

제이슨의 콧구멍과 열린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아이는 쿨럭거리다 다시 기침을 하더니 강물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로버트는 조용히 말했다.

"마비는 안 될 것 같소."

"네."

에비는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제이슨 옆에 다시 몸을 구부린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부드럽게 아이를 어루만지며 안심시켜주다 아이의 머리 뒷부분이 피로 빨간 것을 보았다.

"얘야, 괜찮을 거야."

그녀는 상처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몇 바늘만 꿰매면 될 거야."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창백한 얼굴의 페이지를 보았다.

"페이지, 타월 좀 가지고 올래? 그리고 조심해라. 뛰지 말고."

페이지는 고개를 끄덕이곤 계류장을 향해 달려갔다. 달렸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그 비슷한 움직임이었다.

제이슨의 발작적인 기침은 멈췄고, 아이는 숨을 몰아쉬면서 옆으로 누워 있었다. 에비는 그의 팔을 쓸어 주며 괜찮을 거라는 말을 되풀이해 안심시켜 주려 했다.

페이지가 타월을 가지고 돌아왔고 에비는 부드럽게 상처를 누르면서 흘러나오는 피를 멈추게 하려 했다.

"에비 이모?"

제이슨의 목소리는 갈라져서 거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기 있단다."

"나 일어서도 돼요?"

아이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감당하기 힘든지 눈을 감고 물었다.

"모르겠다."

그녀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 있니?"

그녀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제이슨은 안으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으므로 로버트가 다시 무릎을 꿇고 한쪽 허벅지를 제이슨의 등에 대주었다.

"머리가 아파요."

제이슨은 신음을 흘렸다.

"많이 아플 거야,"

로버트가 상냥한 음성으로 말했다.

"선착장의 모서리 부분에 부딪혔어."

사이렌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소동이 커진 것을 깨달은 제이슨의 눈이 불안하게 깜박거렸다. 조심스럽게 손을 뒤로 뻗어 상처 부위를 만지다 움찔하더니 손을 다시 내렸다.

"엄마가 아시면 정말 혼나겠죠?"

그는 풀이 죽어 말했다.

"엄마만 화낼 거라 생각하지마."

에비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제이슨은 당혹스러워 보였다. 로버트의 부축에서 몸을 옮기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그때 응 급구조원들이 선착장을 가로질러 응급처치 함을 가지고 달려왔다. 로버트는 에비를 붙잡아 같이 뒤로 물러서 응급구조원들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했다. 페이지도 옆으로 물러나 에비의 허리를 팔로 감고 얼굴을 에비의 젖은 셔츠에 비비면서 본능적으로 위안을 구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들을 보고 로버트는 팔을 둘러 그 둘을 품에 안았고, 저항하기에 에비는 너무 피곤하고 멍한 상태여서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강한 힘과 따뜻한 온기에 에비는 위로를 받았다. 그는 제이슨의 생명을 구했고, 어쩌면 자신의 생명도 구했다고 봐야 했다. 마지막 순간에 그의 도움 없이 제이슨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이슨을 구할 수 없었다면 그를 내버려두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수면으로 떠오르기보다는 차라리 함께 물밑으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제이슨은 신속하게 상태를 검진 받았다. 응급구조원들은 곧 그를 병원으로 운송해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 뒤의 상처는 꿰매야 되겠어요."

응급구조원 중 한 명이 에비에게 말했다.

"또 뇌진탕의 위험도 있구요. 병원에 입원해야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

에비는 로버트의 포옹에서 몸을 움직였다.

"레베카에게 전화를 해야겠어요. 그리고 병원까지 앰뷸런스를 타고 같이 가겠어요."

"내가 데려다 주겠소."

그가 그녀를 놓아주며 말했다.

"돌아올 때 차가 필요하지 않겠소?"

"레베카가 데려다 줄 거예요"

사무실로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말했고 로버트와 페이지도 그녀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왔다. 전화를 향해 손을 뻗던 그녀는 잠시 멈칫하며 이마를 문질렸다.

"아‥‥‥ 아뇨 레베카는 제이슨과 함께 병원에 있어야겠군요 아, 상관없어요 내가 운전해서 가면 될 테니."

"물론 할 수 있을 거요."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운전해 줄 테니 그냥 있으시오"

그녀는 레베키의 전화번호를 누르면서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릴 필요까지는 없어요 아, 베키, 저기‥‥‥ 제이슨이 선착장에서 미끄러져서 머리를 다쳤어. 괜찮을 것 같지만 몇 바늘 꿰매야 한대. 응급구조원이 병원으로 데려갈 거야. 지금 갈 거니까 병원에서 만나. 페이지도 함께 데려갈게. 응, 끊을게."

그녀는 전화를 끊고 다시 다른 곳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크레이그니? 에비야. 몇 시간만 계류장 사무실 좀 봐 줘. 제이슨이 다쳐서 지금 병원으로 가야 해, 아니, 제이슨은 괜찮을 것 같아. 5분? 좋아 지금 떠난다."

전화를 끊은 뒤 재빨리 카운터에서 지갑과 자동차 열쇠를 꺼냈다. 번개처럼 로버트가 그녀의 손을 잡아 간단하게 열쇠를 빼냈다.

"지금 너무 충격을 받은 상태요."

그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도 익사할 뻔했단 말이오 에비, 여러 말하지 마시오."

열쇠를 도로 빼앗을 힘도 없었다. 짜증스러웠지만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그의 뜻에 따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좋아요."

그녀의 차는 보트를 매달고 갈 수 있는 튼튼한 사륜구동 픽업 트럭이었다. 페이지는 앞서 달려가 벌써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두고 갈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에비는 아이가 먼저 올라타서 자신과 로버트 사이에 앉아 주자 고마웠다. 서둘러 차에 올라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직렬 기어예요."

그건 로버트의 능력으로 볼 때 불필요한 말이었다. 그는 엔진에 시동을 걸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다를 수 있을 것 같소."

물론 그는 멋지게 운전했다. 그 일에 이력이 난 사람처럼 멋지게 기어를 움직였다. 로버트 캐넌이 서투르게 할 일이 과연 있을지를 상상하다가 그녀는 자신의 심장박동이 약간 빨리지는 것을 느꼈다.

병원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며 도로 앞을 주시하려 애썼다. 그를 바라보는 중에 자신의 내부에서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강한 끌림을 무시하고 싶었다. 그도 잔뜩 젖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찰딱 붙어 있었고 흰 실크 셔츠는 근육질 가슴에 피부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마른 듯 보이던 겉모습은 착각이었다. 젖은 셔츠 속에서 넓은 어깨와 근육질의 가슴, 매끄럽지 만 강철처럼 단단한 복부와 등의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강렬한 남성미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지금의 모습은 영원토록 머리 속에 낙인 찍혀질 것이다. 겨우 15분 동안에 일어난 일이란 말인가? 한평생은 지난 것 같았다.

그는 과속으로 달렸고 앰뷸런스의 뒤를 이어 바로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병원은 규모는 작았지만 신설병원이었고 스태프들의 신속한 반응도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제이슨은 에비가 뭐라고 말을 붙이기도 전에 응급실로 실려 갔다.

로버트는 그녀의 팔을 꼭 잡고 페이지와 함께 대기실로 갔다.

"여기 앉으시오."

음성은 온화했지만 일말의 반대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 있었다.

"커피를 가져오겠소. 우리 귀염둥이는 뭘 먹고 싶니?"

그는 페이지에게 물었다.

"음료수를 사다 줄까?"

페이지는 멍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가로 저었다.

"에비 이모, 나도 커피를 마셔도 될까요? 추워서요 안 되면 핫초코라도 좋아요."

에비는 고개를 끄덕였고, 로버트는 자판기로 갔다. 그녀는 페이지에게 팔을 두르고 꼭 안아 주었다. 오빠가 거의 죽을 뻔한 것을 본 충격으로 페이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얘야. 걱정하지 마. 제이슨은 내일이면 집에 갈 거야. 머리가 아프다고 너를 미칠 듯이 괴롭힐걸,"

페이지는 훌쩍이는 울음을 삼키려 했다:

"알아요, 그러면 오빠에게 미칠 듯이 화나겠지만 지금은 그저 오빠가 아무렇지도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럴 거야. 내가 약속할게,'

로버트는 세 개의 컵을 가지고 돌아왔다. 하나는 핫초코고 다른 둘은 커피였다. 에비와 페이지는 각자 그들의 컵을 받아 들었고 로버트는 에비 옆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자 로버트가 설탕을 듬뿍 넣었음을 알았다.

"마셔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 일종의 쇼크 상태요."

그의 말이 맞았으므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손가락으로 컵을 감싸쥐고 온기를 느꼈다. 젖은 옷에 부딪히는 대기실 에어컨의 찬바람에 그녀는 덜덜 떨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팔이 몸에 닿았을 때 젖은 옷을 뚫고 열기가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약간 떨었을 뿐인데도 그는 그녀의 한기를 알아차렸다.

"담요를 가져오겠소."

그가 간호원 실로 다가가 간호원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봤다. 정중하고 점잖게 얘기했지만 담요를 가지고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30초도 안 되었다. 명령을 내리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의 초록빛 눈동자를 한 번 보면 사람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허겁지겁 명을 따랐다.

그는 몸을 굽히고 그녀의 몸에 담요를 둘러 주었고,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그때 응급실 문이 벌컥 열리며 놀라고 긴장한 얼굴의 레베카가 들어왔다. 에비와 페이지를 본 그녀는 그들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무슨 일이야?"

그녀가 다급히 물었다.

"지금 응급실에 들어가 있습니다."

페이지에게 말하듯 깊이 있는 목소리로 에비 대신 로버트가 대답했다.

"머리 뒤쪽에 몇 바늘 꿰맬 거고 상당한 두통을 느낄 겁니다. 병원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경과를 지켜보겠지 만, 상처는 경미합니다."

레베카는 영리해 보이는 갈색 눈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곧바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로버트 캐넌 씨야"

가능한 차분하게 보이려고 애쓰면서 에비가 소개했다.

"제이슨과 나를 물 밖으로 꺼내 주었어. 캐넌 씨, 언니인 레베카 우드예요."

레베카는 로버트의 젖은 옷과 창백한 여동생의 얼굴을 봤다.

"일단 제이슨부터 보자."

그녀는 평소처럼 확실한 태도로 말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듣자꾸나."

그녀는 등을 돌려 간호원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제이슨이 있는 응급실로 갔다.

로버트는 다시 에비 옆에 앉았다.

"당신 언니는 어디 부대 소속이오?"

옆에서 페이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머니 부대 소속일 거예요."

에비가 대답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연습을 시작했죠."

"나이 차이가 많이 나오?"

"다섯 살이요."

"항상 꼬마 여동생 취급을 받았겠군."

"나쁘진 않았어요."

"나빴을 거라고 생각진 않았소. 자, 커피를 마셔요."

컵을 들어 그녀의 입술에 대주며 권했다. 에비는 인상을 찌푸리며 마쳤다.

"당신도 어미닭처럼 구는 것 알죠?"

그가 살짝 미소지었다.

"내 것은 내가 돌보는 사람이오"

그녀가 눈치 빠르다면 충분히 알아들을 문제성 발언이었다.

자신은 그의 것이 아니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대신 의자 등에 몸을 기대고 앞을 똑바로 쳐다봤다. 제이슨이 거의 죽을 뻔한 일은 그녀에게 너무 많은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로버트 캐넌은커녕 다른 일에 신경 쓸 힘도 없었다. 당장 하고 싶은 일은 침대로 기어 들어가 세상과 대면할 준비가 될 때까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모든 일에 신경을 끄는 것이었다. 오늘밤이 지나고 다시 내일이 오면 그때는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라면 그의 독선적인 행동과, 맞서 싸우기 곤란할 정도로 부드럽지만 소유욕이 분명한 저 태도에도 대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점잖은 부드러움 속에 섞인 단호한 의지를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방해가 되는 것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부드럽게 그녀를 보호해 줄 테지만 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레베카가 응급실에서 나와 다시 그들에게 올 때까지 그들은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오늘밤 제이슨을 입원시키라네."

그녀가 말했다.

"약간의 뇌진탕 증세와 머리 뒷부분을 꽤 많이 밀고 열 바늘이나 꿰맸더라고. 떨어졌다고 중얼거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던데‥‥‥‥ 제이슨이 내게 숨기려는 게 뭐지?"

레베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망설이는 동안 페이지가 벌써 이르기 시작했다.

"스코트와 제프, 패트릭이 계류장에 놀러 왔어요. 그러더니 선착장에서 어리석은 장난들을 시작했지 뭐예요. 에비 이모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말을 안 들었어요. 제이슨 오빠가 패트릭을 밀었고, 패트릭이 다시 오빠를 밀어서 오빠가 미끄러져 머리를 선착장 모서리에 부딪히더니 그대로 물 속으로 빠져 버렸어요. 에비 이모가 따라서 들어갔지만 영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두 사람 다 수면 위로 나오질 않았어요. 캐넌 씨가 물 속으로 따라 들어가 에비 이모와 오빠를 갑판으로 끌어올렸어요. 오빠는 숨쉬지 않았고 에비 이모도 물에 빠져 죽을 뻔했어요. 캐넌 씨가 인공호흡으로 오빠한테 공기를 불어넣었고 오빠가 기침과 구역질을 할 때 응급구조원들이 왔어요, 엄마. 내가 911에 전화했어요."

숨도 쉬지 않고 페이지가 단숨에 말해 버렸다.

레베카는 평소 조용한 딸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말을 정신없이 듣고 있었지만 그 빠른 말속에 아직도 간직되어 있는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페이지를 껴안아 주었다.

"그래, 제대로 했구나."

엄마의 칭찬에 페이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레베카는 창백한 에비의 얼굴을 살폈다.

"제이슨은 괜찮아."

그녀는 안심을 시키듯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말야. 회복되기만 하면 내가 죽여 버릴 거지만. 아니, 여름방학 내내 아예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해야겠어. 그리고 그 녀석을 죽이겠어."

에비는 미소지었다.

"그렇게 하고도 살아남으면 나도 거들게 해줘."

"그렇게 하자꾸나. 자, 지금은 집에 가서 젖은 옷부터 갈아입어라. 제이슨보다 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여."

이번의 미소는 좀더 쉽게 나왔다.

"언니, 정말 고마워."

그녀는 레베카의 날카로운 눈앞에 그녀가 지금 겪고 있는 스트레스가 이미 드러났음을 알았다.

"제가 돌봐 주겠습니다."

로버트가 에비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 그럴 힘이 없었다. 레베카에게 대신 제이슨에게 키스해 주라고 부탁하곤 로버트의 부축을 받아 병원을 나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실외의 작열하는 태양이 그녀를 따스하게 감싸자 그녀는 기쁨에 몸을 떨었다.

로버트는 그녀의 허리를 더욱 세게 힘주어 안았다.

"아직도 추운 거요?"

"아뇨, 지금은 괜찮아요 더위가 반가울 때도 있군요."

그는 트럭 문을 열고 그녀를 조수석으로 들어올렸다. 가뿐하게 들어올리는 그의 힘을 느끼자 그녀는 몸이 떨려 왔다. 눈을 감고 머리를 창 쪽으로 기댔다. 완전히 지치기도 했지만 갑작스레 솟아오른 욕망을 그에게 들키기 싫어서였다.

"잠자면 안되오."

그가 운전석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집까지 가는 길을 알려줘야 하지 않겠소?"

억지로 눈을 뜨고 자제를 바로잡은 뒤 집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건터스빌은 작은 동네였고, 15분 후 그들은 집 앞 차도로 접어들었다. 그녀는 문을 열려고 손을 움직였지만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은 탓에 그가 먼저 문을 열고 힘센 손으로 부축해서 그녀를 차에서 내려 주었다.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하기가 망설여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계류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바로 뒤를 따라 들어왔다.

"않으세요."

침실 쪽으로 향하며 그녀는 말했다.

"금방 나오겠어요."

"너무 젖어서 앉기가 그렇소."

그는 말했다.

"천천히 갈아입으시오. 괜찮다면 밖의 갑판에 나가 있겠소."

"물론 괜찮아요."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예의상의 미소만 지으며 침실로 향했다.

로버트는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두려워하는 건지, 될 수 있으면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그녀였다. 다른 여자들의 반응과는 너무 달랐다. 추측대로 파워넷과 그의 관계를 알고 있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시간을 들여 경계심을 풀 수도 있겠지만, 사건 해결을 위한 계획을 이미 시작했으니 이제 그가 할 일은 그녀의 의심을 완화시킬 만큼 모든 노력을 다해 그녀를 확실하게 유혹하는 것이었다. 계획은 세웠으니 이제 박차를 가할 차례지.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 좋은 기회라 싶어 집안을 둘러봤다. 집은 대략40년 정도 되어 보였지만, 개조를 해서 천장의 버팀목과 윤이 나는 나무 바닥으로 꾸며진 내부는 넓고 현대적인 감각이 풍겼다. 원예에 재능이 있는지 집 안 구석구석에 여러 가지 화초가 담긴 화분이 놓여 있었다. 거실에서 부엌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곳을 지나 이중문을 나서면 잔교 베란다로 나가게 되어 있었다. 잔교 옆은 보트하우스로 연결되어 있었다.

가구는 편리하고 깨끗해 보였지만 값비싼 것은 아니었다. 책상으로 다가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것저것 살펴보기 시작했지만 별 소득이 있을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책상에 중요한 증거나 서류가 있다면 그를 거실에 남겨 두고 샤워를 하러 갈 정도로 어리석은 여자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최근의 은행거래 영수증을 보았지만 큰 금액이 적혀 있지는 않았다.

책상에는 작은 액자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집어들고 사진에 찍혀있는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매력이 넘쳐흐르는, 확실히 아주 젊어 보이는 에비가 있었고 젊다기보다 소년 같은, 그녀의 남편이었을 남자가 있었다. 로버트는 청년의 얼굴에서 웃음과 행복. 그리고 옆에 있는 여자에 대한 숭배의 표정을 보았다. 하지만 어려 보이는 청년이 그가 안고 있는 여자의 섹시함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그건 그 나이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오래 전에 죽은 청년에 대해 까닭 모를 질투심을 느꼈다. 청년에 대한 깊은 사랑이 지금까지 그녀에게 결혼반지를 끼고 있게 했을 것이다.

샤워하는 소리가 멈추자 그는 사진을 내려놓고 잔교로 나갔다. 화려하진 알았지만 에비의 집은 평온하고 기정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호수 쪽으로 가까운 이웃이 없는 걸로 보아 개인적인 사생활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호수의 물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아서 하늘과 호수를 둘러싼 산의 모습을 파랗게 투영하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흘러 태양은 많이 기울었지만 여전히 살갗을 태울 것처럼 뜨거웠다. 곧 하늘은 청동빛으로 물들 것이고 신록의 푸른 냄새는 더 짙어질 것이다. 자줏빛 석양이 물들 무렵이면 대기는 향기로운 장미와 솔잎, 그리고 막 다듬어진 잔디의 신선한 향기로 꽉 찰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서둘러서 일을 처리하는 법이 없었다. 동네 주위를 산책할 때면 사람들이 베란다에 나와서 신문을 읽거나 완두콩 껍질 따위를 벗기고 있다가 지나가는 타인에게 손을 흔드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뉴욕 같은 대도시의 사람들이 보기엔 이곳에 무슨 바쁜 일이 있겠냐고 말할 테지만, 이곳 사람들도 나름대로 바쁘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무슨 일이건 서두르는 법이 없을 뿐이었다.

그는 에비가 문을 열고 잔교 쪽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준비가 됐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몸을 돌려 그녀를 봤다. 새로 감은 머리는 여전히 젖어 있었지만 머리카락을 핀으로 틀어 올려 물이 떨어지지 않게 했고, 짧은 반바지 대신 청바지로 갈아입고 황금빛으로 그을린 피부가 돋보이는 핑크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긴장이 엿보였다.

"집이 멋지오"

그가 말했다.

"고마워요 시부모님에게서 물려받았어요."

이미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직접 사실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물어 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결혼했소?"

그는 물었다.

"혼자됐어요."

그녀는 뒤돌아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 죄송하오 혼자된 지 얼마나 됐소?"

그는 뒤를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

"12년이요."

"책상 위의 사진을 봤소 남편이오?"

"네. 남편 매트예요"

멈춰 서서 사진을 보는 그녀의 얼굴엔 감출 수 없는 슬픔이 드러났다.

"우리는 그때 정말 어렸어요"

잠시 후 그녀는 마음을 수습한 듯 문 쪽으로 서둘러 걸어가며 말했다.

"계류장에 돌아가 봐야 해요"

"여기서 5마일 떨어진 곳에 내 집이 있소."

그가 말했다.

"샤워하고 옷 갈아입는 데 그리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요"

그녀는 타월을 가져가 자동차 시트를 닦았다. 그가 계속 운전대를 잡았지만 말릴 시도도 하지 않았다. 운전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해도 그가 들어줄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의 옷은 거의 말라 물이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니 왜 꺼림칙할 것이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기 전 끔찍할 정도로 불편했던 걸 생각하자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 제이슨의 생명뿐 아니라 그녀의 목숨도 구했고, 그녀를 돌보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해주었는데. 그를 보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의 신속한 행동이나 냉정한 판단력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조용히 앞을 주시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제이슨과 나는 산목숨이 아니었을 거예요."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은 너무 오래 물 속에 있었고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태라 제이슨을 물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했을 거요 제이슨을 놔두고 물 밖으로 나와서 숨을 쉬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소?"

"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녀의 얼굴에 서린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 것을 보고 그는 화제를 바꿨다.

"당신 언니가 정말 제이슨을 여름 내내 집안에 가둬 둘 것 같소?"

에비가 웃기 시작했고 그 구르는 것 같은 웃음소리는 곧장 그의 심장에 꽂혔다.

그 정도 처벌이면 제이슨이 꽤 운이 좋은 거죠. 하지 말라고 타일렀는데도 말을 듣지 않았으니 엄청 혼날 거예요."

"필수 규칙을 어긴 셈이군?"

"그렇다고 봐야죠."

로버트도 따로 그 소년을 불러 부주의한 행동으로 생길 결과와 책임에 대해 몇 마디 타이를 예정이었지만 에비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조카들을 맹목적으로 두둔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녀가 다른 사람의 참견을 좋아할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이슨과의 대화는 비밀리에 행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의 새 집에 도착하자 에비는 흥미롭게 주위를 둘러봤다.

"이 집은 1년 동안이나 매물로 나와 있었는데‥‥."

그녀가 말했다.

"이곳을 사는 데 경쟁자가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봐야겠군."

그는 먼저 내려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병원에서는 긴급상황이었다.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땐, 먼저 문을 열 수 있었으면 그가 문 열어 주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안에서 문을 잠그고 영원히 그가 다가오지 못하게 할 것 같은 인상을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나면서부터 여왕의 고귀함을 가진 듯, 그의 행동에 당연한 것처럼 우아하게 행동했다. 청바지에 운동화, 셔츠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여성스러움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남자들로부터 이런 대우는 당연히 받아야 할 서비스를 받는 것처럼 행동했다. 항상 예의를 갖고 여자들을 대하는 로버트였지만, 여자들이 그런 대접을 차별 받는 것으로 생각할 뻔 굳이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그는 에비의 당당한 남부 숙녀다운 처신에 매혹되어 즐거움마저 느꼈다.

에비는 여전히 그를 경계하지만 어떤 부분에선 저항이 약해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지만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아직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너무 빨랐다.

"샤워하는 동안 당신 집처럼 편히 있으시오"

그는 복도를 지나 오른쪽 끝에 있는 침실로 가면서 혼자 미소지었다. 그처럼 그녀도 이 기회를 이용해 집안을 조사하리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에비는 그가 샤워하러 간 뒤 거실의 중앙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자기 집처럼 편히 있기에는 너무 긴장한 상태였다. 천천히 긴장을 풀면서 그녀는 주위를 둘러봤다. 집은 넓고 현대적이었다. 그녀의 집보다 세배 정도 더 큰, 벽돌과 삼나무로 지어진 단층집이었다. 거실의 왼쪽 벽에는 거대한 석조 벽난로가 있고, 굴뚝은 장식이 화려한 천장까지 솟아 있었다. 천장에는 두 개의 팬이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키며 돌고 있었다. 가구는 우아하고 편안해 보였고 그처럼 큰 체격에 걸맞게 대형이었다.

거실과 식당은 허리까지 오는 고급스러운 관영식물과 양치식물 화분들로 구분되어 있었다. 커다란 이중창으로 내다보이는 잔교의 베란다에는 편안해 보이는 의자들과 차양이 드리워진 테이블, 그리고 여러 개의 화분이 있었다.

그녀는 더 자세히 내다보기 위해서 식당으로 갔다. 오른쪽으론 부엌이 펼쳐져 있었다. 최첨단의 조리용 기구들이 번쩍거리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커피메이커조차도 공학사 학위를 가져야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복잡해 보였다. 부엌 끝에는 상판이 타일로 덮인 조그만 아침식사용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다. 아침에 일어난 그가 신문을 펼치고 앉아 커피를 마시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옆에 바로 아름다운 프랑스식 문이 있어 곧장 잔교 베란다로 나가게끔 연결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 이것저것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거실로 되돌아왔다.

로버트는 천천히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집안을 조사해 보게 하고 싶었다. 의심할 만한 물건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녀는 긴장을 풀 것이고, 그는 그것을 원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라면 그녀의 집에 있던 순간을 이용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마음의 평정을 잃어 공략하기 쉬운 상태였다. 그녀가 벗고 샤워하던 순간을 이용해서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가 좀더 그를 편하게 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그녀의 집에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 여기서 그가 유혹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이런 때라면 그녀의 반응은 오히려 참되고, 그를 경계하는 마음도 약해져 있을 것이다.

그는 어슬렁거리는 것을 멈추고 거실로 갔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가 거실을 떠날 때의 바로 그 자리에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그를 돌아봤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담갈색 눈동자는 단순히 제이슨의 사고 때문만은 아닌, 더 깊은 슬픔의 잔재로 어두웠다.

로버트는 그 가라앉은 눈을 살피며 그녀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피할 틈을 주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가 놀라서 숨을 들이키고는 항의하듯 고개를 들며 눈동자가 커지는 것을 보았지만 그는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뒤로했지만 그는 더욱 단단히 잡아당겨 부드럽게 안았다. 상처를 주지 않으려 주의하면서 입술로 끊임없이 그녀의 입술에 압박을 가해 마침내 항복을 받았다. 달콤한 그녀의 입술을 맛본 그의 혈관은 감전된 듯 찌릿거렸고 그의 남성은 부풀어올랐다. 그는 혀로 그녀의 입술을 공략했다. 그녀를 꼼짝 못하게 붙잡고 혀로 성행위를 모방하듯 삽입과 후퇴를 반복했다. 곧 그녀의 입술은 그의 입술에 함몰되었고 그녀는 몸을 떨며 그의 품안에서 부드럽게 늘어졌다.

그녀의 그런 반응은 그의 머리를 핑 돌게 해 그는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품에 안긴 그녀는 완벽했다. 그 부드럽고 풍만한 여자의 몸이 자신의 단단한 육체에 감겨 오는 맛이라니. 그녀의 입술은 여태껏 그가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달콤했고, 단순한 키스만으로도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이 돼 버렸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키스 이상의 것을 할 작정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이 정도로 강렬하게 반응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더욱 거세게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그녀의 목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녀의 팔이 그의 목에 감겨 오고 온몸이 그에게로 밀어 붙여졌다. 그녀가 명백히 흥분했다는 증거를 확인하자 야성적이고 본능적인 남자의 승리감이 그의 전신을 꿰뚫었다. 그 단단하고 풍만한 가슴과 유두가 자신의 가슴에 닿는 것을 느끼자 그는 그녀의 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한쪽 가슴을 감싸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얇은 레이스 브래지어 위로 뽀족이 솟은 유두를 문질렀다. 그녀의 상체는 뒤로 젖혀졌고 엉덩이는 더욱 단단히 그에게 밀어붙여져 그를 압박했다. 그러다 갑자기 공포에 질린 듯 그녀는 물러나려고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더 황홀한 감각의 축제를 원했지만, 그녀를 놓아주었다.

"괜찮소."

간신히 토해낸 그의 음성은 낮고 거칠었다. 그녀를 좀더 안심시키기 위해 그는 말을 이었다.

"에비, 당신에게 상처를 주진 않을 거요."

에비는 그로부터 물러났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키스로 인해 입술은 부풀어오르고 빨갰다. 그녀는 뒷걸음질을 억지로 멈추고 똑바로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남성적인 매력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강해서 다시 그 품으로 돌아가 강렬한 관능의 세계에 정복당하고 싶었다. 그녀는 바닥이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처음 의심한 것보다 그는 더 위험한 남자였다.

"아뇨, 당신 때문에 난 상처를 받을 거예요."

그녀는 속삭였다. 이가 덜덜 떨렸다.

"왜 이러는 거예요? 내게서 뭘 원하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