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사랑 에반젤린-3화 (3/19)

3장

에비는 책상 위에 펼쳐진 회계장부에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지만 수입과 지출을 맞추는 계산에 마음을 매어 둘 수가 없었다. 매끈하게 잘생긴 거무스름한 얼굴이 자꾸 눈앞에 떠올라 숫자는 안중에 없었다. 그 사냥꾼의 눈빛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고 심장은 쿵쾅거렸다. 두려움이었다. 그는 예의가 깍듯했지만, 표범이 아무리 고양이라고 우겨도 본성을 가릴 수 없는 남자였다.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자신에게 위험한 존재임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와의 경계에 두터운 벽을 쌓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랜 세월 어렵게 이뤄낸 평화로운 삶, 이렇게 의도적으로 꾸민 단조로운 생활 패턴에 갑자기 생긴 방해가 마땅치 않았다.

오래된 책상의 책꽂이 선반 위엔 조그만 사진 액자가 놓여 있었다. 결혼 사진은 아니었다. 결혼 사진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기 전 여름에 찍은 것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하루 종일 물가에서 수상스키를 타고 공놀이를 하고 야외에서 식사도 한날이었다. 친구 중 하나가 집에서 카메라를 가져와서 황금빛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던 여름날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주었다. 매트는 얼음 조각을 가지고 에비를 쫓아와서 짓궂게 그녀의 셔츠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했고. 그녀는 버둥거리며 반항해 얼음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떨어진 얼음을 보고 그들은 크게 웃었고 매트의 손은 에비의 허리에 머물러 있었다. 친구가 그들을 소리쳐 불렀다.

"매트, 여기 봐!"

그들이 반사적으로 돌아보았을 때 친구는 셔터를 눌렀다.

매트.

키가 큰 매트가 청소년기의 어정쩡함을 막 벗어나 성인 남자의 골격을 갖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카락이 앞으로 쏠려 눈썹을 덮고 있었고, 입가에 걸린 미소와 밝은 푸른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에게는 항상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에비는 그 시절 소녀였던 자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자신을 안고 있는 매트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진이었지만 그들 사이의 단단한 끈은 그 웃음 가득한 행복했던 순간에도 확연했다. 그녀는 자신의 왼손에 끼여진 금반지를 내려다봤다.

매트.

그 오래 전 이후로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은 원하지도 않았고 흥미를 느끼거나 매혹된 적도 없었다. 물론 사람들을 좋아하고 같이 어울렸지만 낭만적인 사랑의 의미에서 감정적인 격리는 너무 완벽해서 그녀에게 누군가 끌렸다고 해도 그 자체도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계류장에 로버트 캐넌이 걸어 들어와 그 얼음장처럼 차가운 초록빛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본 순간 그녀의 평온한 세계가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으로는 아무것도 눈치챌 수 없었지만 그의 관심이 레이저광선처럼 그녀에게 집중되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서 뜨거운 성적인 느낌과 동시에 그가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계류 중인 임대보트들을 둘러본 후 즉시 떠났지만 그는 곧 돌아올 것이다. 물어 보지 않았어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에비는 한숨을 쉬었다. 별빛이 호수의 물결에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호숫가 쪽에 설치된 잔교(배를 댈 수 있게 물가에 만든 구조물)의 베란다로 나왔다. 습기를 머금은 나무 향기를 담은 따스한 밤 기운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의 작은 집은 강둑의 바로 오른편에 있었고, 계단을 따라 베란다에서 내려가면 개인 선착장과 보트 하우스로 갈 수 있었다. 그녀는 베란다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난간에 올려놓고 주변의 평화로운 강가 풍경에 점점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여름밤은 조용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울어대는 곤충들, 개구리와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새들, 바람에 사각거리는 나무들, 조그맣게 찰랑대는 강물의 소리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음 속에 평화로움이 있었다. 오늘은 달도 뜨지 않아서 칠흑처럼 어두운 밤하늘의 별빛이 더 선명해 보였다. 반짝이는 별들이 수 천만개의 알알이 빛나는 다이아몬드처럼 희미하게 수면에 비쳐 보였다. 이곳 선착장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호수와 강의 본류가 만나는 교차점이 있어서 그로 인해 호수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가장 가까운 이웃은 보이진 않지만 작은 능선 건너편에 살았다. 그녀가 있는 베란다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집은 호수 건너편에 있었고, 거리로 따지면 2킬로미터가 넘었다. 건터스빌 호수는 테네시 강에 댐을 건설한 30년대에 형성된 인공호수로, 깊고 넓었다. 불규칙하게 조성되어서 수백 개의 후미가 있었고, 호수 위에는 나무들로 뒤덮인 작은 섬들이 꽤 많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평생을 살았다.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었고 가족과 친지들이 2백 년에 걸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터전이었다. 그녀는 강 유역의 세세한 곳부터 계절의 변화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살기를 원한 적도 없었다. 이곳에서 엮어진 삶이 바로 그녀의 성역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성역은 두 개의 다른 적들에 의해서 위협을 받고 있었고,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것들과 싸워야 했다.

첫 번째 위협으로 그녀는 엄청 화가 났다. 랜든 머서라는 사람은 분명 나쁜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 남자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거의 틀려 본 적이 없는 그녀의 직감에 의하면 확실했다. 처음부터 경계심이 절로 드는 교활함이 엿보였다. 그가 처음 배를 임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두어 달 간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그의 행동에 수상한 점이 엿보였다. 선착장을 떠날 때면 그는 언제나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강 위를 오가는 배들을 살펴보았다면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겠지만 그가 쳐다보는 곳은 언제나 주차장 쪽이나 고속도로 쪽이었다. 그리고 돌아올 때 그의 얼굴에는 승리감과 안도감이 떠올라 있었다. 마치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도 무사히 빠져 나온 사람처럼.

그의 매무새도 어쩐지 이상했다. 그는 낚시꾼처럼 입으려고 애썼지만 항상 어색해 보였다. 낚싯대와 작은 낚시도구 상자를 손에 들고 다녔지만 그가 그것들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에비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또 물고기를 잡아 온 적도 없었다. 배를 타고 나갈 때마다 항상 똑같은 미끼였다. 머서는 절대로 낚시하러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낚시도구 상자를 가지고 가는 걸까? 논리적인 대답은 그가 그것을 낚시꾼으로 가장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누가 그를 봐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이곳을 자신의 성역으로 생각하는 에비에겐 그가 낚시꾼으로 가장하고 다닌다는 것이 수상쩍었다. 유부녀를 만나고 있는 것일까? 그 가능성은 지워 버렸다. 보트는 시끄럽고 눈에 띄기 쉬웠다. 보트를 사용해서 바람을 피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연인의 집이 인적 드문 곳에 있다면 날씨의 변화에 신경을 쓰지 알아도 되는 자동차가 더 편리할 것이다. 근처에 이웃이 살 경우 낯선 보트가 정박해 있다면 더욱 의심을 살 것이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낮선 보트가 오가는 것을 주의해서 보기 때문이다. 복잡한 강 위의 통행 사정을 생각하면 호수 가운데서 일을 벌리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됐다.

그렇다면 마약일까? 도구 상자 안에는 낚시도구 대신에 마약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가 마약조직의 일원이라면 호수 가운데서 거래를 하는 것은 안전할 것이다. 호수를 순찰하는 경비보트들이 다가오면 증거물을 호수에 빠뜨리기만 하면 증거가 인멸될 테니까. 거래를 할 때 가장 위험한 순간은 물건을 갖고 배에 탈 때뿐이다. 그 때문인지 그는 돌아올 때는 한 번도 주차장 쪽을 살피지 않았다. 돌아올 때의 그의 모습은 마치 낚시를 즐긴 것 같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정확한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번이나 그의 뒤를 따라갔었지만 호수에 있는 섬 사이의 후미진 곳에서 그의 자취를 잃어버렸다. 그가 그녀에게서 임대한 보트를 이용해 마약거래를 하고 있다면 그녀의 사업에 분명히 커다란 위협이었다. 보트 자체가 압수될 뿐 아니라 계류장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보트 소유주들은 그녀의 계류장에서 자기들의 보트를 빼 갈 것이다. 건터스빌에는 그녀의 계류장이 아니어도 넘칠 정도로 많은 계류장들이 있었다.

그녀가 뒤를 따라간 두 번 모두, 머서는 마셜 카운터 파크의 군도지역으로 향했고 그곳에선 쉽게 자취를 감출 수 있었다. 에비는 강의 모든 구석구석을 알았다. 그녀라면 그 복잡한 군도 지역 내에서도 그의 보트가 갈 만한 장소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범법행위를 한다는 가정 하에 그를 체포하려고 하는 야심에 찬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보트에 상비하고 있는 고성능 망원렌즈로 그녀의 의혹을 확인하고 싶었다. 추측이 사실이라면 이 사건을 보안관에게 넘기고 수상경비대에서 처리하게 할 일이었다. 그 방법이면 자신과 계류장의 명예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보트를 뺏길 가능성도 있었지만 보안관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그녀일 경우 몰수까지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됐다. 어쨌거나 그 남자가 마약거래 같은 심각한 범죄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고발하기 전에 그녀 자신이 확실한 증거를 찾고 싶었다.

머서의 뒤를 추적하는 데 있어서 문제는, 그가 언제 올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뒤를 추적하고 싶어도 계류장에 다른 손님이 있는 경우 모든 일을 미루고 보트에 올라타서 그를 따라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는 대로 상황에 대응하자고 그녀는 결심했다.

두 번째 문제인 로버트 캐넌은 전적으로 아주 다른 문제였다. 그와 아예 상대를 하고 싶지 않았다. 차갑고 강렬한 눈빛을 지닌 북부의 양키와는 전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코브라 앞에 선 토끼가 된 심정이었다. 겁을 주는 한편 그는 무섭도록 매혹적이었다. 세련되고 도회적인 매너로 자신의 무자비함을 감추었지만 에비는 그의 본성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한다. 그는 그녀를 가질 작정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녀를 망가뜨리는 것도 개의치 알을 것이다.

그녀는 결혼반지를 만지며 손가락에서 빙빙 돌렸다. 매트는 왜 살아 있지 않은 것인지. 그 없이 많은 세월이 흘렀고 살아남은 자신은 계속해서 살아야 했지만, 그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그녀에게 강요했다. 그녀는 강해졌고 그녀에게 다가와 소유하려는 남자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는 고독을 택했다. 그 남자들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하지만 로버트 캐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복잡한 남자였다. 최소한 그녀가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머서의 범죄 현장을 잡아야 하는 이 시점에서 그녀의 집중력을 뺏어 갈 것이고, 최악의 경우 그녀의 방어벽을 부셔 버리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후 절망할 그녀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떠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격렬하게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한번은 살아남았지만 다시 그 절망을 극복할 자신이 없었다.

오늘 자신의 허리에 그의 손이 얹어지고 그의 건장한 몸에 끌어당겨져 안겼을 때 그녀는 충격과 동시에 황홀한 기쁨에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런 기쁨을 느낀 지 너무 오래되어서 남자의 육체에 닿는 감각이 얼마나 뇌쇄적이며 강렬한지를 잊고 있었다. 미묘한 사향 체취와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강한 손길은 충격이었다. 예전의 기억이 떠오르자 감각까지 모두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추억일 뿐이었다. 그녀를 붙들고 달콤하고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매트의 입술과 손. 시간은 그 소중한 기억을 너무 희미하게 만들었지만, 로버트 캐넌의 이미지는 그 새로움과 날카로움에 있어 고통스러울 정도로 현실적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를 무시하는 것이 가장 안전했지만 그가 그렇게 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도 너무 확실했다.

다음날 아침, 로버트는 파워넷의 사무실로 출근해 삼십대의 영리해 보이는 안내원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렸다. 그녀는 재빨리 머서에게 전화를 하고는 직접 그를 랜든 머서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는 에비의 손가락에서 결혼반지를 본 순간부터 몹시 난폭한 심정이 되어 있었지만, 안내원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고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실제로 대단한 자제력으로 인해 대부분의 고용인들은 그가 무서운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그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꽤나 두려운 방법으로 그 사실을 확인했어야 했다.

하지만 랜든 머서는 무고한 사람이 아니었다. 로버트는 호의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화를 잘 내지 않았다. 랜드 머서는 그가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연락을 받은 머서는 재빨리 사무실에서 나와 로버트가 복도를 다 걸어가기도 전에 마중을 나와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캐넌 회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헌스빌에 오신 것을 아무도 알려주질 않았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그럴 필요까지야."

로버트는 머서와 악수하면서 일부러 손에서 힘을 뺐다. 머서가 키 크고 잘생긴 유럽 스타일의 금발미남인 것을 보자 더욱 화가 났다. 전문가의 눈으로 머서가 입고 있는 이태리 양복의 가격을 가늠해 보니 이 남자가 정말 값비싼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머서는 로버트를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해 들어가며 말했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그렇게 해주겠소?"

아부라고는 하지만 하급자의 아첨을 받아 주면 그들이 마음을 놓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랜든 머서는 그의 갑작스런 방문에 잔뜩 당황한 상태였다. 어쨌든 그를 안심시키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머서는 갑자기 바빠 보이는 비서에게 말을 건넸다.

"트리시, 커피 두 잔만 부탁해."

"네. 캐넌 회장님, 어떻게 드릴까요?"

"블랙커피로 주시오."

그들은 머서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머서의 의자에 앉아 권위를 보일 수도 있었지만 로버트는 손님용 안락의자에 앉았다.

"아무런 통보도 없이 사무실을 방문해서 미안하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근처에 휴가차 왔다가 이곳을 개인적으로 시찰해 본 적이 없어서 사무실 돌아가는 형편을 보려고 왔소"

"들러 주시면 저희야 영광이죠"

머서는 예의 그 진심인 듯한 어조로 말했다.

"휴가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한여름에 휴가를 보내기에 그리 좋은 장소는 아니라 여겨지는데요 이곳의 더위는 살인적이라서요 뭐, 이미 느끼고 계시겠지만 말입니다."

"그리 나쁜 건 아니오"

로버트는 머서의 머리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버트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왜 지금인지? 머서 자신의 일 때문에 온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를 체포하지 않는지? 로버트는 머서가 의구심을 품는 것에 대해 꺼려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노크소리와 함께 트리시가 두 잔의 커피를 쟁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먼저 로버트에게 커피를 주고 나서 머서에게 다른 커피 잔을 건넸다.

"고맙소."

로버트와 달리 머서는 예의를 차리려 하지도 않았다.

"휴가에 대해서 말씀인데요."

머서는 트리시가 문을 닫고 나가자 다시 말을 시작했다.

로버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머서가 자신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알았다. 다소 마른 체격에 우아하게 차려입은, 차가워 보이지만 세상사에 지겨움을 느끼고 있는 남자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의 방문이 갑작스런 것이어서 놀라기는 했겠지만.

"건터스빌 호수에 집이 있소."

그는 천천히, 약간 거리를 두는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머서가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몇 년 전에 그곳에 집을 구입했지. 내가 직접 와 본 적은 얼지만 그룹의 중역들이 몇 번 이용한 적은 있소 그들이 돌아올 때마다 그 과장된 낚시 경험담을 들었고‥‥. 약간 과장이야 있었겠지만 낚시를 해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어서."

"여기 호수에서 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

머서도 정중히 말했지만 그의 머리는 전보다 더 빠르게 회전이 되는 것 같았다.

"해보면 알겠지."

로버트는 희미한 미소를 띄었다.

"조용하고 경치가 좋은 곳인 것 같소. 바로 의사가 명령한 그런 장소 말이오."

"의사라구요?"

"고혈압. 스트레스"

로버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은데도 의사는 내게 긴 휴양이 필요하다고 우기지 뭐요. 이곳은 스트레스를 피하기에 완벽한 장소로 보이는군."

"그건 그렇습니다."

머서가 말했다. 의심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로버트의 갑작스런 출현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에 어느 정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얼마나 오래 여기 머물게 될지는 모르겠소."

로버트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자주 사무실에 들리지는 못할 테고 여기 온 이유가 일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이니."

"회장님을 뵐 수 있다는 것은 영광이지만 의사의 권고를 지키셔야죠."

머서가 성급히 말했다.

"이왕 오셨으니 사무실 구경을 하시겠습니까? 뭐, 본사에 비교도 되지 않고 있는 것이라야 컴퓨터와 프로그래머들이 전부입니다만."

로버트는 마치 어디 갈 곳이 있는 사람처럼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간은 되지만 번거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소?"

"번거롭다니,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빨리 안내를 마치고 로버트를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머서는 벌떡 일어섰다.

머서에 대해서 미리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더라도 그를 싫어했을 것이다. 그에게서는 교활함이 느껴졌다. 인상도 좋고 진심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그런 우월감은 알게 모르게 그의 행동에서도 드러났다. 에비에게도 같은 태도로 대했을까? 세련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그녀의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머서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을까?

그녀가 유부녀라지만 그들은 연인 사이일 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결혼의 맹세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이 그럴 마음만 있다면 바람 피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간첩행위를 하는 여자가 남편을 속이는 것쯤은 정말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그녀가 기혼자라는 사실이 보고서에 청부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남편이 이 일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명백히 남편은 상관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로버트는 어제 호텔에 돌아간 즉시 사설정보원에게 연락해 그녀의 남편에 대한 정보를 구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격분한 상태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부녀와 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그였고 지금에 와서 자신의 가치관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여자도 에비 쇼를 원한 것처럼 원해 본 적이 없었다.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더욱 위험하게 화가 난 상태였다.

사무실의 이곳저곳을 안내하는 머서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의 특징과 진행상태를 설명했고, 아주 쾌활했다. 로버트는 사무실을 안내 받는 동안 정보를 수집했다.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그의 능력을 최대한 살려서 에비 쇼에 대한 생각을 밀어내고 현재의 문제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파워넷은 길다란 1층짜리 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반사무실은 앞쪽에 있었고 프로그램 실은 뒤쪽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컴퓨터 천재들이 그들의 특별한 마법을 엮어 내고 있었다. 로버트는 보안장치들도 살펴보았고 만족했다. 감시카메라가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었고 적외선 탐지기까지 있었다. 세분화된 특수자료에는 암호화된 카드로만 접근이 가능했고, 카드를 가진 사람마저도 보안장치를 통과해야 했다. 서류나 디스켓 시디 등은 일체 빌딩 밖으로 반출되는 일 자체가 허가되지 알았다. 하루의 프로그램 작업이 끝나면 모든 작업들은 암호로 잠겨지고 안전금고에 넣어졌다.

보안장치를 살펴본 결과 로버트는 문제를 더욱 단순하고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시스템에 누군가 걸리지 않고 침입을 했다면 그건 책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접근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랜든 머서 본인.

그는 건물 안을 안내 받는 동안 몇 번이나 시계를 보는 티를 냈다. 사무실을 모두 둘러보고 나서 그는 말했다.

"매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소 하지만 별장의 수리 문제로 만날 사람이 있어서 가 봐야겠소. 다음 번에는 같이 골프나 치러 갑시다."

"언제든지 좋습니다."

머서가 말했다.

"전화만 주십시오."

로버트는 짧게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하겠소."

그는 파워넷을 방문한 것에 만족했다. 실제적인 탐색을 한다기보다 그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머서가 알게 하고, 파워넷의 보안 정도를 확인하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었다. 이곳이 세워질 때 보안장치 설계도를 보았지만 실제로 설치된 것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밤중에 몰래 사무실에 들어가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머서가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것을 잡아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그 정보를 건네는 순간에 체포해야 했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 때문에 머서는 초조할 것이다. 그리고 초조한 사람은 으레 실수하게 마련이다.

사설정보원이 보낸 봉투가 호텔 프론트에 맡겨져 있었다. 로버트는 텅 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달랑 한 장 들어 있는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간략한 서류에는 에비의 남편인 매트 쇼가 12년 전인 그들의 결혼식 다음날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서류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갑작스럽게 다시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홀몸이다! 차지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가 목표로 쩍은 이상 이제 그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텔 방으로 돌아와서 그는 머리 속으로 다음 체스의 움직임을 구상하면서 수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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