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사랑 에반젤린-2화 (2/19)

2장

덥고 축 늘어지게 하는 전형적인 남부의 여름 날씨였다. 머리 위 하늘엔 군데군데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을 뿐, 호수 표면 위로는 잔물결도 거의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약한 실바람만 불고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을 아예 무시하고 잇는 몇 명의 골수 낚시광들과 수상 스키를 타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침에 나갔던 대부분의 낚시꾼들은 정오가 되기 전에 되돌아와 있었다. 대기는 답답하고 습기가 많아서 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울창한 산림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에반젤린 쇼는 계류장 사무실에 달린 커다란 창문으로 그녀의 성벽을 내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왕국이 필요하며, 이 넓게 퍼져 있는 미로 같은 계류장이 바로 그녀의 왕국이었다. 이곳에서 그녀의 시야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5년 전에 그녀가 이곳을 인수할 때는 여러 시설들이 노후하고 소득이래야 간신히 경비를 지출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후한 시설을 보수하는 데 상당한 은행융자가 필요했지만 말쑥하게 보수하고 확장한 결과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이곳을 운영할 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 비용은 상당했지만 이제는 수익이 꽤 좋았다. 행운이 계속 따라 준다면 3년 이내에 은행융자를 모두 상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계류장은 완전히 그녀의 소유가 될 것이고, 그러면 더 크게 확장도 하고 이곳 외에 다른 분야에도 눈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녀는 이 사업이 계속 지탱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근래에 들어 테네시 주 당국이 '수초제거 프로젝트'를 벌이는 바람에, 물고기들을 보호해 주고 그들에게 정착지가 돼 주던 수초들이 많이 제거되어 수중생물들의 대부분이 죽었기 때문에 낚시 사업은 사양길을 걷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그녀는 지나친 확장은 하지 않아서 융자금은 충분히 갚아 나갈 수 있었다. 같은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 낚시붐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고 과잉투자를 한 경우도 많았다.. 그녀의 성역은 안전했다.

아침 내내 버질 도드 노인은 카운터 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그녀와 고객들에게 1900년대 초반기로 거슬러 가 그가 자라던 시절의 이야기를 즐겁게 늘어놓았다. 가죽끈처럼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그 노인은 지금이라도 금세 무너질 것 같은 어깨에 무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의 무게를 지고 있었다. 앞으로 2년, 혹은 3년, 언제까지 노인이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그 노인을 같은 동네에서 봐 왔다. 그녀에게 버질 할아버지는 항상 늙은 모습이었으며 주위의 산이나 강처럼 조금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손쉽게 달아나고 불확실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으므로, 버질과 함께 보내는 이런 아침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버질 노인도 역시 즐거워했다. 90평생 해 온 낚시질은 이제 할 수 없었지만, 그는 선착장에 부딪혀 찰랑대는 물소리와 호수 냄새, 이런 것들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계류장에 들러 추억을 되새기는 것을 썩 즐거워했다.

지금 그들은 둘만이 계류장 건물에 남겨져 있고, 버질은 다시 청년 시절의 무용담을 털어놓고 있는 중이었다. 에비는 높은 의자에 걸터 앉아서 창 밖을 내다보며 가스펌프 쪽으로 혹시 보트를 갖다 대는 손님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대부분의 관심은 버질에게 쏟고 있었다.

옆문이 열리고 키가 큰 날씬해 보이는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선글라스를 벗기 전에 한참을 서서 화창한 바깥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두운 실내에 적응하려는 듯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표범 같은 걸음걸이로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에비는 버질에게 주의를 돌리기 전에 아주 잠깐 그를 쳐다보았지만, 단 한 번만으로도 그녀의 방어본능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즉시 그가 어떤 사람일지를 눈치챘다. 그는 이방인이고 국외자였다. 이곳 건터스빌에는 온화한 겨울 기후와 느린 생활 리듬, 그리고 물가가 쌀 뿐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풍광 때문에 북부 출신의 사람들이 많이 살지만, 그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먼저, 은퇴하기에는 너무 젊어 보이는 나이였다. 정이 메말라 보였으며 값비싼 옷을 걸치고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태도가 느껴졌다. 에비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전에 만났었고,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받지 않았다. 이방인으로 무시하면 되는데도 그녀는 갑자기 단단한 방어벽을 쌓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위험했다.

비록 그녀는 버질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낯선 이방인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녀는 동네의 부랑아들, 날라리들, 그리고 불량배들 틈에서 함께 자랐다. 남부에는 그런 건달 패거리들이 넘치고 또 넘쳤다. 하지만 이 남자는 뭔가 달랐다. 분명히 다른 종류였다. 그는 위험해 보였지만 위험 따위는 초월한 듯 보였다. 그는 분명히 다른 세게를 가진 남자였다. 어떠한 반대도 용납하지 않는 강한 성격이 그 놀랍도록 빛깔이 엷은 초록색 눈동자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실례합니다"

깊이 울리는 음성이 마치 벨벳처럼 그녀를 휘감았다. 익숙하지 않은 작은 떨림이 복부와 등을 관통했다. 그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 뒤에 흐르는 강철 같은 의지는 그녀가 즉시 그에게 주의를 기울여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스치듯 그를 보면서 말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녀의 어조는 매우 공손했지만 버질 노인에게 말하는 따뜻한 음성과는 아주 달랐다.

"버질 할아버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어요?"

비록 여자가 보여준 무시 비슷한 반응에 놀랐지만 로버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반응은 드문 것이었다. 그는 무시당하는 것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고, 거기다 여자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여자들은 항상 그의 존재를 날카롭게 인식했고, 냉혹하게 억제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풍기는 그의 강렬한 남성다움에 열렬하게 반응했다. 자만심에 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대한 열렬한 여자들의 반응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원하는 여자를 갖지 못했던 적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그는 여자의 말대로 잠시 기다리며 그 기회를 이용해 여자를 자세히 살피기로 했다. 그녀의 용모 또한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흩뜨려 놓았고, 그것은 이상한 경험이었다. 예상한 것과 실제 모습의 차이에 그는 아직 적응을 못했다.

그녀가 에비 쇼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카운터 뒤 높은 의자에 앉은 그녀는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네에게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 노인은 늙수그레한 목소리로 신이 나서 기억도 가물가물한 청년 시절의 무용담을 얘기하는 중이었다. 그녀를 살피는 그의 눈동자는 점점 생각에 잠긴 듯 가늘어졌다.

생각한 대로 부대자루 같은 몸매의 여자가 전혀 아니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예상을 정정해야만 했다. 상상한 허름한 이미지는 아무래도 제대로 찍히지 못한 사진과 헐렁하게 걸친 옷차림 때문인 것 같았다. 무식하고 욕심 많은 부대자루 같은 여자를 기대하고 왔는데 그가 발견한 모습이라니.

그녀는 말 그대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착각일지도 몰랐다. 등뒤의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후광처럼 그녀의 금발머리를 비추고 부드럽게 담갈색 눈동자을 빛나게 하는 건지도 몰랐다. 햇빛은 또한 황금빛으로 그을린 피부를 부드럽게 감싸 마치 도자기 인형의 피부처럼 부드럽고 매끈한 질감을 보여주었다. 착각이든 아니든, 여자에게서는 빛이 났다.

놀라울 정도로 깊은 울림이 있는 섹시한 그녀의 음성은 옛날 영화를 보던 추억을 떠올리게 했으며, 로버트의 척추신경은 그 목소리에 짜릿한 전류를 느꼈다. 그녀의 액센트는 느긋하게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멜로디나 아니면 나뭇가지 사이를 흔들고 지나가는 산들바람 같았고, 그는 갑자기 길고 긴 뜨거운 밤과 침대 위의 엉킨 시트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는 잠시 숨이 멈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노인은 앞으로 몸을 숙이고 주름 투성이의 손으로 지팡이를 감싸 안았다. 나이가 들어 흐려진 푸른 눈동자는 웃음과 옛 시절의 좋은 추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 우리는 말야. 존 영감을 어떻게든 끌어내려고 아는 수단을 모두 동원했다구. 그런데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거야. 흠... 그 망할 놈의 총알이 장전된 구식 장총을 겨냥하고서 말이지. 그래서 아주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어. 존 영감은 한 떼거리의 젊은 녀석들이 그를 놀리는 것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우리는 그가 아는 줄 몰랐거든. 여하튼 그가 장총에 한 번씩 힘을 주고 겨냥을 할 때마다 우리는 놀란 토끼 새끼들처럼 도망을 쳤지. 그러다가 잠잠하면 다시 존 영감 근처로 다가가서 말야..."

로버트는 노인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건물 자체는 낡았지만 진열되어 있는 낚시도구들과 계류장에 정박되어 있는 보트들의 숫자를 고려하면 사업은 꽤나 번창하는 듯 보였다. 카운터 뒤에 있는 판에는 임대보트의 시동키들이 꼬리표가 달린 채 걸려 있었다. 누가 어떤 보트를 모는지 그녀가 어떻게 다 기억을 할까 하는 게 갑자기 궁금해졌다.

노인은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해 무릎을 치며 의기양양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에비 쇼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크게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고, 그 웃음소리에는 그녀의 음성만큼이나 깊은 울림이 있었다. 로버트는 자신이 갑자기 얼마나 사교적으로 완벽하게 조절된 교양 있는 웃음소리에 익숙해져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런 세속적인 웃음들에 비하면 저 에비 쇼라는 여자의 웃음은 아무것도 감추거나 신경 쓰지 않는, 그냥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건강한 즐거움의 표출이었다.

그녀를 쳐다보고 싶은 충동에 저항하려 했지만 그것은 숨을 쉬려는 욕구를 억누르는 것 같았다. 잠시 억누를 수는 있어도, 처음부터 패배가 뻔히 보이는 전투였다. 그는 화가 났지만 호기심에 항복하고 탐욕스럽게 그녀의 모습을 눈 속에 담았다.

태연스러움을 가장한 그의 자제력은 너무 완벽해서 태도나 얼굴을 보고 그의 마음속을 눈칳챌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 자제력은 생각에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에비 쇼에게 매혹 당한 그는 이제 주변환경이 눈에 들어오지도,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항상 끌리던 타입의 여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도한 산업스파이 활동에 연루된 반역자일지도 모르는 그녀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끝없이 계속되는 환상으로 쿵쿵거리기 시작한 심장의 박동을 멈추게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숨이 막히게 할 정도로 더운 대낮의 열기에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갑자기 그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열기와 비교하면 바깥의 기온은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피부는 팽팽하게 긴장되고, 걸치고 있는 옷가지가 거추장스러웠다. 허리 아래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중량감은 그가 지금 느낀 감각들이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남성이 흥분했음을 증명해 주었다.

과거에 그가 원한 여자들은 모두 개성이나 성격이 다르다고는 해도 일종의 공통된 스타일 감각과 세련된 취미를 공유했다. 그들은 모두 사치스러워 보였고, 그들과의 연애에는 실제로 돈이 많이 들었다. 그는 그런 부분을 꺼려하지 않았고, 어떤 면에선 그녀들을 사치스럽게 대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 그들은 모두 완벽한 옷차림에 값비싼 향수 냄새를 풍기고, 돈으로 꾸밀 수 있는 한 화려하고 세련되게 가꾸어졌다. 그의 여동생인 매들린은 그들 중 몇 명을 보고는 마네킹을 보는 것 같다는 소리도 했지만, 사실 매들린도 패션 감각에 있어선 최고의 모델이라고 해도 좋았으므로 그는 매들린이 하는 말을 듣고도 꺼려하기보다는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

반면에 에비 쇼는 옷차림에 대해선 무신경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체격보다 몇 치수는 큰 셔츠를 허리에다 대충 묶어 입고 청바지는 너무 오래되어서 색깔이 바래고 솔기가 헤어진데다, 마찬가지로 낡을 대로 낡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햇빛에 바랜 밝은 금색에서부터 밝은 갈색, 그리고 여러 농도의 갈색이 조합된 머리카락을 단순하게 뒤로 잡아당겨 땋았는데, 굵기는 그녀의 손목만큼이나 굵었고 길이는 등의 중간까지 왔다. 거의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했어도 이런 더위와 습기 속에서라면 소용도 없었겠지만-그녀의 피부는 너무나 멋져서 화장이 전혀 필요 없어 보였다.

빌어먹을... 어떻게 저렇게 피부가 빛날 수 있는 거지? 땀이 번들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빛이 그녀에게 반사되어 미묘하게 어우러진 황금빛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 있는 것 같았다. 적당하게 그을린 피부는 크림빛과 황금빛의 완벽한 조합이었으며 비단결처럼 고왔다. 그녀의 눈동자조차도 황금빛 갈색이 섞인 어두운 보석 같았다.

그는 항상 키가 크고 모델처럼 마른 여자들을 좋아했다. 그 자신이 큰 키이다 보니 댄스 플로어나 침대에서 자신과 키가 적절하게 맞는 여자가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에비 쇼는 16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키에, 절대로 마른 타입이라곤 볼 수 없었다. 그보다는 속된 말로 군침이 돌게 하는, 풍만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격렬한 반응에 놀란 그는 자신이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건지, 그녀가 먹음직스런 음식처럼 여겨지는 건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지만, 솔직한 대답은 두 가지 모두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저속할 정도로 풍만하지는 않았지만 곡선의 심포니라고 해야 할 정도로 육감적인 느낌이 드는 완벽한 여성미의 화신이었다. 그가 평소에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굴곡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소년 같은 엉덩이가 아닌 팽팽하고 동그스름한 엉덩이가 날씬한 허리와 함께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항상 손 안에 들어오는 조그만 가슴을 사랑스럽게 생각했는데, 그 벙벙한 셔츠 뒤에 가려진 부드럽고 푹신해 보이는 가슴에 매혹된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면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로 출렁거렸지만, 그 가슴은 커다랗기만 하고 모양 없는 그런 가슴이 아니었다. 가슴만 보고도 욕망이 일어날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지만 보고 있노라면 사람을 애태워 유혹에 빠지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 부드럽고 따뜻한 무게는 그의 손을 채울 것이고... 계속된 상상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쥐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느라 주먹을 꼭 쥐어야 했다.

그녀의 모든 것이 남자의 눈을 즐겁게 했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반응에 화가 났다. 그녀에게 그가 이렇게 반응한다면 머서도 어쩌면 그녀 육체의 포로일지도 몰랐다. 이것은 그가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이전에 욕망을 느꼈던 여자들의 타입과 거리가 멀었음에도 그녀를 원하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치솟았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해서 그녀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왔고, 욕망으로 인해 눈이 먼 짓을 할 마음도 없었다. 스파이 짓을 하며 범죄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그녀에게 그가 느껴야 할 감정은 혐오감이면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는 격렬한 육체적인 욕망에 휩싸여서 고작 가만히 서 있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녀에게 구애하거나 유혹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를 안아 들고 멀리 데려가 버리고 싶었다. 그의 보금자리는 우스울 정도로 비싼 맨해튼의 펜트하우스지만, 그가 지금 느끼는 원시적인 충동은 원시인들이 굴속에 둥지를 틀었을 때나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고, 거기엔 교양이나 품위 따위는 없었다. 이 다급한 충동은 그의 지성과 자제력을 우습게 만들었다.

자신이 끌리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너무 강한 감정이고 그녀가 던지는 도전은 너무 컸다. 에비 쇼가 고의로 그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나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는 남자의 본능을 그녀는 아예 모르고 있었다. 그를 옆에 서 있는 기둥 보듯 하는 그녀를 보고 로버트는 내재돼 있는 모든 남성적인 공격세포가 거세게 포문을 여는 것을 느꼈다. 맹세하건대, 그녀를 꼭 갖고 말리라.

등뒤에서 문이 열리자 그는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잇는 상황에 감사하며 뒤돌아섰다. 짧은 반바지와 샌들, 그리고 티셔츠 차림의 젊은 여자가 그를 보고 미소를 던지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잠시 여자는 미소를 띄며 그를 쳐다보다가 곧 카운터 뒤에 있는 두 사람에게 주의를 돌렸다.

"할아버지, 오늘 즐거우셨어요? 사람들 많이 만나셨어요?"

"아주 즐거웠지"

버질은 지팡이를 집고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버트 마르디스도 봤고, 깁스네 애들도 잠깐 다녀갔고. 손자 녀석들은 잘 챙겼니?'

"식료품들과 함께 차 속에 얌전히 있답니다."

그녀는 에비를 쳐다보았다.

"급히 가고 싶지는 않지만 햇빛이 너무 뜨거워서 상할지도 모를 음식들이 몇 가지 있어서요."

"가능하면 나는 모든 일들을 밤에 하려고 미뤄 놔."

에비가 말했다.

"식료품도 저녁에 사고 말야. 버질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항상 무릎 조심하셔야 하는 것 아시죠? 그리고 자주 들러 주세요."

"무릎은 벌써 다 나은 것 같아."

버질이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나이가 드는 것은 정말 재미없는 일이야.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지."

그는 윙크하고는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에비, 또 봐요."

젊은 여자도 버질의 뒤를 따라 나섰고, 지나치면서 로버트에게 다시 미소를 지었다.

노인과 젊은 여자가 문을 나서자 로버트는 아무렇게나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비교적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와 손녀지간인가 보죠?"

에비는 고개를 흔들면서 가스펌프 쪽을 살폈다. 그와 단둘이 남겨졌다는 것을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의식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남자 고객과 단둘이 있을 때가 비일비재한 그녀였지만 한 번도 이런 기분인 적은 없었다. 그가 문을 통해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는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 기분이 들게끔 그가 말이나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뭔가 꺼리는 마음이 드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증조할아버지예요 그녀와 함께 살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다른 손님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버질 할아버지는 벌써 아흔세 살이시고, 그분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이해합니다."

그녀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녀가 자신을 쳐다보게 하고 동시에 그녀를 만지고 싶은 생각에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나는 로버트 캐넌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지만, 손을 내미는 느린 속도로 보아 그저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손을 내밀고 있을 뿐 그와 악수를 하는 것은 꺼려하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려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가늘고 서늘했지만, 그의 손을 잡는 힘은 놀랄 정도로 강했다.

"에비 쇼예요"

그녀는 말했다. 그는 확실한 인상을 주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지만 금세 손을 놓았다. 접촉은 너무 짧았고‥‥‥ 무엇보다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도 즉시 몸을 돌리고 서둘러 말했다.

"캐넌 씨, 필요한 게 뭔가요?"

눈앞에 떠오르는 생생한 이미지들이 있었지만 말로 옮기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의 가냘픈 등을 주의 깊게 쳐다보며 선입견들을 고쳐 나갔다. 그녀가 자신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사실 지나치게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역으로 그를 꽤나 의식하고 있어서 긴장한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 그는 계획을 수정했다.

그는 이 계류장에 들어오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보안상태를 살피고 시설들의 위치를 확인한 뒤 낚시허가증이나 호수의 지도를 구하려고 했었지만 지난 몇 분 동안에 모든 계획을 바꾸었다. 머서의 그림자가 되려는 대신 그는 이제 본드처럼 에비 쇼에게 달라붙어 있을 작정이었다.

그녀는 왜 지나치게 그를 두려워하는 걸까? 그녀는 그가 자신을 소개하기 전부터 그를 꺼려하고 있었다. 유일한 대답은 그녀가 이미 그에 대해 들었으며, 그래서 오늘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조직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체계가 잡힌 범죄조직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결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예상보다 꽤나 많은 힘과 노력이 들것이다. 전광석화 같은 결정으로 그는 즉시 조사거점을 헌스빌에서 건터스빌로 옮겼다. 과거 FBI와 연계하여 몇 번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을 때 그는 여자요원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었다. 그들을 침대로 데려가는 것은 위험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위험이 흥분의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에비 쇼와 함께 침대에 드는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 되지 싶었다.

"우선 정보가 좀 필요한데‥‥‥."

그는 그녀가 자신을 전혀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데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그러한 기분을 음성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녀의 의심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를 편하게 대하게끔 만들어야 했다. 여자를 부드럽게 길들이는 것이 어려웠던 적은 없었으므로 이번에도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FBl 당국의 몇몇 상급간부들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그는 부유한 기업체의 회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영리하다면 곧 그에게 접근하는 것의 유리함과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에 혹하게 될 것이다. 여름날의 가벼운 정사 정도면 원하는 바를 이룰 거라 생각할 거고, 그는 그녀에게 그것을 기꺼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관광객 안내센터를 찾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녀가 제안했다.

"그렇소?"

그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당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

"그럴 수도 있죠"

그녀의 말투에선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흔쾌히 나선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어떤 정보가 필요한 거죠?"

"여름 내내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합니다. "

그는 말했다.

"이곳에 온 두 번째 이유는 보트를 빌리려는 건데‥‥‥하지만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으니 호수에서 나를 안내해 줄 사람을 구하고 싶습니다. 누구보다 당신이 이곳 지리는 잘 안다고 들었소"

마침내 그녀는 그를 쳐다보았고, 그녀의 눈빛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실이에요 하지만 직접 안내를 하지는 않아요. 보트 빌려 드리는 것, 그게 도와 드릴 수 있는 전부일 것 같네요"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둘 사이에 방어벽을 쌓았고 어떤 일에든 협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불안해하는 여자들을 안심시켜 주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던 그런 미소였다.

"이해합니다. 나를 잘 알지 못할 테니,"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의 미소에 그녀도 본능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에요 이곳에 오는 손님들 중에는 처음 보는 분들도 아주 많아요"

"내가 알기로 안내인의 일당이 비용 제하고 백 달러로 알고 있는데, 두 배를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만."

"캐넌 씨, 돈 문제가 아니에요 시간이 없어요."

여기서 그녀를 더 밀어붙이는 것은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진지하게 그녀를 쫓아다니기 전에 준비할 일들이 많았다. 그를 쉽게 잊지 못할 정도의 인상은 준 것 같았고 처음 만남에서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다면 소개해 줄 만한 다른 안내인은 있소?"

그의 질문에 그녀가 어느 정도 긴장을 푸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몇 개의 이름을 거론했고, 그는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겨 놓았다. 강의 지리를 확실히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녀가 물었다.

"대여가 가능한 보트들을 지금 둘러보시겠어요?"

"아, 좋소"

이곳의 보안시설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카운터 뒤에서 나왔다. 로버트는 그녀의 약간 뒤에 떨어져서 걷기 시작했고, 걸어가면서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지나 청바지 위로 섹시하게 드러난 엉덩이 곡선을 찬찬히 감상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금발머리는 어깨 위에서 찰랑거렸다. 그녀의 통통한 엉덩이를 손으로 감싸쥘 생각을 하자 피가 끓고 맥박이 요동을 쳤다. 그 도발적인 이미지에 마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는 억지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저렇게 계류장 사무실을 비워 둬도 됩니까?"

그는 계류장 쪽을 보며 물었다. 햇빛이 눈부실 정도로 수면 위에 반사되고 있어서 그는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사우나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푹푹 찌는 날씨였다.

"이곳에서도 계류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다른 직원들은 몇 명이나 있습니까?"

그가 질문하는 이유를 가늠하듯 그녀가 살피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기술자 한 사람과 여름 동안 아침에 나를 도와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한 명, 그리고 학기 중에는 오후에 몇 명을 교대해서 일하게 하고있어요."

"하루에 몇 시간 열어 놓고 있죠?"

"오전 6시부터 저녁 8시까지예요"

"상당히 긴 하루겠군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겨울에는 대신 8시부터 7시까지 열어요."

네 개의 선착장은 이미 차 있었고 대부분의 요트는 사용 중인 것 같았다. 잔잔한 호수 위에는 다양한 보트와 요트들이 떠있었다. 하우스 보트, 낚싯배, 수상스키 전용 모터보트, 요트 등이었다. 계류장 사무실 왼쪽에 있는 출입구는 열쇠가 달린 문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두 개의 갑판이 연결되지 않은 선착장은 일반 보트들이 자유롭게 정박할 수 있는 곳인 것 같았다. 사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갑판 쪽에 임대보트들이 매여져 있었다.

에비는 잠가놓은 철문의 자물쇠를 열고 물결에 따라 가볍게 흔들리는 계류장으로 들어섰다. 아무 말 없이 그녀는 늘어져 있는 보트들을 보여주며 대여가 가능한 보트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어느 정도의 크기면 되겠어요?"

그는 즉각적인 결정을 내렸다.

"차라리 작은 보트를 사고 싶소. 크루저(선실이 있는 요트)가 아닌 스피드 보트가 좋겠는데. 잘 아는 보트 판매점을 알려줄 수 있소?"

그녀는 그를 다시 거리를 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대답은 해주었다.

"마을의 번화가로 가면 보트 판매점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곳에 가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돌아서서 다시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선착장의 갑판 위에서도 그녀의 발걸음은 우아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로버트는 즉시 뒤를 따라 걸으면서 그녀의 뒷모습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이제 그를 보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분노와 기대감이 함께 뒤엉킨 상태에서 남자의 공격본능을 자극 받은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온몸의 신경이 긴장한 상태였다. 그를 속인 대가를 그녀는 톡톡히 지불해야 할 것이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오늘밤 같이 식사를 하지 않겠소?"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그녀의 몸에 부딪혔다. 몸이 닿지 않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그녀의 몸에 접촉했다. 그리고 균형을 잃고 버둥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몸을 지탱해 주었다. 등을 그의 몸에 기대게 해서 그녀가 똑바로 서게 했다. 손 아래 놓인 그녀의 감촉과 열기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의 허벅지와 복부에 걸쳐 밀착된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을 즐기면서 그는 가볍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같이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인지는 몰랐소."

그녀는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그를 꺼린다면 그녀는 그의 섹시한 몸에서 벗어날 것이고, 그와의 접촉을 반긴다면 몸을 돌려 그에게 안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서서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 사이의 침묵이 길어지고 점점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그녀는 다시 몸을 떨었고, 그 미묘한 감각적인 떨림이 느껴지자 허리에 감긴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동시에 그의 남성도 서서히 발기되었다. 그녀는 왜 움직이지 않는 건지. 또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건지.

"에비?"

그는 중얼거렸다.

"아뇨"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더 짙어지고 허스키해졌다. 그녀가 그에게서 갑자기 몸을 때었다.

"미안합니다. 함께 식사하러 갈 수 없어요"

그때 선착장으로 보트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고, 그는 고객을 맞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보고는 아주 쉽게 미소짓는 그녀를 보자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는 왼팔을 흔들면서 환영했고, 로버트는 그녀의 가냘픈 손가락에 시선이 가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그녀는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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