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에반젤린 (Loving Evangeline) / 린다 하워드(Linda Howington)
김선영 옮김 장편(신영미디어 2001년)
혐의는 너무 뚜렷하다!
에반젤린 쇼. 작은 시골마을의 순수한 여인처럼 보이지만 로버트 캐넌은 속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스파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는 자신의 컴퓨터 제국을 붕괴시킬 그녀의 범죄사실을 직접 증명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길고 뜨거운 남부의 여름을 그녀와 함께 보내는 동안, 그는 확신하고 있던 모든 사실을 송두리째 의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데…
1장
데이비스 프리센은 겁쟁이는 아니었지만 로버트 캐넌에게 보고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마취 없이 수술을 받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넌 그룹의 대주주이자 회장으로서 실제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로버트는 데이비스에게 이 나쁜 소식의 책임을 지라고 할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보고하는 사람을 캐넌이 경질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얼음장같은 초록빛 눈동자가 더욱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등골에 써늘한 한기가 흐르리라는 것을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캐넌이 공평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그를 속이려고 드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냉혹하다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자신이 제일 존경하는 로버트 캐넌이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어둡게 하는 두려움은 억누를 수 없었다.
캐넌의 지위 정도에 오르면 그 엄청난 권력의 힘으로 주위에 비서들과 보좌관들로 두터운 보호벽을 쌓을 터였지만 캐넌의 무서울 정도로 강한 자신감, 자제력과 냉정한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듯 개인비서 하나만 그에게로 통하는 성역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팰리스 쿠어리는 지난 8년 간 캐넌의 개인비서로 근무해 왔으며 스위스 시계처럼 정확하게 캐넌의 사무실을 운영했다. 키가 크고 날씬한 체형의 소유자로, 희끗희끗하게 머리가 세었지만 20세 여자처럼 맑고 주름 없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막내아들이 이십대 중반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적어도 그녀의 나이가 사십대 중반은 됐으리라 짐작되지만 얼굴만 보고 나이를 추측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능력 있고 냉정하고 침착한 비서의 화신 같았으며, 그 무서운 보스 앞에서도 초조한 기미조차 보인 적이 없었다. 데이비스는 자신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기를 바랐다.
캐넌과의 면담을 위해서 사전에 전화로 연락을 해 놓은 상태라 팰리스는 그가 사무실로 들어서도 놀라지 않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프리센 씨."
그녀는 그 말과 함께 전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회장님, 프리센 씨가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즉시 만나겠다고 하시는군요."
항상 그를 위축되게 하는 빈틈없는 비서의 태도로 그녀는 그가 회장실로 향하는 문에 도달하기도 전에 먼저 문을 열고는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문을 닫아 주었다. 그녀의 태도에서 비굴하거나 아첨하는 듯한 것은 전혀 없었다. 캐넌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철통처럼 지키고 조종하는 막강한 권력이 느껴졌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캐넌의 사무실은 놀라울 정도로 커다랗고 고급스러웠으며 멋지게 실내장식이 되어 있었다. 2백 년은 족히 지났을 골동품 페르시안 카펫이 발 밑에 깔려 있고 유명 화가의 진품임이 분명한 유화가 벽에 걸려 있음에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사람들을 위압하기보다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는 것은 분명히 캐넌의 취향에 점수를 줘야 할 것이다. 오른편에는 대형 스크린 텔레비전과 비디오플레이어를 비롯해 최첨단 회의장비가 갖추어진 널찍한 접대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벽을 따라 나란히 설치된 16세기 이탈리아 건축양식의 창 여섯 개는 마치 여섯 개의 고급 액자에 뉴욕의 경치가 담겨진 것처럼 보였다. 창틀 자체만으로도 예술품 같았다. 아름답게 조각된 유리창들을 통해 햇빛이 반사될 때면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사무실 안에 찬란한 광채를 더해 주었다.
캐넌의 거대한 책상 또한 골동품으로, 18세기 로마노프 황가의 소유물로 알려진 것이었다. 그 뒤에 앉아 있는 캐넌은 주위의 고급스런 사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제국의 주인처럼 보였다.
로버트는 키가 크고 말라 보이는 체구에 우아함까지 갖추었지만, 표범의 힘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매끄러운 검은머리와 초록빛의 눈동자를 보다 보면 어딘지 표범을 연상하게 하는 무엇이 그에겐 있었다. 그를 보고 느긋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아주 위험한 착각이었다.
로버트는 악수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고, 데이비스의 손을 잡는 길다랗고 모양새 좋은 손가락은 놀랄 정도로 힘이 셌다. 그와 악수를 하게 되면 데이비스는 그 강철같은 손아귀 힘에 항상 놀랐다.
가끔 캐넌이 데이비스를 불러서 면담을 할 경우 커피 마실 거냐고 물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면담에서는 그런 배려가 없었다. 캐넌의 현재 지위는 사람들을 잘못 판단해서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이번에도 역시 데이비스의 안색에 서린 긴장감을 단번에 읽은 터였다.
"데이비스, 다시 보게 되어서 기쁘다고 말하고 싶네만, 자네 얼굴을 보니 기뻐할 만한 소식을 전하려고 온 사람 같지는 않군."
아주 편안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음성으로 말했지만 데이비스는 팽팽하게 신경 줄이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맞습니다, 회장님."
"자네 잘못인가?"
"아닙니다, 회장님."
하지만 데이비스는 정직하게 인정했다.
"훨씬 더 빨리 사태를 포착하지 못한 잘못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앉아서 긴장을 풀고 이야기를 시작하지."
로버트는 다시 자신도 자리에 앉으며 온화하게 말했다.
"자네 잘못이 아니라면 걱정 말게. 문제가 뭐지?"
데이비스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지만, 로버트의 말대로 긴장을 푼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부드러운 가죽소파의 끝 부분에 불안하게 걸터앉아 보고를 시작했다.
"헌스빌의 누군가가 나사(NASA, 미국 항공우주국)에 제공될 우리 회사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몰래 빼돌리고 있습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사실을 말했다.
갑자기 캐넌의 움직임이 일체 정지되고 그 초록빛 눈동자에 데이비스가 두려워하는 얼음처럼 차가운 광채가 떠돌았다.
"증거가 있는 건가?"
캐넌이 물었다.
"예, 회장님."
"누가 그랬는지도 아는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
"보고하게."
짧게 그 말을 던지고 캐넌은 소파에 등을 기댄 뒤 잠자코 초록 레이저광선 같은 눈동자로 데이비스를 쳐다봤다.
데이비스는 조심스럽게 몇 번씩 말을 더듬으며, 그가 의심을 갖게 된 계기와 상부에 보고하기 전에 그의 의심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찾기 위해 조사를 했다는 것을 설명했다. 캐넌은 침묵 속에서 듣고만 있었으므로 데이비스는 조사 결과를 설명할 때쯤 이마에서 땀이 솟는 것을 느꼈다. 캐넌 그룹의 자회사 중 하나인 ?파워넷?은 앨라배마 주 헌스빌 시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나사를 위해 기밀정보로 분류된 소프트웨어를 개발 중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그 소프트웨어를 외국계 회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건 단순한 산업스파이 영역을 벗어난 국가적 반역행위라고 봐야 했다.
데이비스의 의심은 파워넷의 프로젝트 책임자인 랜든 머서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머서는 지난해에 이혼을 했고, 갑자기 그의 생활이 눈에 띄게 사치스러워졌다. 그의 급여 수준은 꽤 높은 편이었지만, 이혼한 아내와 아이들에게 위자료와 양육비를 지급하고도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데이비스는 비밀리에 사립탐정을 고용해서 머서의 은행계좌에 상당한 금액이 예치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몇 주 동안 그를 감시한 탐정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주기적으로 건터스빌 호수에 있는 계류장(배나 보트를 대고 매어 놓는 곳) 중 한 곳을 방문한다고 했다.
그 계류장의 소유주이자 운영자는 에비 쇼라는 여자였다. 조사에서 에비라는 여자의 지출 습관이 특별히 변했다거나 은행계좌에 많은 돈이 들어갔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녀가 머서보다 더 교활하다는 것을 말해 줄뿐이었다. 머서가 계류장에서 모터보트를 대여해 호수로 나갈 때 에비 쇼도 두 번 정도 사무실 문을 닫고 그녀의 보트로 그를 따라갔다는 것이다. 그들은 약 15분의 간격을 두고 각자 돌아왔다. 손쉽게 자취를 감출 수 있으며 또 추적자들을 살필 수 있는 넓은 호수 어딘가에서 접선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붐비는 계류장에서 비밀거래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할 것이다.
보고를 마친 데이비스가 손가락 마디를 신경질적으로 꺾으며 앉아 있는 동안, 무표정한 캐넌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고맙네, 데이비스."
캐넌이 조용히 말했다.
"FBI(미국 연방수사국)에 이 사실을 통보하고 조사를 진행하겠네. 수고했어."
데이비스는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보안 책임이 자네 담당은 아니지 않은가. 누군가 일을 태만하게 처리한 게지. 그 부분도 살펴보겠네. 자네라도 날카롭게 관찰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로서는 다행이지."
로버트는 속으로 지금도 높은 편인 데이비스의 급여를 인상하고 훨씬 더 높은 직위로 그를 끌어올리기 위한 훈련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데이비스는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예사로 넘길 수 없는 예리함과 진취성을 보여준 것이다.
"FBI에서 자네와 얘기하기를 원할 테니 오늘 하루는 본사에서 대기하게."
"알겠습니다, 회장님."
데이비스가 사무실을 나가자 로버트는 전용전화로 FBI에 연락을 취했다. FBI 당국은 시내에 지국을 운영하고 있었고 로버트는 때때로 그들과 연계해 일을 처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즉각 고위급 수사요원과 연결되었다. 가장 뛰어난 수사요원 두 명을 사무실로 급파해 달라고 요청하는 그의 음성에서는 그가 느끼는 격분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FBI에서도 30분 이내에 수사요원을 파견하겠다고 조용히 확약을 주었을 뿐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통화가 끝나자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생각했다. 격렬한 분노가 일었지만, 감정의 분출은 하등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로버트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자신에게 용납하지 않았다. 자회사라곤 하지만 고용인 중 하나가 나사에서 사용할 기밀 프로그램을 빼내어 팔았다는 것은 명백히 로버트의 평판에 오점을 남길 일이었다. 돈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는 그런 녀석에 대한 격한 혐오감으로 그는 놈을 감옥에 가둘 때까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리라 결심했다. 15분 이내에 그는 자신의 행동 계획을 수립했다.
수사요원 두 명이 20분 만에 도착했다. 팰리스가 내선으로 알려 오자 그들을 들여보내라고 말한 뒤 그들이 떠나기 전까지는 일체 방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뼛속까지 완벽한 비서인 팰리스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장 차림의 남자들을 사무실로 안내한 뒤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등뒤로 문을 닫고 나갔다. 로버트는 인사를 나누면서 냉정한 눈썰미로 두 명의 남자를 관찰했다. 30세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는 중간급의 수사요원으로 짐작되지만 자신감이 눈매에 서려 있었다.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나이 든 남자는 본래 밝은 갈색이었겠지만 지금은 거의 회색으로 머리가 센 사람이었다. 그는 중키에 단단한 체구였다. 금속제 안경테 뒤에 있는 푸른 눈동자는 피곤해 보였지만 여전히 날카롭고 위엄이 서린 것이었다. 하급 수사요원으로 볼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나이 든 남자가 로버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캐넌 씨?"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했다.
"FBI의 선임요원인 윌리엄 브렌트라고 합니다. 여기 이 사람은 리 머리이고 특수방첩대 요원입니다."
"방첩대라……."
중얼거리는 로버트의 눈은 차가웠다. 여기 와 있는 두 남자의 신분으로 보아 FBI가 이미 파워넷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훌륭한 추측입니다. 자, 이리로 앉을까요?"
"추측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브렌트 요원이 자리를 잡고 앉으며 겸연쩍게 대답했다.
"캐넌 그룹처럼 정부와 계약 건이 많이 걸린 회사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스파이들의 주요 목표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또한 회장님께선 이 분야에 상당한 경험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당연히 특수방첩대 요원이 필요하리라는 결론을 내렸죠."
뛰어난 요원이라고 로버트는 생각했다. 그들은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알기를 원하지만, 그가 파워넷을 언급하지 않는 한 먼저 정보를 흘리진 않을 것이다. 그가 먼저 회사에서 기밀이 누출되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말하면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란 척할 테고, 그가 술술 털어놓기 전까지는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감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작전에 말려들 로버트가 아니었다.
"FBI에서도 상당히 걱정스런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을 알겠군요."
그는 차갑게 말했다.
"왜 당신들이 즉각 이런 정보를 내게 알려주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궁금합니다."
윌리엄 브렌트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로버트 캐넌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 정도까지 명석하게 상황을 꿰뚫고 있을 줄은 몰랐다.
캐넌은 냉정해 보이는 눈썹을 들어올리며 설명을 재촉하듯 브렌트를 바라보았고, 이런 표정을 보고도 캐넌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브렌트는 무슨 말이든 다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다스리면서 사과의 말부터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인다는 것에 사실 경악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로버트 캐넌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는 이미 캐넌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정보수집은 그의 전문이었다. 캐넌은 교양이 넘치는 유복한 환경 출신인데다 그 자신의 수완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이룩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전력은 완전무결했다. 국무성과 법무성 양쪽에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는 많은 친구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봐, 캐넌 그룹 내에서 뭔가 미심쩍은 일이 일어난 경우 자네들이 조치를 취하기 전에 로버트 캐넌에게 먼저 알려준다면 나에 대한 호의로 생각하겠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때 브렌트는 그렇게 대답했다.
"조사 과정에 손상을 주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네."
그 당국자는 말했다.
"캐넌이라면 최우선의 기밀을 요하는 국가기밀이라도 안심하고 말할 수 있는 친구야. 사실 이전에도 몇 번 그런 경우가 있었고, 그때마다 그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네."
"그가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브렌트가 경종을 울리듯 말했다. 앨라배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민간인에게 정보를 누설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당국자는 머리를 흔들면서 다시 말했다.
"아니, 로버트 캐넌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야."
캐넌이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 사건들의 중요성과 성격에 대해서 듣게 된 브렌트는 당시 상황이 이해가 되자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캐넌에게 상황을 통지하는 것에 대해 마지못해 동의했었다. 하지만 캐넌이 먼저 전화를 걸어옴으로써 그들의 계획이 틀어진데다, 그가 파워넷에 관한 사실을 과연 알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없어 일단 캐넌이 전화 건 이유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기로 계획을 세웠다. 비록 캐넌이 선수를 쳐서 소용이 없게 되었지만.
사람을 읽는 것에 익숙해진 브렌트였지만 캐넌은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널리 알려진 캐넌에 대한 평가는 부유하고 교양이 넘치며 세련된 남자라는 것이고, 그 부분은 브렌트도 동의하는 바지만 그것은 그의 일면일 뿐이었다. 그 외의 다른 부분은 그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너무 잘 감춰져서, 그도 단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부분이 존재하리라는 짐작만을 할 뿐이었다. 그나마 그 정도 눈치를 챈 것도 그가 기밀정보를 취급하는 가운데 캐넌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부터였다. 캐넌의 잘생긴 외모에서는 감정의 흔들림조차 눈치챌 수 없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인내심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는 그 차가운 눈빛만 가득 눈에 들어왔다.
신속하게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윌리엄 브렌트는 앞으로 몸을 숙이고 말을 계속했다.
"캐넌 회장님, 원래 의도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실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앨라배마 주에 있는 회장님의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분명히 조사 대상이 되는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먼저 얘기하면 어떻겠소?"
로버트는 평이한 음성으로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그리고 당신들이 부가해서 더 말할 것이 있으면 말하시오."
조용히 그리고 완벽한 기억력으로 그는 데이비스 프리센이 그에게 말한 것을 옮겼다. 두 명의 요원이 주고받는 눈짓을 보고 캐넌은 FBI가 데이비스가 알아낸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을 밝혀 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다시금 데이비스의 평가를 상위로 조정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윌리엄 브렌트는 헛기침을 하면서 몸을 앞으로 더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저희보다 더 앞선 정보를 가지고 계시군요. 우리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훨씬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나는 내일 아침 그곳으로 날아갈 예정이오."
로버트의 말에 브렌트는 찬성하지 않는 듯 보였다.
"캐넌 회장님, 도와주시려는 의도에는 감사드리지만, 이런 일은 FBI 당국에서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내 말을 오해하셨군요. 돕는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 이 회사는 내 소유이니 당연히 내 문제죠. 내 문제는 스스로 해결합니다. 단지 당신들에게 상황과 내 의도를 통고하는 것일 뿐이오. 나라면 위장신분을 만들어 잠입하는 데드는 시간이 전혀 필요 없소. 그곳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물론 당신들에게는 계속 정보를 제공하겠소."
브렌트는 이미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안 됩니다. 물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소? 나는 모든 것에 다가갈 권한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내 존재는 FBI 당국의 간섭보다는 덜 위협적일 텐데 말이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아마추어가 아니오."
"캐넌 회장님,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상급자와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해 보길 바라오."
그는 시계를 흘낏 바라보았다.
"그동안 나는 여러 가지 준비들을 좀 해야겠소."
그는 브렌트가 이 문제를 상급자들과 상의하게 되면, 로버트 캐넌이 이 문제를 직접 다루길 원한다면 뒤로 물러서라는 소리를 듣고 유감스러워하게 되리라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모든 상황에서 협조를 할거고 필요할 때면 뒤에서 지원을 하겠지만, 브렌트는 곧 로버트가 모든 상황을 지시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로버트는 그날의 나머지 시간 동안 스케줄을 점검하고 약속들을 취소하는 데 진력했다. 팰리스는 돌아오는 날짜를 임의로 정할 수 있는 비행기표와 헌스빌의 호텔을 예약했다. 그날 저녁 사무실을 떠나기 전 그는 시계를 보고는 운에 맡기듯 전화를 걸었다. 뉴욕 시간으로는 저녁 8시였지만 몬태나 주는 아직 6시였다. 여름은 낮이 긴 관계로 겨울보다 오랜 시간 바깥 목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기쁘게도 세 번 정도 벨이 울렸을 때 여동생이 느긋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던컨의 정신나간 집입니다. 매들린인데요."
로버트는 껄껄거리고 웃었다. 멀리서 두 명의 어린 조카들이 우당탕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전히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는 것 같군."
"로버트 오빠!"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묻어 났다.
"그렇다고 봐야지. 오빠, 저 정신없는 조카들을 아주 오랫동안 오빠 집에 데려다 키워 줄 생각은 없어?"
"너희 집이 완전히 무너지면 모를까. 그리고 한동안 집에 없을 예정이야."
"어디로 가는데?"
"앨라배마의 헌스빌."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거기 무척 더운 곳이지?"
"알고 있어."
"거기 가면 땀을 흘릴지도 모르는데."
그녀가 경고했다.
"오빠가 얼마나 지겨워할지 생각해 봐."
그녀의 음성에 섞인 약올리는 기미에 그의 입가엔 미소가 감돌았다.
"뭐, 한번 운에 맡겨 보지."
"꽤 심각한 일인가 봐? 문제가 있어?"
"몇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어서."
"조심해요."
"그럴게. 가 봐서 생각한 것보다 오래 있어야 하게 되면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알려주마."
"좋아. 오빠, 사랑해."
"나도 사랑한다."
그는 전화를 끊으면서 미소지었다. 역시 매들린다웠다. 아무런 질문 없이도 앨라배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의 심각성을 즉각 깨달은 것이다. 그 짧은 대화 속에서 그에게 축복과 그를 믿는다는 사실과 사랑한다는 말까지 해 버리다니. 부모들의 결혼으로 맺어진, 피가 섞이지 않은 의붓여동생일 뿐이었지만, 그들 사이의 애정과 이해는 피로 맺어진 것만큼이나 단단하고 강했다.
다음으로 그는 최근에 그가 정기적으로 데이트를 하고 있던 발렌티나 로렌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할 정도로 진전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원한다면 다른 남자를 만나도 좋다고 말하는 편이 두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아쉬웠다. 발렌티나는 오래도록 파트너 없이 지내기에는 너무 인기가 좋았고 그는 앨라배마에 적어도 한 달이나 두 달은 가 있어야 할 테니.
그녀는 로버트가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경주용 말처럼 큰 키에 날씬하고 작은 가슴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화장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고 자연스러웠으며, 옷차림은 세련되고 고상한 취미를 반영한 것이었다. 또 꾸밈이 없었고, 같이 있으면 즐거운 성격의 그녀는 그와 마찬가지로 오페라와 연극을 좋아했다. 이런 문제로 훼방을 받지 않았다면 아주 괜찮은 애인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관계가 끝난 지 여러 달이 지나서, 그는 자신이 어딘지 모르게 안정을 잃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자 없이 혼자 지내는 것보다는 여자와 함께 보내는 삶이 좋았다. 물론 독신생활에 만족하고 있지만 여자들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한 여자와 함께 보내는 안정감을 선호했다. 하룻밤 관계는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가볍게 구는 녀석들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발렌티나는 그가 오랫동안 떠나 있을 거라는 소식을 우아하게 받아들였다. 아직까지 그들은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고, 서로를 구속할 정도까지 진전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음성에서 아쉬워하는 기색을 느꼈지만 돌아오면 전화하라는 그런 말은 없었다.
마음에 걸렸던 문제가 모두 일단락되자 그는 잠시 동안 가만히 앉아 섹스로까지 발전되지 않은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섹스에 대해 신경을 쓰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하는 눈앞의 상황에 저절로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재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섹스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한 그의 성욕은 항상 무서울 정도의 자제력으로 억제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힘 차이를 고려해 볼 때 힘을 자제하지 못하는 남자는 쉽게 여자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고, 그런 것은 생각만 해도 혐오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강한 성욕을 얼음처럼 차가운 지성의 힘으로 조절했다. 끌리는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의 기분을 알게 했지만, 결코 그녀에게 심리적, 육체적으로 압박감을 준 적은 없었다. 자신의 삶에 처한 그녀의 자리를 인식하게 해주고 그녀로 하여금 진행 속도를 조절하게 했다. 친밀함의 속도는 숙녀가 결정할 일이었다. 여자보다 훨씬 크고 강한 남자에게 자신들의 여리고 상처 입기 쉬운 육체를 열어 준다는 것에 대한 여자들의 본능적인 망설임을 그는 깊이 존중하고 있었다. 섹스를 할 때면 그는 항상 여자가 먼저 충분히 흥분할 때까지 시간을 들여서 애무한 후 부드럽게 사랑을 하는 편이었다. 그런 정도의 자제력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여자의 살결과 매혹적인 육체의 곡선을 어루만지며 몇 시간이고 키스와 애무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애무에 들이는 오랜 시간은 금욕한 시간만큼의 갈증을 풀어 줄 것이고 더불어 그의 파트너를 오래도록 절정에 있게 할 것이다.
새로운 파트너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에 비교할 만한 인생의 즐거움은 없다고 그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 처음 경험처럼 강렬하고 갈망에 시달리는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게 함으로써 그녀에게 특별한 시간이 되게 하려고 노력했다. 한 여자가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작은 구애의 시간들을 그는 무시하지 않았다. 촛불이 밝혀진 로맨틱한 저녁식사, 다정하고 사려 깊은 선물들, 그리고 완벽한 관심 집중. 마지막으로 침실로 가서 둘만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기교를 동원해서 상대를 끊임없이 만족시킨 후에야 자신도 절정에 도달했다.
앨라배마의 문제로 인해 그가 놓치게 될 그 즐거운 시간들을 생각하자 짜증이 났다.
문에서 나는 노크소리로 인해 캐넌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팰리스가 머리를 문안으로 디밀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
"벌써 퇴근했어야 하는 시간인데……."
그는 나무라는 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잖소."
"서류 배달원이 이 봉투를 가져왔습니다."
그녀는 그의 책상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의 말에 그녀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얼마나 늦든 지간에 그가 사무실을 떠나기 전에 그녀가 먼저 퇴근하는 적은 극히 드물었다.
"퇴근하시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건 명령이오. 내일 전화하겠소."
"가기 전에 시키실 일은 없으신가요? 커피를 새로 끓일까요?"
"아니오, 조금 있으면 나도 나갈 거요."
"그럼, 출장 잘 다녀오세요."
그녀는 미소와 함께 방을 나갔다. 바깥쪽 사무실에서 그녀가 사물을 담고 서류들을 정리하며 서랍과 사물함 등을 열쇠로 잠그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이번에 갈 출장에서 즐겁게 잘 다녀올 좋은 일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막연히 복수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노란 봉투에는 보내는 사람의 주소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는 봉투를 열고 몇 장의 종이를 꺼냈다. 거기에는 흐릿한 사진 한 장과 대부분이 로버트가 얘기한 것의 반복이었지만 상황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들, 그리고 브렌트 요원으로부터의 짧은 메시지가 있었다. 사진 속의 여자가 에비 쇼라는 것과, 예상한 대로 로버트에게 FBI 당국이 모든 면에서 협조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복사를 해서 선명하지 못한 사진을 들고 세밀하게 살폈다. 너무 상태가 안 좋았다. 한 여자가 계류장의 선착장에 서 있고, 그녀 뒤로는 모터보트들이 정박되어 있는 사진이었다. 그래, 이 여자가 에비 쇼인 것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머리가 부스스한 살이 쪄 보이는 단정치 못한 금발머리 여자라는 것 외에는 뭐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절대로 마타하리 타입은 아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차림이 너무 형편없어서 그는 자신의 미적 감각이 훼손되는 느낌까지 들었다. 진흙탕에서 경기하는 여자레슬러 같은, 욕심이 너무 많아 나라를 팔아 넘기는 야비한 시골뜨기 여자와 상대해야 하다니. 그는 다소 거칠게 서류들을 봉투에 집어넣었다. 랜든 머서와 에비 쇼를 법의 심판대에 세울 날만이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