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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163)화 (163/163)

163화

그녀를 구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렉스의 혀가 덜덜 떨고 있는 목덜미를 핥았다. 무엇보다 귀한 동시에 너무나도 예민한 이곳은 생명의 정수다. 수지라는 본질. 렉스는 목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좋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눈꼬리를 휘면서 말했다.

“이 의식이 끝나면 너랑 그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약속해.”

“아읏! 흣!”

“물론 언제 끝날지 나도 장담하지 못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렉스가 짓궂게 웃었다. 신음에 헐떡이던 수지는 곧 빨갛게 얼굴이 물들었다. 그가 고개를 내려 수지 다리 사이로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아……!”

까만 머릿결이 하얀 살에 달라붙었다. 검은 가닥가닥, 땀에 젖어 허벅지에 비벼질 때마다 수지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길고 축축한 혀가 덩굴처럼 그녀의 멍울을 감쌌다. 그 음란함이 얼마나 치밀한지. 수지는 끝내 울먹이고 말았다.

“흐읏!”

열기가 진득하다. 늪지 한가운데, 가장 위험한 존재가 머무르는 곳답게. 그리고 그 상태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 * *

미카엘은 초조하게 하늘을 바라봤다. 옆에서 무디스가 걱정해 봤자 달라질 건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곧 왕국에서 기구를 타고 사람이 올 것이다. 로퍼를 통해 평화 협정의 사신을 보내겠다고 한 왕국은 협상에 걸맞은 인물을 보냈다고 했다.

‘설마 알다리스 후작?’

어쩌면 란드 공작일 수도 있다. 왕국을 움직이는 주요한 대신 셋을 떠올려 본 미카엘은 제가 늪지를 헤매다가 주운 인물을 바라보았다.

“추, 추워…….”

제 옷자락을 꽉 붙든 채로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남자. 수지를 뒤쫓다가 만난 로도스 백작이다. 주요한 대신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그는 늪지의 괴물과 식물에 호되게 당했는지 계속 얼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머리 셋 달린 도마뱀에게 잡아먹히려던 걸 구해 주었는데 그래서인지 소년 기사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화장실까지 따라와서는 말이다. 무디스가 혀를 끌끌 찼다.

“지 좋을 대로 남에게 붙는 놈인데 왜 살려 준 거냐.”

수지인 줄 알았다. 로도스 백작인 걸 알았으면 결코 구해 주지 않았을 거라고 미카엘은 가만히 생각하며 저편을 바라보았다.

늪 전역에 종소리가 울린 날로부터 벌써 이틀이 지났다.

그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미카엘은 해변에 그럴싸한 임시 거처를 만들었고 아더와 함께 떨어진 기계 부품을 주워 마나 보충 기계를 만들었다. 부족하나마 연명할 수 있는 동력 장치를 만든 것이다. 로퍼는 그걸 관리하고 개발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언제든지 늪지를 떠날 수 있었지만 그는 이곳에 머물며 늪지의 기운으로 마나로 전환하는 기계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늪지의 힘이 무궁무진한 거 같다며.

‘역시 늪지는 매력적이지!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니까!’

무디스는 로퍼의 행보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손에는 매일 같이 새롭게 조사할 신비로운 풀들이 한 아름이었다. 벌써 새롭게 조합한 약으로 몸이 많이 좋아진 그는, 하늘을 노려보는 미카엘에게 힘내라고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거처 옆쪽에 설치된 화로를 보고 그 앞의 소년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다 먹겠다! 작작 맛봐라!”

노인의 호통에도 소년은 까닥하지 않았다. 습지를 돌아 해변을 축축하게 감싸는 바람에 기분 좋게 파란 머리카락을 흔드는 소년, 아니 로난은 해맑게 수프를 퍼먹기만 했다. 그 옆에는 역시 비슷한 분위기의 황금빛 사슴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모아 놓은 채소를 먹고 있었다. 무디스가 투덜거렸다.

“수지는 어디서 저런 음식 축내는 것들만 데려왔어?”

신성하기는 개뿔이다. 고개를 절레 저으며 치료사는 임시로 만든 실험실로 향했다. 그는 왕성에서 사신이 오든 기구가 오든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제가 공격이나 방어에 도움이 못 되는 걸 알아서 할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실험에 임했다. 한창 그의 실험실에서 흰 연기와 보라색 연기가 뿜어져 나올 때, 아더가 번쩍이는 쇳덩이를 하늘에서 발견했다.

“기구가 온다!”

미카엘은 팔을 뻗었다. 혹시나 있을 기습에 대비해 마나를 뿜자 로도스가 질겁하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곤 임시 거처 속으로 쏙 줄행랑을 쳤다. ‘역시.’ 사람은 안 변한다고 생각하면서 미카엘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사령관님께선 대체 언제 오시는 거야.”

이럴 땐 역시 가장 무서운 자가 제일 믿음직하다고 할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난이 팔딱 뛰며 누군가를 반겼다. 저 멀리에서 숲에서 빠져나오는 남녀 한 쌍이 있었다. 미카엘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기다리던 사령관이 아닌 여자를 보고서였다.

“드디어 기구가 왔군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해변에 서서 담담하게 하늘을 올려보는 여자. 두려움보다는 침착함이 느껴지는 그녀는 이 시간을 신중하게 기다린 듯하다. 미카엘은 그녀가 오자 편안해진 마음으로 대답했다.

“방금 도착했어요. 공격 낌새는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수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선 사내에게 물었다.

“렉스가 보긴 어때요?”

나른해 보이기까지 한 그는 그제야 심장이 움직이기 시작한 로봇처럼 하늘을 향해 눈을 빛냈다.

“구식 기구인데. 없어졌어야 할 고물을 타고 왔군. 재밌는 건.”

그가 의외란 듯이 말했다.

“한때 나만큼이나 굉장한 발명품이었다는 거야.”

“저게요?”

수지는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첫눈에 기구의 연식을 알아본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구 앞쪽에 달린 작은 기를 확인했다.

“백기가 걸려 있군.”

“백기 말입니까?”

그제야 미카엘은 멈칫해서 기구의 선두를 자세히 바라봤다. 그의 말대로 항복과 휴전을 상징하는 하얀 기가 나풀거리고 있었다. 놀란 것도 잠시, 곧 기구에서 수십 명의 사람이 내려왔다. 초췌하고 비틀거리는 어딘가 원시적인 옷차림의 무리. 수지는 그 선두에서 한 여자를 알아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로지?”

“수, 수지……? 맙소사, 정말 수지예요?”

그녀는 소리 지르며 달려왔다. 경계심이 가득한 렉스 때문에 수지를 안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수지를 만난 게 너무 반갑다는 듯이 펑펑 눈물을 흘렸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풀어 준다고 해서 무척 놀랐거든요! 지하 감옥에서 죽는 줄 알았던 터라서! 흑,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파루랑 아버지도 많이 아팠고 친구들도 굶어 죽었던 터라……! 그, 근데 우리를 놓아준다네요? 그동안의 감금도 사과하며 치료해 줬고요! 믿을 수가 없었는데, 수지를 보니 알겠어요! 이번 일 수지가 해 준 거죠?”

그러나 수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황한 그녀를 대신해 렉스가 답을 줄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도 놀랐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직접 올 줄 몰랐는데.”

“저 사람이 누군데요?”

지팡이가 없으면 제대로 서기도 힘들 만큼 병색이 짙은 남자. 호위 기사도 없이 홀로 서 있는 비단옷의 노인을 보면서 수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령관이 대답했다. 저도 오랜만에 보는 인물이었다.

“이 늪의 주인.”

“네?”

“이 나라의 국왕 말이야.”

무척 놀랐다. 곧 그가 그들을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수지는 렉스는 부르는 것이겠지 하면서 가만 있었다가 그가 저를 손가락으로 콕 찍자 더 흠칫해서 어깨를 들썩이고 말았다.

“저, 저라고요?”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알아본 거지.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까.”

수지는 망설였다. 자신이 홀로 왕을 대면해도 될까. 혹시 말실수라도 하면, 렉스에 대해 제대로 항변하지 못하면 어쩌나. 그가 반역자로 찍히는 건 아닐까 두려워져 렉스를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야. 부담되면 바로 없애 버리는 방법도 있어.”

살기를 번뜩이는 그에게 수지는 얼른 두 손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가 볼래요! 우리가 논의해야 할 건 결국 저분과 관련된 일이니까.”

수지는 용감하게 걸음을 옮겼다. 렉스는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게 국왕을 노려보면서 수지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그를 없애겠노라 결심하며.

가까이서 본 국왕은 훨씬 커 보였다. 마르고 병약한 행색인데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긴장한 수지를 찬찬히 살펴보며 무게 있는 첫 말을 건넸다.

“그가 인간일까, 무기일까.”

“!”

“앞으로의 논의는 그 정의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거야.”

수지는 왠지 렉스를 쳐다보고 말았다. 저만 바라보고 있는 사내. 죽음의 기사인 그는 자신 없이는 못 산다는 사랑꾼이었다. 무기일 리 없다고, 수지는 마음속 확신을 뚜렷하게 하며 그를 바라봤다. 세월의 풍파를 겪은 듯한 어조가 이어졌다.

“나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네. 처음부터 그러했지. 비록 아들에게 일을 맡긴 뒤에는 뜻하지 않는 개조로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왔지만 여전히 그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해.”

“…….”

“자네도 그러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안도하듯이 한숨을 내쉬는 게 아닌가.

“다행이군, 생각이 일치해서.”

한 나라의 왕이자 누구보다 강한 나라의 군주인데 왜 그런 걸까. 의아하다는 수지에게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가 우리 왕국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부술 수 있다는 걸 아네. 저를 맘대로 부리려는 한 왕자에게 화가 나서, 모든 걸 때려 부순다고 해도 사실 할 말이 없어. 모든 걸 이제야 알게 된 걸 사과하지. 하지만 그를 더 미워하진 말아 주겠나. 왕자는 자신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렀어. 어떻게 아냐고? 연금술로 확인했지. 더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수지는 차마 뭐라고 위로하지 못했다. 굳어버린 그녀를 보면서 왕은 씁쓸하게 웃었다.

“괜찮아. 아비로서의 슬픔을 논하자고 이 자리에 온 게 아니니까. 나는 국왕으로 여기에 섰어. 사령관과 화해하고 싶다네. 영원한 그의 우방이 되고 싶지. 괘씸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다른 나라에 그를 빼앗기고 싶지 않으니까.”

“…….”

“한 나라의 군주가 되면, 머릿속에 항상 그게 제일 우선이지.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무사히 보존할 수 있을 것이냐가.”

왕은 제 머리를 톡톡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느리지만 현명한 자처럼 천천히 눈을 빛내며 그녀에게 말했다.

“자네가 신경 썼던 사람들을 우선 풀어 줬네. 사과의 의미로 이곳으론 이젠 기사나 행정관이 찾아오지 않을 거야. 자네의 요청이 아니라면 나도 오지 않겠어. 이곳은 독립 영지나 마찬가지니까.”

“독립 영지요?”

“자네가 원한다면. 나는 자네를 늪지 섬 특별 협력관으로 임명하고 싶어. 그대의 의무는 단 하나뿐이지. 그를 여기에 붙들어 두는 것. 늪지에서 잘 지낸다고 가끔 보고서만 전해 주면 좋겠어. 그렇게 해준다면 예전처럼 마나를 제공해 주지. 어쨌든 그에겐 안정적인 마나 공급이 필수일 테니까.”

“왜 제게 말씀하시죠? 직접 그에게가 아니라.”

“그는 자네 말만 들을 테니까. 누구라도 알 거야. 이 땅에 만연한 종소리를 듣는다면.”

멈칫. 수지는 얼굴이 조금 붉어지고 말았다. 왕도 알고 있다니. 민망하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저하고 협상하려고 하는 그의 진의를 이해하고 만 수지였다.

“생각을 좀 해 봐도 되나요?”

고민이 깊어진 얼굴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늦지만 말게. 보다시피 나는 저렇게 발랄한 노인네가 아니니까.”

그가 쳐다보는 곳을 보자 무디스가 실험실 밖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로난과 사슴을 혼내려는 듯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쫓아다니고 있었다. 그게 더 재밌어 병아리처럼 팔딱거리며 도망 다니는 로난과 사슴이다. 그에 더 성질이 나서 무디스가 온몸을 떨며 고래고래 소리치는데…….

‘진짜 발랄하긴 하네.’

어색하게 웃고만 수지였다. 국왕이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돌아섰다. 수지와 친구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이.

깔끔하게 제안하고 사라진 그를 보는 수지는 말이 없었다. 렉스가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다 들었어요?”

내가 청각까지 완벽한 거 잊었냐며 렉스가 투덜거렸다. 수지는 그 말이 재밌어 또 웃었다. 이내 그녀는 멈칫했다가 말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싶은 대로 해. 왕의 말을 따르지 않아도 되니까.”

여차하면 왕국을 부수고 마나 광산을 가져오면 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그에게 수지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참 좋네요. 자유란 거.”

저 멀리 가족들과 껴안은 채 해방을 만끽하는 루지 일행이 보였다. 안도하며 돌아다니는 미카엘과 아더, 흥이 난 로난과 사슴까지. 실험실에서 나와 부산스럽다고 외치는 무디스까지 골고루 살펴본 수지는 그들이 이 늪지에 속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늪지 속에서 자유로운 생이라고.

“근데 어딘가 속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응?”

“왕의 제안이요. 받아들이려고요.”

수지는 고심했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몇 가지만 분명히 해서요. 제가 이 섬의 주인이라는 거.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늪지의 소유자라는 걸 확실히 했음 좋겠어요.”

이 섬을 지키고 싶다. 렉스와 함께 살아갈 장소를. 소유권을 확실히 하고 싶다는 수지의 말에 렉스가 진지하게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참 그것도 분명하게 해 달라고 해.”

“뭐요?”

“내 생식 기능.”

“아.”

수지의 얼굴이 빨개졌다.

“애는 열 명이면 되겠지?”

렉스는 수지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멧돼지 수컷이나 할 말을 모른 척하며 수지는 찰싹 달라붙은 그에게 물었다.

“근데 렉스. 보고서 써 봤어요?”

“왜?”

“왕국 공무원이었으니까 잘 알 거 같아서요.”

“그런 건 병졸이나 하는 거야. 미카엘에게 떠넘겨.”

“하지만…….”

“우린 애나 만들자고.”

“…….”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둘의 모습을 금세 덩굴이 감춰 버린다. 늪지의 것은 함부로 내어 줄 수 없다는 듯이. 습습한 열기를 따라서 사랑의 존재를 증명하는 종소리만이 그 틈새로 들려올 뿐이었다.

[ 늪지 보고서 본편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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