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아가씨!”
그가 불러도 멈추지 않았다. 안개 속으로 사라진 그녀는 늪지에 서식하는 청개구리 같았다. 언제 저렇게 날쌔지신 거지. 전생에 늪지 공주였을 거라 확신하며 미카엘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따라가긴 해야겠는데. 푸드덕. 새와 사슴이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따라잡는 게 부럽기만 했다.
‘나도 동물이고 싶다.’
나도 늪지의 생물이고 싶어! 미카엘은 다음 생엔, 이라고 조용히 중얼거리며 그녀를 뒤따라 달렸다.
한편 수지는 어느새 다가와 제 옆에서 걷고 있는 동물 둘을 보았다.
“와 줘서 기뻐.”
먼저 파란 새에게 말했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부드럽게 꼬리 털이 흔들렸다. 그때, 커다란 황금 뿔이 옆에서 서걱서걱 움직였다. 저를 알아달라는 것에 수지는 조금 웃으면서 텁수룩한 등을 쓸어 주었다. 덩치는 큰데 커다랗고 순박한 눈망울이 아기 같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고마워. 하지만 위험해지면 달아나야 해.”
그렇게 말하는 눈에는 걱정이 깊었다. 쫓아오긴 했지만 두렵지 않다는 건 아니다. 늪지는 원래 위험한 곳인데 지금은 렉스 때문에 더 음험해졌으니까.
‘하여간 굉장한 남자야.’
늪지를 이렇게 변화시킬 존재는 많지 않을 것이다. 수지는 어두컴컴해진 늪지를 바라봤다. 짙은 안개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사슴의 도움을 받아야 할까? 막막함이 올라올 때 질척이는 진흙땅이 눈에 들어왔다. 안개도 차마 가리지 못한 그 진 땅에는 군화가 반듯하게 찍혀 있었다.
‘이건 렉스고 이건 괴물들 건가?’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 렉스도 진흙에선 더 깊은 흔적을 남겼다. 수지는 그의 발자국을 관찰했다. 뒤쫓는 괴물들보다 훨씬 반듯하고 떨림도 없었다. 확고한 신념과 자신감으로 옮기고 있다는 듯이.
‘파괴하려는 자는 다 이런 걸까.’
수지는 뒤쫓는 괴물들의 발자국이 외곽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성급한 모양으로 찍혀 있는 것을 보았다. 화가 난 듯 힘이 잔뜩 실린 것이 무시무시했지만 렉스의 것만큼 위압감을 주지 못했다. 수지는 렉스가 화가 나서 세상을 파괴하려는 건 아닐 거라고 문득 생각했다. 그랬다면 괴물들 발자국처럼 군화가 찍혔을 테니까.
‘그래도 걱정돼.’
늪지가 괴물들을 보냈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만약 늪지가 진심으로 렉스를 싫어하는 거라면 어쩌지? 그를 죽이고 싶은 거라면? 새삼스레 걱정되고 두려워지는데 흙탕물에서 놀고 있는 작은 벌레들이 눈에 들어왔다. 군화 자국에 고인 물에서 어느새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 늪지는 그를 미워하지 않아.’
작은 벌레에게서 그런 확신을 받는다고 할까. 뭉클해진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막막함이 걷힌 그녀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좋아.’
늪지는 여전히 위험했지만 그녀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덩굴이 나타나면 손으로 헤치고 구덩이가 나타나면 바닥을 찌르는, 능숙하게 헤쳐 가는 사람이 되었다. 간혹 위협적인 괴물의 등장엔 움츠러들기도 했지만 라이터로 불을 붙인 나뭇가지를 흔들며 시간을 벌 줄 아는 그녀였다. 그사이 새와 사슴이 성난 괴물들을 쫓았다.
그렇게 협동하며 30분쯤 걸었을까. 현지 생물의 도움으로 훨씬 빠른 길로 목적지에 다다른 그녀는 기시감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긴.’
울창한 밀림 지대를 벗어나자마자 나타난 기이한 비석 지대. 신발에 닿는 삐죽삐죽한 돌이 낯익다. 수지는 땀으로 젖은 이마를 내버려 둔 채 샅샅이 풍경을 살폈다.
‘왜 이곳으로 왔지?’
그녀는 떨리는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거대한 흑색 나무 앞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어둠과 불꽃에 휩싸여 멸망의 기운을 뿜어내는 채로. 그의 주변으로 사나운 마나가 몰아쳐서 안개도 괴물도 접근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가까이 가야지, 마음먹었지만 한편으론 의구심도 올라왔다.
‘그가 싫어하면? 날 공격하면?’
그녀는 떨면서 걸음을 옮겼다. 용기와 두려움이 반반 섞인 그 조심스러운 행보를 천천히 지켜보는 존재 하나가 있었다. 웅크린 채 렉스의 빈틈을 노리던 뱀 괴물이었다. 그는 긴장으로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수지를 향해 입을 벌렸지만 어디선가 날아온 마나에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레, 렉스?”
가까이에서 검게 타 버린 괴물을 보며 수지는 당황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대답뿐이었다.
“가.”
“왜요?”
“위험하니까!”
이 힘을 개방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그러나 대가도 알 수 없는 이 힘을 써야만 한다는 맹목적인 생각이 그를 움직였다. 파괴하라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커지는 걸 느끼면서 렉스는 꿈쩍도 하지 않는 수지에게 외쳤다.
“내게서 멀어져!”
“그럴 순 없어요!”
수지는 고개를 저었다. 렉스는 답답해졌다.
“가라니까, 난……!”
세상을 파괴하고 생명을 죽일 것이다! 그런 존재로 태어났으니까!
“죽음의……!”
무기라는 말이 채 나오기 전이었다. 심장에서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빛이 뿜어져 나왔다. 수지를 보자 더욱 격렬하게 뛴 심장은 제가 낼 수 있는 모든 마나를 끌어냈다. 찬란하게 뿜어져 나온 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 일대를 뒤덮었다. 붉은 빛이 온 섬을 감싼 것이다.
“아……!”
땅이 움직이고 공기가 전율한다. 흙이 펄떡거렸으며 풀이 술렁거렸다. 나무와 동물들이 웅성거렸으며 벌레와 미생물까지 꿈틀거렸던 그 찰나. 렉스는 팔을 뻗었다. 수지가 빛에 휘감기는 모습에 절망하면서.
안 돼.
렉스는 탄식했다. 지금 그녀가 무방비한 상태로 마나에 휩싸인 건가? 그는 얼이 빠져 고개를 수그렸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한 거지? 힘에 집착한 나머지, 파괴욕에 휩싸인 나머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를 없애 버리고 만 건가?
“나, 나는…….”
정말 왕자가 주장하는 죽음의 무기에 불과했을까?
“나는….”
파괴와 죽음만 일삼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소모품에 불과한 것인가?
“…….”
그가 더할 나위 없는 충격에 굳어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그에 뺨에 와 닿는 감촉은 그러나 날카롭지 않았다. 부드럽고 조화로운 선율을 지니고 있었다.
“……?”
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웬 나무가 보였다. 막 돋아난 것처럼 흑색 나무껍질이 촉촉했다. 렉스는 이게 웬 생뚱맞은 아기 나무인가 고개를 갸웃했다. 잎사귀가 종 모양인 나무는 바람이 흔들릴 때마다 아름답게 울었다. 선율은 은은했지만 소리는 작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울려서 웅장하기까지 했다.
‘잠깐, 함께 울려?’
고개를 들자 같은 나무 수십 그루가 보인다. 시야를 멀리 하면 멀리 할수록 더. 섬 전체에 검은 나무가 번쩍거리는 것을 본 렉스는 그제야 제가 마나로 무얼 만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파괴가 아니라 창조한 것이다. 늪지 전역에 종 나무를.
‘이게 뭐야.’
렉스가 깨닫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디서 흑, 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빛에 휩싸여서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녀가 있었다. 다친 곳은 단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는 몹시 기뻐서, 아니 너무 좋아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신은 바보예요.”
그녀가 충격적인 말을 하기 전까지.
“뭐?”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은 그에게 수지는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왜 여기로 온 거예요?”
“그야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
“종 나무를 키워서요? 저렇게 마나를 써서 어떻게 세상을 없애요? 종 나무숲을 만들면 모를까. 묘목 소유주는 되겠지만 세상은 파괴할 수 없어요.”
훌쩍거리면서도 논리적으로 말하는 그녀였다. 렉스는 제가 누구인지 그녀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는.”
“알아요, 죽음의 무기란 거.”
와락. 어느새 그는 수지에게 안겨 있었다. 그 품은 너무나 따뜻해서, 렉스는 젠장, 너무 좋잖아. 라는 말을 절로 하고 말았다. 수지는 조금 웃었다. 예전의 그구나. 여전히 무섭고 두려운 나의 남자.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해졌다. 수지는 읊조리듯이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은 죽음의 무기가 아닐 거예요. 그럴 리가 없어요. 마나로 나무를 키우는 남자가 어째서 무기예요? 수지 바보라면 모를까.”
“뭐?”
바보라는 말이 또 나왔다. 참신한 별명에 렉스는 눈썹을 살짝 구겼으나 수지는 오히려 가슴 벅차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아직도 당신이 이곳으로 온 이유를 모르겠어요?”
조용히 묻는 그녀에게 렉스는 멈칫했다. 그가 깨어나서 이 늪지로 오려고 했던 이유, 힘에 집착하고 마나를 쓰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렉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답이 제 눈앞에 있었다.
“너를 행복하게 하려고.”
“흑.”
그녀는 결국 울컥해서 더 큰 소리로 울고 말았다. 그를 꼭 끌어안으면서.
그렇게 온기와 애정 속에 휩싸여서야 그는 모든 걸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뒤흔들린 머릿속, 오랫동안의 개조. 엄청나게 화가 났고 미칠 듯이 짜증이 났다. 폭주할 만큼의 분노가 끓어 넘쳤지만 그 와중에도 제가 생각했던 건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연인을 기쁘게 할 것인가.
딴 건 다 상관없고, 어떻게 그녀를 다시 웃고 행복하게 만들 것인가만.
그러다가 한 기억에 집중했고 흑색 거목에서 그녀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걸 보았다. 그가 한 일로 인해 너무 기쁘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