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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160)화 (160/163)

160화

수지까지 꾀어내려는 그의 행태에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난 그는 위정자의 목을 틀어쥐었다. 왕자의 안색이 빠르게 푸르러졌다. 끅끅. 게거품을 내뿜으며 눈알을 뒤집는 그의 모습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여느 인간보다 지저분했다. 렉스는 분노를 태웠다.

“제가 당신에게 뭘 원하냐고 물었습니까?”

“커, 커헉!”

“처음부터 죽음을 원했어요. 당신의 목숨을. 마나 공급 때문에 살려 뒀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잖습니까.”

왕자의 동공이 커졌다. 제게 바라는 게 그것뿐이라니.

“하. 하, 하지만, 자넨 날 돕도록 만든 무기인데……!”

“사람을 죽이라고 만든 무기였죠.”

렉스는 짤막하게 정정했다. 멍청한 그를 비웃으면서.

“그래서 지금 그 짓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끄아악……!”

“당신의 바람대로.”

왕자의 눈에 경악이 들어찼다. 뭐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그는 그러할 틈을 주지 않았다. 왕자는 절망감에 입술을 까닥였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생명은 그의 육신에서 발을 뗀 상태였다. 오래지 않아 그의 목이 완전히 꺾였다.

침묵이 찾아왔다. 요란하게 저항하더니만. 이제야 죽음을 앞둔 이에게 어울리는 허망함이 찾아온 것이다. 렉스는 무표정하게 손에 힘을 풀었다. 두통이 말끔히 사라진 게 좋았다. 가라앉은 분노를 느낄 때 미카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려 왔다.

“정말 끝난 겁니까? 진짜로요?”

“의심되면 너도 똑같이 해 줄까.”

미카엘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마나 기사를 흡수할 수 있는 상관을 잠깐 두렵다는 듯이 쳐다본 그는 늘어진 시체를 그제야 샅샅이 살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죽었다니. 허탈하면서도 시원하다. 오래 앓아 온 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미카엘은 왕자의 몸에 숨이 붙지 않은 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어쩐지 자유로움마저 느낄 때 근처에 떨어진 검이 눈에 띄었다. 늪지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보검이었다.

“아! 검을 챙기셔야죠. 전하의 유일한 몫인데.”

미카엘은 상냥하게 시체의 손에 검을 쥐여 주었다. 그렇게 똥 묻은 검을 쥔 채, 왕자는 천천히 늪지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진흙이 그를 삼키는 것을 물끄러미 보면서 미카엘은 가만히 다음에 할 일을 생각했다.

‘좋아, 저녁엔 쿠키를 구워야지.’

무슨 쿠키를 구울까. 미카엘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위에서 자유롭게 나는 파란 새를 보니 저도 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해방감을 느낀 그가 기쁘게 일행을 돌아보았을 때, 렉스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왜 그래요?”

수지가 당황했다.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마나가 너무 사납게 휘몰아쳤다. 렉스는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다가오지 마! 기억들이 날뛰니까!”

“하지만……, 흣!”

수지는 그를 돕고 싶어 한 발 내디뎠다가 날카로운 마나에 볼을 긁히고 말았다. 렉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고 미카엘은 다급해져서 외쳤다.

“가지 마세요! 폭주하고 계신 겁니다!”

수지는 떨리는 눈으로 렉스를 살폈다. 울긋불긋한 그의 피부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붉은 강물 같았다. 무섭게 콸콸 흐르는 모양이 그의 몸 상태를 보여 주는 것만 같다.

수지는 막막함에 멍해지고 말았다. 그의 주변으론 정돈되지 않은 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었다. 마나의 광풍이었다. 그에 휘말리면 흙이나 풀, 어떤 것도 사라졌기 때문에 미카엘은 경고했다.

“지금 다가가면 아가씨도 다치실 겁니다! 물러나는 게 최선이에요!”

도망가는 게 최선이라고? 수지는 입술을 달싹였다.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는데. 험난하고 혼란스러운 고난의 바다를 건너 이제야 서로를 보듬어 줄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카엘이 그를 향해 공격 자세까지 취한 걸 보자 다시 파도가 내려치는 격정의 바다로 떠밀린 기분이었다.

“제, 제가 어떻게 도와주죠?”

수지가 애써 울음을 삼키며 물었다. 하지만 렉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썹만이 더 처참하게 구겨졌을 뿐이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은데. 렉스는 날뛰는 머릿속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하지만 억눌려 있던 기억들은 쉬이 말을 듣지 않았다. 두통 때문에 여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기억들은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듯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깨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빌어먹을!’

번뜩이며 날뛰는 사건들이 그의 시야를 방해한다. 보드라운 그녀를 앞에 두고서 하필 지금 이러다니! 언젠가는 겪었어야 할 일이지만 그는 몹시 화가 났다. 기억을 저주하고 과거를 없애고 싶어졌다. 어차피 이런 것들 따윈, 제게 도움 하나 되지 않을 텐데! 그렇게 과거를 향해서 분노에 증오심을 더하자 잠잠해지던 파괴욕이 일어났고, 온몸에서 불길이 솟는 것처럼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렉스!”

커다란 불꽃에 휩싸인 그는 형체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저러다가 죽는 건 아닌가,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렉스를 응시했다.

“크, 으으윽!”

한편 빛 속에서 렉스는 정리되지 않은 기억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차례를 지키지 않고 머릿속을 푹 찌르는 단도처럼 그를 괴롭혔다.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해서일까. 그는 신음을 문 채로 기억의 번쩍임을 감당해야 했다. 고통스러운 기억. 실험실에 갇힌 채로 수없이 비명을 지르던 때가 기억난다. 오로지 아픔뿐이었다.

“흐, 으으큭!”

이 세계에 도착했을 때도 비슷했다. 늪지에 도착해 생각했던 건 오로지 생존이었다. 그러나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육체 없는 의식이 된 채 오랫동안 떠돌았다. 외롭고 슬픈 방황. 온기 없는 그 떠돎에 돌아온 건 실험뿐이었다. 기나긴 개량뿐이었다.

렉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억들이 되살아날수록 그의 핏속에 개량된 욕구도 고개를 드는 것이다. 네가 어떻게 다시 태어난 건지 잊지 말라는 듯이. 들끓는 파괴욕과 야만성에 렉스는 더욱 음험해졌다.

‘응?’

그때. 구석에서 작지만 은은하게 기억 하나가 빛났다. 지나칠 수도 있을 만큼 연약한 빛이었지만 렉스는 애써 그것에 집중했다.

‘너는…….’

그 속에 작은 소녀가 있었다. 자신을 향해서 붉어진 볼로 웃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그 예쁜 미소에 넋이 나가는 것도 잠시, 어느새 기억은 커다래진 아가씨가 까만 동굴 속에서 저를 간절하게 응시하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렉스는 멈칫했다. 그녀를 어째야 할까. 죽여야 할까? 살려야 할까. 이상하게 망설여질 때 어느새 장면은 다시금 바뀌어 스스로를 소개하는 그녀를 비췄다.

이수지.

그녀의 이름이다. 렉스는 오래전 기억 속의 소녀의 이름이 그러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소녀와 그녀. 각기 다른 차원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실 같은 사람인 것이다. 이 놀라운 진실에 감탄할 겨를도 없이 렉스는 또다시 기억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수지에 대해 더 알고 싶었지만 다른 기억들이 떠올라 그를 방해했다. 렉스는 아쉬워하며 앞다투어 펼쳐지는 과거의 향연을 바라봤다. 어둠의 뭉텅이 같은 그 파편들은 저를 잊지 말라는 듯이 저마다 요란하게 빛났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모두 그의 일부란 듯이.

“……렉스!”

그때 저를 기억의 뭉치에서 끄집어내는 목소리가 있었다. 파괴하라는 본능의 목소리에 저항하며 렉스는 그 익숙한 부름에 집중했다. 붉은 빛 너머에 어렴풋이 그녀의 형상이 보였다.

“괜찮아요? 힘들면 내 손을 잡아요!”

그녀는 마나 바람에 긁히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얗게 질려서도, 겁을 먹어서도 꿋꿋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소년 기사가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래야 한다는 듯이. 렉스는 수지를 바라보았다.

“내 말 들리죠?”

“…….”

“대답해요, 렉스!”

그 외침에 번쩍 정신이 든다. 그녀의 명령.

수지의 외침과 동시에 렉스의 눈에 이지가 돌아왔다. 그 변화가 경이로워 수지는 잠시 말을 잃었다.

렉스는 혼돈에서 깨어나 붉은 빛에서 빠져나왔다. 어둠이 그의 전신에 상주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까보다 훨씬 진정되어 보였다. 그럼에도 검은 망토처럼 출렁이는 그의 기운이 어마어마해서 수지는 말을 더듬거려야 했다.

“기, 기억은 괜찮아요?”

“아직도 혼란스러워.”

거짓이 아니란 듯이 그의 미간이 짙게 찌푸려져 있었다. 수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아요, 도와줄 사람이 있어요! 일행 중에 실험실에서 일한 연금술사가 있거든요! 그에게 말하면 당신을 아프지 않게 해 줄 거예요!”

수지는 물기에 젖은 눈으로 외쳤다. 렉스는 멈칫했다.

“안 돼, 난 아직 할 일이 있어.”

“어떤 일이요?”

“모르겠어. 하지만 해야 해.”

그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이 눈을 빛냈다.

“내가 늪지로 돌아온 이유가 그거니까.”

“네?”

수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막막해져서 바라보고 말자 그의 깊은 시선이 따라온다. 슬퍼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길 역시 깊게 침잠해 있었다. 말문을 잃었을 때 남자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걸어가는 그를 어둠이 뒤따랐다. 그의 기운에 반응한 것처럼 회색 안개도 짙어졌다. 결국 안개에 휩싸여 사라지고 만 그를 수지는 아득하게 바라봤다.

그때였다.

“조심하세요!”

미카엘이 진흙에서 일어나는 녹색 괴물을 발견했다. 몸통이 길쭉한 악어 형태의 괴물이었다. 잠자고 있던 거대 괴물은 수지나 미카엘에겐 관심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녀석은 렉스를 쫓고 있었다. 그런 게 악어 괴물만은 아니란 듯이 곧 거대한 애벌레도, 몸이 단단한 가재도 그를 따랐다.

“사령관님의 힘에 끌린 겁니다. 늪지도 그분이 위험하다는 걸 느낀 거죠!”

미카엘은 얼른 이 섬을 벗어나야 한다는 듯이 말했지만 수지는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하나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이란 게 대체 뭘까요?”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파괴적인 힘이 그를 감싸고 있다. 미카엘은 안타깝지만 자신의 비관적인 예상을 내놓았다.

“폭주하셨다면 파괴욕에 사로잡힌 상태일 테니까요. 미친 마나 기사들처럼 세상을 파괴하려고 들 겁니다.”

“설마…….”

“가장 좋은 건 저분에게서 멀어지는 겁니다. 파괴로 소멸할 반경에서 최대한 떨어지는 거죠.”

“……!”

수지는 그 말을 듣고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를 책임진다고 했는데.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내버려 두는 건 책임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언제까지 자신과 함께해 달라는 그의 요청도 그녀를 부추기는 요소였다. 수지는 소년 기사에게 ‘도망가요, 그는 제가 막을 테니.’ 하고선 안개 속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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