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무디스가 격하게 기침을 토해 냈다. 금세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흥분한 그에 로퍼는 상체를 뒤로 무르고 말았다. 그만큼 치료사는 분노한 상태였다.
하나 그건 그만이 아니었다. 마나 기사인 미카엘도, 마나 기사라도 부르기 애매해진 아더도 로퍼의 설명에 착잡한 얼굴이었다. 동의 없이 자행된 수많은 실험에서 살아남은 의식은 과연 얼마나 될까. 자신들은 운 좋게 육체와 의식의 분리 없이 마나 기사가 된 경우였지만 보통은 그렇지 못했다. 대부분은 발명이란 미명하에 몸과 분리되어 사라졌다.
미카엘은 더는 그런 소리 없는 죽음들을 외면하기 어려워졌다. 고개를 올려 바라본 하늘은 구름이 밀려와 어둡기만 했다.
“저렇게 분노하신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군요.”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무기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늘 낯선 이들에게 둘러싸여 고통스러운 실험을 당했다면. 저라도 모든 걸 파괴하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미카엘은 처음으로 사령관을 애잔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애잔함을 수지에게 이어 갔다. 그런 과거를 지닌 사령관을 감당해야 하는 그녀에게.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이상하게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힘겹게 입술이 떼어졌다.
“그게.”
핏기가 사라진 얼굴에선 혼란함만이 가득했다. 렉스가 범상치 않은 과거를 지녔을 거라 어렴풋이 생각하긴 했었지만 차원 이동한 소년이었다니.
“그게…….”
수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반복했다. 어느새 그녀는 로퍼를 바라봤다.
“저도 늪지로 이동했어요. 다른 세계에서 말이죠. 이런 저와 렉스가….”
묻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다. 로퍼는 진실을 고백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눈을 끔벅거렸다.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그녀는 사령관의 비밀에 큰 충격을 받은 걸까? 어쩐지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저희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거죠?”
아, 둘의 상관관계가 궁금한 거구나. 로퍼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같은 파장이 나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령관님의 의식하고 아가씨하고요! 저희는 두 분이 같은 세계에서 왔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죠. 그것도 아주 근접한 지역에서요! 물론 그것 때문에 사령관님의 의식이 불안정하게 되었다고 보긴 무리가 있지만…….”
“같은 차원, 근접한 지역이요?”
수지는 말을 끊었다. 미카엘이 부축하지 않았으면 무릎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휘청거리는 그녀에 로퍼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네, 네. 아마도 동일 지역일 거예요. 파장이 거의 비슷하니까. 각각의 세계, 땅에는 내뿜는 파장이 다 다릅니다. 연금술로 파악이 가능하지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의뭉스러운 늪지가 같은 차원의 지역 사람들 둘을 끌어당긴 겁니다!”
로퍼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이유도 모르고 앞으로도 그럴 건지도 분명하지 않지만요. 적어도 늪지가 두 분을 끌어당긴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물론 조사가 중단됐기 때문에 이는 사견입니다만….”
“왜 더 조사하지 않았지?”
무디스가 미간을 잔뜩 구기며 끼어들었다. 로퍼는 우물쭈물 대꾸했다.
“질겁하셨으니까요. 로리엔 님이. 그, 그러니까 고참 연금술사 하나가 늪지가 두 사람을 끌어당긴 이유가 서로의 존재가 필요해서가 아니냐는 의견을 냈었거든요. 로리엔 님은 그 의견을 무척이나 좋아하지 않으셨죠. 위협이 된 건 어쨌든 명확하다고요. 자세한 조사는 관두고 현상의 원인을 없애는 데 치중하자고 한 거예요.”
“현상의 원인? 수지를 없애려고 했다는 말이냐?”
“네에…….”
로퍼는 수지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무디스가 화를 버럭 냈다.
“하여간. 높은 놈들이란 하나같이 똑같다니까. 대의를 쫓는 것처럼 말하지만 모든 게 사사롭지! 이기적인 욕망으로 일을 진행하려 해! 연구를 관둔 것! 분명히 수지가 렉스와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해서일 거다! 차원을 넘어서까지 이어질 인연! 그러니 추악하고 어두운 속내로써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지! 물론 너는 그걸 느꼈을 테지만!”
“…….”
“그래서 우리에게 협조하는 거가 아니냐? 그런 그들에게 실망해서!”
쿨럭, 쿨럭. 말을 마친 무디스가 격하게 기침을 터트렸다. 심란하다는 반응이었다. 창백한 수지를 대변한 것처럼 한차례 앓은 노인은 이내 흐물흐물한 팔짓으로 손을 흔들었다.
“어쨌든 이야기를 이어 가라. 속상해도 반드시 들어야 할 것처럼 보이니.”
축 늘어진 노인의 눈이 어느새 수지를 향해 있었다. 로퍼도 두 사람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인지 수지를 보며 천천히 설명을 이어 갔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같은 차원이라서 사령관님의 의식이 불안정해진 건 아닐 거예요. 왜냐하면 두 분이 같이 계실 때 사령관님의 의식은 더 안정되어 보이니까요. 제 생각엔, 그러니까 연금술사인 제 의견으론 사령관님의 의식이 아가씨를 느끼고, 만나지 못할 땐 극심한 불안에 떨다가 정작 만나게 되니 평온을 찾은 게 아닌가 싶어요. 원래부터 함께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수지는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함께해야 했다고?’
그 말이 위안을 준 걸까. 수지는 눈을 꾹 감았다. 래연이가 사라지고 나서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하다가 렉스를 만났다. 낯선 땅, 기이한 늪지에서 만난 두 번째 인연은 참으로 신비했다. 아름답고 무서웠다. 카리반처럼 눈을 뗄 수 없는 그를 보며 수지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참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속절없이 끌리고 마는 거라고.
‘근데 그가 래연이었다니.’
첫사랑의 연이 시공간을 너머 이어진 셈이다. 그에게 끌린 분명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닐 것이다.
‘그와 함께 하는 건 과거 인연 때문만은 아니야.’
지금의 무섭고 냉정한 렉스는 자신이 좋아했던 래연이와는 너무도 달랐다. 연결 지을 수 조차 없게 달라져 있었다. 지금의 그는 늪지에서의 고독한 죽음과 의식으로써의 오랜 떠돎, 14년의 고통과 수십 만 번의 실험을 거쳐 탄생한 사내의 것이다. 다른 육체와 합쳐서 황폐한 삶을 견디고 버텨 온 렉스란 존재의 것이다.
따라서 수지는 현재의 그를 사랑하는지, 래연이란 과거를 지닌 그를 원하는지 제 진심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
‘과거의 연이 있기 때문에 그를 좋아해야 한다는 건 어쩐지 운명이란 것에 모든 걸 맡겨 버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한심한 변명처럼 들리니까.’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벽돌을 쌓는 것처럼 제 자리를 만들어 온 그녀에게 렉스의 일은, 그러니까 사랑하는 남자의 과거는 더 섬세하게 챙겨야 하는 까다로운 종류였다. 간과하거나 대충 넘어갈 수 없는 것. 그가 아팠을 시간을 고려하면 그러한 의지는 더 확고해진다고 생각하며 수지는 고개를 들었다.
상념은 길지 않았다. 여태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터라서 그의 과거만 고려하면 되었으니까. 수지는 확신했다.
‘그가 좋다.’
라고. 세상을 파괴하고 사람을 죽이는 사신일지라도 그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혼란과 불안 속에서 제 마음을 찾자 훨씬 몸이 편안해진다. 떨림마저 멈췄다. 손발 구석구석 힘이 돌고 머리까지 맑아진다고 할까?
그때의 수지는 진흙에서 만개한 꽃송이 같았다. 사랑과 의지로 피어난 꽃. 기괴한 늪지에서 개화한 생명답게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제가 볼 수 있는 하늘을 바라봤다. 저 하늘만으로 부족하다. 그녀는 렉스가 있는 곳의 하늘을 보고 싶었다. 이제는 항상.
‘몸이 좋아졌으니까 그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이상한 확신이었다. 그때 때마침 무디스가 왜 수지만 늪지에서 절로 몸이 낫는 거냐고 로퍼에게 물었다. 무디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단 말이야. 둘 다 같은 차원에서 왔는데 왜 한 사람만 그러는지. 사령관은, 그러니까 초기에 소년이었던 그는 왜 낫지 않고 죽게 된 거지?”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늪지의 마음이 아닐까 싶은데요?”
“뭐? 늪지가 변덕스럽게 회복 능력을 준다고?”
“아, 아뇨! 그 뜻이 아니라……. 처음엔 온 소년은 살리지 못했잖아요. 거기서 늪지가 생각한 거죠. 두 번째로 부른 자는 무조건 살리겠다고. 몸을 다르게 구성한 거예요. 혹여라도 괴물에게 공격당해 죽는 일이 없도록요. 그 때문에 몸이 절로 낫는 게 아닐는지…….”
로퍼는 자신 없다는 듯이 수지를 흘깃흘깃 보았다. 하지만 무디스는 설명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는 박수를 쳤다.
“그럴싸하군! 이 늪지는 의지가 있는 것처럼 반응하니까. 충분히 그런 학습된 사고를 할 수 있을 거다! 이 곳은 무한한 힘과 가능성으로 가득한 장소니까!”
그러면서 늪지 예찬을 이어 가는 무디스였다. 미카엘은 숨을 헐떡이는 아더를 보았다가 수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벽을 오를 것처럼 발을 흙 벽에 대 보고 있었다.
“뭐 하세요?”
“아무래도 나가 봐야 할 거 같아서요.”
미카엘은 멈칫했다. 수지의 생기 있는 눈을 보건대 그냥 하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은 것이다.
“위험합니다. 마나 기사들의 싸움은 그 여파가 땅을 뒤흔들 만큼 큰 데다 무엇보다 사령관님은 상태가…….”
미카엘은 이렇게 말하기 죄송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안정적이지 못해서요. 너무 분노해서 아가씨를 못 알아보고 힘을 쓰실 수 있습니다.”
“괜찮지 않을까요?”
“네?”
“음, 전 왠지 괜찮을 거 같아서요.”
“늪지가 낫게 해 주기 때문에요?”
“그런 것도 있고 렉스가 제게는 좀 온유한 거 같아서…….”
“아직 기억이 온전치 않습니다. 그리고 마나 기사는 힘을 쓰면 쓸수록 본능에 끌리고요. 더 파괴욕에 휩싸이지요. 사령관님처럼 강한 자면 그 정도도 무척 심할 겁니다. 어떤 것도 꺼리지 않을 거고요. 어쩌면 연인도 못 알아보고 죽일 수가…….”
미카엘이 불안해하며 말할 때였다.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는 것처럼 커다란 충격파가 전달되는 게 아닌가. 미카엘은 서둘러 수지를 잡아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진동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열기 낀 광풍이 뒤따라 몰아쳤다. 늪지의 습기가 일순 바싹 말라 사막처럼 느껴질 만큼 숨 막히는 열이었다. 미카엘은 머리카락이 바짝 서는 걸 느끼면서 동시에 전신에 고양감이 돌았다. 강한 자를 만났을 때 자연스레 나타나는 조건 반사였다.
“사령관님의 힘입니다. 분명히요.”
이 정도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기운은 그 밖에 없었다. 떨리는 무릎으로 힘겹게 일어난 그는 팔을 뻗었지만 그 도움의 손은 필요하지 않았다. 수지는 이미 먼저 일어나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툭툭 무릎을 털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곧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가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