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왔느냐? 수지는? 저런! 많이 다쳤구나!”
한편 일행을 쫓아온 무디스는 중간에 수지를 만나 깜짝 놀라고 말았다. 편안한 이끼 밭에 수지를 누인 그는 속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렇게 다치다니. 홀로 감당하려고 한 대가구나. 작은 몸으로 너무 큰 부담을 지려 했어.”
무디스의 탄식에 왠지 숙연해지고 마는 두 기사였다. 그녀는 아까의 귀족하고는 너무도 달랐다.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위험에 몸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미카엘은 애잔함이 묻어나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죠? 몸이 늪지에서 절로 나으신다니까요.”
“응? 저절로 낫는다고?”
놀라서 말을 되풀이 한 무디스였다. 미카엘은 여기에 온 게 애초에 그 이유 때문이라고 솔직히 대답했다. 수지가 아끼는 치료사인 그라면 모든 걸 말해도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미카엘의 말에 무디스는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흔들었다.
“정말 놀랍구나. 늪지에서 절로 회복된다니. 어쩌면 진짜 늪지에서 태어난 요정일 수 있겠어. 아니면 신비한 섬의 공주이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무심코 던진 말에 누군가 말을 받았다. 무디스가 쳐다보자 로퍼가 얼른 고개와 어깨를 움츠린다. 무디스는 저기 나무 뒤에 도둑처럼 웅크린 놈은 누구냐고 물었다. 아더가 설명했다.
“왕성의 연금술사입니다. 마나 연구를 주도하는 실험실의 핵심 인물이었죠. 근데 충격을 받았는지 말수가 없어졌습니다.”
“그래? 왕성에서 일하는 녀석이라면 별일을 다 겪어 봤을 텐데. 어떤 충격을 받았기에 저런 반응이냐? 응? 누가 죽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믿던 이에게 배반이라도 당한 거냐? 뭐가 됐든,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협조한다면 말이야!”
무디스는 깐깐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봐, 너! 겁 먹은 족제비 같은 눈으로 날 쳐다보는 네 녀석 말이다! 수지가 왜 이런 건지 아는 거냐? 늪지에서 그녀가 왜 이런 건지 속 시원하게 말해 봐라!”
하지만 그는 무엇이 두려운지 눈동자만 굴릴 뿐이다. 무디스는 한심하다는 듯이 외쳤다.
“뭘 그리 함구해? 혼날까 봐 그런 거냐? 하지만 주위를 봐! 넌 이미 버려졌어! 혼낼 가치도 없다는 소리지! 저 위의 인간들에겐 넌 여기 뭉친 흙더미보다도 의미가 없다는 거야! 폭풍에 휘말려도, 괴물에게 잡아먹혀도 구하러 오지 않을 거다!”
“…….”
“느끼고 있을 텐데 부정하는 거냐? 아직 충격을 덜 받았구나!”
노인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미카엘이 냉정하게 눈을 빛냈다.
“억지로라도 입을 열게 할까요?”
잠시 로퍼를 쳐다보던 노인이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죽을지도 몰라. 심약한 녀석처럼 보이니까. 그나저나 수지를 여기 계속 둘 수는 없다. 강력한 괴물들이 계속 나타날 테니까.”
늪지를 사랑하는 무디스도 괴물들만큼은 좋아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미카엘은 알겠다며 서둘러 수지를 안았다. 한동안 섬 외곽으로 피해 있으면 될 것이다. 노만이 죽었으니까. 기구의 눈초리만 피해서 몸을 낮추고 있으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아더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위쪽 하늘에서 불어오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고 있었다.
“조만간 다시 정비해서 공격하려 들 겁니다.”
“괴물들이 있잖아? 보니까 늪지의 괴물들이 알아서 저들을 공격하던데.”
무디스는 아까 새들이 기구를 공격하던 모습을 떠올려 말했다. 그 역시 늪지가 외부의 힘이나 침입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느낀 것이다. 무디스의 말에도 아더는 조용히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괴물도 공중 요격에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저 기구는 대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거라 남다른 공격용 대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력한 마나를 응집해 쏠 수 있지요. 여차하면 여기 일대를 초토화할 만한 힘입니다.”
“흠. 왕성에서 그런 끔찍한 걸 만들었다니. 인간을 상대로 만든 무기치고는 지나치게 잔인하구나. 썼을 때의 피해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했을까.”
노인의 중얼거림에 아더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확실히 뒤를 생각하지 않고 만든 무기였다. 하지만 왕국이 뒤를 생각하지 않고 만든 무기 중에서 가장 강력한 건 저것이 아니다. 이 순간에도 늪지를 향해 오고 있을 존재. 바로 특별사령관 렉스였다.
아더는 그가 여기로 오고 있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순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의 정신 상태에 따라서 도움이 될지 말지가 결정될 거라 생각하면서 그는 솔직하게 제 의견을 털어놓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후환 같은 건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승리에 눈이 멀어서요.”
부도덕함이란 결과로서 정당화가 된다. 자신 같은 비인간적인 무기가 창조된 것도 다 그러한 배경에서였다. 이기기만 한다면, 승리만 한다면.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어떤 비인간적이고 부조리한 일은 눈감아 줄 수 있다. 그리하여 감정이나 생각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살인 무기인 마나 기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더 많은 인간을 수월하게 죽이려고.
“저도 사실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힘으로 적을 없애야 한다고요. 문제가 되기 전에 문제가 자랄 만한 땅을 아예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죠.”
“마나 기사라면 다 그럴 겁니다. 저도 그러하니까요.”
무디스는 솔직히 고백하는 아더와 미카엘을 번갈아 봤다.
“그러니까 너희는 만들어진 대로 잔인하게 사고한다는 거지? 오만한 왕성의 관계자들이 원하는 대로. 아마 수지의 애인이라는 사령관이란 자도 그러할 거고.”
아더가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무디스는 도리어 웃는 게 아닌가. 미카엘이 물었다.
“어떤 점이 재미있으신 거죠?”
“왕성이 자신들이 만든 무기에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게 재밌구나.”
무디스는 끌끌 소리 내어 웃었다.
“고위 관계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려 주는 대목이지. 인간성을 제거하면, 강력한 힘만 소유한다면,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막연히 생각한 거 말이야. 지금만 봐도 끔찍한 무기를 잘못 사용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 같은데. 너희만 봐도 이미 왕성에 대항하고 있으니까.”
“…….”
“쯧쯧, 하지만 내가 아무리 여기서 떠들어도 소용이 없겠지. 지휘하는 놈이 확 뒤통수를 처맞아 정신이 든다면 모를까.”
아더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무디스의 솔직 담백한 말투 때문이었을까. 왠지 조금은 속이 후련해지는 걸 느끼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어쨌든 저희는 여길 벗어나 섬 외곽으로 피해 있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일행을 재촉해 길을 떠나게 했다. 오랜 경험이 가져다준 불길한 경고를 읽었기 때문일까. 그의 촉이 맞았다는 듯이 곧 공중에서 흰 빛이 번쩍였다. 일행들이 질척이는 늪지대를 벗어나기 직전, 강하게 응집된 마나가 무서운 속도로 지상을 강타한 것이다.
‘……어?’
수지는 몰아치는 바람에 눈을 떴다. 눈앞이 시린 흰 빛으로 가득했다. 이대로 죽는 걸까? 멍하게 눈을 끔벅이던 그녀는 곧 새롭게 날아오는 빛을 발견했다. 그 빛은 흰 빛과는 달랐다. 더 붉고 더 눈이 부셨다. 그 빛은 곧장 흰 빛을 타격했다.
“아, 아가씨!”
믿을 수 없는 충격파. 힘과 힘이 뭉쳐지고 싸우고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광풍이 수지 일행을 덮쳤다. 수지는 마른 낙엽처럼 미카엘의 품에서 떨어져 땅바닥을 여러 번 굴렀다.
“아…….”
수지는 고통에 눈을 아프도록 내려 감았다. 온몸이 쑤셔 왔다. 전에 입은 상처 때문일까. 고통의 가시가 입을 벌려 그녀를 삼키는 기분이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미카엘?”
“아, 아가씨.”
그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곧 수지는 그의 옆구리를 관통한 나뭇가지를 발견하고 굳었다. 별일 아니란 듯이 미카엘이 화제를 돌렸다.
“저쪽에 무디스 님을 일으켜서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세요……. 전, 쉬었다가 뒤따라가겠습니다…….”
수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나뭇가지를 빼내려고 했을 뿐이다.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수지의 팔을 미카엘이 잡았다.
“저 괜찮으니……. 걱정 마시고…….”
삑삑!
그때였다. 경고의 의미로 로난이 유난스럽게 운 것은. 수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나무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가는 게 아닌가. 숲이 홍해처럼 갈라지자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누군가가 있었다.
“당신…….”
가슴이 쿵쿵 뛰었다. 검은 눈을 빛내며 나타난 사내는 아주 멀쩡했다. 모든 게 완벽하다는 듯이 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무사했구나!’
눈가가 뜨거워졌다. 동시에 그에게 뛰어가고 싶었다. 미카엘만 아니었다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수지가 벅찬 심정으로 그를 울렁이는 눈으로 보고 있을 때, 사내가 팔을 뻗었다. 그 손끝에는 붉은 빛이 가득했고 곧 날아와 수지 뒤를 공격했다.
‘……헉!’
수지는 숨을 들이켰다. 돌아보자 그가 공격한 곳에 늪지의 괴물 하나가 죽어 있었다. 몰래 수지를 공격하려고 했다는 듯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민 채로. 수지는 꿰뚫린 목에서 녹색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멍하게 보았다가 다시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쓰러져 있는 다른 일행에겐 관심이 없다는 듯이 수지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넌.”
묘하듯이 그의 눈가가 가늘어져 있었다.
“뭐야.”
“네?”
“늪지랑 비슷한데 완전히 같진 않고. 강렬한 생명력을 내뿜는데 적의는 느껴지지 않고. 다쳐서 아파 보이는데 행복해 보이는 건 왜 그런 거야.”
수지는 멍해져서 대답했다.
“당신을 만나서요.”
“뭐?”
“전부 다 당신 때문이라고요. 제가 이런 건…….”
그러면서 훌쩍이고 마는 그녀였다. 남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섬에 도착해서 거슬리는 건 전부 없애겠노라 결심했었는데. 근데 제 눈앞에서 훌쩍거리는 여성은 엄청나게 거슬리고 신경 쓰이는데 손끝 하나 못 대겠다. 입술을 댔으면 댔지.
‘뭐?’
방금 제가 무슨 생각을 한 거냐며 인상을 구기고 만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