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자네 힘을 많이 썼어. 괜한 저항으로 부득이한 고통을 자아낼 필요가…….”
말이 끝나기 전에 노만이 용병에게 달려들었다. 용병들은 서둘러 검으로 대항했지만 단단한 피부엔 가벼운 생채기만 날 뿐이다. 노만은 그런 용병들의 머리를 낚아채 악력으로 부수며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것도 좋군요! 몸을 푸는 용도로요!”
“자, 잠깐! 그만해! 멈춰……!”
로도스는 겁에 질려서 외쳤으나 노만은 용병과 개들을 하나같이 잔인하게 죽이고서야 멈췄다. 그의 손에 흥건한 피를 보며 로도스는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저 존재가 마나 기사라고? 흡사 괴물에 가까운데? 로도스는 사령관과는 다른 의미의 광기에 사로잡힌 노만을 보면서 공포에 질렸다. 노만은 그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바지에 오줌이라도 지렸습니까? 왜 다리를 떨고 계세요? 예상하지 못했나요? 마나 기사를 막아섰을 때 각오를 하셨어야죠. 어리숙하시긴.”
“그, 그게…….”
“불쌍하니 원을 들어드리죠.”
“뭐?”
“하나만 골라요. 이 중에 살릴 존재를요.”
“사, 살려 준다고?”
로도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수지와 사슴을 번갈아 보았다. 수지는 다쳤지만 분명히 살아 있었고 상처도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반면 사슴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네. 한 명만요.”
“그럼 여자로…….”
머릿속으로 계산해 골랐지만 노만은 짓궂었다.
“물론 인간만 해당합니다.”
노만은 숨이 붙어 꿈틀거리는 사슴의 머리를 보란 듯이 밟았다. 수지가 절망적인 신음을 토해 냈다. 그렇게 머리를 터트려 죽여 버린 잔인한 기사는 씩 웃으며 다시 물었다.
“여자랑 본인 중에 누굴 살릴 겁니까?”
“뭐?”
“본인 목숨과 여자 목숨 중에 무엇이 더 소중하냐고요?”
남을 고를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신성한 게 귀하다고 하더라도 제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다. 로도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당연히 나…….”
“역시 그렇지요?”
노만이 예상했던 대답이라며 수지의 목을 마나 손으로 잡아 터트리려고 했다. 덤불을 뚫고 두 기사가 달려오지만 않았다면.
“멈춰!”
미카엘과 아더였다. 그들은 중간에 깨어나 수지가 사라진 걸 발견하고 그녀를 구하고자 정신없이 달려왔다. 어둠 속에서 그녀를 추적하는 건 어려웠지만 노만으로 추정되는 마나의 이동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빠르게 이동하는 그의 뒤를 쫓았더니 예상했던 대로 그가 수지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아 있는 것에 안도하며 아더는 노만의 뒤로 잽싸게 돌아가 그의 사지를 억압했고 미카엘이 그 틈에 남아 있는 마나를 뿜었다.
“으, 으악!”
마나가 가슴에 쏟아지자 노만은 비명을 질렀다. 미카엘은 있는 힘껏 모든 마나를 방출해 그를 공격하고 그럼에도 일어나 움직이겠다는 그의 머리를 프라이팬으로 가격했다.
“역시 유용하다니까.”
노만이 진흙 바닥에 머리를 처박자 크게 만족하는 미카엘이었다. 그는 서둘러 아더가 살피는 수지 쪽으로 다가갔다.
“괜찮을까요?”
“아마도.”
아더는 그녀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깊진 않아도 자잘한 흔적이 워낙 많았다. 짧은 사이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손과 발 성한 곳이 하나 없는 그녀를 보면서 아더는 어두운 어조로 말했다.
“쉬셔야 할 거 같아.”
“제가 업겠습니다.”
미카엘이 아픈 어깨를 아무렇지 않게 돌리며 말했다. 아더는 그녀를 안아 미카엘의 등으로 올려 주다가 바닥에서 치솟는 촉수를 발견했다. 구덩이에 사는 괴물이 깨어났는지 촉수가 자꾸만 튀어나와 아더와 미카엘의 발목을 감아 끌고 가려고 했다.
“어떡하죠?”
미카엘은 긴장한 채로 제 발을 타고 올라오려는 촉수를 걷어찼다. 아더 역시 조용히 촉수를 떼어 내면서 뒤로 물러나란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아지랑이처럼 일어나는 촉수가 목표를 찾아 이리저리 꿈틀거리더니 쓰러진 노만을 발견하고 그의 몸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노만의 거대한 몸이 진흙으로 사라졌다. 미카엘과 아더는 그러고서도 자신들까지 감아 가려는 촉수를 보며 다급하게 움직였다.
“여기서 빠져나가요!”
하지만 달라붙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미카엘은 저를 강하게 견인하는 힘에 놀라면서 인상을 구겼다.
“무, 무슨 힘이 이렇게 세……!”
미카엘은 조금씩 진흙으로 끌려가는 몸을 느꼈다.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쪽 팔을 허우적거리는데 느닷없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오, 오지 마!”
로도스였다. 미카엘은 앞에 선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네?”
“제, 제발 나한테 오지 말라고!”
“그게 무슨…….”
“도와줄 수 없으니까 가까이 다가오지 마!”
로도스는 질겁해 외치고는 자리에서 달아났다. 미카엘은 어이가 없었다. 도와달란 말은커녕 그쪽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는데.
‘결국 혼자 도망치겠다는 건가.’
기대도 안 하긴 했지만 곱씹을수록 괘씸했다. 소위 국정을 운영하는 고위 귀족이 아닌가. 원하는 게 있을 때 눈을 빛내며 온 충성을 바라다가 정작 위험이 닥치며 곁에 오지 말라고 하며 혼자 달아나다니.
미카엘은 기대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었다고 불쾌하게 생각하며 촉수를 떨쳐내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 아더가 라이터로 나뭇가지에 불을 붙인 것이 도움을 주었다. 불이 무서운지 자취를 감춘 촉수를 보며 아더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둘러 치료사님께 돌아가지.”
그렇게 말하며 발을 돌리던 그는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또 한 사람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왕성의 연금술사군요.”
미카엘이 먼저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근데 상태가 이상한데요?”
“일단 데려가지.”
로퍼는 고분고분하게 그들을 따라왔다. 얼이 빠진 사람 같은 연금술사는 딱히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카엘도 데려가는 걸 찬성했다. 그는 떠나기 전에 땅바닥에 거의 빨려 들어간 노만을 응시했다.
“목을 잘라야 하지 않을까요?”
아더는 잠시 돌아보았다. 노만의 주변으로 촉수가 들끓더니 이내 그의 얼굴을 뒤덮어 빨아먹기 시작한다. 늪지의 괴물이 먹이를 먹는 방식이라고 해야 할까? 아더는 딱히 놀라지 않으면서 대답했다.
“늪지가 알아서 할 거야.”
그게 이 대지를 어지럽힌 것에 대한 대가니까. 아더는 사뭇 냉정하게 생각하는 저를 발견했다. 그는 노만에게 단 하나의 미련도 없다는 듯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먹구름 사이로 번쩍거리는 기구였다.
“우린 한시라도 빨리 여길 벗어나지.”
왠지 불길하다. 엄청난 에너지가 저 위에서 집약되는 기분이랄까. 아더가 불안함에 미카엘을 독촉하며 늪지 구역을 벗어날 무렵, 기구에서는 왕자가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화를 내고 있었다.
“뭐라고? 겨우 새 떼에게 대포 다섯 개를 잃었다고?”
“그, 그게 워낙 끈질기게 달려든 터라…….”
“빌어먹을! 변명하면 다야? 새 따위에게 비싼 무기를 잃어 놓고, 그런 말 하면 다냐고!”
“사, 사죄드립니다! 늪지의 생물이 이렇게 강력할 줄 몰랐습니다! 방심하여 반격하다가 그만……!”
기사가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사죄를 반복했다. 왕자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렸다. 늪지에 와서 내내 심기가 좋지 않았다. 속 시원히 해결되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일까. 불쾌함과 불만에 검 손잡이를 불안하게 만지는 그를 보면서 기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곧 왕자가 음산한 눈빛을 번쩍거렸다.
“마나를 쏠 순 있는 거지?”
“네! 가장 큰 대포는 피해가 적습니다! 공격도 가능하고요!”
“그럼 노만에게 연락해.”
“아까부터 연락을 했는데 답이 없습니다.”
“마나 추적을 하면 되잖아?”
“그게…….”
수하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마나가 거의 사라졌다고 나오는지라.”
“뭐?”
왕자는 신경질적으로 망원경을 쥐었다. 아래를 살피던 그는 노만이 있던 곳이 이상하게 잠잠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넓게 펼쳐진 진흙 지대에서 간간이 튀어나오는 건 정체 모를 촉수 뿐이었다. 왕자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설마 괴물들에게 당해 쓰러진 건 아니겠지? 큭, 하여간 쓸모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뭐가 됐든 당장 그를 찾아와!”
“네?”
수하 기사는 잘못 들었나 되묻고 말았다. 왕자가 험악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아직 돈값을 못한 내 발명품을 데려오라고! 네 놈을 그 녀석처럼 개조하기 전에!”
왕자의 협박에 기사는 놀라서 재빠르게 수하를 추리기 시작했다. 수색 끝에 그들은 노만을 진흙 땅에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얼굴과 몸이 반쯤 먹혀서 끔찍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왕자는 건져 올린 노만을 보면서 마나를 주입하라고 했다. 연금술사가 변형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했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재사용만 바랐다.
“어떤 식의 괴물이든 쓸 만하기만 하면 돼.”
지금 그는 성과에 애가 닳아 있었다. 이 늪지 문제를 처리하고 사령관을 잡아서 돌아가야 고위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아바마마를 무시하고 일을 벌인 것에 대해 면죄부를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왕자는 늪지의 괴물들이 아까처럼 날아오자 망설임 없이 발포 명령을 내렸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양으로 연금술사들이 마나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