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괴물들이 가득한 곳을 무작정 내려간다고? 저곳에서 얼마나 많은 기사가 목숨을 잃은 줄 알아? 원주민 같은 야만인이 아니면 한 시간도 살아남기 힘든 곳이.”
“그래서 많은 기사들과 무기를 챙겨 오신 게 아닙니까. 강력한 마나 대포도요! 여차하면 여기를 쓸어 버릴 생각으로 가져오신 걸 압니다.”
확실히 눈치가 빠르다. 왕자는 불편하다는 입맛을 다셨다.
“어디까지나 최후 수단이야. 노만이 실패할 때를 대비해 챙겨 온 거지.”
“수하가 실패하면 이곳을 아예 밀어 버릴 생각이라니. 얼마나 대비가 철저하신지 알겠습니다. 뭐가 됐든 제가 그 전에 무사히 사슴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진짜 저들과 내려가려고? 알다시피 나는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싶으면 마나 대포를 쓸 거야. 자네가 그 사정거리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냉정한 말이 그냥 하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로도스는 겁이 났는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그럼 두 시간은 어떤가요? 두 시간 동안은 제가 있는 곳을 향해 대포를 쏘지 말아 주십시오!”
“그래. 그 정도야.”
왕자는 선심을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도스는 다른 고위 귀족에게 대항해 쓸 만한 도구였다. 충성스럽고 눈치 빠른 그를 죽이긴 아까웠으니 되도록 배려해 줘야겠다고 판단하며 왕자는 저쪽 구석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연금술사를 가리켰다.
“혹시 모르니 연금술사도 데려가게. 위급한 순간에 도움을 될 거야.”
로리엔의 직속 수하로 실험실의 연구를 주도하는 인물이다.
‘이름이 로퍼였던가.’
근데 상태가 좀 이상했다. 낙하한 기구에서 살아 있는 걸 데려온 것인데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건지 사람이 얼이 빠져 있는 것이다. 버려야 할지 써먹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안 서는 터라 백작에게 딸려 보내 상태를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의도를 모르는 백작은 무조건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왕정 연금술사라면 이런 상황에선 매우 긴요하게 쓰이죠!”
로리엔이 잠깐 생각난 로도스였다. 그녀가 죽은 거 같다는 소식에 얼마나 안타깝던지. 동시에 제 앞가림을 더 잘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수석 연금술사도 죽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니 제가 살 곳을 파악해 그쪽에 붙어야 한다. 그는 사슴만 구하는 대로 왕자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습기가 올라오는 음험한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백작이 일행을 데리고 떠나고 나자 왕자는 수하를 불렀다. 노만에게 연락하라고 한 그는 늪지의 여자의 생사를 궁금해했다.
“살아 있다고?”
곧 처리할 거라고 강조했지만 어쨌든 살아 있다는 것이다. 실망스러웠다. 사령관이라면 이런 늦장 없이 처리했을 텐데. 노만은 말만 거창하지, 임무 수행률이 매우 떨어진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여자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물었다. 마나 대포를 조금씩 뿜어내서 늪지의 여자를 죽이는데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사령관이 오기 전에 처리해야지.’
아직 조용한 걸 보면 그는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니까. 왕자는 늪지의 땅이 파괴되는 건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 불을 뿜을 준비를 하라고 명했다.
쾅, 쾅!
대포에서 머지않아 열과 빛이 쏟아졌다. 강렬한 마나는 아니었다. 그러나 숲을 파괴하고 생명을 없애기엔 충분했다.
수지는 선잠이 들었다가 대지를 뒤흔드는 진동에 잠에서 깨어났다. 가까운 숲이 불타고 있었다. 대포가 번쩍거릴 때마다 강풍이 몰아쳤고 하얀 불이 나무를 잡아먹고 있었다. 숲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우는 소리를 냈다.
“또…….”
저와 늪지를 죽이러 온 건가? 수지는 가까워지는 포성에 귀를 막았다. 어떡해야 할까. 일행을 깨워 더 깊은 곳으로 달아나야 할까? 수지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디스, 미카엘, 아더, 로난. 모두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들은 부상당한 채 잠든 상태였다.
‘저들을 데리고 피할 수 없어.’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당하고 말 텐데. 두려움과 걱정에 몸을 떨던 수지는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무섭더라도 움직여야 한다. 저들의 목표는 자신일 테니, 자신이 다른 곳으로 가면 따라올 것이다.
‘할 수 있어.’
수지는 잠든 이들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빗속으로 빠져나왔다. 다행히 아까보다 비가 잦아들어 있었다. 대신 안개가 스멀스멀 퍼지는 모양을 보면서 수지는 바위산과 떨어진 곳을 향해 뛰었다. 가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가시에 긁혀 피가 났지만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창 달리던 그녀는 강이 한쪽으로 흘러가는 수변에 도착했다.
‘어디로 가지?’
아니, 어떻게 적들을 유인하지? 멍하게 서 있던 그녀는 수변을 따라 늘어선 갈대숲에서 머리가 두 개인 새가 튀어 오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새들은 무척 많았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수지에게 놀란 듯 경고하듯 몰려들었다. 깜짝 놀란 수지가 저도 모르게 팔로 얼굴을 가렸을 때였다. 손등에서 황금빛이 번쩍였다.
‘어?’
신성한 빛이란 걸 아는 걸까. 새들이 더 공격하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소동이 무척이나 요란해서 수지는 넋을 잃고 바라봐야 했다. 먹구름 아래, 검은 새들이 거대한 밤의 장막처럼 너울거리고 있었다. 무서우면서 장엄한 광경. 카리반에 걸맞은 모습이라고 느꼈을 때, 대포가 새들을 공격했다.
수지는 강물이 튀어 오른 것에 놀라며 옆으로 쓰러졌다. 멀리서 사냥개가 쫓아오는 소리가 났다. 확실히 제가 여기 있는지 알아챈 것 같았다. 수지는 아픈 몸을 일으켰다.
‘잡히기 전에 도망가자.’
하지만 대포가 그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수지 근처에서 터졌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모래가 튀고 풀이 찌르며 살갗을 베었다. 수지는 숨을 죽였다. 갈대숲에 엎드린 저는 너무 무력했다. 도망가야 하는데. 대포가 다시 쏘아질까 무서워서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때, 새들이 사납게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머리가 두 개 달린 새들이 일제히 대포로 달려들어 공격하는 게 보였다. 갑자기 달려든 새들에게 놀랐는지 기구가 옆으로 불안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지는 무릎을 세웠다. 도망가야 한다면 지금이 기회였다.
‘가자!’
수지는 강 옆의 늪지로 들어갔다. 사냥개가 가까워졌는지 짖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앞만 보고 달리던 수지는 진흙 웅덩이에 발이 빠져 넘어지고 말았다. 다친 코를 느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데 웅덩이 사이에서 커다란 가시덩굴이 빠져나와 메두사의 머리처럼 흔들거리는 게 아닌가. 수지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컹컹!
신기하게도 덩굴들은 수지를 공격하지 않고 달려온 개들을 공격했다. 가시는 마나 이빨을 가진 그것들의 사지를 붙들고 흔들었다. 마나를 쓰는 침입자가 싫다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패대기쳤다. 수지는 안도하면서 걸음을 옮겨 달아났다. 더 안쪽으로,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달리려고 했으나 뒤에서 누군가 수지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흑!”
“참 운이 좋아요.”
끔찍한 목소리. 노만이었다. 그는 수지의 머리 가죽이 벗겨질 것처럼 강하게 잡아당기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 늪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몸으로 여태 살아남은 걸 보면, 확실해요. 나약한 당신을 이 저주받을 곳이 보호하고 있는 게.”
너무 아프다. 수지는 그만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노만을 똑바로 노려보며 버티고 싶은데. 고통을 참을 재간이 없었다. 노만은 괴로워하는 수지를 보면서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에요.”
드디어 잡았다. 이 쥐새끼 같은 여자가 얼마나 곤란한 존재였는지. 어서 피 맛을 보고 싶어 미치겠다. 노만은 안달하는 심정으로 두꺼운 혀를 빼 수지의 볼을 핥았다. 몸서리치는 그녀에게서 풋풋한 맛이 났다. 이 늪지처럼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맛이. 사령관이나 늪지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를 왠지 알 것 같다고 느끼면서 노만은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목만 빼고 갈기갈기 찢어질 겁니다. 사령관이 머리만 남은 당신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말 궁금하지 않습니까?”
노만의 손이 수지의 목뼈를 부러뜨리려 닿았을 때였다. 피부 감촉이 끔찍이도 싫어 발버둥 치던 수지는 노만이 갑자기 소리를 내며 손에 힘을 풀자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노만이 몸을 잔뜩 구부린 채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노만의 등을 공격한 짐승이 곧 보였다. 휘황찬란한 뿔을 가진 황금빛 사슴 무리였다.
“이 하찮은 털 뭉치들이!”
노만은 화를 내며 마나를 풀어냈다. 사슴들은 상처 입으면서도 뿔을 들이밀었다. 수지는 멍해져서 있다가 얼른 사슴을 돕고자 돌을 주워 노만을 향해 던졌다. 평범한 돌 공격은 그를 아프게 할 순 없어도 더 신경질적으로 만들어 마구잡이로 마나를 뿜어내게 했다. 결국 노만은 자신이 가진 마나를 한계치까지 뿜어내게 되었고, 지쳐서 헐떡거리게 됐다. 다행이라고 느꼈지만 수지 역시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마나 분사에 떠밀려 부딪친 몸이 고통에 휩싸여 있었다.
“으, 으윽…….”
“짜증 나요! 여기 모든 게 짜증 나!”
노만이 고래고래 외쳤을 때, 로도스가 등장했다. 그는 사냥개들이 짖는 곳으로 용병들과 달려온 터였다. 그런데 사슴들이 가득 있다니. 그것도 애타게 찾던 이인 수지와 함께.
“하, 하하!.”
로도스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원하는 걸 모두 찾다니! 일이 잘 풀린다는 생각에 웃던 그는 노만의 험악한 눈빛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그리고 서둘러 제 소개를 했다.
“나는.”
“압니다. 수도의 백작님이시죠.”
노만이 피 섞인 침을 옆으로 뱉어내며 대꾸했다. 로도스는 그 모습에 왠지 겁이 났다. 백작은 두려움을 숨긴 채로 일부러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여자와 사슴을 내게 넘기게.”
“미쳤습니까? 여자는 원래 제 목표입니다만 사슴도 절 공격했으니 제가 죽여야 합니다. 두 존재 모두 제 손에 으스러져야 마땅하죠.”
방해하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듯이 노만이 으르렁거렸다. 이제 그녀를 잡아 죽이기만 하면 되는데 귀찮은 방해꾼이 끼어든 셈이었다. 로도스는 그의 변형된 혈관이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걸 보면서 지위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부디 내 말을 들어. 난 수도의 아주 유명한 귀족이야. 실험실에서 내 영향력은 전하에 맞먹을 만큼 막강하지. 전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여자와 사슴을 모두 넘기게.”
“싫다면요?”
노만이 입꼬리를 들어 웃었다. 잔인하게 빛나는 눈빛이 선명했다.
“데리고 온 인간들로 절 막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