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도착했구나!’
그만 안도감에 머리를 수그리고 말았다. 젖은 모래가 이마에 가득 달라붙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부드러운 카펫처럼 저를 환영해 준다고 느낄 뿐이다. 심지어 아픈 몸이 나아가는 느낌마저 들자 수지는 울컥했다.
‘죽는 줄 알았어.’
난데없는 공격이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포탄에 갑판과 돛대가 날아갔고 배가 갈라졌다. 이대로 침몰하는가 싶었는데 때마침 파도가 몰아치는 게 아닌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파도는 배가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 사람들을 해면으로 끌어냈다. 로난이 시끄럽게 울지 않았다면 헤엄쳐 오는 것도 잊고 그렇게 계속 휩쓸렸을 것이다. 수지는 저 멀리서 젖은 날개를 털고 있는 로난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깊이 쉬었다.
‘다른 이들은?’
셋 다 무사했다. 병약한 무디스는 물 먹은 톳마냥 늘어지긴 했어도 마른 손을 휘적거리며 살아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두 기사는 벌떡 일어나서 해변에 떠밀려 온 물건을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파도에 휩쓸렸는지 건질 것은 많지 않았다. 미카엘은 무디스의 약병과 프라이팬을 건져 올리며 인상을 썼다.
“무기와 갑옷, 마법의 가루를 잃어버리고 말았군요. 늪지의 괴물들에게 저항할 수 있을지…….”
하지만 아더는 깊게 출렁이는 바다를 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더 심각한 고민에 잠겨 있는 듯한 그의 눈에 곧 무언가가 발견됐다.
“적이 살아 있습니다.”
그는 허우적거리는 무디스를 안아 들었다. 수지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서둘러 바다를 살폈다. 출렁이는 파랑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기구의 잔해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인근 해류의 영향으로 커다란 파도가 잔해를 먹었다가 토해 냈는데 그 틈바구니에서 파도가 이상하게 부서졌다. 물 밑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서둘러 도망가야겠습니다.”
“차라리 해변에 숨어 있다가 기습하면요?”
미카엘은 늪지로 도망가는 게 썩 내키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아더가 고개를 저었다.
“수적으로도 열세고 장비로도 열세야. 우리에겐 그나마 지형이 도움이 되겠지.”
“이 지형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고 하는 말입니까?”
“알다마다.”
아더가 대답했다. 진중한 눈빛이었다.
“여기서 죽었으니까. 이상한 괴물한테 끌려가서 수장 당했었거든.”
“…….”
“그럼 가지.”
아더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디스는 추운지 몸을 생쥐처럼 말았다. 적을 피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떨고 있는 무디스를 보자 마음이 다급해진다. 아더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새에게 길 안내를 부탁할 수 있을까요? 되도록 몸을 숨길 수 있는 동굴 같은 곳으로요.”
“아, 네.”
서둘러 로난을 불렀다. 로난은 수지의 손동작에 고심하듯이 머리를 까닥거리더니 이내 날개를 활짝 펴서 날아올랐다. 그의 머릿속에는 몸을 숨길 만한 곳으로 늪지의 중앙이 떠올랐다. 그쪽은 괴물들이 많아도 몸을 숨길 돌들이 많으니까. 이런 해변보다는 훨씬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앞장섰다.
‘이곳은 여전하구나.’
한편 수지는 묘한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금세 신발을 덮는 진흙. 밟은 자리마다 모여드는 벌레. 눈을 깜박일 때마다 살랑이며 꼬이는 나무 덩굴. 제게 달라붙는 야생초들을 능숙하게 치워 내면서 주변을 살폈다. 안 본 사이 늪지는 더 단단해진 거 같다. 마치 손대지 않아야 잘 자라는 자연처럼 더 풍성해지고 성장한 느낌이랄까. 대단하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했다. 몸이 낫고자 적을 데려온 건 저였으니까. 그런 죄책감이 스며들 때, 이슬이 가득한 나무 잎사귀가 그녀의 이마를 쓸어 주었다.
‘위로해 주는 걸까.’
우연의 일치라도 덕분에 답답한 가슴이 조금 시원해진다. 그녀는 나무 틈새를 바라보았다. 로난이 그 사이를 여유롭게 날아가는 게 반가웠다. 로난은 물 만난 제비처럼 신나 있었다. 제집에 와서 저렇게 반갑게 나는 걸 보자 저까지 기뻤다. 역시 모든 생명은 제집에 있어야 하는 구나를 느끼면서 수지는 무디스가 늘어진 몸으로도 감탄을 내뱉는 것을 들었다.
“오, 저건 아주 희귀하다는 베란 약초야! 눈이 침침해질 때 먹으면 달처럼 맑아진다고 하지! 응? 저건 열이 날 때 좋은 오로로 식물 아니냐! 저 귀한 게 저렇게 풍성하게 매달려 있다니! 이곳은 하늘의 세상인가! 아아! 저건 아마사 버섯이구나! 벌레들이 알을 깔 때 먹으면 통증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하지! 굉장해! 보물 천지로구나!”
늪지를 보며 보물이 가득하다고 하는 사람은 그밖에 없을 것이다. 제집에 있지 않아도 늪지를 향해 찬사를 날릴 수 있는 건 그만큼 그가 늪지를 알아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곳이 그에게 또 다른 집이 될 수 있을까. 문득 드는 생각에 골몰하며 수지는 뒤를 돌아보았다. 앞을 향해 나아가는 데도 왠지 불안하다. 오싹한 기운이 그녀의 뒤를 바짝 뒤쫓는 기분이었다. 방심하면 금세라도 무언가 날아올 기분에 뒤를 살피는데 그런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무언가 쫓아옵니다.”
미카엘은 신중한 얼굴로 공격 자세를 취했다. 무섭게 사냥개들이 달려들었다. 왕성에부터 기구를 타고 쫓아온 그들은 역시 마나로 개량된 생물들이다. 허연 이빨에 맺히는 빛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느끼면서 미카엘이 그들을 쫓아냈다.
“어떡할까요? 우리 위치를 알릴 텐데.”
마나 기사가 무섭다는 듯이 본능적으로 물러나면서도 계속 쫓아오는 개들이었다. 개들이 힘을 쓸 때마다 키가 큰 풀들이 사납게 흔들렸기 때문에 멀리서도 그 소란을 모를 수가 없었다. 다행히 먼저 반응한 생물이 있었다. 커다란 두꺼비였다. 수지는 익숙한 늪지 생물을 보자마자 움직이지 말란 듯이 신호를 보냈다.
일행들이 모두 멈춰 선 가운데, 개들만이 집채 만 한 두꺼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꺼비는 약간 우스꽝스럽게도 보이는 눈알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윽고 커다란 혀가 움직였다. 개들 두 마리가 모두 두꺼비의 입 안으로 끌려가며 주변 바람이 요동쳤다. 아그작아그작. 뼈가 씹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괴물 두꺼비가 몸을 돌렸다. 뜻밖의 식사에 몹시 만족했다는 듯한 느긋한 움직임이었다. 미카엘이 괴물이 떠나고 안도의 한숨인지 걱정인지 모를 것을 토해 냈다.
“깜박했군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얼마나 기괴하고 이상한 장소였는지.”
괴물 두꺼비의 등장에 몹시 놀랐다는 얼굴이었다. 아더가 위로했다.
“먼저 소란만 피우지 않으면 괜찮을 거야.”
“천천히 움직여야겠군요. 여기 짐승들이 흥분하지 않도록.”
“그래도 우리 위치가 발각됐으니 서두르는 게 좋겠어.”
아더의 근심처럼 오래지 않아 적이 쫓아왔다. 노만 일행이었다. 해변에서 살아남은 수하들을 정비해 쫓아온 그는 수지 일행을 보자마자 마나부터 날렸다.
“조금만 버텨요!”
미카엘은 마나를 쓰면 늪지의 괴물들이 몰려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나 공격을 피해 시간을 벌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노만이 무지막지하게 마나를 쏟아 내며 공격하는 통에 주위 엄폐물이 사라졌다. 숨을 곳이 모두 사라지자 미카엘은 당황해서 외쳤다.
“달아나세요! 제가 붙잡아 두고 있을 테니까, 끅!”
미카엘은 부지불식간에 제 어깨를 찌른 검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노만이 그가 손에 든 프라이팬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그걸로 제게 대항하려 했다니. 하여간 이상한 사령관 밑에 이상한 수하가 있다니까요?”
“크, 큭!”
“나라를 배신한 기사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요? 사지가 찢어질 겁니다. 벌레처럼 온몸을 밟아 터트릴 거라고요!”
노만의 미소가 짙어졌다. 미소가 강해질수록 미카엘의 몸으로 파고드는 검도 깊어졌다. 미카엘은 조금 더 버텼다. 뒤쪽에서 아더가 마나 기사들을 상대로 고전하는 게 들려왔다. 소란을 피우는 만큼 주변 공기가 험악해졌다.
‘조금만 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기다렸을 때였다. 어디선가 몰려온 원숭이 떼가 노만을 덮쳤다. 노만은 신경질을 내며 제 몸을 깨무는 원숭이를 떼어 냈다. 그러나 떨치면 떨칠수록 더 많은 원숭이가 달려들었다. 그 소동에서 미카엘은 노만의 검을 밀쳐 내고 주위를 벗어났다. 마나 기사들도 원숭이들에게 고전하고 있었다. 마나를 써서 그것들을 상대했지만 그럴수록 더 많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금세 원숭이 뭉치에 쌓인 제물이 되었다. 미카엘은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쪽에 쓰러져 있는 아더를 흔들었다.
“이 틈에 도망가야 해요!”
“그, 그래.”
아더가 미간을 굽히며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에 피가 흐르는 것이 기사의 검에 당한 모양이었다. 아더는 사시나무처럼 바닥에서 몸을 떨고 있는 무디스를 부축하고, 수지를 찾았다.
“아가씨는?”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바로 보이지 않았다. 미카엘은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저 멀리 그루터기에서 파란 새를 끌어안은 채 쓰러져 있는 그녀가 보였다. 갑작스러운 마나 공격에 휩쓸려 버린 로난을 구한 수지는 이어지는 기사의 공격을 피하려다가 넘어져 버린 것이다. 멀쩡해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미카엘은 그녀를 깨웠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흐윽.”
“힘드시겠지만 이동해야 합니다.”
미카엘은 고함을 지르는 노만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주변으로 목이 잘린 원숭이들의 머리가 가득했다. 머지않아 더 쌓이겠지. 미카엘은 힘겨워하는 수지를 안은 채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비가 오는군요.”
그러나 날씨가 최악이었다. 소란을 일으킨 손님들을 반기지 않는다는 듯이 늪지는 폭우를 쏟아냈다. 미카엘은 시야가 보이지 않을 만큼 주위가 어두워지자 인상을 찌푸렸다. 노만이 쫓아오기 어려운 것은 다행인 일이었으나 자신들도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는 건 불행이었다. 비 오는 늪지를 돌아다니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본능적으로 판단하면서도 미카엘은 시야에 보이는 돌산으로 일행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