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지 보고서 (147)화 (147/163)

147화

“컥! 전……!”

“뭐라고?”

렉스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연금술사는 쥐어짜듯이 목소리를 냈다.

“저, 전 단지 명령으로 공격했을 뿐……!”

“그래서?”

“부디 선처를…!”

살려 달라고 외치는 그를 무정하게 쳐다보았다. 생을 향한 간절함이란 게 참 이기적이었다. 남을 공격할 때는 느끼지 못하다가 그 공격이 저를 향할 때면 강하게 느껴진다니. 이런 이중적인 행태가 왠지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악한 짓을 할 땐 악하다는 걸 알고 있어야지.’

적어도 제대로 미워할 수 있도록. 렉스는 곧 까칠하게 대꾸했다.

“내가 왜? 너도 선처하지 않았잖아.”

“제, 제발…… 컥!”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렉스에게 대항한 연금술사의 목은 금세 옆으로 꺾였다. 목뼈가 괴이하게 살 밖으로 삐져나온 수하를 보면서 로퍼는 요란한 과호흡을 시작했다. 요절할 듯한 반응이었지만 로리엔은 수하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음은 명령을 내린 너라는 듯이 렉스가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그녀는 머리 회전이 되는 이답게 빠르게 외쳤다.

“머리가 아픈 건 기억이 자리 잡지 않아서 그래요!”

“뭐?”

“기억이 대거 합쳐져서요. 혼란스러움에 두통이 동반되는 거라고요!”

“그래?”

반응이 왔다. 로리엔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혼란이 사라지는데?”

그녀는 들려온 대답에 안도했다. 그가 이야기를 들어 줄 태도였다. 깨어난 순간부터 이상한 불안과 분노에 휩싸여 있는 그는 실험의 부작용을 겪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두통도 그런 이유에서 발생했을 거라고 추측하며 그녀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확정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려워요. 의식이란 건 무척 까다로운 영역이라서요. 당신을 만들 때부터 신경 썼던 건데 지금 의식 안의 기억이 모조리 건드려졌으니 언제쯤 나아질지는 마나를 살피며 지켜봐야 해요. 현재 과도한 마나 보충으로 육체 안의 힘이 들끓는 상태니까요.”

로리엔은 더욱 힘을 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우리가 만든 마나 인간이라는 걸 아나요? 당신은 왕국의 오랜 꿈이자 결실이에요. 어떤 실험작도 이루지 못한 완성도를 이루었죠! 하지만 그런 당신이라도 마나 보충은 꾸준히 받아야 하고 의식은 주기적으로 관찰되어야 해요. 당신은 만들어진 자니까요. 타인의 관리가 절실한데 지금 같이 뜻밖의 조작을 당하면 우리도 손써 볼 수가…….”

“거창하게 말하지만 결국 이 두통을 낫게 할 방법이 없다는 거잖아?”

음산해져 다가오려는 그에게 로리엔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만! 당장 낫고 싶으면 다시 기억 조작을 받는 게 최선이에요. 예전 기억을 모두 지우면 두통이 사라질 테니까요! 혼란스러움도 아픔도 모두 잊겠죠!”

렉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게 너희들의 방법인가? 문제가 생기면 문제 자체를 없애 버리는 거.”

“다 당신을 위해서예요! 당신은 무기라고요! 기억이란 불필요한 존재!”

로리엔은 그를 이해시키려 애썼다.

“모르겠어요? 당신이 우리 말을 따르지 않아서 일이 복잡해진 거. 얌전히 늪지에서 위협이라는 여자를 죽이기만 했어도, 돌아와서 우리를 고분고분 따르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요!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려서 우리 둘 다 왕자 옆에서 웃고 있었을 텐데!”

눈물 가득한 호소에도 그는 미동도 없었다. 애초에 그는 아직 수지의 기억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늪지의 여자를 죽이는 말을 꺼냈지만 흥미도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로리엔은 아쉬움을 느끼면서 더 깊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제발 제 말을 따르라고요.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요! 당신이 강한 무기가 되도록 돌봐 줄 테니, 제 손을 잡기만 해요!”

로리엔은 독촉하듯이 그에게 말했다.

“어서요.”

제 손을 잡으라고 애원했으나 그는 반응이 일절 없을 뿐이다. 지켜보던 연금술사들도 측은하게 시선을 주는데 왜 그는 아무런 감흥이 없을까. 오히려 더욱 차갑게 분노해서 저를 바라보는 것이 가슴 아픈 로리엔이었다.

“싫어.”

“렉스!”

“두 번 말해야 아나?”

렉스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문에는 실험실의 폭발음을 듣고 기사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왕자의 경고로 위험해 보이는 사령관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공격에 들어갔다. 로리엔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을 때, 렉스는 이미 자리에서 사라져 그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순종하지 않는 무기는 없애야 하나 보군.”

“아…….”

“너와 왕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

움찔한 로리엔은 금세 쌓여 버린 시체의 산을 보며 어깨를 떨었다. 방금 전까지 그에게 기합을 지르며 검을 내려치던 기사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과연 그다웠다. 기억 조작 뒤에도 육체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두통이 있어서인가, 더 손속이 잔인해져 있었다.

하나 로리엔은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일반 기사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마나 억제제의 효과마저 곧 사라지면 그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다. 로리엔은 조급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렉스, 절 따라오면 당신의 두통을 없애 줄게요!”

그가 관심 있어 할 화제를 던져 보았지만 그는 반응이 없다. 오히려 피가 흥건한 바닥에서 무언가 깨달았다는 얼굴로 서 있을 뿐이다.

“나는 죽이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가 보군.”

그는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아도 그 손에 가득한 피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죽였을까. 이를 생각한 순간 두통이 극심해졌다.

‘죽이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건가?’

렉스는 생각했다. 순응하는 몸과 다르게 가슴 속 어딘가는 죽음을 떠올리며 답답해졌다고. 화난 누군가의 모습도 어쩐지 흐릿하게 떠올라 신경이 쓰이는 그였다. 왜인지 그 누군가가 여성이라고 느낀 그는 앞에서 시끄럽게 구는 로리엔을 바라봤다. 제 존재 의의를 자각했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는 로리엔은 분명 그녀가 아니었다.

“말했잖아요, 당신은 무기라고요! 죽음을 부르는 왕국의 가장 강력한 마나 인간이죠!”

화색이 돈 얼굴로 바르르 떠는 로리엔을 렉스는 차갑게 응시했다.

“그럼 무기로써 살면 이 두통이 없어질까?”

“네? 그건 저도 모르는….”

“이 미친 듯한 분노도 함께 사그라져서?”

“아…….”

로리엔은 멈칫했다. 두통과 분노에 휩싸인 그는 자신이 알던 사령관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렉스는 어떤 순간에도 차분하게 사람을 죽이는 전투 기계였다. 감정이나 기억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완전무결한 무기.

‘근데 그는 아니야.’

불완전하게 되어 버렸다! 제국 첩자 때문이었다고 하나 어쨌든 잘못되어 버린 건 사실이고 그런 그를 책임져야 할 것도 현존한 과제였다. 로리엔은 두려움을 느꼈다. 왕자가 이를 알면 분명 분노해서 책임을 지라고 할 텐데. 금방이라도 그의 검이 떨어질까 공포감이 생생했다. 렉스는 그동안 스스로에 말하듯 중얼거렸다.

“확인해 봐야겠어. 내 추측이 맞을지.”

추측을 확인한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제가 죽음의 무기라는 것을 이제 증명하러 간다는 것인가?

“어디 가요?”

떠나려는 그를 저도 모르게 막아서자 살기가 쏟아졌다.

“내 앞을 막지 마.”

“레, 렉스…….”

“다신 너와 네 왕국의 뜻대로 살지 않을 테니까.”

“……!”

너와 네 왕국. 완전한 타인처럼 지칭한 그에게서 적의가 느껴졌다. 얼어붙은 로리엔을 그대로 지나쳐 렉스는 문턱을 빠져나갔다. 곧 비명과 충격음이 연달아 달려왔다. 기사는 물론이고 왕성마저 깨부수고 있는지 실험실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윽고 사방에 커다란 금이 가기 시작하자 로퍼가 노랗게 뜬 얼굴로 외쳤다.

“도, 도, 도망가야 합니다!”

“…….”

“로, 로리엔 님!”

얼빠진 얼굴로 그가 사라진 문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던 로리엔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정신없이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실험실과 연결된 기구 탑승지에서 비상용 기구에 오르자마자 실험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로리엔은 안도함과 동시에 우울해졌다.

그 안에 값비싼 기계가 얼마나 많았던가. 귀한 실험 기록들도 있었기 때문에 더욱 절망감이 들고 만다. 당분간 마나 인간을 만드는데 큰 차질이 오겠지. 로리엔은 절망을 넘어 참담해진 심정으로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렉스가 있는지 기사단이 인위적인 바람에 뒤로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는다. 기사단이 또 몰려왔지만 역시나 같은 결과를 맞이했다. 그가 쓸고 간 자리에 산처럼 쌓이는 기사들의 시체를 보면서 로리엔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공격을 준비해요.”

그녀가 명령에 반응한 자는 공포에 질린 로퍼가 아니라 다른 연금술사였다. 그는 수석 연금술사가 한 말이 자신이 생각한 의도가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마나 공격이요? 사령관님을 향해서요?”

“저건.”

로리엔은 입술을 떼었다. 슬프다는 듯이 힘겨운 모양으로.

“사령관이 아니에요. 실패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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