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지 보고서 (145)화 (145/163)

145화

“일어났구나! 천만다행이야. 영영 잠들어 버렸다는 동화책의 주인공처럼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했으니까. 응? 그게 뭐냐고? 제국의 아이들이 읽는 소설이지. 자신이 어떤 신비로운 나라의 공주라고 믿는 고아 소녀의 이야기야.”

노인의 목소리가 유독 부드러워졌다. 수지가 집중한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잠이 덜 깬 그녀를 위한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소녀는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는 요정의 말을 믿고 왕의 반지를 훔치게 된단다. 그러다 자신을 쫓는 기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 그녀는 기사의 설득에 반지를 돌려주게 돼. 그녀를 기다리던 요정은 사실을 알고 매우 분노했다. 신성한 약속을 어겼다면서 끔찍한 저주를 내렸지. 그녀의 연인인 기사를 영원한 잠에 빠뜨린 거야. 소녀는 그를 깨우려고 갖은 애를 써 봤지만 무슨 짓을 해도 깨울 수 없었어.”

노인은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한차례 가슴을 들썩거린 그는 수지의 기대감을 읽었다는 듯이 열심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보다 못한 요정은 그녀에게 반지의 담긴 힘으로 그를 깨울 수 있다고 알려 준단다. 하지만 대가는 그녀의 목숨이라고. 그녀는 선택해야 했다. 기사를 깨울지, 제가 살지. 결국 기사를 택해 대신 영원한 잠에 빠지는 그녀를 보면서 요정은 환하게 웃는단다. ‘드디어 왕국으로 돌아오시는군요, 공주님. 당신은 사실 죽음 나라의 공주입니다. 오로지 남을 대신해 죽어서야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죠.’라고 하면서.”

노인은 미묘한 어조로 말했다.

“어때, 마냥 웃기엔 좀 섬뜩한 이야기지? 모든 걸 다 알고 접근한 요정은 나쁜 놈 같고. 하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믿음과 희생이란다.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위해 희생할지, 고아인 소녀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거야.”

노인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물론 아이들은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고아 소녀가 진짜 공주가 되었다는 것에 열광하곤 하지. 마지막에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제 부모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행복해하면서.”

노인은 물었다.

“어떠냐. 동화 이야기에 잠이 좀 깼느냐. 아니면 동화 속의 소녀처럼 잠이 더 오느냐. 어떤 상태인지 그동안의 네 이야기만큼이나 궁금하구나.”

수지는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더는 그 길로 돌아 나왔다. 더는 엿듣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가 갑판으로 올라가자 기척이 없어진 걸 느낀 노인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네 남자가 다시 왕성에 잡혀갔다고? 늪지에서 몸을 회복해 그를 찾으러 간다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구나. 아니, 실은 아주 무모한 일이지. 상처 입은 그 몸으로 병사들을 어찌 상대할 거냐. 몰려오는 검과 활은 어찌 피할 거고? 늪지와는 다른 의미로 무서운 괴물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욕심과 모략, 야욕과 속임수에 능한 인간들이 판치는데 고작 저 바깥 기사 둘이 널 보호한다고 안심하는 건 아니겠지?”

노인은 걱정이 많아 보였다. 늘 세상사에 초월한 듯 무심했던 그라서 그럴까. 수지는 그런 그의 걱정이 부담스럽기는커녕 고마웠다. 그래서 간략하게나마 제가 어떤 존재인지, 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밝혔다. 노인은 그녀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에 눈을 한 번 크게 뜨고, 연인이 그녀를 죽이려던 왕국의 사령관이라는 것에 숨을 들이켰다. 그는 몹시 놀랐다는 듯이 말을 더듬었다.

“서, 설마 늪지에서 널 보살펴 준 사람이 마나 인간이라는 왕국의 기사냐?”

그렇다고 하자 잠시 말이 없는 노인이었다. 끙끙 고심하다가 그가 말했다.

“참 묘한 일이구나. 왕국이 무시무시한 걸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하필 네 남자라니. 별일 다 겪은 나에게도 네 이야기는 놀랍기 그지없구나. 네가 늪지에서 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놀람 그 자체였는데.”

애잔하게 웃는 수지를 보며 무디스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늪지로 돌아가는 건 네가 이세계 사람이라는 것과 연관 있겠지? 비록 치료사지만 나도 아카데미 시절에 다른 차원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단다. 어려운 이야기는 생략하고 핵심만 말하면 차원 이동이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야.”

“그게 무슨….”

“무엇이든 필연이라는 거지. 네가 늪지로 이동된 것도 그 늪지에서 마나 인간인 그를 만난 것도. 모두 연관이 있을 거란 거야.”

“어떤 연관이요?”

처음 들었던 이야기처럼 렉스와 제가 운명의 적수라는 이유에서일까. 겁이 났다. 두려움이 스며든 얼굴을 보면서 노인은 위로하듯이 말했다.

“나도 모른다. 자세한 건 그를 만든 연금술사들이 알고 있겠지. 하지만 미리부터 겁 먹고 걱정할 건 없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너를 봐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는 견뎌 낼 아이야.”

“정말 그럴까요?”

수지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용기를 내 보지만 모든 위험을 뚫고 진정 그를 되찾을 수 있을지 저조차 의심이 들곤 한다. 위태로운 절벽에 서 있는 것처럼 마음이 불안했다. 상처 입은 곳마저 쑤셔 오면 어딘가의 진창으로 가라앉는 기분에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고 마는 것이다. 무디스가 그런 수지를 위로하듯 기운차게 외쳤다.

“정말이지! 네가 누구냐! 늪지의 공주 아니냐! 그러니 고개를 들어라! 네 왕자를 찾을 때까진 절대 절망해선 안 돼!”

저와 렉스를 공주와 왕자로 비유한 게 재밌다. 수지는 조금 웃고 말았다. 그녀가 웃는 걸 보며 봐라, 훨씬 좋구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무디스는 그녀를 더 기쁘게 할 무언가를 뒷주머니에서 꺼냈다.

“예전에 네게 줬어야 했는데. 이제야 돌려주는 날 용서하렴.”

은색의 네모난 철제 라이터. 바다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수지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무디스가 멋쩍은 듯이 볼을 긁적거렸다.

“네 몸에서 떨어진 걸 전 주인이 무엇인지 살펴보라고 주었던 거다. 워낙 신기한 물건이라 좀 더 살펴보고 말하려 했는데, 네가 갑작스럽게 떠나는 바람에. 핑계지만 어쨌든 이걸 가지고 있으면서 몇 차례 도움을 받았단다. 네가 갖고 있다면 너도 그랬을 텐데. 정말 미안하구나.”

수지는 제 손에 올려진 라이터를 보았다. 그가 소중히 보관했는지 표면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것. 이제는 저쪽 세계를 떠올리는 유일한 물건이다. 낯선 늪지에 도착했을 때 이 작은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지. 수지는 그때를 떠올리며 무디스를 바라봤다. 평소 그답지 않게 몹시 미안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참 신기한 물건이더구나. 춥고 힘들 때 한 번만 튕기면 불이 나고. 경련으로 괴로울 때 도움이 많이 됐다.’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응?”

수지가 도로 라이터를 내밀자 의아해하는 그였다.

“선물로 드릴게요.”

“하지만.”

“괜찮아요. 전 이미 충분히 도움을 받았어요. 앞으론 무디스 님에게 더 필요할 거 같아서요. 잘 써 주시면 좋겠어요.”

무디스는 그녀를 응시했다. 작고 편협한 눈이었지만 모처럼 깊고 진한 감동의 물결이 그 안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가 감성적이었다면 눈물을 흘렸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냉랭한 치료사였고, 고마움을 찡해진 코로 표현하는 노인이었다.

“죽을 때까지 잘 사용하마.”

코를 매만지며 말하는 그에게 빙그레 웃는 수지였다. 그녀는 늪지로 가는 것에 들떠 있는 노인을 보면서, 그가 다른 이들과 다르게 늪지에 대해서 무척 긍정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수지는 노인이 늪지에 가서 할 연구로 들떠 있는 게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푸른 열매는 내 수집 대상 1호야! 가장 중요한 과실이지! 가자마자 그것부터 구할 거야! 저 바깥에 작은 놈이 날렵한 거 같으니까 나무에 올라가 많이 따 오라고 해야지. 덩치 큰 놈은 만들기를 잘하니까 따온 걸 가공하라고 하고. 그렇게 조합과 변형을 가하면 세상을 바꿀 약이 하나 나오지 않을까 싶다.”

늪지를 좋은 가능성 품은 곳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왠지 기쁘다. 수지는 그가 떠드는 소리를 얌전히 경청했다. 아더가 해적이 나타났다고 외치지만 않았어도 계속 그랬을 것이다.

“해적이요?”

수지의 안색은 대번에 변했다. 무얼 떠올렸는지 창백해진 낯빛에 무디스는 두 놈들이 잘 처리할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잠시 후 미카엘이 파란 새와 함께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해적선입니다. 두 척이고요, 바로 공격을 할 테니까 조용해질 때까지 나오지 마세요.”

“공격? 공격을 왜 해?”

무디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당하기 전에 먼저 타격하는 게 전략상 유리…….”

“군인 아니랄까, 사고방식이 척박하기 그지없구나!”

무디스는 혀를 차더니 벽 한 편에 있는 배낭을 들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미카엘은 굳어 있다가 얼른 하라는 잔소리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수지는 그가 무엇을 할까 궁금했다. 바깥이 조용했다. 시간이 흘러도 비명이나 대포 소리가 없기에 이상하다고 느낀 수지는 복부를 움켜쥔 채로 조심스레 걸어 나왔다. 언제 떠났는지 저 멀리 해적선 두 대가 멀어지고 있다. 그 배에 탄 해적들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게 진풍경이라면 진풍경이랄까. 수지가 놀라자 노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역시. 해적들도 영주와 똑같아. 신분이 귀하든 천하든 그 약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

“자산이란 게 발기부전 치료제였습니까?”

미카엘이 조금 민망하다는 듯이 물었다. 노인은 그 반응은 약의 진가를 몰라서 그런 거라며 인상을 팍 썼다.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무게당 금화를 받고 팔린단 말이야! 영주가 이것 때문에 날 얼마나 귀하게 대접하는 줄 알아? 항구에서도 이것 때문에 내가 유명해졌다. 엄청나게 효과 좋은 약이어서, 명성이 제국에 있을 때처럼 드높아져 있지!”

무디스는 히쭉 마른 입술을 올렸다.

“계속 있었다면 발기부전 치료사로 유명해졌겠지만 그게 내가 바란 목표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늪지에 가고 싶다. 늪지에서 상처 치료제를 개발하고 싶어. 그러니까 해적선과 싸우는 위험한 일은 피할 거다. 이 바다는 험해. 괜히 싸우다 배에 구멍이라도 나면 꼼짝없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거야. 최대한 마찰 없이 가는 게 제일이지.”

안전한 게 좋으니까. 지혜로운 자처럼 말한 무디스는 이 상황이 놀랍다는 수지에게 진지한 어조로 권유했다.

“혹시 너도 필요하냐. 네 남자에겐 무조건 공짜로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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