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부탁입니다!”
“부탁에 절에 금화를 보따리도 줘도 안 해! 나 살기도 바쁘다고!”
그때였다. 여태까지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던 로난이 답답한 상황을 알아차리고 내려온 것은. 그는 미카엘이 무얼 하려고 하는지 알았다는 듯이 집요하게 부리로 문을 쪼았다. 콩콩 신경질적인 소리가 연달아 나자 곧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이게 미쳤나? 그렇게 치면 문이 부서지잖아! 문이 망가지면 나중에라도 진료는 절대 안 볼 거야!”
벌컥, 그가 문을 열고 소리쳤다. 미카엘은 그가 또 거절하면 문을 박차고 들어가 힘으로라도 순응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가 파란 새를 보고 멈칫하더니 품에 안긴 수지를 확인하고 크게 놀라는 것이 아닌가. 굳어 있는 것도 잠시 그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저리 눕혀라.”
“네? 아, 예.”
미카엘은 치료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새가 걱정되는지 침대 끝에서 커다란 날개를 퍼덕거렸다. 치료사는 표백한 듯한 미간을 주름지었다.
“털 떨어지니까 얌전히 굴어! 배가 고프면 부엌에 뒹구는 곡식이라도 주워 먹던지!”
타박하면서도 은근히 물이 어디 있는지까지 알려주는 그였다. 곧 그는 수지의 복부의 감긴 붕대를 풀고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마법의 가루를 썼나 본데. 그전에 얼마나 깊이 찔렸지?”
“이 정도요.”
미카엘은 그에게 나뭇가지가 박혔던 정도를 손으로 표현했다. 치료사는 그걸 유심히 보고는 금세 약제실에서 약을 제조해 왔다. 수지의 상체를 잡고 있으라는 말에 그의 말을 따르던 미카엘은 그가 무작정 약을 입 안으로 들이밀려고 하자 그 손을 붙잡고 말았다.
“뭐야?”
어린놈이 손힘이 왜 이렇게 세. 아프다고 투덜거리는 그에게 미카엘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분을 살리는 약이죠?”
“살릴지 죽일지 그건 먹어 봐야 알지.”
“네?”
“넌 선택할 수 없다는 거야. 이 약이 좋은 약이라도 결국엔 그녀 스스로가 회복할 힘이 없다면 죽을 테니까. 나는 회복하는데 조금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지, 모든 건 본인에게 달렸다.”
“어, 그러니까 결국 좋은 약이란 의미죠?”
“어린 놈이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 딱 융통성 없는 기사처럼 생겼는데. 왕성에서 온 거냐?”
미카엘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치료사는 잡힌 손목을 떨쳐 내면서 혀를 쯧 찼다.
“망토를 뒤집어써도 모를 수가 없다. 피 냄새, 철 냄새가 철철 나니까. 기운도 어딘가 불쾌하니 기분 나쁜 데가 있고. 흠. 일반 기사가 아닌 게 분명한데. 어떻게 그녀가 너 같은 놈하고 엮었지?”
“이분을 알고 계십니까.”
미카엘은 아까보다 훨씬 크게 동요하고 말았다. 치료사, 아니 무디스는 설명하는 게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거렸다.
“그래서 치료하는 거잖아. 그녀가 아니었음 어림도 없었어. 주인인 영주도 문전 박대 할 참이었는데.”
무디스는 그녀를 애잔한 눈으로 보고는 말했다.
“수지에겐 신세 진 게 있으니까.”
“아.”
“그러니 잔말 말고 저쪽에서 기다려.”
“저흰 시간이 없습니다. 쫓기고 있어서 다시 항구로 가야 해요.”
“알겠으니 방해하지 마라.”
무디스는 쏘듯이 말하고는 그녀의 입에 약을 들이부었다. 쿨럭거리면서도 삼키는 그녀는 곧 경련하듯이 몸을 떨었다. 무디스는 예상했다는 듯이 그런 그녀의 팔을 잡고 지켜보더니 이내 상처 부위에 어두운 빛의 약초를 바르기 시작했다. 한차례 진득하게 땀을 내던 그녀는 마침내 얼굴색이 연분홍으로 밝아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호흡이 좋아진 게 보였다. 미카엘은 기뻐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됐어. 그건 수지가 이미 갚았으니까. 근데 항구에서 어디로 가게? 설마 늪지로 가려는 거냐?”
어떻게 알았지. 미카엘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아는 듯한 노인에게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쾅쾅.
갑자기 문이 험악하게 두들겨졌다. 무디스는 창문으로 그들이 영주의 기사라는 것을 확인했다. 쫓아온 걸까. 미카엘은 대번에 안색을 굳히곤 수지를 안아 들었다. 무디스는 그런 그에게 기다리라고 한 뒤 안쪽 방에서 곧 커다란 배낭을 낑낑 끌고 왔다.
“무슨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챙겨 두었지. 자. 이것도 들어라.”
“예?”
“아니, 그럼 병약한 노인에게 들라고 할 셈이야? 여자를 거뜬히 들었으니 이것도 더 들 수 있잖아!”
얼떨결에 미카엘은 그가 준 배낭까지 어깨에 걸치고 말았다. 묵직하니 안에서 병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디스는 설명 없이 뒷문을 가리켰다.
“가자, 항구로 향하는 지름길을 안다.”
삐쩍 마른 다리로 휘적휘적 걷는 노인의 뒤를 미카엘이 따랐다. 속도는 느렸지만 지름길을 안다는 게 거짓이 아니었는지 금세 항구의 선착장이 나타났다. 그들은 로난의 도움으로 아더를 쉽게 찾았다. 그는 제법 큰 배에 올라타서 그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무사히 왔군. 근데 이분은?”
아더는 미카엘의 뒤를 힘겹게 따라 올라오는 노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미카엘은 멈칫했다. 안내하고 갈 줄 알았던 노인이 배까지 올라타다니.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때, 노인이 아더를 향해 버럭 외쳤다.
“치료사다! 긴 항해에는 필수 인물이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아더에게 미카엘이 멋쩍은 듯이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요. 수지 아가씨와 아는 사이니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데려가야 말지 순간적으로 고민되었으나 수지의 상태를 보면 데려가는 게 이롭다는 판단이 든다. 따라서 아더는 딱히 반대하진 않은 채로 그의 생김새를 살폈다. 햇볕을 받은 피부는 생기를 띠기보다 오히려 더 병적인 흰빛을 더 부각시킨다. 웬만한 난동은 아더가 힘으로 제압할 수 있을 법한 몸까지. 염색이 빠진 듯한 창백한 피부와 해골 같은 마른 외향을 보면서 아더는 그도 범상치 않은 과거를 지녔다고 판단했다. 뭐가 됐든 무디스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두 기사가 불편한지 이내 소리를 빽 질렀다.
“힘들어 죽겠다! 병약한 노인네를 계속 서 있게 할 셈이야? 어서 쉴 장소로 인도하지 못해?”
“따라오시죠.”
아더가 앞장섰다. 천장이 낮은 갑판 바로 아래의 공간이었다. 방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세간살이 하나 없는 낡고 허름한 공간이었지만 빛이 창문으로 약하게나마 들어와 음습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노인은 모서리마다 핀 거미줄이 맘에 차지 않는지 연신 투덜거렸다.
“아니 이런 곳에서 쉬라고? 먼지인지 벌레인지 모를 공기를 들이키면서?”
아더는 기어 다니는 벌레를 손수 잡으면서 말했다.
“그나마 깨끗한 곳입니다. 더 아래도 있지만 술병이랑 정체 모를 것들이 가득 쌓여 있어서요.”
“네놈들 선박은 아닌 모양이지? 보아하니 막 사는 인생들 것을 빼앗은 거 같은데.”
“그게 문제 됩니까.”
“나? 나야 상관 없지. 내 몸 하나 눕힐 곳만 있다면. 이런 배 수십 척을 가져와도 개의치 않는다.”
솔직하게 대답하는 무디스였다.
그러나 그렇게 해적 수백 명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이기심의 소유자인 그라도 수지에 대해선 까다롭게 굴었다. 그녀가 누워 있을 곳은 각별하게 깨끗해야 한다고 야단을 떤 것이다. 결국 미카엘이 와서 쓸고 닦고 빛을 내자 그제야 수지를 눕히게 하고는 그녀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미카엘은 그가 진료를 보는 동안 가져온 배낭을 옮겼다. 커다란 병에 정체 모를 액체들이 가득 담긴 게 이상하다. 술은 아닌 거 같은데.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무디스가 소리를 질렀다.
“뭘 하는 거야? 귀한 거니까 깨지지 않게 한쪽에 잘 놓아!”
“이게 뭐죠?”
“내 자산이다.”
“자산이요?”
“자세한 건 나중에 물어보고 깨끗한 물을 끓여 와. 붕대를 갈아야겠으니.”
미카엘이 끓는 물을 준비하는 동안 아더는 늪지로 배를 몰았다. 바람만 잘 타면 이틀이면 도착하게 될 것이다. 섬 근처의 파랑이 거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섬에 가까워지면 작은 배를 내려서 진입해야지. 아더는 그렇게 마음 먹으며 키를 고정해 놓고 갑판 아래로 내려왔다. 상황이 괜찮은지 확인하러 온 그에게 노인은 가늘게 뻗은 눈을 번쩍였다.
“잘 왔다. 저 작은 놈은 일은 잘하는데 자꾸만 꼬치꼬치 캐물어서 귀찮던 참이었어.”
미카엘은 쳐다보자 이제야 살았다는 눈이다. 소년은 잽싸게 말했다.
“전 그럼 먹을 걸 찾아보겠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
“식사 준비는 서둘러 해야죠!”
“잠깐.”
왜 이리 서두르냐고 아더가 말하려고 했으나 그전에 깐깐한 노인네의 요구 사항이 쏟아졌다.
“쓸만한 탁자 좀 구해 와. 한 세 개 정도. 이 공간에 놓고 정리하기 좋은 거야 해. 약초를 섞는 유리병도 많이 필요하다. 반드시 유리로 된 것이어야 해. 나무 병 같은 건 불순물이 많으니까.”
“알겠습니다.”
돌아서려는 아더를 노인이 불러세웠다.
“아직 안 끝났어! 하얀 천도 필요해! 이왕이면 누에가 짠 것으로! 감촉이 좋은 게 좋거든. 내 허리에 댈 거라서 부드러워야 한다. 그리고 마법의 가루가 있지? 있다면 다 나 줘! 회복 약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위기의 순간에 긴요하게 쓰일 거다.”
“끝입니까?”
“끝? 이제 시작이지! 보다시피 난 매우 병약하단 말이야. 경련이 와도 편히 앉을 수 있는 의자가 필요해. 자네는 힘이 좋으니까 의자를 개조해 흔들의자를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또 피가 잘 통하게 발을 올리는 받침대가 있어야 하는데…….”
노인의 요구를 다 들어줬을 때에는 어느새 저녁이었다. 아더는 잔소리가 참 많은 노인네라고 생각했다. 무던하게 일을 잘 하는 자신도 고개를 내두를 정도의 뻔뻔함과 깐깐함이 있는 그를 보니 왜 미카엘이 일찍부터 요리한다고 설치면서 도망쳤는지 알 거 같았다.
파도가 간간이 치는 밤의 바다에서 키를 단단하게 다시 고정하고 온 아더는 간판에서 요리하는 미카엘을 보았다. 새가 옆에서 날개를 펼치며 이거 넣어라, 저거 넣어라, 요란하게 간섭하고 있었다. 맛보라고 국자를 새에게 들이미는 미카엘을 보고 있자니 그가 탈영하고서 제정신이 아니구나 싶다. 깊이 생각하면 신경 쓰였기 때문에 아예 무시하면서 아더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입구에서부터 노인네가 그답지 않게 밝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