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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141)화 (141/163)

141화

로리엔은 날카롭게 외쳤다. 그녀에겐 로퍼처럼 굳어 있지 않고 상황을 처리할 침착함이 있었다. 그녀의 외침에 수비를 서던 기사들이 달려왔고 그를 기계 앞에서 끌어냈다. 잠시 후, 왕자가 달려왔다. 설명을 들은 그는 무서운 표정으로 조작자를 노려보았다.

“왜 이런 짓을 했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서요.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의 답변에 로퍼가 움찔했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를 왕자는 그러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조작자만 쳐다보았다. 초연한 눈빛이 이런 상황을 겪어 본 자처럼 차분한 것이 이상했다.

“정체가 뭐지? 왜 사령관에게 이런 짓을 한 거야?”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사령관께 도움을 드리고 싶었고요.”

“기억을 되살리는 게 진정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나?”

“그럼 기억을 지우는 게 진정 이분께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질문으로 대꾸하는 순진한 얼굴이 짜증 났다. 왕자는 칼을 빼 들었다. 연금술사는 움찔하면서도 입술을 열었다.

“저는 제국 사람이라 원래 사령관님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분이 불쌍하더군요. 기억을 맘대로 지웠다가 말았다가 하는 장난감 취급이라니. 기르는 개에게도 그런 짓은 안 할 겁니다. 하물며 나라의 큰 공을 세우는 사령관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잣대가 헝클어진 괴물들이나 할 그런 신 놀음을……”

왕자의 팔이 움직였다. 날카로운 칼에 목은 단번에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퍼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얼른 눈치가 보여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비명까지 멈추는 건 아니었다. 방금까지 싹수가 괜찮은 후계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목이 잘려 바닥을 뒹구는 시체가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로퍼가 딸꾹질을 시작하는 사이 왕자는 차가운 얼굴로 칼을 칼집에 넣고 있었다.

“어디서 감히 제국의 첩자 따위가 의견을 나불거려?”

낮게 중얼거린 그는 방금 말에 어떤 타격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냉기 서린 표정으로 로리엔을 응시했다.

“상황 수습이 가능하나?”

“아…….”

“로리엔! 수습이 가능하냐고!”

“그, 그게.”

그녀는 얼른 정신을 차려 대답했다.

“이미 기억이 합쳐져서 중단이 어렵습니다. 지금 손을 대면 의식 전체가 붕괴해 몸까지 망가질 수가 있어서요.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망가질 수…….”

“젠장!”

왕자가 처음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신경질이 났는지 그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연금술사의 머리를 발로 쾅 찼다. 그 탓에 피가 튀어 비단옷이 지저분해졌지만 여전히 분이 안 풀린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사람 관리를 철저하게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못 알아낸 거냐고!”

“저, 저도 정말 영문이…….”

말을 더듬는 로리엔에게 왕자는 싸늘한 시선을 치켜떴다.

“정말 실망이야, 로리엔. 자네는 얼굴만 반반한 관리자일 뿐이야. 정작 이런 중요한 일에서는, 실수하고 마는 애송이에 불과하지. 솔직히 자네가 남들보다 잘하는 게 뭐가 있어? 연금술사 능력이 동료들보다 월등히 출중한가? 아니면 집안이 뒤를 봐줄 만큼 압도적인가? 얼굴 하나 반반하고 성향이 순종적이라 수석 연금술사로 둔 것인데, 이렇게 일을 그르치다니! 중요한 무기를 잘 관리하긴커녕 제국의 첩자가 맘대로 하게 놔두었잖아!”

왕자가 노해서 소리쳤다. 비난은 세기는 더 강도를 더했다.

“여태 들어간 비용이 얼마인지 알아? 사령관이 망가지면 손실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냐고! 자네를 변방으로 보내 마나 광부로라도 써먹어야 할 할 판이야. 자네의 가치는 어차피 그 정도일 뿐이니까. 아니 얼굴이라도 반반하니 창녀촌으로 보내 몸값을 받아야겠지! 아니! 지금 실패를 생각하면 그것도 부족해! 연금술에 필요한 장기를 얻는 실험체로라도 써야 할 판이라고!”

로리엔의 얼굴이 점점 시퍼레졌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소리를 왕자에게 듣게 되다니. 손등이 마구 떨려 왔다. 문득 렉스가 ‘적당히 이용해 먹기 좋은 연금술사’라고 정의했던 게 기억났다.

‘그의 말이 맞았어.’

자신은 권력자의 써먹기 좋은 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왕자 옆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연금술사들의 수장이라고 은연히 자부심을 가졌던 제가 부끄러워져서 로리엔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왕자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몰래 가져온 마나 양이 엄청나서, 한동안 마나 공급에도 차질이 생길 텐데. 그걸 다 어떻게 수습하지? 아바마마에게 당장 어떻게 변명을 하냔 말이야! 전쟁이 금방 끝날 거라고 기대하는 그 늙고 병약한 왕에게, 마나가 부족해서 마나 기사를 당분간 쓸 수 없을 거라고 어찌 설명해!”

이윽고 한숨을 크게 내쉬는 왕자였다. 사방은 고요해져 있었다. 왕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항상 모든 일을 여유 있게 진행했기 때문에 그럴까. 제 반응에 긴장한 수하들이 보인다.

‘의외로 나쁘지 않아.’

잔뜩 기합이 들어간 수하들을 보며 광포한 것도 통치하는 데 괜찮겠구나, 느끼고만 왕자였다. 어쨌든 그는 진정할 요량으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천천히 뒤로 넘겼다. 모양이 말쑥해지면 말쑥해질수록 마음도 몸도 진정된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왕자는 어두운 눈을 번쩍였다.

“그가 깨어나는 데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로리엔은 움찔해서 대답했다.

“확실치 않지만 이삼일 정도…….”

“만약을 대비해 마나가 억제되는 특수한 시설에 가둬.”

“알겠습니다.”

“순종적인 무기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닌 채로 깨어나면 위험하니까.”

로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깨어난 그가 어떤 존재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말 잘 듣는 사령관이 될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가 눈을 떠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시 붙잡아 넣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를 막으려고 내 마나 기사들이 모조리 소모되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왕자는 마나 기사들로 깨어난 사령관을 막을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로리엔은 마나 기사들이 현재 인원보다 두 배 이상 몰려와도, 노만 같은 자가 열 명이 덤벼든다고 하더라도, 깨어난 사령관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힘의 절대량부터 너무 차이 나니까.’

따라서 어떻게든 사령관을 순종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필요한데. 지금의 결과가 어떨지 모르니까 너무도 불안한 그녀였다. 로리엔은 떨리는 손을 감춘 채로 로퍼에게 턱짓을 했다.

돌처럼 굳어 있던 로퍼는 그제야 숨결이 불어 넣어진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특수 감금 시설은 실험실에 만들어지게 될 것이므로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자신이 모든 걸 감독해야지 마음먹으며 떠나려는 그녀를 왕자가 불러세웠다.

“내 무기를 또 망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로리엔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왕자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그를 쓸모 있게 만들어. 필요하다면 기억을 수십 번 지워서라도, 의식이 망가지면 의식을 교체해서라도. 내가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거야.”

왕자는 그를 소유한 신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헉, 헉.”

깊은 숲을 정신없이 뛰어가는 인영이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품에 그만한 여자 하나를 안은 채였다. 비슷한 크기의 여성을 안고서도 그는 나는 듯이 달렸다. 커다란 돌도 밟아 뛰고 흐르는 천도 건너뛰었다.

달아난 이래로 한 번도 쉬지 않았던 그였지만 쫓아오는 자들은 집요했다. 어디로 가든 얼마나 빨리 달리든 쫓아왔다. 사냥개를 푼 것인지 컹컹 소리도 점점 가까워지자 소년 기사는 다급한 심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방금까지 길 안내를 하던 새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놓쳤나?’

일단 급한 대로 나아가자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저기 덤불 뒤에서 누군가 수지, 수지 어색하게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소년 기사는 멈칫해서 덤불을 살짝 헤치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파란 눈의 소년 하나가 그들을 보며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든다.

“어서 타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자신이 타고 있는 허름한 짐마차를 가리키면서. 소년 기사, 아니 미카엘은 망설였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숲에 소년 하나가 마차를 태워 준다고 한다. 간절히 바라던 탈출 기구였기 때문에 미카엘은 뛰어들다시피 마차에 올라탔다.

“갈게요!”

파란 눈의 소년이 신나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새였던 그가 마차 운전을 잘할 리가 없었다. 천장과 벽에 여러 번 머리를 부딪치고 나자 미카엘이 짐 공간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내가 할게!”

“뭐라고요?”

미카엘은 못 알아듣는 얼굴에 날 듯이 마부석으로 이동해 고삐를 가져갔다. 얼떨결에 고삐를 빼앗긴 소년은 멈칫했다가 곧 자신의 할 일을 깨닫고 짐 공간으로 이동했다. 미카엘은 그가 가는 모습을 힐끔 바라봤다.

‘설마 저 소년이 그 새야?’

어이없었지만 죽던 자신도 살아난 세상인데 뭐가 안 될까 싶다. 미카엘은 오래 고민하지 않으며 빠르게 산길을 내려갔다. 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바라보았다. 쫓아오던 사냥개는 다행히 멀어진 모양이었다. 미카엘은 안심했다. 일단 추적대를 따돌렸으니 소로로 방향을 틀어 남으로 달아날 셈이었다.

‘항구에서 배를 잡아타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만.’

미카엘은 급한 건 가서 해결하자고 생각하면서 바쁘게 말들을 재촉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렸다. 중간중간 덜컹거리는 진동에 수지는 가느다랗게 눈을 뜨기도 했다. 낡아 빠진 나무 천장, 알싸하게 풍기는 약초 냄새. 그리고 근심 걱정 가득한 푸른 눈의 소년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게 낯설어서 그녀는 눈을 깜박거려야 했다. 소년이 울먹였다.

“수지 괜찮아요?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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