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알겠습니다.”
노만의 눈길은 어느새 바닥에 뒹군 마차에 향해 있었다. 치료사가 다급하게 입구를 드나드는 것을 보아 마에뜨의 상태가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런. 저러다 전하의 아이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하죠?”
걱정하며 묻고 있었지만 은근히 제 눈치를 살피는 것이 자신의 반응이 궁금한 듯했다. 건방지다고 생각하면서도 왕자는 진실하게 답했다.
“안타깝겠지. 하지만 그게 다야. 아이는 여자만 있으면 몇 번이고 만들 수 있어. 하지만 사령관은 달라. 손에서 떠나면 끝나는 거야. 왕국의 병기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마는 거지.”
막대한 비용은 물론 대륙 정복의 꿈도 저 멀리 날아간다. 왕자는 어두운 눈을 치켜떴다.
“더 큰 목적을 위해서라면 따라서 저런 희생쯤은 감내할 줄 알아야 해.”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노만은 히죽히죽 웃었다. 역시 자신이 따르는 권력자다웠다. 그는 기분이 좋아져 기괴하게 미소 지으며 멀쩡한 마나 기사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목표물을 쫓아 사냥을 할 시간이었다.
한편 렉스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표면적인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의식과 기운이 날뛰고 있었다. 마나 억제제를 쏟아부어도 이를 악물며 분개하는 모습에 로리엔은 왠지 질려 버리고 말았다.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그녀를 보며 로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작해도 될까요?”
“…….”
로리엔은 대답하지 못했다. 저렇게 불안정한 상태인데, 기억을 제거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저번에도 비슷한 상태로 기억을 제거했더니 렉스의 상태가 이상했었다. 더 비협조적이고 날이 선 존재가 되어 있었다. 마치 제어 안 되는 짐승을 깨운 것처럼.
‘이번에도 그러면 어떡하지?’
더 야만적이고 잔인한 존재가 된다면. 그러면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그런 불안으로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로퍼가 조바심이 난 것처럼 되물었다.
“로리엔 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전하께서 지켜보고 계신데.”
왕자는 실험이 잘못될까 봐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예리하게 고정된 시선을 확인하면서 로리엔은 더는 망설일 수 없다는 듯이 손을 꽉 쥐었다.
“가지고 온 마나는 어떻지?”
“안정적인 상태입니다. 양도 상당하고요. 기억 제거와 보충을 하고 나서도 넉넉하게 남을 만큼 많아요.”
로퍼는 가지고 온 마나 양을 살피면서 놀란 목소리로 덧붙였다.
“폐하께서 이 정도 양을 허용하시다니, 의외인데요? 항상 마나는 신중하게 써야 한다며 필요한 양만 주셨는데. 이 정도 여유분이면 사령관님의 기억을 두 번은 더 제거할 수 있겠어요. 물론 진짜 그러진 않으시겠지만.”
농담처럼 한 소리였는데 로리엔의 표정이 진지했다. 엄숙한 어조로 그녀가 대답했다.
“폐하께서 허락하신 게 아니야. 이건 전하께서 독자적인 결정으로 광산에서 가지고 온 거야.”
“그, 그게 가능한 건가요?”
로퍼가 아까보다 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로리엔은 신중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누가 듣고 있지 않은데도 그래야만 하는 죄책감과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폐하께서 아신다면 물론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 하지만 지금은 전시고 우리는 궁지에 몰려 있어. 까닥하면 왕국의 보물을 잃을 처지에 놓여 있지. 보물을 잃는 것과 왕께서 노하시는 것 가운데 어떤 걸 선택해야 할까? 전하께선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걸 선택하신 거야. 왕국을 이끌 후계자로서.”
이는 단순히 마나를 몰래 가져오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왕이 왕자의 의견을 애초에 신중치 못하다고 반대하고 나선 것부터가 문제였다. 왕은 사령관의 기억을 초기화시켜 왕정에만 충실한 존재로 만들자는 왕자의 의견을 비난했다. 좋은 군주가 해서는 안 될 비인간적인 결정이라고 꾸짖었다.
결국 왕자는 그 이야기를 더는 논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로 왕 모르게 일을 진행했다. 어차피 병상에 누워 있는 왕이었고 그의 주요 측근들은 늙었거나 몸을 사리고 있었으니까. 주변 입단속만 잘 하면 그는 비인간적인 일은 영원히 모르다가 세상을 떠날 예정이었다. 왕자가 의도한 대로.
로리엔은 왠지 양심이 쿡쿡 찔려 오는 걸 느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그분을 도와서 우리도 이 일을 비밀리에 신중하게 진행해야 해. 입이 무거워야 한다는 건 안 말해도 알고 있겠지?”
“무, 물론이지요. 연금술사니, 실험에만 전념할 뿐입니다!”
얼른 웃으면서도 로퍼는 눈치를 살폈다. 많은 마나가 공급된 배경에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새삼스럽게 왕과 왕자를 대립하게 만든 렉스란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지 상기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마나를 넉넉하게 주신 건 다 전하의 의도란 말이군요.”
“시도가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다시 시도할 수 있게 주신 거지.”
“실패 시 또 기억 제거라. 그거 과연 괜찮을까요?”
이 실험의 주요 관리자인 그마저 확신이 안 드는 모양이었다. 불안하다는 표정에 로리엔은 일부러 밝게 말했다.
“당연하지. 그가 누군데. 우리의 렉스인데.”
로리엔은 그를 바라보았다.
“완벽한 창조물인데. 물론 괜찮지.”
이유가 애매한 무한 긍정의 답변이었으나 로퍼는 익숙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리엔 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렇겠죠.”
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저도 의심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로리엔은 마음을 다잡았다. 생각해 보면 실험이란 언제나 위험과 불안을 동반했다. 거듭되는 사건으로 이번엔 더 각별하게 걱정이 커진 것에 불과하다. 설사 진짜 위험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리고 수석 연금술사가 아니던가. 결과가 잘못되더라도 수습할 용기와 결단이 있는 여자였다. 권력자의 지지를 받는 재원이었다.
‘그러니까 과감해지자.’
로리엔은 렉스를 바라보았다. 저항하고 절규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두려움 대신 애틋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더러운 여자 하나 때문에 저게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이 모든 게 늪지에선 온 수지 때문이라고 원흉을 규정해 버리자 그녀의 마음은 더욱 편해졌다. 악한 여자로부터 자신의 남자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당신은 괜찮아질 거예요.’
절규하는 그에게 말없이 속삭였다. 그러면서도 직면한 그의 고통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냉정한 결단의 말이 이어졌다.
“시작해.”
로퍼는 빠르게 신호를 보냈다. 막내 연금술사였던 그는 그 신호에 잠시 주춤거렸다. 왠지 고민된다는 얼굴이었다. 로퍼는 엄숙한 얼굴로 과장해서 주의시키었다.
“절대로 실수해선 안 돼. 사령관님은 아주 중요한 무기니까. 제국을 무찌르려면 반드시 이 일을 성공시켜야 한다고.”
“반드시, 말이죠?”
“그래!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네 목숨을 걸고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마침내 결심이 섰는지 신참이 비장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자신의 충고가 제대로 통한 모양이었다. ‘역시 경험자의 무게 있는 말 한마디가 중요하다니까.’ 로퍼는 우쭐해지고 말았다.
곧 오래지 않아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번 아더가 있을 때 잠깐 고장 났던 부분은 말끔히 수리되어 이전보다 고요하고 빠른 소리가 났다. 로퍼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신참이 조작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습득 속도가 빠른 그는 어느새 기계를 섬세하게 조작하는 담당자가 되어 있었다. 제법이라고, 그 모습을 사뭇 대견하게 보고 있던 로퍼의 표정이 어느새 굳었다.
“잠깐. 지금 뭐 하는 거야?”
로퍼의 목소리가 떨렸다. 예상했던 조작 방법과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로퍼는 움찔해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면 기억을 잃는 게 아니라 기억이 합쳐지게 된다고. 맨 처음 기억부터 합쳐질 텐데…….”
로퍼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되면 어떤 존재가 될지 전혀 알 수가…….”
기억이 혼합되어 미칠 수도, 아니면 모든 걸 기억해서 멀쩡할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왕정이 바란 존재는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멈춰야 하는데, 신참은 굳은 표정으로 마나 보충 단추까지 누르는 게 아닌가. 기억 조작과 함께 마나 보충이 된다는 소음이 들려오자 로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는 당황해서 로리엔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뭐야?”
로리엔은 단번에 달려왔다. 조금 떨어져서 렉스에게 처음으로 각인될 말을 고민하고 있던 그녀는 로퍼의 굳은 얼굴을 보며 멈칫하고 말았다. 그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마나에 완전히 감싸인 렉스가 보인다. 특히 뇌와 심장에 빛이 집중되어 있었다. 기억과 마나 보충에 관련된 일을 당하고 있단 증명이었다.
“대체 왜 그래?”
“그, 그게…….”
로퍼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기계를 가리킬 뿐이었다.
“왜? 기억 조작이 착실히 되고 있는 거 같은데? 이제 기다리면 되는 거 아니야? 기억이 모조리 제거될 때까지…….”
불안하게 말을 잇고 있던 그녀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조작법이 틀렸다. 그리고 그건 조작자의 얼굴을 보건대 명백히 의도한 것이었다.
“경비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