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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139)화 (139/163)

139화

노만은 빠르게 집게 같은 팔로 그의 어깨를 끊듯이 잡아당겼다. 그 탓에 살과 근육이 찢어지며 피가 터져 나왔지만 렉스는 비명을 삼킨 채로 그의 목을 붙들었다. 역으로 공격해 목을 끊으려고 한 것이지만 변형된 그의 몸은 너무 두껍고 단단해서 손가락이 투구를 뚫고 목살을 조금 파고든 게 다였다.

“짜증 나네요. 너무 성가셔서 이제는 짜증 나요!”

노만은 마나를 막무가내로 분출했다. 마나를 억제하는 힘이 담긴 마나가 사방에 뿌려지자 렉스는 그대로 떠밀려 땅바닥에 처박혔다. 근처에 있던 마차도 그 탓에 날아가고 말았다. 거대 기사는 신경 쓰지 않으며 눈을 깜박였다. 어느새 머리가 시원했다. 렉스 탓에 투구가 망가져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혐오스러우니 반드시 쓰라고 했지.’

로리엔, 그 여자의 징그럽다는 눈빛이 생각나 기분이 좋아진다고 생각하면서 노만은 자유로워진 얼굴을 까닥였다. 목뼈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흐물거리는 연체동물 같은 동작은 정말 기괴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게 있었다. 수지는 드러난 기사의 인상을 보며 창백하게 낯빛이 질렸다.

“다, 당신은.”

“제가 누군지 알아보겠습니까? 저도 듣기만 했던 터라서요. 사령관님과 그 여자를 이전에 마주한 적이 있을 거라고. 많이 변해서 저를 못 알아보면 어쩌나 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거대 기사, 노만은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이전의 적수를 알아보는 게 더 좋으니까요. 끝이라고 생각했던 공포가 다시 살아났다는 두려움,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눈앞이 컴컴해질 테니까!”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딱딱한 입술을 벌리며 그가 힘을 뿌렸다.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잠시, 수지는 뒤에서 날아온 마나가 그 공격을 와해하자 놀라고 말았다. 미카엘. 소년 기사가 제 동료들에게도 마나를 뿌리고는 재빨리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서 가요.”

하지만. 수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저기에 있는데.’

막막한 심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쓰러진 렉스가 다시 절뚝거리며 일어나 노만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몸이 망가진 상태로도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보겠다는 그의 의지가 느껴졌다. 혈관이 터져 초점이 사라진 멍한 시선을 확인하자 서러움이 울컥 올라오는데 미카엘이 그녀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가요.”

수지가 미카엘과 떠나자 노만이 외쳤다.

“안 돼!”

사냥감이 도망간다. 어떻게든 잡아 죽여야 하는 것인데.

“절대 도망갈 수 없습니다!”

노만의 성난 마나가 뒤따른 것도 그때였다. 강력한 마나가 뿜어지자 근처의 나무가 모조리 뽑히며 바람이 몰아쳤다. 미카엘은 자체 마나를 방어막 삼았지만 모든 충격을 완화할 수 없었던 터라 수지와 함께 땅을 구르고 말았다.

“수, 수지 아가씨?”

재빨리 몸을 일으킨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녀부터 찾았다. 다행히 수지는 그의 앞에 처박혀 나무뿌리 사이에 낀 채로 힘없이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다행…….”

이라고 말하려던 미카엘은 곧 멈칫했다. 그녀의 복부에서 번지고 있는 핏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원인은 마나로 날아온 나뭇가지였다. 미카엘은 서둘러 갑옷에 숨겨진 소량의 마법 가루를 꺼냈다. 그는 나뭇가지를 살살 빼내며 가루를 뿌렸다. 수지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신음 소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아, 흐윽…….”

가루의 효과로 피는 멎었지만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던 모양인지 숨결이 떨리는 걸 보며 미카엘은 신중하게 말했다.

“치료부터 받아야겠습니다. 당장 치료사를 찾아서,”

“……남쪽 항구로.”

“네?”

“항구에서 늪지로…….”

“하지만.”

“가야 해요…….”

생기가 점점 몸에서 떠나가는 목소리였다. 빛이 희미해진 눈빛에서 절박함을 느낀 미카엘은 입을 꾹 다물며 저와 비슷한 키의 그녀를 안아 들었다.

뒤쪽에선 노만이 마나를 번쩍거리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배신한 기사는 잡아서 목뼈부터 발라낼 거라고, 그런 상태로 마나 한 줌 보충하지 않고 수백 일을 괴롭힐 거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미카엘은 잠깐 그곳을 바라보았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었으나 이 순간 명령을 따르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기사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고 싶은 일이.

‘참 묘한 일이지.’

자신은 수지를 죽이기 위해 배정된 기사였다. 살리는 게 아니고 없애라고 보내진 기사. 한데 지금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왕정을 배반한 기사가 되었다. 반역죄로 처형되어도 마땅한 인물이.

‘이게 다 사령관님 때문인가?’

미카엘은 핏기가 사라진 수지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사령관 때문이라고 하기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저의 마음이 느껴졌다. 마나 기사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 대해 주었던 그녀를 염려하는 마음이 사령관을 따르자는 마음보다 더 앞서는 것이다.

‘좋은 사람은 살아남아야지.’

미카엘은 눈을 빛내며 어두운 사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야 하지?’

생전 처음, 명령이 아닌 제 의지로 길을 떠나고 있다. 앞으로의 여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듯이 사방은 컴컴했다.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마나 기사인 자신도 갈피를 잡기 어려운데 때마침 커다란 새가 나타나 요란하게 날갯짓을 했다.

“너는 설마.”

아픈 수지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파닥파닥 날더니 곧 용감하게 한 곳을 향해 날아가고 돌아오고를 반복한다. 그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 같았다.

“네가 아가씨가 말한 그 새구나?”

특별한 파란 새. 미카엘은 저를 향해 반짝이는 푸른 눈을 응시했다. 왠지 그렇다고 말하는 듯한 눈초리가 마음을 놓이게 한다. 이 새라면 믿을 수 있어. 미카엘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이리로 가면 남쪽 항구로 향할까?”

새가 돌아보자 미카엘은 저도 모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우린 지금 달아나는 중이라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남쪽 항구로 가야 해. 다친 사람이 있으니 마차가 있다면 좋겠는데.”

새가 목을 갸우뚱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거 같아서 마차를 타는 시늉에 말을 채찍질하는 걸 동작으로 보여 주자 바로 머리를 까닥거린다. 그 뒤 새는 무언가를 아는 것처럼 빠르게 앞서갔다. 가끔 돌아보는 모습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미카엘은 수지를 안은 채 그를 바삐 뒤쫓았다. 기사단이 오기 전에 달아나야 한다. 소년 기사의 머리카락이 쉴 새 없이 휘날렸다.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한 거야?”

왕자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 당연히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던 일들이 어그러졌다는 것에 심히 불쾌감을 느낀 것이다. 노만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반성한다는 그 태도에 그러나 사람들은 겁부터 먹었다.

거인의 키인 그가 고개를 수그리면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아래를 노려보는 것 같은 험상궂은 얼굴이 만들어진다. 안 그래도 끔찍한 얼굴. 마치 위협하는 괴물의 모습처럼 자신들을 노려보는 모습에 왕자의 기사와 수하들은 모두 흠칫 숨을 들이켰다. 왕자만이 그게 신경 쓰이지 않다는 듯이 화를 내기 바빴다.

“가장 먼저 죽였어야지! 사령관을 엉망으로 만드는 데 정신이 팔려서 정작 네 임무는 소홀히 했잖아!”

“죄송합니다. 제 실수입니다. 사령관님을 제압한다는 것에 들떠서 그만. 중간에 누군가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고요.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축 늘어져서 빠져나오는 소리가 변명인지 사죄인지 애매했다. 왕자는 찌푸린 얼굴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혐오스럽게 변형되어 뒤틀린 얼굴. 좁은 눈매와 흉측한 코, 비정상적으로 커진 입술은 보고 있노라면 구역질까지 치민다. 로리엔의 말처럼 아군도 두려워지는 생김새였다.

‘그래서 그런가? 잘못하니까 더 기분 나빠.’

왕자는 콧등까지 주름지도록 왈칵 인상을 썼다. 노만은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두터운 입술을 새초롬하게 움직였다.

“기사의 배신만 없었어도 한결 나았을 겁니다. 물론 제가 알아봤어야 하지만요. 상황이 워낙 갑작스러워 잘 대비가 않는 게 아니겠습니까? 마나 기사란 자가 정말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저를 만들어 준 왕정을 배반하다니요. 모두 저처럼 충성스러울 줄 알았는데. 대체 원인이 뭘까요?”

“지금 내게 묻는 건가?”

“설마 그렇겠습니까.”

노여워하는 왕자를 보며 노만은 얼른 능글맞게 대답했다.

“그들을 만든 책임자에게 묻고 싶은 거죠. 그들이 그렇게 배반할 수 있는 존재인지. 어쩌면 말 안 듣는 사령관님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그게 무슨 말이야?”

“마나 기사로 있어 보니 사령관님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겠더군요. 암묵적으로 마나 기사들은 사령관님을 우상처럼 따르고 있습니다. 그분의 행동이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요. 아마도 실험체들끼리 완성작이 가진 완벽함에 끌리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만 뭐가 됐든, 마나 기사들 사이에서 사령관님의 위치는 왕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흠.”

생각보다 예리하고 불쾌한 분석이었다. 마나 기사들 사이에서 사령관의 언행이 화제란 것을 알았지만 ‘왕’ 같이 생각될 정도일 줄 몰랐던 왕자는 노만의 지적에 사령관을 반드시 바꿔 놓아야겠다고 확고하게 마음을 굳혔다. 왕자는 냉정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사령관의 문제는 더는 신경 쓰이지 않을 거야.”

어느덧 대형 기구에선 복잡한 기계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사령관은 마나를 억제하는 특수 합금에 꽁꽁 사지가 묶여서 그 기계들 쪽으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붙잡힌 순간부터 끌려가는 순간까지도 그는 저항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두 눈은 실명에 한쪽 어깨는 파열에, 온몸에선 피가 흘러내리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따르기를 거부한다. 옆에서 로리엔이 아무리 달래고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구속구에 피부가 찢어져 피가 흐를지 언정 그는 억압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자유를 갈망하고 제 여자를 바랐다. 마치 하나의 분명한 인간처럼.

“정신력.”

순순하게 감탄했다는 듯 왕자는 중얼거렸다. 렉스의 목에 구속구가 더 달리는 것을 보면서 그는 노만에게 말했다.

“사령관은 걱정 말고 너는 임무를 완수해.”

그의 눈빛이 어둡게 빛났다. 야심과 욕망에 가득 차서.

“그 과정에서 방해되는 건 무조건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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