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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136)화 (136/163)

136화

수지는 놀라서 고개를 들고 말았다. 임산부를 이런 곳에 데려오다니. 믿고 싶지 않았지만 저 멀리 있는 가장 호화롭고 큰 마차에서 마에뜨가 내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중요한 인물이 타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웅장한 크기의 육두마차. 잠시 후, 마에뜨가 왕자의 눈치를 살피며 그곳에서 느릿하게 걸어왔다.

“전하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이런 곳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

창백한 얼굴로 마에뜨는 이런 말부터 했다. 임신한 상태로 여기까지 온 게 힘들었는지 숨이 가빠져 있었다.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힘겨운 어조로 덧붙였다.

“갑자기 제국군과 큰 전투라니. 별일 없이 왕성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마에뜨, 꼭 그렇게 될 거야. 그러니 무리하지 말고 바로 마차에 가서 쉬어.”

왕자는 애틋하게 말하고는 수지를 바라봤다.

“마에뜨와 함께 마차에 있지. 가장 튼튼한 마차고, 정예병들이 지키고 있어.”

“하지만…….”

수지는 저도 모르게 렉스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왕자는 그를 방해하지 말란 듯이 말했다.

“적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고대 기계로 포환을 쏘아 대는 통에 웬만한 무기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 그가 해결해야 해. 제국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지 더 많은 병력을 이쪽으로 보내고 있으니까. 아무리 대단한 사령관이라도 그 수를 모두 상대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수지는 그래도 망설였다. 렉스가 말했던 대로 그와 타고 왔던 마차에 있고 싶은데,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마에뜨가 비틀거리는 게 아닌가. 왕자와 수지가 동시에 그녀를 붙잡았다.

“괜찮아, 마에뜨?”

“……!”

다행히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던 것이다. 쉬면 될 거라는 치료사의 말에 왕자는 서둘러 그녀를 마차로 보냈다. 그리고 수지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옆에서 우리 마에뜨 좀 살펴 줘. 자네 이야기를 하는 걸 들어 보니 자네에겐 동질감과 호감을 느끼는 모양이니까. 임신 중이라 예민한 상태라 편해진 자네가 그녀를 도와주었으면 좋겠군.”

수지는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저 멀리 새로 변해 내려오지 못하고 날고 있는 로난에게 미안하다는 신호를 보내고는 그녀는 마에뜨가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수지를 보자 힘없이 웃어 왔다.

“말동무가 되어 준다고요? 정말 고마워요. 실은 혼자라 불안했거든요. 전하께서는 계속 따로 말을 타고 가시고 기사들도 밖에만 있다 보니. 전하께서 아이에게 좋을 거라고 약도 주셨는데 왜 이리 어지러운지 모르겠어요.”

마에뜨는 가지고 온 책을 슬며시 눈으로 바라봤다.

“저 책엔 임신 초기엔 그럴 수 있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어지럽거나 토할 수 있다고. 참 아이를 품는 게 쉽지 않네요.”

수지는 두려워하는 마에뜨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온기에 마음이 편안해졌는지 마에뜨의 숨소리가 길어졌다.

“잘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요. 수지는 참 의지가 되는 사람이에요. 깊게 뿌리 내린 나무에 기댄 것처럼 옆에 있음 안심이 되죠.”

“과분한 칭찬이세요.”

수지는 멋쩍게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맘에 드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

‘렉스와 나무 이야기를 하고 와서 그럴까.’

수지는 마차에 난 작은 창으로 눈을 돌렸다. 몸이 편한 거와는 달리 마음이 파도를 탄 것처럼 출렁거린다. 그가 무사해야 할 텐데. 창에서 눈을 못 뗄 수 없는 그녀였다.

한편 쏟아지는 마나 포환을 처리하고, 몰려든 마나 기계를 부순 렉스는 서둘러 마차에 돌아왔으나 곧 멈칫하고 말았다.

“그녀는 마에뜨 님과 함께 있어요.”

렉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로리엔이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었다. 로리엔은 가장 호화로운 마차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렉스를 바라봤다.

“저기보다 안전한 곳은 없죠.”

“전쟁 중에 안전한 곳이란 없어.”

렉스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특히 높으신 분의 마차 같은 게 제일 위험하지.”

저건 완전히 타격하라고 가져온 게 아니냐며 짜증을 낸 렉스가 그쪽으로 향하려고 하자 로리엔이 막아섰다.

“지금 그녀를 신경 쓸 시간이 아니에요! 제국군이 더 강력한 화기를 가지고 모여들고 있다고요! 하늘을 보면 최신식 기계들이 몰려오는데!”

“알 바 아니야.”

기가 막힌 대꾸였다. 로리엔이 어쩔 수 없이 자극하려고 외쳤다.

“당신의 그녀도 위험해질 거라고요! 제국군의 마나 포환에 터져 버려 죽을 수도 있는데!”

렉스가 굳어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이지?”

로리엔이 그의 싸늘한 표정에 멈칫하고 말았다.

“무, 무슨 말이에요? 당연히 제국 때문…….”

“왕자 때문이잖아. 쓸데없는 도발로 일을 키웠어. 준비도 안 된 채 제국을 자극해 그들의 군대를 모조리 상대해야 하잖아. 도착한 아군 전력을 봐. 보병과 기마병, 그리고 소수의 마나 기사들이 전부야. 제국군에 비하면 형편 없을 정도로 수가 적고 화기가 약하지.”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있잖아요. 당신이란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기운차게 대꾸하는 로리엔이었다. 렉스는 조소했다.

“매우 긍정적이군. 전쟁 사령관인 내가 도리어 배워야겠어. 쥐뿔도 없어도 긍정적인 사고만 하면 다 잘 될 거라고. 아니, 근신 처분 중인 사령관이라고 해야겠지?”

“비꼬는 거예요? 지나간 건 이야기하지 말아요. 현재가 중요하잖아요. 뭐가 됐든 당신이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싫어하던 사령관의 의무에서도 자유로워질 거고요. 싸워야 할 상대가 없어진 거니까.”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군.”

렉스는 손을 뻗었다. 몰래 다가오는 제국군의 기사들이 그 손에서 뻗어 나오는 마나를 맞고 사라져 버렸다. 로리엔이 그 모습에 얼어붙었을 때, 렉스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면 순진한 척하고 싶은 건가? 아직 권력욕에 때가 덜 묻어 본인이 순수한 연금술사라 주장하려고?”

로리엔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어딘가 본심을 찔렸다는 듯이 움찔한 그녀를 보며 렉스가 혀를 찼다.

“본인을 전혀 모르고 있군. 로리엔, 네게선 이미 권력 냄새가 코를 찌를 것처럼 진동해. 왕자의 곁에 있다 보니 그 향이 그대로 배인 것처럼, 그들 무리와 하등 다르지 않지.”

“렉스, 전……!”

그렇지 않다고, 여전히 당신만 생각한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무정한 남자의 눈길은 이미 제게서 구만리 멀어져 있었다. 변명 따위가 아무 소용 없을 정도로 아득했다. 왕자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결국엔 다 그를 위한 거라는 걸 알아 줄 눈이 아니었다.

‘다 그가 그로서 존재하게 해 주려는 건데.’

로리엔은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완벽한 창조물로 거듭나게 해 주려는 제 진심을 몰라주는 게 서운했다. 그를 사랑한다는 사심이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를 안정적인 무기로 존재하게 해 주려는 것인데.

‘더러운 늪지 여자 따위에 동요되지 않는, 완전무결한 존재로.’

따라서 왕자가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계책을 반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렉스가 결코 맨정신으로 기억을 소거 당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나를 바닥까지 쓴 상태로 만든 다음에 마나 억제제와 합금을 이용해 강제로 기억을 제거하려 했다.

‘마나를 바닥까지 쓰게 하려면 큰 전투가 벌어져야 하니까.’

자국민의 목숨 수백이 없어지는 게 대수겠는가. 이번 전투로 죽게 될 수백 명의 기사들이 안타깝긴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렉스였고, 렉스의 복종이었다.

더구나 왕자는 이번 일을 순탄하게 성공시키려고 임신한 약혼녀까지 데려왔다. 그건 수지를 홀로 떼어놓을 수 없어서 데려온 렉스와는 정반대로, 철저히 일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과감한 결단이었다. 무섭지만 이럴 땐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로리엔은 애써 서러움을 내리눌렀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순진하지 않은 생각이 뭐죠?”

아직 제국의 신식 마나 무기가 도착하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 했다. 렉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반응해 왔다.

“권력자가 권력을 얻고 나면 뭘 원할 거 같아?”

“평화요?”

“더 많은 권력이지. 더 무한한 힘.”

“…….”

“따라서 난 영원히 왕국의 종이며 개일 거야.”

“전요?”

로리엔은 왠지 묻고 말았다. 렉스의 입으로 제 존재가 어떤지 듣고 싶었다. 예상대로 대답은 냉담했다.

“그 개도 관리 못하는 적당히 이용해 먹기 좋은 연금술사.”

“……!”

“그럼.”

렉스는 치욕감에 떨고 있는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로리엔이 외친 소리에 다시 멈춰 서야 했다.

“마나, 부족하죠? 오자마자 계속 펑펑 써 댔잖아요! 당신 혼자서 상대하다시피 해서 힘이 빨리 소진된 걸 알아요. 팔에서 작지만 경련이 일고 있으니까.”

마나 전문가답게 그녀는 렉스의 상태를 한눈에 꿰뚫었다.

“지금쯤 마나 보충을 해야 할 거예요.”

“그래서 왕성으로 돌아가라고?”

렉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로리엔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너무 멀어요. 그리고 제국의 무기들이 계속 몰려오고 있잖아요. 마나 기사들이 아니면 그 기계를 마주할 수조차 없으니, 당신 같은 기사들은 여길 떠날 수 없어요. 반대로 동력 기계가 와야 하죠.”

로리엔은 이미 모든 게 고려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실험실의 기계가 여기로 올 거예요.”

“그 복잡한 걸 옮긴다고?”

“이미 옮기고 있어요. 전하의 명이거든요. 폐하께서는 위험하다고 반대하셨지만, 그분께서 이번 승리를 위해서 과감하게 결정하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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