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확실히 요즘 이상한 거 같아.’
수지는 마나를 비밀리에 확보해 보겠다고 나가는 그를 보며 주춤 몸을 일으켰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창밖에서 뿌려지는 주홍빛 낙조에 얼굴을 데인 수지는 이게 아침인지 저녁인지 영 분간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 이유가 밤낮으로 달려드는 렉스 때문인 걸 너무도 잘 아는 그녀는 나쁜 기분을 해소하듯이 제게 달려들었던 그를 다시금 떠올렸다.
‘여길 벗어나면 그도 좀 나아지겠지?’
그를 구속하지 않는 장소로 가는 것이다. 더는 무기로 이용당하지 않아도 되는 곳. 누군가를 죽일 때만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장소라면, 그도 마음속에 쌓인 분노를 조금은 덜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에 모든 화를 떨쳐 내지 못하더라도 흐르는 강물에 먼지를 털어 보내듯, 쌓인 화를 조금씩 조금씩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그도 점점 편안해질 것이고, 여느 인간들처럼 환경에 스며들어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수지는 이왕이면 그 장소가 그를 무서워하지 않고 덤덤하게 받아들여 주는 곳이길 바랐다.
‘마치 늪지처럼 말인가.’
그곳에서 마음껏 활개 치고 살았던 그를 떠올리자 수지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늪지에 있을 땐 살기 힘들다고 느꼈는데, 이런 순간엔 또 그곳이 적당하다고 느끼다니. 그만큼 특별한 곳이라서 그럴까. 그를 만난 장소이며 그를 잃었던 장소라서. 그래서 그런지 더 애정이 갔다.
‘처음엔 마냥 무섭고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신비로운 곳이라고 생각하며 수지는 곧 상념을 털고 외출 준비를 했다. 그가 왕성을 떠날 준비를 하는 만큼 저도 여기서 알아볼 정보를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여길 떠나기 전 최대한 늪지에 대해서 조사해 봐야 해.’
그리고 그 장소에는 도서관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각오를 다지며 도서관으로 향했던 그녀는 정문에서 멈칫하고 말았다. 여느 때처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도서관에는 둘이나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약간 부푼 배를 한 손으로 감싼 채, 왕자의 약혼녀 마에뜨가 웃어 왔다.
“잘 지냈어요?”
그녀는 친근하게 물었다. 그녀의 곁에선 정중한 태도로 에스코트하고 있는 로도스 백작이 의미 있는 눈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자 로도스가 이번엔 고갯짓으로 허락을 구하고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마에뜨 님께서 도서관에 갈 일이 있다고 하셔서요.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당신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서, 선물도 따로 챙겨 왔고요.”
“감사합니다.”
수지는 얼떨결에 내민 책을 받고야 말았다. 제목은 ‘늪지 보고서’였다. 수지가 눈을 크게 뜨자 로도스가 묘하게 웃었다.
“보고 싶었던 책일까요?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늪지에 관한 건 쉬쉬하며 취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보니 도서관과 서점을 뒤지다시피 해야 했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백작이 따로 구해 줬다는 것에 이상한 꿍꿍이가 느껴졌으나 그런 꿍꿍이가 있더라도 꼭 읽고 싶어지는 제목임에는 분명했다. 수지가 기뻐하자 로도스는 물론 마에뜨도 웃음을 지었다.
로도스는 새에 대해서 짧게 안부를 물었다가 잠시 후 숙녀분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라고 적당히 빠져 주었다. 배려심이 깊은 것인지. 수지는 그가 인사하고 떠나는 모습을 저도 모르게 쳐다보았다.
“로도스 백작님은 참 눈치가 빠르세요. 젊은 귀족분들 중에서도 도드라질 정도로요. 그래서 어린 나이에 그렇게 중한 인물이 되었나 생각이 듭니다.”
수지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마에뜨가 말했다. 그녀는 빙긋 웃었다.
“로도스 백작님께서 수지에게 관심이 많은 거 알고 계시죠? 일부러 도서관에 데려다주겠다고 절 찾아온 걸 보면 말이죠. 수지와 친분을 쌓고 싶은 것이 눈에 보여요.”
수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가 단순히 친해지고 싶은 것에 그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나 그걸 말로 표현할 만큼 어리숙하진 않은 것이다. 어쨌든 책을 가져다준 것은 고마웠기 때문에 조용히 미소 짓자 수지의 복잡한 마음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마에뜨가 말했다.
“부담되어도 나쁠 건 없죠. 권력자의 호감이란 건 말이죠.”
마에뜨는 어느새 제 배를 의미심장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수지가 배와 그녀를 쳐다보자 마에뜨가 말했다.
“전 읽었던 책을 반납하고 새 책을 빌리러 왔어요. 그렇게 원하던 임신이 되었으니까 출산에 대해서 알아보려고요.”
“아.”
수지는 아까보다 더 놀랐다. 밤 부엉이처럼 동그래진 눈을 보면서 마에뜨가 웃자 수지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아니요. 알면 다들 수지처럼 그럴 거예요. 제가 살이 쪄서 배가 나왔다고 생각하는지 고위 귀족들 몇은 살 빠지는데 좋은 찻잎을 보내지 않겠어요? 친절하면서도 무례한 느낌. 어떤 건지 아나요?”
수지는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털털하게 상황을 받아들인 그녀가 나름 대단했다. 수지는 곧 그녀의 배를 감격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곳에 생명이 자라고 있어. 그런 깨달음이 가슴을 울리자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경이로워하는 수지의 눈길을 느꼈는지 마에뜨는 따뜻하게 두 눈을 깜박였다.
“참 이상해요. 낯선 나라고 어려운 사람들이었는데. 임신을 하니 어떻게든 다 헤쳐 갈 수 있다고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
“임신이 그래서 대단한 건가 봐요. 실은 허울에 가까운 제 자리도 이걸로 달라졌거든요. 전하께서도 오늘 들으시곤 무척 놀라시며 제가 정식 왕자비가 될 거라고 약속하셨어요. 전쟁이 끝나는 대로 발표하겠다고.”
그녀의 눈은 잘 다듬어진 대리석처럼 유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리숙하지도 마냥 순진하지도 않은 눈이었다.
“그게 쉽게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꼭 그리 될 수 있도록 제가 만들 거예요. 정식 왕자비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전하의 여인들이 절 비웃지 못하도록 말이죠.”
심각한 이야기 같은데. 어찌 반응할지 모르고 머뭇거리자 마에뜨가 괜찮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수지에게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수지도 이방인이잖아요. 이 낯선 왕국에 저처럼 적응해야 하는 타지인. 충고할게요. 저처럼 이곳에 뿌리 박을 이유를 만들어요.”
마에뜨는 침착하지만 낮게 덧붙였다.
“그래야 나쁜 인간들에게 당하지 않아요. 내 자리를 만들어야.”
충고라기보다 경고에 가까운 말이라서 수지는 굳고 말았다. 마에뜨는 곧 심각한 표정을 풀며 긴 외출이 힘든 거 같다고 중얼거리더니 출산 관련 책을 찾고 금세 돌아섰다. 수지는 늪지 보고서를 든 채로, 멀어지는 마에뜨를 바라보았다. 제 자리를 만든 왕자의 약혼녀. 걸어가는 걸음에 왠지 모를 당당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뿌리 박을 이유라.’
지금은 여기 적응하기도 벅찬 것 같은데. 물끄러미 생각하던 수지는 저 멀리 푸른 날개를 퍼덕이며 가까워지는 새를 발견하곤 반가워했다.
로난은 왕성에서 저를 알아보며 먹이를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그들 중에는 기사들의 갑옷을 관리하는 시종도 있는데 그가 먹이를 주면서 이 단어를 한숨 쉬듯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고 했다.
“큰 전투, 큰 전투, 큰 전투…….”
로난은 수지가 준 과일 주스를 꿀떡꿀떡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큰 전투! 얼마나 여러 번 반복했는지 몰라요!”
“그래?”
수지는 로난의 목격담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큰 전투라면 전쟁을 말하는 걸까. 갑옷을 관리하는 시종이라면 전투가 있기 전에 갑옷의 준비를 모두 끝내야 할 터였다. 할 일이 많아지는 것이니 이름 모를 새에게 자신의 시름을 털어놓을 만도 한데.
‘하지만 갑자기 큰 전투라니,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수지가 의아함을 느꼈을 때였다. 렉스가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그는 양손에 커다란 쿠키를 들고 냠냠 먹고 있는 로난을 한 번 째려보고는 수지에게 말했다.
“옷을 입어.”
“네?”
“나갈 거야.”
“어디로요?”
“국경으로.”
수지는 눈을 크게 떴다. 느닷없이 나가야겠다는 그에게 단호함이 느껴졌기 때문에 서둘러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생겼어요?”
“제국군과 대접전이 벌어질 거야.”
“네에?”
수지는 몹시 놀랐다. 거의 이겨 가던 싸움이 아니던가. 갑자기 큰 전투가 벌어진다니 의외였다. 렉스가 흑색 갑옷을 챙겨 입으며 사나워진 얼굴로 말했다.
“왕자가 도발했거든. 저번에 국경을 침범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제국의 가장 곡창지대를 내놓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국경 지대의 민가를 모두 없앨 거라고 협박했지.”
“일부러 그런 거예요?”
“응. 제국을 열받게 하려고 부러 그런 거야. 수뇌부가 살해된 그들 입장에선 왕자의 요구가 황당하고 기가 찰 테니까. 결국 제국이 먼저 대규모 기사와 마나 기계를 출정시켰어. 맞닿은 국경 지대에서 내일쯤 충돌하게 되도록.”
덕분에 마나를 빼돌리던 것을 그만두고 국경 지대로 달려가야 했다. 근신 처분은 자동으로 해제된 셈이었다. 렉스는 짜증이 일면서 동시에 의심이 가고 말았다.
왕자가 자신이 떠날 것을 알고 일부러 제국을 도발한 게 아닐까? 자신이 일을 저지르기 전에 먼저 수를 쓴 것이다. 눈치 빠른 왕자라면 요즘의 자신의 행보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모든 준비를 비밀리에 신중하게 했음에도 이 왕성에서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렉스의 기분은 바닥으로 꺼져 갔다. 역시 이 빌어먹을 왕성을 벗어나야 한다고, 아니 족쇄처럼 얽매이는 이곳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이 들자 살의가 뿜어져 나왔다. 그 탓에 수지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지자 렉스는 또 서둘러 힘을 꾸역꾸역 내리눌렀다.
‘무엇이 됐든 수지의 안전이 우선이야.’
심기를 고르는 그의 눈치를 살피던 수지가 물었다.
“근데 저도 가는 거예요?”
가서 도움이 될까요. 방해만 되지 않으면 다행인데. 떨리는 목소리에 렉스가 눈을 예리하게 번뜩였다.
“어쩔 수 없어. 여기 혼자 남는 게 더 위험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