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왕자가 미리 준비해 놓은 저택을 로리엔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리켰다. 실험실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이렇게 가까워서 사냥대회를 습격하기 안성맞춤이었다는 것처럼, 한적한 들판에 여 보란 듯이.
고개를 돌려 저택의 지도상 위치를 확인한 렉스는 실험실의 넓은 벽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창에는 지도에 나와 있는 한적한 들판이 저 멀리 펼쳐져 있었다. 렉스는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뭐 하는 거지?’
로리엔이 의아해져 그를 바라봤을 때였다. 렉스가 갑자기 팔을 드는 게 아닌가. 엄청난 마나가 쏟아 나오기 전 그는 그녀에게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연인을 위협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적들에게 하는 말일까? 얼핏 들으면 자신에게 하는 말인 거 같다. 그러나 그것은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콰과광! 굉음과 함께 그의 팔에서 뭉쳐진 마나가 터져 나오고 난 뒤로는 모든 게 엉망이었다.
로리엔은 휘청- 바람이 불어오는 뻥 뚫린 벽을 멍하게 응시했다. 한쪽 벽이 사라진 실험실은 마치 높은 성벽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요새 같았다. 서류와 기계, 선들이 사납게 요동치고 있었다. 로리엔은 멍한 정신으로 마나가 향한 방향을 응시했다.
적군들의 은신처라고 추정된 저택들이 위치한 일대가 모두 마나의 불꽃에 활활 불타고 있었다. 마치 징벌을 받은 것처럼, 남은 것 하나 없이 철저하게 사라진 것을 보며 로리엔은 오싹한 심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파괴자인 사령관은 웃고 있었다. 표정 없이 무심하게 입꼬리만 올린 채로. 그건 통제할 수 없는 무기를 마주한 것처럼 아주 위협적인 느낌이었다.
“자. 다음엔 누굴 공격하면 될까. 내가 아직 이성적일 때 말해 봐, 로리엔.”
“……!”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세상을 파괴하는 자가 되더라도 그를 사랑할 수 있을지. 순간적으로 자신이 없어졌다.
렉스의 과격한 임무 수행은 곧바로 왕성의 수뇌부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귀족들은 항의하듯이 말들을 쏟아 냈고, 왕자는 그 항의를 모두 들은 채로 사령관을 호출했다. 묵묵한 사령관을 향해 긴 꾸짖음과 설교를 이어간 그는, 실험실을 복구하는 비용과 망가진 대지를 회복하는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거라고 투덜거리듯이 덧붙였다.
“적군을 없앤 건 잘했어. 하지만 임무 수행할 땐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유리한 게 있나 생각하면서 해야지. 자넨 그런 걸 위해서 태어난 사내잖아. 효과적으로 이기고 승리하도록.”
제 딴에는 최대한 쓴소리 없이 달랜다고 했지만 사령관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싸늘한 것이 듣기 싫다는 것 같았다. 무시하는 그를 보며 머리를 부여잡던 왕자는 그다음 임무에서도 그가 과격하게 마나를 터트리자 결국 근신이라는 처분을 내려야 했다.
“렉스. 근신이라는데…….”
수지는 대낮부터 입을 맞춰 오는 그에게 난감하다는 듯이 목을 움츠렸다. 요 며칠 과감한 임무 수행으로 왕성을 들썩이게 하더니 갑자기 자중하라는 처분을 받아 관사에 눌러앉은 그가 아닌가.
위축될 만도 하건만 렉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지에게 달라붙었다. 밤새 그녀를 탐하고 새로운 체위에 몰두했다. 엉망진창으로 신음하고 울음을 터트려서야 놓아준 그는 오히려 이 사태를 기다렸다는 듯이 즐기는 거 같아, 이렇게 물어야만 했다.
“근신 안 하고 있잖아요. 읏, 따, 따로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요?”
“네 생각.”
도망가려는 수지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엉덩이를 주무르자 수지의 입에서 흐트러진 비음이 단번에 터져 나왔다. 아침까지 빨고 애무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렉스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네 몸에 내 걸 박을 생각만 하고 있지.”
“아흣, 그, 그러지 말고.”
수지는 금세 아래로 파고드는 손가락에 눈가를 찡그렸다. 얼마나 귀신 같은지 손가락이 치마 사이로 들어와도 언제 그랬는지조차 모르겠다. 수지는 힘겹게 신음을 삼키면서 말했다.
“진짜요, 왕성을 떠날 생각을 하는 중인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
렉스가 멈칫했다. 수지는 깊어진 검정 눈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정이 완전히 떨어진 눈을 하고 있어서요. 대회 이후부터.”
“정이야 원래부터 없었지. 마나 때문에 그나마 협력했던 건데 널 없애려고 했으니까. 이제 그 협력마저 무의미해진 거야.”
렉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감았다. 검고 보드라운 털, 자연스레 엉겨드는 이 감촉이 마나를 폭발시키는 것보다 기분 좋다면 믿어지는가. 불쑥 솟아오르려는 분노가 그녀 아래에서만 진정되는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최대한 빨리 떠나야지. 그러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사령관의 신분으로 시키는 게 많아서 그러기가 어려워.”
“그래서 일부러 근신을 받아 내려고 과격하게 한 거군요.”
수지는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 중에 그가 분노하듯이 힘을 터트려 시설을 망가뜨렸다는 이야기가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일이든 확실하게 냉정하게 하는 그였기 때문에 물은 것인데 그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아니, 진짜 화가 나서 그런 거야.”
“네?”
“왕성만 생각하면 울컥해. 세상을 전부 없애 버리고 싶을 정도로.”
렉스의 표정이 짓무르듯 일그러졌다. 화를 억누르는 것 같은 얼굴은 몸 속에서 폭주하려는 괴물을 간신히 가둬 둔 이의 얼굴처럼 험상궂었다. 수지가 멈칫했을 때 렉스가 음산하게 질문했다.
“내가 미쳐서 정말 그래 버리면 무서울까?”
수지는 멈칫했다가 아주 조금,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 솔직한 고백에 렉스의 눈썹이 비쭉하게 솟아올랐다.
“뭐야, 정말이야? 날 겁낸다고?”
으르렁거리듯이 다가오는 사내에게 수지는 움찔하고 말았다. 절대 너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눈빛으로 쏘아붙이는 남자. 이미 정해진 대답을 강요하는 그에게 수지의 반응은 낙제점이다. 그녀는 멋쩍게 웃고 말았다. 렉스는 실망하여 두꺼비의 등처럼 울퉁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수지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정말 중요한 문제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미쳐 버렸을 때 어떻게 할 건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거니까 신중하게 고민해 보려고요.”
“…….”
“그, 그러면 안 돼요?”
렉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수지를 바라보았다. 제 눈치를 살피며 시간을 달라는 그녀에게 안된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렉스는 결국 인상을 팍 썼다.
“괜히 물었군. 정사의 열기만 식게.”
“그, 그건 마, 많이 했잖아요.”
밤부터 아침까지 얼마나 했던가. 관사 밖으로 나가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누가 간밤에 잘 주무셨냐고 인사라도 하면 얼굴을 못 들지도 몰랐다. 수지는 그가 욕심을 부린다는 생각에 도리어 얼굴을 붉혔으나 여전히 남자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해도 해도 부족해.”
“…….”
“한 십 년은 멈추지 않고 해야 만족하려나?”
무서운 소리네요. 농담이죠? 수지는 창백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고분고분한 살. 뭉클한 체온에 쌓였던 화가 조금 눈 녹듯이 풀린다.
“뭐가 됐든 너무 고민하지 마. 난 대답을 기다릴 참을성이 현재 없으니까.”
분노 때문인지 인내심과 참을성이 모두 바닥이다. 정욕도 과격하게 나타났다. 욕구가 모두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수지를 탐하고 괴롭히고 싶은 저를 느끼면서 렉스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지의 곁에서 살냄새를 맡으면 보나 마나 또 하루를 그녀를 빨고 쑤시고 핥으면서 보낼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근데, 새는 어디 갔어.”
렉스는 생각을 전환할 겸 로난을 찾았다. 제국의 연금술사가 조만간 연락하겠노라고 했던 터라 로난을 보내 볼 생각이었다. 실험실에 살다시피 하며 고대 기계와 동력 기계를 완전히 파악한 그는 렉스의 소원 대로 그 기계를 다른 곳에서 재현할 예정이었다. 그 재현할 장소로 어디가 좋을지.
마나도 준비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기계를 재현하기 전 비밀리에 실험할 장소도 골라야 했다. 따라서 자세한 논의를 전문가인 그와 이야기하려는데 로난이 점심이 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렉스는 짜증을 냈다.
“짝짓기하러 사라진 거 아냐?”
수지는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로난은 아직 어리다고요. 사람으로 치면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소년인데. 그것 때문이겠어요? 실은 맛있는 걸 찾아다니느라고 바쁜 거예요. 관사에 머물다 보니 맛있는 걸 많이 먹어 더 입맛이 까다로워졌대요. 먹고 싶은 걸 찾는데 오래 걸린다나?”
“차라리 발정 나서라고 해.”
짐승 따위가 무슨 입맛 타령이냐고 렉스는 어이없어했다. 그가 그렇게 반응하든 말든 수지는 로난이 수도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며 새로운 걸 먹고 오는 것을 좋아했다. 늪지에 사는 그가 늪지 밖의 세상을 알아 가는 방식이 요리라고 생각했다.
‘먹을 거면 어때.’
뭐가 됐든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 가면 되는 것을. 좋은 걸 먹고 와서 한껏 기분 좋게 꼬리 깃털을 흔들 로난을 그려 보자 수지는 괜히 마음이 뿌듯해졌다. 제 일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실실 웃는데 렉스가 덜컥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왔다. 그의 눈은 고양된 질투로 번뜩이고 있었다.
“내가 참을성이 없어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네?”
“내 앞에서 다른 존재를 떠올리며 웃지 말라고.”
렉스의 입술이 끈적하게 덮쳐왔다. 수지는 지금 새를 보고 그러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과격한 키스에 넘어온 타액을 삼키기 바쁠 뿐이었다.
“아, 읏, 레, 렉스……!”
결국 그의 이름을 수십 번 부를 짖고서야 수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