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대륙의 왕이 될 때까지는 렉스를 옆에 끼고 부려야 하는데, 한가롭게 의식의 살인이고 아니고를 따질 때이겠는가. 그는 왕이 누워 있는 가장 안쪽의 두꺼운 나무 문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마침내 손을 들어 노크했다.
왕자가 왕과 불편한 대화를 끝낸 저녁이었다. 대회에서 상당량의 마나를 쓴 렉스는 보충을 위해 실험실에 와 있었다. 그의 목에 달리는 합금 족쇄들. 피부를 억압하고 사지를 강박하는 구속 벨트들. 만약을 대비해 공중에 엷게 뿌려진 마나 억제제의 향이 오늘따라 더욱 신경에 거슬린다.
렉스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수지가 죽을 뻔했기 때문인지 몸이 예민해져 있었고 누가 건드리면 폭발할 것처럼 감각들이 곤두서 있었다. 따라서 마나 보충이 끝나고서도 어두운 눈을 번뜩이던 그는 저쪽에서 제국의 연금술사가 고대 기계를 작동하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저 자는.”
고대 기계 안에는 덩치 큰 기사가 누워 있었다. 아까 수지를 보호했다는 마나 기사. 그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멈칫하는데 로퍼가 눈치 빠르게 설명해 왔다.
“아, 아더요? 오늘 기억이 소거됩니다. 본인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했던 터라서요. 전하의 명으로 처분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로리엔 님께서 기억 소거 후 재사용을 결정하셨죠.”
로퍼는 악의 없이 웃었다.
“잘 됐습니다. 폐기되긴 아까웠거든요. 덩치는 큰데 온순한 편이라서. 몸이 불편해서도 임무를 끝까지 수행할 자거든요.”
“부려 먹기 좋은 미련한 개라는 거지?”
“아, 아니, 그게….”
제가 뭔가 말을 잘못 했나. 로퍼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따라 사령관이 더욱 싸늘하다. 흘러나오는 기운은 물론이고 웃음기 없는 건조한 표정에선 얼음 같은 조각들이 쏟아져 나와 사방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금세라도 매끈한 손에서 마나가 날아올 거 같아서 로퍼는 상체를 납작하게 엎드린 채 그를 살폈다. 사령관은 표정과 다른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이해해. 연금술사 입장에선 우린 마나 팩을 달고 사는 시한부 물건들이니까. 쓸모 없어지면 버리는 소모품에 불과하겠지. 기억 따윈 당연히 보호 가치도 없을 테고, 마나 없는 몸뚱이란 처리 곤란한 쓰레기처럼 느껴질 거야.”
로퍼의 안색이 더욱 시퍼레졌다. 마나 없으면 쓰레기라는 말을 하면서 제 목에 감긴 족쇄를 악력으로만 비틀어 떼어 버리는 그는 자신의 말을 고스란히 반증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마나가 없어도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몸소 보여 주는 것이다.
결국 로퍼는 ‘절대 아니에요! 사령관님은 곤란한 쓰레기라고 하기엔 너무 무서운 쓰레기라고요!’라고 되지도 않는 변명을 지껄였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아 입을 다물어야 했다. 구속구가 사라진 렉스의 몸에서 마나가 폭발하듯이 뻗어 나온 것이다.
“으헉!”
로퍼는 저도 모르게 혀를 깨물고 말았다. 참았다가 터진 것처럼 폭발한 마나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옅은 마나 억제제는 효과가 조금도 없을 정도로 그의 주변에 일렁이는 마나가 벽과 바닥에 커다란 금을 만들었다. 로퍼는 아연실색했다. 실험실이 무너지면 기계가 망가지는 건 물론이고 저장된 마나가 폭발해 왕성 전체에 피해가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 사령관님! 부디 진정하세요! 제,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용서하시고, 마나를 거두세요!”
“…….”
“으악, 전 죽고 싶지 않다고요, 제발 살려 주세요!”
결국 솔직한 목숨 구걸까지 튀어나왔다. 로퍼는 동료들처럼 달아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섬뜩한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사령관의 마나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이대로 무너지는 실험실에서 쏟아지는 벽돌에 죽게 되는 게 아닌지. 로퍼가 울먹이기 시작했을 때, 저 멀리 복도에서 달려온 자가 그의 앞에 섰다.
“렉스!”
로리엔. 그녀는 사냥 대회에 있었던 일을 조사 받는 척 왕자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던 터였다. 그는 렉스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차리고 애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흥분을 가라앉혀요! 당신은 충동적인 존재가 아니에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무기라고요!”
침잠한 시선이 그녀를 꿰뚫었다. 두려울 정도의 살기가 팽배했지만 로리엔은 제 기분에 취한 것처럼 더욱 용감하게 외쳤다.
“기억해 봐요! 당신이 처음 눈 뜰 때를요! 얼마나 세상을 침착하게 바라봤는지! 그 차분함에 우리가 놀랐잖아요! 당신은 그냥 태어난 게 아니에요! 우리의 계산대로, 계획되어 완벽하게 태어났죠!”
마음을 담은 절절한 외침에도 렉스의 상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달라진 건 기계들이 오작동하는 소리가 나면서부터였다. 자신이 심어 둔 연금술사가 뿜어진 마나에 고대 기계가 고장 난 거 같다고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 렉스는 꾸역꾸역 힘을 내리눌렀다.
“당신, 괜찮아요?”
그가 진정되는 것이 눈으로 보이자 그제야 로리엔이 다가왔다. 그녀는 애정이 듬뿍 서린 눈으로 그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더니 안도의 한숨을 들으란 듯이 내쉬었다. 그를 쳐다보고 있는 눈은 애정이 깊었다. 새끼가 무사한지 확인하는 어미의 시선 같았다. 창조자의 애틋함까지 지닌 그녀는 한 자, 한 자, 의미심장한 무게를 담아 말했다.
“정말 걱정했어요. 당신이 폭주해서 여길 파괴하는 건 아닌가 하고.”
로리엔은 웃었다.
“여긴 당신의 집이나 마찬가지잖아요. 당신을 만들어 주고 살게 해 준 집.”
“…….”
로리엔은 대답 없는 그를 향해 끝까지 다정하게 눈웃음쳤다. 한 손을 그의 가슴에 올린 채로, 마치 그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려는 연인처럼.
“그 집을 없애려는 건 아니죠? 당신의 생명줄인데.”
“역시 연금술사 수장답게 협박을 잘 하는군.”
차가운 대꾸에 로리엔은 멈칫했다.
“협박이라뇨. 전 당신을 생각해서…….”
“내 생각? 네 생각을 했겠지. 여기가 망가지면 네 목숨도 수석 연금술사 지위도 위태로울 테니까.”
“제가 그런 걸 신경 쓸 거 같아요? 전 당신이 최우선이라고요! 당신만 무사하면 누가 다쳐도, 아니 수십 명이 죽어도 개의치 않아요.”
“왕성이 불타고 아군이 죽어 나가도 말인가?”
로리엔이 굳어졌다. 렉스는 차가운 눈으로 짓궂게 질문을 이어갔다.
“왕국 전체가 불바다에 휩싸여도, 여전히 날 최우선으로 한단 거지?”
“그, 그럼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당신인데!”
말해 놓고서도 로리엔은 아차 싶었다. 너무 솔직하게 제 맘을 밝힌 걸까. 슬며시 눈치를 살폈지만 렉스는 변화가 없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도리어 속상할 지경이었다. 로리엔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전 언제까지나 당신 편이지만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잘 알아요. 왕국에 해가 되는 일을 할 리가 없다고, 확신해요.”
“네 맹신은 알겠으니 그만 손 떼.”
무겁다며, 렉스는 가슴에 올려진 손을 무심하게 털어 냈다. 그 냉담한 반응에 로리엔은 씁쓸히 웃었다. 그래도 아주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방금 전, 렉스가 폭주할 것 같은 상태에서 제 말을 듣고 진정하지 않았던가. 그건 냉랭한 렉스에게 저란 존재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싸늘하게 대한다고 하더라도 위기에선 저를 믿는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로리엔은 이것만으로 큰 위안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일부러 발랄하게 말을 이었다.
“방금까지 조사를 받고 있었어요. 그리고 깨닫게 됐죠. 당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침착하고 이성적인 당신이 얼마나 제국에게 위협적인 무기인지. 이번 사냥 대회에서 사고가 일어난 게 다 그 이유 때문이에요. 우리가 버린 기사들이라도 가져서 왕국을 공격하고자 한 것이죠.”
“무슨 말이야?”
“대회 공격이요. 폐기된 마나 기사들로 사람들을 기습했잖아요. 제국군이 마나 기사들을 홀려서 사람들을 공격한 거죠.”
“홀려, 어떻게?”
“저도 그건 잘 몰라요. 아마 제국의 신기술이겠죠. 저번에 렉스가 파괴했지만 완전히 파괴하지 못한 거 같은…….”
렉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로리엔은 그걸 따지는 게 아니란 듯이 부드럽게 화제를 넘겼다.
“아무튼 그 기술로 우리가 폐기한 마나 기사들을 조종한 거예요. 의식이 망가져 있는 자들이니 더 홀리기 좋았겠죠. 무조건 풀어 놓으면 사람들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회에 푼 것이겠고요. 전하께선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국의 은신처를 없애라고 하셨어요. 사령관이 그 일을 주도해서 처리하면 좋겠다고 하시고요.”
“그러니까 이번 일의 주모자가 제국군이며 왕정을 공격하려 폐기 기사들을 홀려 공격했다는 거지?”
“네.”
“그럼 귀빈들이 아닌 숲을 공격한 건? 일반인들을 노린 건 제국군이 특별히 숲을 좋아해서인가?”
“그건…….”
비꼬는 어조에 로리엔은 멈칫했다가 서둘러 답을 생각해 냈다.
“폐기된 마나 기사들이 통제되지 않아서일 거예요. 그들은 본능대로 움직이잖아요. 조용한 귀빈석보다 공격적인 움직임이 이어지는 숲으로 당연히 발걸음이 옮겨졌겠죠. 움직이는 건 무조건 공격하려 들잖아요. 렉스도 그들이 얼마나 본능대로 움직이는 존재인지 잘 알죠? 그들에겐 렉스의 지닌 차분함이나 이성적인 사고를 기대할 수 없어요. 그들은 그냥 미친 존재들일 뿐이니까요.”
“한 끗 차이일 뿐이야.”
“네?”
“그들이나 나나. 미치거나 멀쩡하거나. 우리의 기본은 야만적인 파괴와 죽음이니까. 왕국의 고명하신 분들이 바랐던 대로.”
렉스가 웃었다. 건조하고 싸늘하게. 로리엔은 섬뜩해지고 말았다.
“근데 나는 적군을 죽여서 쓸모 있는 거고 그들은 그렇지 않아서 쓸모없는 것뿐이지. 차이는 그것뿐이야. 왕국의 말을 잘 듣냐 아니냐.”
“렉스…….”
“그런 안타까운 표정 지을 거 없어. 이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뭐가 됐든 적군이 제국군이라는 거잖아? 의식을 조종하는 기술을 가진.”
“네, 바로 그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