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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131)화 (131/163)

131화

‘이럴 때 보면 참 순수하단 말이야.’

순수하다는 표현이 적합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수지는 그에게 아이 같은 데가 있다고 또다시 느꼈다. 누군가 없어질까 봐 두려워서 먼저 소리치고 화내는 아이처럼, 그도 그렇게 반응하고 있다고.

‘예전의 렉스야. 분명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예전보다 참을성이 없고 과격한 면모가 있지만 그는 다른 존재가 아닌 그 자체다. 자신이 좋아했던,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는 그라는 걸 확인하자 한결 여유롭고 부드럽게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네가 없다고 생각하면.”

반면 렉스는 더 구석으로 내몰린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기분이 거꾸러져. 세상 따윈 존재할 필요가 없지.”

분노는 힘을, 힘은 파괴를 부른다. 냉철하고 합리적인 사고의 그는 어느새 사라지고 절망적인 파괴자로서의 그만 부상한다. 마나는 그런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마음껏 파괴하고 살해하라고.

‘내가 하고 싶은 게 진정 그것인가?’

속삭여 오는 마나에게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렉스는 착실히 힘을 분출했다. 수지가 저 자리에 없는 것을 상상해 보니 마나가 솟구쳐 나왔다. 디디고 있는 땅에서 흙과 풀이 사납게 요동쳤고, 공기가 들쑤셔지듯 흔들렸다. 두려움에 수지가 두 주먹을 말아 쥐는 것을 느끼자 렉스는 마나를 억지로 내리누르면서 간신히 말했다.

“진짜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왕국을 없애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몰라.”

암담한 눈빛은 처음 만났을 때의 그와 같았다. 죽음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 파괴적인 시선이 사람들 가득한 곳에 머물자 수지는 당황한 채로 서둘러 입술을 떼었다.

“전, 당신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

“어떻게든 와서 구해 줄 거라고!”

두 손을 기원하듯 붙잡았다. 이 순간 그가 자신에게 집중하길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서.

“하, 한심하겠지만 전 그런 사람인걸요. 위기 속에서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견뎌 보겠다고 하는 대책 없는 여자.”

목을 움츠린 채 자신을 비하하는 여인. 이 연약하고 부끄럼 타는 생명은 왜 이런 순간에도 어여쁠까. 얼굴이 빨개진 채로 말하는 수지에 렉스는 파괴를 잊고 말았다. 얼굴처럼 예쁜 목소리에 집중하기도 바빴다.

“전요, 지금도 렉스를 생각해요. 당신이 구하러 와서 너무 좋다고, 제 곁에 있어서 더는 외롭지 않다고.”

수지는 빨개진 얼굴로 용감하게 외쳤다.

“그러니까 저만 신경 써요. 렉스, 세상은 내버려 두고.”

이런 말이 통할까. 제가 들어도 어이없고 억지스러운데. 근데 의외로 대답이 순순히 들려왔다.

“알겠어. 너만 신경 쓸게.”

“저, 정말요?”

진짜 그러자고 할 줄이야. 수지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렉스는 정말 마나 발산을 멈춘 채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직 분노가 가시지 않은 눈빛이었으나 아까보다 훨씬 진정된 얼굴이었다.

“네 명령은 들어야지.”

“명령 아닌데요…….”

“날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좋아한다면서, 무엇이든지 함께 한다고. 그런 네가 말했는데 어떻게 안 따라? 절대적인 책임을 지는 자를 따르는 건 내 세계에선 당연한 일이야.”

수지는 자신이 렉스보다 높은 지위가 된 듯한 느낌에 뻣뻣하게 웃고 말았다. 왕만이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했던가? 그 왕의 명이라도 렉스라면 시큰둥하게 이행할 것 같은데. 저한테는 그냥 따른다고 하니, 기쁘다고 해야 할지, 난감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수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참. 제가 꼭 못 살아나는 건 아니에요. 전 늪지에선 엄청나게 회복력이 좋아져요.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웬만한 건 금방 회복이 되죠.”

“뭐? 그게 정말이야?”

왜 이제 이야기했냐고 렉스가 따질 때였다. 멀리서 왕국의 깃발을 든 이들이 위엄차게 다가왔다. 렉스의 표정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기사들 사이로 왕자의 하얀 망토가 보였을 땐 더더욱.

“괜찮나? 이게 무슨 일이야!”

왕자는 몹시도 놀란 것처럼 외쳤다. 주위를 둘러보며 참가자들의 안전을 확인하라는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는 듯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귀족들이 제국의 기습 공격일까 두려워하고 있었기에 그는 서둘러 침입자가 있는지 조사하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입을 조개처럼 꽉 다물고 있는 렉스에게 말했다.

“사령관이 빨리 달려와서 다행이야. 하마터면 끔찍한 일이 생길 뻔했어. 사상자가 조금 있긴 하지만 더 심각해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이내 안쓰러운 표정으로 수지를 바라봤다.

“자네, 조금 다쳤군. 치료사를 부르겠네.”

수지는 감사하다는 의미로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렉스가 그런 수지의 팔을 꽉 잡아 왔다. 얼떨결에 인사를 중단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 모습에 멈칫한 왕자에게 렉스가 따지듯이 말했다.

“제국의 소행일 거 같지 않습니다.”

“뭐? 그들이 아니면 누가 이런 공격을 한단 말이야?”

“악의가 있는 내부자라면 쉽게 감행할 수 있지요.”

“그게 무슨 말이지? 악의 있는 내부자?”

“보란 듯이 대회 초반에 공격했습니다. 수뇌부들이 모두 귀빈석에 붙어 있을 때요. 사람들이 숲에 흩어져 있을 때 귀빈석을 공격하면 피해가 더 큰데도 굳이 숲을 공격한 걸 보면 숲의 누군가를 죽이려고 공격했다는 겁니다. 왕국을 파괴하려 공격한 게 아니고요. 살의를 가지고 대상을 없애려 이런 짓을 벌인 거죠.”

렉스의 눈이 수지에 닿았다. 그 누군가가 마치 그녀란 듯이. 분노와 독점욕으로 가득한 시선은 그녀를 그렇게 취급한 대상을 갈가리 찢고 싶어 하고 있었다. 왕자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수지를 향한 사령관의 집착이 생각보다 더 지독해 보였다.

‘여자를 죽이면 사령관이 미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그는 심각한 어조로 되물었다.

“누군가를 노렸다고? 우리가 폐기한 기사들로 말인가?”

“폐기했기 때문에 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뒷조사를 해도 미친놈들이라 누가 풀어 줬는지 말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저 풀린 장소에 존재하는 것들을 모조리 없애는 것들이니 푸는 것만으로도 공격이 가능한 셈이죠.”

“로리엔의 말을 들어 봐야겠군. 어떻게 풀려났는지, 감금시켜 놓은 이들이 어떻게 여기에 있었는지 조사해야겠어. 자네 주장처럼 내부자인지 제국군인지, 주모자를 알 수 있을 거야.”

왕자는 제국군에 더 힘을 주어 말하고는 사령관에게도 약속했다.

“주모자를 찾아서 이번 위협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네.”

엄숙한 그 말에도 렉스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니, 음산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조소하는 태도를 보였다.

“어련히 잘 하시겠습니까.”

“사령관. 왠지 믿지 못하겠다는 거 같은데.”

“설마요. 왕국의 후계자인 전하를 믿지 못하면 누굴 믿겠습니까.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렉스는 그 말을 마치고 수지를 품에 낀 채 몸을 돌렸다. 왕자는 묘하게 비웃음 당하는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서 벽이 느껴졌다. 불신으로 가득 찬 벽이.

‘그러면 안 되는데.’

왕국의 병기인 특별 사령관이 여자 때문에 후계자인 자신을 멀리하고 있다니. 이번 암살 실패로 그게 더 심해질 거라고 생각하자 왕자는 저도 모르게 왈칵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원래대로 만들려면 여자를 없애야 해.’

하지만 여자를 없애 버리면 그가 통제 불능으로 미쳐 버리는 게 아닌지. 아까의 불안으로 다시 생각이 귀결되자 왕자는 그의 기억을 없앤 뒤 여자를 죽이는 방향으로 해결의 가닥을 잡았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돼.’

늪지 여자를 만나지도 않았고 만날 수조차 없는 상태로, 그의 주변 환경을 조성하겠다. 그러면 불안정한 의식도 안정이 될 것이고, 업무에 태만하던 태도도 사라질 테니까. 두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는 셈이다. 물론 로리엔의 말처럼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의식이 잘못돼 망가질 가능성도 있지만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렉스를 말 잘 듣는 수하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전쟁 중에 말 안 듣는 무기처럼 위험한 건 없으니까.’

요지는 말 잘 듣는 사령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혹시나 기억 소거 과정에서 폭주하게 되거나 미치게 되면 마나 억제제 같은 걸로 잡아서 의식을 제거한 뒤 사령관의 몸을 재사용하면 된다.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 육체인 만큼 의식을 바꿔서라도 진물이 날 때까지 써먹겠다고 각오한 그는 저 멀리 쓰러져 있는 아더를 바라봤다.

‘저런 폐기 직전의 기사 따위하고는 다른, 그는 완벽한 발명품이니까.’

왕자는 아더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폐기를 고려하고 있던 터라서 일부러 수지를 수호하는 기사로 보낸 것인데. 예상보다 더 뛰어나게 활약을 해서 계획을 틀어 버렸다. 참으로 황당하면서 화가 나는 심정. 아더를 버릴지 죽일지 고민하던 그는 이내 그 모든 게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로리엔에게 알아서 하라고 하고 자신은 중요한 문제나 신경 써야겠다.

‘사령관의 기억을 지우려면 아바마마의 허락부터 받아야 하니까.’

이는 필수적이면서도 귀찮은 과정이었다. 마나 인간의 기억을 지우려면 최고 권력자의 의견이 필요하다. 그만큼 기억을 지울 때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왕의 허락을 받는 것인데, 지나치게 신중한 왕인 그는 이전처럼 이 문제에 대해 반대하고 나설 것이다. 그는 한 번 완성된 의식에 손대는 것을 살인이라고 보고 있었다.

물론 왕자는 그가 그렇게 말하든 설교하든 예전처럼 자신의 결정을 밀어붙일 참이었다. 어차피 그가 죽고 나면 이 왕국이 제 것이 되는데, 렉스의 일처럼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곧 죽을 자의 판단을 신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가장 귀중한 무기가 손에서 떠나가고 있는 기분을 더는 느끼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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