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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130)화 (130/163)

130화

5분 전, 아더는 이상한 마나를 감지했다.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배를 탄 것처럼 위태로운 기운이었다. 이상해서 두 팔을 긴장시켰을 때 숲에서 펑- 소리를 내며 가열된 마나가 날아왔다. 아더는 갑옷으로 그 마나를 받아 냈다. 복부를 타격한 충격이 골까지 흔들며 구토를 일으켰다. 아더는 역함을 참으며 서둘러 수지를 등으로 숨겼다.

“움직이지 마세요, 큭!”

아더는 어금니를 물었다. 마나 공격이 이어졌다. 공격 주체가 한 사람이 아닌지 근처에서도 마나가 폭발했고 비명이 쏟아졌다.

“무, 무슨……?”

잔뜩 겁먹은 중얼거림이 뒤에서 들려왔다. 아더는 마나를 피워 공격을 방어하면서 흐릿한 앞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나 공격이 사방에서 쏟아져서 흙먼지가 올라왔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더는 상황 파악을 위해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마나 기사들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을 텐데…….”

본인이 말해 놓고도 의구심 가득하게 덧붙이던 그는 곧 거대하게 날아오는 에너지에 두 팔을 교차해야 했다. 있는 마나를 모두 끌어내 방어했지만 불안정한 마나는 상당히 위력적이었다. 방어했음에도 수지와 함께 뒤로 나뒹굴고 말았다.

“……윽.”

아더가 충격을 흡수한 덕에 수지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바닥을 굴렀다. 그래도 땅에 부딪친 탓에 머리가 어질거린다. 이 정도에도 이렇게 아픈데. 정면으로 공격을 받아 낸 아더는 괜찮을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상태를 보러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

저 멀리 쓰러진 그가 보인다. 가슴에선 하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마나로 파괴된 상체 갑옷은 균열이 잔뜩 난 채로 틈마다 피가 흘러내렸다. 팔에선 끝없이 경련이 이어지는 것이 심상찮아 보였다. 수지는 기다시피 그에게 다가갔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당황으로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아더가 말했다.

“무조건 뛰세요. 뒤쪽 숲으로, 커다란 나무를 등진 채 달리셔야 합니다.”

조용하면서 고지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무가 공격을 흡수하면 괜찮을 겁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제 안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수지의 할 일을 말하는 그다. 수지는 멍해져서 물었다.

“제, 제가 가면 당신은요?”

“기사로서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

“가세요. 사령관님께서 오실 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그는 이미 렉스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대한 에너지가 숲 가장 안쪽에서부터 폭발하듯이 이동하고 있었으니까,

“그분을 만나셔야죠.”

“기사님도 함께 가요. 그가 살려 줄 거예요.”

수지는 온 힘을 다해 그를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갑옷을 입고 쓰러진 그는 거대한 돌덩이 같아 도저히 옮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부축하려고 애쓰자 아더가 짧게 웃어 왔다. 미련하게도 고집스러운 여자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사령관님께서도 반한 것인가.’

이런 자신도 하나의 목숨이라고 끈질기게 구하려는 걸 보면. 눈앞의 여자가 어떤 고집스러운 심성을 지녔는지 알게 된다. 특수 능력도 사라진 폐기품으로, 자신을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하는 왕성의 수뇌부들과 달리 마나 기사도 존중 받아 마땅한 하나의 인간으로 보고 있는 거겠지. 아더는 낯선 여자에게서 따뜻함을 느끼면서 말했다.

“그분께선 이미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네?”

“그때 늪지에서, 제 목을 끊지 않으셨거든요. 그것만으로도 살아갈 기회를 얻은 셈이지요.”

“…….”

“모쪼록, 저는 제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기사로서 소임을 다할 테니 걱정 마시고 가세요.”

그 여느 때보다 아더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죽어 버린 눈동자가 아니라 의미를 발견한 눈빛으로. 죽음을 앞두고서 오히려 편안함까지 느껴지는 시선에 수지는 그만 숙연해지고 말았다. 그 누가 내 가치를 정할 수 있을까.

‘내가 아니고서야.’

그를 보며 진정 깨달았다는 듯이 그녀는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그러면서도 혼자 가기를 망설이는 그녀를 아더는 억지로 떠밀었다. 수지는 밀리다시피 앞으로 나아가고 뒤를 돌아보고를 반복했다. 머지않아 공격용 마나가 쏟아졌다. 아더가 몸을 움직여 방어했지만 완전히 막기엔 역부족이었는지 에너지가 튕겨 날아갔다. 비껴간 에너지는 수지가 들어서려는 숲 입구를 완전히 불태웠고, 잿더미로 만들었다.

“아…….”

발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공포에 몸이 굳어서인지, 정신이 아득해져서인지. 수지는 그래도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사의 말처럼 무조건 달려가야겠다고 마음 먹을 때, 앞쪽 긴 수풀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

“렉스?”

수지는 반가워 울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나타난 사내는 렉스가 아니었다. 큰 키와 훤칠한 몸. 감정이 없는 눈과 양팔에 가득한 붉은 빛이 몹시도 렉스를 닮아 있었지만 그가 아니었다.

‘어딘가 이상해.’

감정이 없는 시선이라 그럴까. 텅 빈 눈은 아예 인간이 아닌 거 같다. 로봇 같은 싸늘한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던 수지는 그만 굵은 나뭇가지에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팍.

사내의 공격이 이어진 건 그 찰나였다. 비껴간 공격은 그대로 뒤에서 터졌다. 매캐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수지는 마나로 소멸한 공간을 보면서 몸을 떨었다. 운이 좋아서 피했다. 운이 나빴다면 저 연기 속에 나무들처럼 한 줌 재가 되어 있을 테니까.

수지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목을 들어 올렸다. 공격이 스쳤는지 목에선 한 줄기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닦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의 텅 빈 눈을 응시했다. 그의 팔에 마나가 모여드는지 피부에 와 닿는 공기가 뜨겁다고 느낄 때, 빛이 번쩍였다.

이대로 죽는 건가. 수지는 그를 떠올렸다.

‘렉스……!’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몇 초가 흘러도 통증이나 아픔도 없자 이상해서 눈을 떴다. 그러자 팔에서 빛이 사라진 사내가 보였다. 그도 당황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수지는 곧 무엇이 원인인지 빠르게 알아차렸다. 바로 그의 가슴을 꿰뚫은 손, 뒤에서 등뼈를 부수고 들어온 손이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끄아-”

그가 입을 벌리며 대항하려 했지만, 렉스의 몸에서 쏟아진 붉은 기운이 완전히 그를 뒤덮었다. 그 힘에 저항하려고 했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그는 점점이 소멸하더니 이윽고 완전히 형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렉스는 일부러 손에 남긴 심장을 으깨듯이 천천히 깨부수면서 말했다.

“감히, 누굴 노려?”

그 말은 중얼거림에 가까웠으나 너무도 냉랭해서 들은 자들은 모두 죽음의 경고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렉스는 그대로 으깨진 심장의 잔해를 마나로 없애 버리고 수지에게 말했다.

“죽을 뻔했잖아.”

너무도 맘을 졸였던 탓일까. 위로 대신 분노가 빠져나온다. 그녀의 이마와 목에 난 상처를 발견하자 그 분노는 더 과격해졌다. 끓어오르는 파괴욕을 억누를 수 없다는 듯이 렉스가 조용히 읊조렸다.

“가만히 있어.”

“무슨.”

말이냐고 물을 새도 없다. 그는 사라졌다. 곧 사방에서 마나가 격렬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렉스가 마나 인간들을 공격하는지 붉은 빛이 터지고 버티고를 반복하더니, 그 일대가 완전히 침묵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살아남지 않은 것처럼.

숲은 마침내 평화를 되찾았다. 수지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다리를 조금씩 움직여보았다. 자신을 도와준 기사가 괜찮을까 살피고 싶었다.

‘다행이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채였다. 자신이 떠난 뒤로 더 공격당하진 않은 모습에 안도하며 상처를 파고 들어간 갑옷을 벗겨 주려고 했으나 돌아온 렉스가 그를 허용하지 않았다.

퍽!

“뭐, 뭐 하는 거예요?”

그의 배를 걷어찬 렉스가 이어서 목뼈를 부수려고 다리를 들자, 수지는 그만 그의 허리를 붙들고 말았다. 렉스는 무정해진 눈으로 아더를 쏘아보고는 제 허리를 붙잡은 그녀에게 말했다.

“죽어가도 마나 기사는 마나 기사야. 목만 잘리지 않으면 언제든 회생이 가능해.”

“하지만 그는 적이 아니에요.  절 도왔다고요!”

“도와줬다고 좋은 사람 같아? 살아나면 다시 왕국의 개가 되는 거야. 개가 되어 인간들을 죽이려 들겠지. 미쳐 버리면 저들처럼 막무가내로 죽이려 들 거고.”

“왜 그런 식으로 말해요?”

사령관이 되어 인간을, 적군을 죽이는 건 렉스도 마찬가지 아닌가. 마치 제 본질을 부정하고 짓밟는 느낌에 수지가 놀라서 묻자 렉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화가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른다고. 자신과 같은 인간에게 당하는 수지를 보자 저조차 혐오스러울 정도로 마나 인간이 싫어진다고. 렉스는 그녀가 겁먹을까 봐 제대로 표현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지는 그렇게 나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의 허리를 놓은 그녀는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이유를 꼼꼼하게 물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혹시 저 때문에 그래요? 제가 멋대로 숲에 들어와서요?”

“아니.”

“그럼 아더 때문에 화난 거예요? 그의 도움을 받아서?”

“아니.”

“그럼 마나 기사들 때문이에요? 그들의 공격으로 크게 다칠 뻔해서?”

“다칠 뻔한 정도가 아니야. 내가 늦었으면 너는 없어졌을 거야. 다시 살아날 수 없겠지. 빌어먹을 마나 기사는 몇 번이고 살아나겠지만, 너는, 정작 몇 번이고 살아나야 하는 너는, 되살아날 수 없을 테니까!”

렉스가 왜 분노에 차 외치는 것인지 수지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그런 것이다. 제가 없어질까 봐 겁을 집어먹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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