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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129)화 (129/163)

129화

로도스는 안내자가 되겠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내심 렉스의 활약이 궁금했던 터라서 그녀는 갈까 망설였다. 그동안 가지 않았던 것은 이렇게 맘대로 자리를 이탈해도 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왕자가 귀신같이 알고서 제 시종을 보냈다.

“지금 숲으로 구경 가실 겁니까?”

“그러려고 하는데.”

백작의 위엄찬 대꾸에 시종이 왕자에게 돌아갔다. 잠시 후 왕자가 친히 다가왔다. 그는 수지를 향해 다정다감한 미소부터 날렸다.

“오늘도 아름답군. 그대에겐 묘한 매력이 있어. 야생적이면서도 청순한. 오지에서 자라나는 꽃 같달까.”

“감사합니다.”

잔뜩 언 목소리로, 수지가 대답했다. 왕자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사령관보다 나는 훨씬 다정한 남자거든.”

능글맞게 휘어진 눈썹이 무얼 닮았다고 느꼈더라? 그래, 수컷들 사이에서 정보를 파악하며 다니는 과장되게 몸을 부풀린 새 같다고. 수지는 제 비유가 생각나자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왕자는 찬찬히 그녀를 뚫어져라 살폈다.

“물론 사령관을 보러 갈 수 있지. 마나 기사를 따로 붙여 줄게.”

하지만, 이라고 덧붙이며 왕자는 백작에게 말했다.

“자네는 안 돼. 방금 숲에 다녀왔잖아. 이제 국정을 다루는 백작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라고. 귀빈석에 앉아 지루해진 노령의 귀족과 미모의 아가씨들을 상대해 줘야지. 그게 사냥 대회에서 자네가 할 일이니까. 설마 일을 내팽개치고 또 나가려는 건 아니겠지?”

왕자의 꾸중 아닌 꾸중에 로도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수지는 왕자가 붙여준 마나 기사를 만나 이동했다. 매우 덩치 큰 기사였는데, 머리에서 무릎까지 특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상한 건 한쪽 다리를 절고 있다는 것이다. 마나 기사 중에 신체가 불편한 자는 처음이라서 그녀는 의아하게 보고 말았다. 그가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말했다.

“신경 쓰이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이전 전투에서 회복이 불가능했던지라 몸이 이렇습니다. 보시기 불쾌하다면 뒤에서 걷겠습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제가 너무 빨리 걷나 싶어서요! 절대 불쾌해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거듭 사과하며 무척이나 미안해하는 수지에게 기사는 잠시 시선을 주었다. 사령관의 여자는 어딘가…… 특이했다.

‘사령관님만큼.’

마나 기사는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

“정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원래 폐기돼도 마땅한 몸이었으니까. 운 좋게 경호 임무에 나섰으니 저로서는 끝까지 쓰임이 있다면 다행일 뿐입니다.”

“폐기요?”

한 박자 느린, 창백해진 물음이 이어졌다.

“네, 마나 회복으로 더는 완벽한 신체를 가질 수 없을 때 그리됩니다. 가치 없는 인간이 되는 거죠.”

수지는 우울해지고 말았다. 가치가 없다니. 수지는 슬픈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울창한 숲속. 저 멀리 뛰어다니는 사슴도 보이고, 수풀에서 노니는 토끼도 보인다. 가까이엔 굵은 나뭇가지를 퍼뜨린 커다란 나무가 있고 그 위에서 지저귀는 새도 있다. 세밀히 보면 그 새 주변에 작게 피어난 하얀 꽃들이 가득한데 그 개화에 온갖 벌레들이 붙어서 꿀을 빨아먹고 있다. 보고 있으려니 왕벌이 날아와 그 벌레들을 꼬리에서부터 떼어 내려고 애쓴다. 어떤 벌레는 꼬리가 없어져 반이 된 채 움직이기도 한다. 다리가 없어진 애들도 있다. 그런데도 벌레들은 굴하지 않고 꿀을 빨아 먹는다. 온몸이 꽃가루 범벅이 된 채로도 온 힘을 다해.

‘누가 저 벌레를 가치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누가.

수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직 인간만이 그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심으로 마나 인간을 창조한 인간들만이.

‘……렉스.’

그가 떠올랐다. 같은 마나 기사인 그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참 슬플 거 같다. 눈앞의 기사도 그런 생각을 해서 누군가가 슬퍼하진 않을까. 마음이 쓰이던 와중, 그가 눈을 빛내 왔다. 여태 죽은 듯이 있던 시선과는 다른 특별한 일렁임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근데 사령관님께선 다르시더군요. 전장에서 가치가 없어도 삶이 의미 있다고 몸소 보여 주고 계시니까요.”

역시. 이번에도 저와 렉스의 관계가 거론되는 것일까. 수지는 당황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을 때, 그가 팔을 뻗었다. 한층 더 부드러워진 기분이었다.

“가시죠. 그 특별한 분께 안내하겠습니다.”

어쩐지 나까지 특별하다고 말해 주는 거 같아. 수지는 덩치 큰 투구의 기사에게 경계가 살짝 느슨해지고 말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사령관?”

그 시각. 렉스는 왕궁의 숲 가장 안쪽에 위치한 작은 샘을 보고 있었다. 샘 주변은 울창한 밀림이었다. 덩굴과 오래된 나무들이 얽혀서 석벽처럼 단단한 동굴을 이루었다.

그 안에는 정원사도 손댈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음침한 생태계가 만들어졌는데, 그 덕분에 늪지처럼 바깥 숲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축축한 벌레와 기이한 동식물들이 가득했다. 렉스는 그 구물거리는 생명의 요람의 구경을 방해하고 있는 훼방꾼을 바라보았다.

“사냥감을 잡고 있습니다.”

화려한 옷차림. 갑옷과 사냥 도구가 모두 요란뻑적지근하다. 왕국을 대표하는 고위 귀족은 아니더라도 꽤 유명한 수도의 후작이다. 렉스의 대꾸에 그는 곧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잡는다고? 움직이지 않은 채로?”

“네.”

“어떻게? 눈빛으로 보이지 않는 짐승에게 저주라도 거나?”

렉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비아냥거리든 말든 관심도 없다. 그는 렉스가 다시 앞을 바라보자 오기가 돋았는지 제가 잡은 사냥감을 성큼 내밀었다.

“혹시 한 마리도 못 잡았다면 내가 두 마리 정도는 나눠 줄 수 있어.”

그는 뒤에 쌓인 사냥감을 돌아보며 우쭐거렸다.

“이래 봬도 사냥 경력이 40년이야. 알다리스 후작도 사냥이라면 내게 한 수 접어줄 정도니까. 자네가 원한다면 곁에서 사냥하는 걸 도와줄 수 있네. 그럼 이런 값비싼 새 두 마리 정도는 어렵지 않게 잡을 테니까.”

“전쟁 사령관인 제가 새 사냥을 못할 거 같습니까?”

비하가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느낌에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지에서 인간을 죽이는 거랑 하늘에서 새를 잡는 거랑은 완전히 다르니까! 내 도움이 필요할 걸세!”

후작은 친해지고 싶은 사심을 담아 덧붙였다. 알다리스 후작처럼 그를 따로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라면서.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냉랭하기만 했다.

“다르긴 하죠. 후자가 훨씬 쉽다는 면에서.”

“뭐, 뭐야?”

“인간의 목은 새의 목만큼 쉽게 잘리지 않거든요. 목뼈가 두꺼워서.”

매우 단순한 이유란 듯이 렉스가 미소 지었다. 눈은 전혀 휘어지지 않은 냉소였다.

“아무튼 가만히 있으시죠.”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날 무시하겠다고 대놓고 말하는 건가?”

울컥해서 그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갑자기 땅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게 있었다.

“억!”

커다랗고 굵은 뱀. 뱀은 후작의 머리를 삼킬 것처럼 주둥이를 벌린 상태였다. 날카로운 앞니에 독이 반짝였을 때, 후작은 얼어붙었다. 죽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뱀의 이빨이 닿기 전, 보이지 않는 것이 뱀의 머리를 잘랐고, 곧 세모꼴의 머리와 긴 몸뚱이가 풀밭에 떨어졌다. 머리가 없어져서도 여전히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보면서 후작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게 사령관이 말한 사냥감인가?”

“…….”

“어, 엄청나게 거대한 뱀인데! 길이가 족히 열 자는 되겠어! 대, 대단하군! 저 정도라면 도감에도 나와 있지 않을 기물일 텐데! 그 누구도 잡지 못할 사냥감일 거야!”

사냥 대회의 우승은 따 놓은 거나 다름없다. 잡은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잡는 난이도였으니까.

“사령관! 날 구해 줘서 고마워! 역시 전장의 사신답군! 자네의 위명은 질리도록 들어왔지!”

“무거워서 죽인 겁니다.”

“뭐?”

감격해서 묻는 후작에게 렉스는 번복이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뱀이 삼키면 들고 가기 무겁거든요.”

“뭐야?”

구해 준 이유가 그거라니. 소름이 쫙 돋고 마는 후작이었다. 그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죽은 뱀과 죽인 인간을 번갈아 보더니 ‘머, 먼저 가 보겠네, 자네는 수고하게!’ 하고서 부리나케 사라져버렸다. 렉스는 짧게 코웃음 치고는 샘 주변을 보았다.

‘이상하게 친숙한 느낌.’

낯설거나 기괴하거나 하지 않다. 오히려 이런 암흑의 숲이 화려한 왕정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질 뿐이지.

‘이런 것도 지워진 기억에서 비롯한 걸까.’

과거의 파편 속에 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여태 기억을 되찾으려고 했던 건 수지 때문이었는데. 이런 환경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저를 신기해하며 렉스는 마나를 피웠다. 우두머리 뱀이 죽자 작은 뱀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말아야지.’

친숙한 환경 속에서도 이상하게 뱀만은 살리고 싶지 않다. 열심히 마나를 튕기던 그가 한순간 멈칫했다.

“!”

그리고 즉시 그의 인영이 숲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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