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지 보고서 (125)화 (125/163)

125화

“진짜 거지 같은 말을 있어 보이게 하는군.”

렉스는 피식, 결국 웃고 말았다. 그는 받은 서류를 순식간에 마나로 태워 버리고선 싸늘한 눈으로 말했다.

“결국 네 종노릇만 하게 했어.”

“렉스.”

“이번 임무는 너 없이 혼자 가고 싶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말 그대로야. 널 못 믿겠다는 거지.”

“이것 때문에 그래요? 하, 하지만 기록이 없어진 건 제 탓이 아니에요. 전하의, 아니 폐하의 결정이었다고요! 과거를 기억해 봤자 혼란스러워질 거라는 판단에…… 렉스! 어디 가는 거예요, 렉스!”

렉스는 관사로 돌아오자마자 침대를 바라봤다. 수지가 새와 함께 누워 있었다. 우중충한 표정으로 렉스는 창문을 열었다. 눈치 빠른 새가 잽싸게 일어나 밖으로 날아갔다.

“왔어요?”

창문 여는 소리에 일어난 수지에 렉스가 두 팔을 뻗어 냈다. 팔 하나가 목을 감싸면서 커다란 덩치가 기울어졌다. 수지는 꺄, 작은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뒤로 무너지면서도 그를 껴안았다. 숨이 막혀 왔지만 왠지 안아 주지 않고선 못 견디겠다. 잠시 후 그가 크게 호흡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골라야 할 사람은 자신 같은데. 수지는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예상한 건데도 연금술사가 짜증 나. 왕자도 지겹지. 다 죽여 버리고 싶어.”

살의가 솟구친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분별력과 인내심이 사라진 그는 고삐 풀린 죽음의 망령이었다. 세상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악이었다.

“그래 버릴까.”

그 파괴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 불안한 마음 상태를 따라서 마나가 휘몰아쳤다. 이어 피부가 붉어지며 무기로 변하려는 그를 보면서 수지는 무척이나 놀랐다.

뭐라고 말을 해 줘야 할까. 그가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고? 그럼에도 생명은 소중하다고? 고민하던 수지는 결국 현실적인 문제를 꺼냈다.

“그들을 죽이면 마나 회복을 할 수 있어요?”

렉스는 멈칫했다. 그동안 열심히 알아봤지만 자체 마나 회복은 쉬운 게 아니었다. 우선 동력 기계부터가 연금술사의 복잡한 연금술로 작동된다. 원동력은 마나였지만 작동은 연금술사가 하는 것이다. 과연 그에게 협조할 실험실 연금술사가 얼마나 있을지. 그들은 왕정의 명령만 따랐다.

운 좋게 협조하는 연금술사를 구하더라도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엄청난 양의 마나. 거대한 마나를 보유해야 했다. 현재 그런 마나를 보유한 자는 국왕뿐이었다. 그의 허락이 떨어져야 굳게 닫힌 마나 광산의 문이 열리기 때문에, 마나를 소유하려면 국왕을 죽이고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렉스는 내키는 대로 말했다.

“왕과 왕족을 모조리 죽이고, 반대하는 귀족, 신민들까지 모조리 살해하면 마나 회복이 가능해.”

“……그렇군요.”

수지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녀가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렉스는 알고 있었다. 사실 그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두뇌 역시 수뇌부들을 모두 죽이는 건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왕국의 중심부를 말살해서 왕국 자체가 불안정해지면 마나 광산이고 마나 회복이고 애초에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렉스는 한숨 쉬듯이 말했다.

“종속이란 게 거지 같단 말이야.”

“보통 그렇죠.”

“네가 나한테 종속되는 건 진짜 좋은데.”

“아.”

“막 아래서 내 걸 찔린 채로 좋다고 흐느끼며 울고 더 해 달라고 앙앙거리는 건 상상만 해도 짜릿한데 왜 다른 놈들에게 종속 당하는 건 이리 기분이 나쁘지? 상대가 네가 아니어서 그런가?”

“…….”

“난 너 외엔 다 싫은 모양이야.”

렉스는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수지는 뭘 새삼스럽게, 라고 생각했다. 기분 좋다는 듯이 볼을 붉게 물든 채로 말이다.

“어쩌면 너에 대한 기억을 못 찾을 수도 있겠어.”

“마나 기계를 작동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요?”

“응.”

렉스는 가만히 끄덕였다. 연금술사를 어떻게 협박하더라도 기계가 잘 작동할지는 미지수. 며칠간 알아본 바, 마나 기계가 잘못 작동돼 의식에 영구적인 피해가 생기면 그 대상을 감당하지 못해 철장이나 저택에 감금하는 듯했다. 최악의 수에는 죽였는데, 렉스는 냉정하게 자신은 그 후자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불안정한 내 힘을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참으로 단순한 삶이다. 무기로 살아가다가 불안정해지면 폐기되고. 이게 소모품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예전이었다면 그것에도 별 감흥이 들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눈앞의 여자가 있어서 사는 것에 흥미가 생긴 것이다.

렉스는 비뚤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의 나는 못 찾을 테니, 현재의 부족한 내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현재의 당신도, 과거의 당신도 좋아해요.”

렉스의 눈이 번뜩였다. 수지는 머뭇거리며 고백했다.

“그 이전의 당신도 좋아했을 거예요. 아주 작은, 연약한 소년이었다고 하더라도.”

수지는 수줍게 웃었다. 렉스는 그 순간 살의를 잃어버렸다. 다 죽여 봤자 뭐할까. 시체 썩는 냄새만 사방에 진동할 텐데. 수지랑 살기 좋지 못한 환경이었다.

‘그냥 인간들을 내버려 두자.’

그렇게 살의를 거뒀을 때 그 자리를 채우는 따스함이 밀려왔다.

“당신이 기억을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과거의 당신을 제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따스함 속에는 과거의 저가 있었다. 따라서 현재의 그만 의미 있다는 로리엔의 말은 틀렸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과거의 저도 의미 있게 되니까.

“알지 못하는 어린 당신까지 좋아하고 있으니까.”

따스함이 이제 멈춘 심장을 뛰게 한다. 온몸에 마나가 아닌 피가 돌자 어느새 붉은 빛이 사라지고 제 색으로 돌아온 렉스가 있다. 인간이 된 그가. 완벽해졌는데도 성질은 달라지지 않은 그가 딴지를 걸었다.

“다른 세상에 모든 기억을 지닌 완벽한 렉스가 있다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 당신을 고를래요.”

자그마한 목소리로 영롱하게 말하는 여자.

“몇 번이고 당신을 택하겠어요.”

이 대책 없이 요망하고 유혹적이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능란한 여자를 어찌 가만히 둘 수 있을까. 렉스는 정신없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 * *

육체란 게 얼마나 강렬한 욕구의 집합인지. 렉스는 적지에 나와 있으면서도 간밤에 부둥켜안은 완벽한 살덩이를 떠올렸다. 수지의 헐떡임을 상기했다. 그녀의 달뜬 체온과 더운 숨결, 흐릿해지는 눈동자를 생각했다.

믿을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진 렉스는 도망치는 제국의 기사들을 내버려 두었다. 감시자로 따라온 왕자의 수하는 그자들까지 모두 죽이라고 성화였지만 렉스는 정보도 모르는 졸개들을 죽여봤자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실험을 주도하는 연금술사 하나만이 남자 수하는 기쁘다는 웃었다.

“저자도 죽여 버리고 이제 제국의 수뇌부들을 처리하러 갑시다!”

그는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였다. 렉스는 겁을 집어 먹은 연금술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 차례라는 것을 알았는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삶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가렸을 때, 렉스가 질문을 던졌다.

“마나 동력 기계에 대해 얼마나 알지?”

“네?”

머뭇거린 그가 곧 천천히 대답했다.

“조금이요. 직접 보면 더 잘 알 거고요. 제 전공이 원래 고대 기계여서…….”

“좋아, 그 정도면 나쁘지 않군.”

“뭘 하는 겁니까!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어서 죽여 버리세요!”

“그럴 예정이야.”

렉스는 태연하게 대꾸하며 팔을 움직였다. 그러자 수하의 목이 얼음에서 미끄러지는 조각처럼 단면을 따라 땅에 떨어졌다. 데구루루……. 연금술사는 목만 굴러다니는 왕국의 간부를 보며 숨을 들이켰다. 렉스는 그걸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이제 쓸데없는 말은 안 하겠지?”

그는 공포심에 몸을 떠는 연금술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널 미끼로 쓴 제국을 떠나 오만한 자들이 가득한 왕국으로 가는 건 어때?”

“어…….”

연금술사는 당황했다. 고민했지만 대답은 빨랐다. 바닥에 구르는 머리처럼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국과의 국경 지대까지 따라온 왕자는 제가 아끼던 측근이 죽었다는 소식에 잠깐 인상을 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렉스가 실험실 파괴는 물론 수뇌부 암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그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좋아, 전쟁 종결이 멀지 않았군.”

머리를 잃은 제국은 조만간 항복의 백기를 들게 될 것이다. 왕자는 기뻐하면서 사령관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오는 즉시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역시 자네는 우리 왕국의 보물이라고 추켜세울 셈이었다. 왕이 될 자에게 받는 칭찬은 남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전서구를 담당하는 수하 하나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저, 저기, 사령관님께서는 바로 개인 마차를 타고 수도로 가신다고 합니다!”

“뭐?”

“그, 그게 임무도 성공했으니 연인과 느긋하게 올라가겠다고……!”

왕자는 멈칫했다. 설마 했는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가? 내내 곁에 없어서 관사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보여 주기 싫어서 감춘 건가?’

왕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여자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제가 왕국을 아끼는 것보다 더한 모양새였다. 여자에게 그렇게 빠지면 일을 그르치게 되는데. 아직은 여자 덕분에 사령관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는 평가뿐이었지만 왕자는 향후 위협이 될 요소를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렉스는 엄청난 돈이 들어간 성공작인 만큼 그것을 위협하는 모든 요소를 없애고 싶었다.

어떻게 우연을 가장해 죽일 수 있을까. 철벽으로 수비하는 렉스 때문에 고민할 때 전서구 담당 수하가 가지 않고 머뭇거리는 게 보였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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