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그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하기 적합하지 않은 것 같군요.”
로리엔이 반응했다. 그녀의 얼굴을 불쾌한 듯 찌푸려져 있었다. 자신의 약점을 공격당한 것 같은 반응에 왕자가 나섰다.
“그래, 그 이야기는 좀 그렇군. 이 자리는 즐거운 것만 나누는 자리니까.”
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다행히 렉스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아니 아예 대화에 관심도 없는 듯 수지의 그릇에 음식을 챙겨 주기 바빴다. 사령관이 저렇게 다정한 남자였나?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뭐가 됐든 왕자가 직접 나서 화제를 전환하자 얼른 알다리스 후작이 반응했다.
“그렇지요, 좋은 것. 상상하면 즐거운 것만 이야기해야겠지요!”
앞으론 말조심하라는 의미로 후작은 백작을 째려보았다. 알아먹었는지 못 알아먹었는지, 백작은 방글방글 웃었다.
“즐거운 것이라니 갑자기 생각났는데요. 전쟁이 끝나 가니 기념으로 사냥 대회를 열어 보는 건 어떨까요? 넓은 숲에서 다양한 동물들을 시원시원하게 잡을 수 있게 되면 반응이 좋을 겁니다. 마치 제국을 점령한 것처럼 통쾌한 기분이 들 테니까요.”
“흠, 괜찮은 생각인데?”
왕자가 대꾸했다. 알다리스 후작은 최근에 저택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란드 공작은 왕자의 의견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사령관의 애인은 어떻게 생각하지? 사냥 대회에 대해서.”
느닷없이 화살이 자신을 향하자 수지는 쿨럭했다. 렉스가 준 커다란 새우를 찍어 먹고 있던 터였다. 다채로운 색깔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먹었던 새우가 꼬리를 튕기며 입 밖으로 나올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간신히 냅킨으로 입술을 훔쳤다.
“잘 모르겠어요, 경험한 적이 없어서…….”
자신 없는 모습. 희미한 목소리에 귀족들은 그럼 그렇지 하면서 사령관의 애인을 비웃었다. 저런 나약하고 소심한 태도로 사령관을 어떻게 사로잡았을까 궁금하다. 반면 그녀의 당돌함을 알고 있는 로도스는 그 대답이 나름 괜찮았다고 느꼈다. 모르는 걸 안다고 대충 지껄이는 것보다 솔직히 모른다고 고하는 게 교제하고 싶은 사람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는 호감이 가득한 미소로 말했다.
“직접 경험해 보면 재미있을 겁니다. 생명이 죽고 사는 모습이 무척 생동감이 넘치거든요. 마치 야생이나 늪지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
렉스의 눈이 눈에 띄게 가늘어졌다. 저 새끼는 뭔가. 생명의 ‘생’자도 모를 거 같은 귀족 놈이. 늪지를 꺼내 수지에게 친한 척하는 게 달갑지 않았다. 그의 기분이 나빠졌을 때 로도스가 갑자기 화제를 그에게 돌렸다.
“그런 의미에서 사령관께서 반드시 참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전쟁을 도맡는 사령관이 사냥 대회에서 짐승을 몰아가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도 큰 위협이 없어 그러는구나, 하면서 마음을 놓을 테니까요.”
“좋은 의견이야. 추진해 보도록 하지.”
왕자가 끼어들어 마무리했다. 음식이 나오고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왕자가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마에뜨도 여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예의 바르게 잘 대답하는 로리엔과 정숙하지만 오만하게 대꾸하는 이젤 공녀. 그리고 수지에게도 공평하게 질문을 던지는 그녀였다.
뭘 좋아해요? 취미 시간에 뭘 하죠? 어떤 걸 즐겨 먹나요? 한 나라의 왕자비가 던지기엔 어찌 보면 소박한 질문들은 수지의 경계심을 낮추며 대답을 끌어냈다. 그게 왕자가 노린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수지는 착실하게 대꾸하면서 마에뜨와 눈을 맞췄다.
“더 대화를 나누면 좋겠어요.”
말이 잘 통한다고 느꼈는지 마에뜨가 가만히 미소 지어 왔다. 수지는 고개를 숙였지만 같은 마음이었다.
뭐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저녁 식사가 끝나고 왕자가 렉스를 불러세웠다. 로리엔과 동시에 부르는 것에 수지는 움찔하자 렉스가 왜 그러냐는 듯이 바라봤다.
“아뇨, 저는 관사에 가서 기다릴게요.”
“무슨 말이야.”
“로난이 와 있어서요, 같이 가려고요.”
“하지만.”
“그와 두 시간은 있을 수 있잖아요.”
수지는 냉큼 대꾸하고는 렉스를 두고 응접실을 벗어났다. 렉스의 눈길은 이곳에 있기가 더는 싫다는 그녀의 등에 박혀 있었다.
“렉스.”
로리엔이 얼른 오라고 그를 재촉했다. 먼저 가 버린 수지를 확인한 터였다. 제 고백에도 멀쩡해 보여 왠지 화가 났는데, 얼른 이 자리를 떠나 버린 걸 보면 부담이 되긴 했나 보다.
‘이왕 부담이 된 김에 어디론가 혼자 도망이라도 쳐 버렸으면.’
로리엔은 저를 돌아보는 렉스에 살갑게 미소를 머금었다.
“왠지 임무 이야기일 거 같죠?”
하고 다정하게 말을 걸었건만 렉스의 대꾸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혹시 쓸데없는 말을 한 거 아니지?”
“네? 무슨…….”
“수지에게 말이야. 아까 화장실에 같이 들어간 걸 봤거든.”
응접실에서도 수지의 상태를 민감하게 확인하고 있던 그였다. 로리엔도 화장실에 들어간 걸 봤을 땐 조금 긴장했지만, 그 뒤 수지가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와 일단 넘어갔다. 심박이 빨리 뛰는 게 느껴져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고 대답했다.
‘정말인가?’
렉스는 그 대답에도 의심하며 로리엔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의 지적에 로리엔이 멈칫했다가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왜 당신 애인에게 그러겠어요?”
“모르지. 알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감정으로 인해 수지가 다치거나 상처 입으면.”
렉스는 한 손을 가만히 들었다. 그녀의 숨결을 끊을 것처럼.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싸늘한 경고에 로리엔의 가슴도 싸늘하게 식었다. 애써 그녀는 입술을 끌어 올렸다.
“전 바보가 아니에요. 당신이 현재 무엇에 관심 있는지 정도는 알아차릴 눈치가 있다고요. 오히려 저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묻고 싶네요. 렉스에겐 제가 그 정도 여자 밖에 되지 않는 거예요?”
애절하게,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애틋하게 묻는 건 그만큼 그의 관심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의 애정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절절한 심정을 담아 말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무심하고 허망했다. 그 정도 여자이지 않냐는 듯이 시큰둥하게 응시한다.
……강렬한 화합 따윈 존재하지 않았구나.
‘아니, 그 어떤 감정조차 없었어.’
깨달음으로 로리엔의 심장은 저 아래로 처박혔다. 더 꺼질 밑바닥도 없는데. 여인은 서글픔과 비참함을 분노와 질투로 바꾸었다. 이 자리에 없는 원흉을 저주하면서,
‘꼭 없애 버릴 거야.’
각오를 다졌다. 로리엔은 그렇게 시퍼런 눈빛으로 입술을 다물었을 때, 왕자가 둘을 손짓으로 불렀다. 임무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무렵 수지는 응접실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로도스 백작을 마주하고 있었다.
“나오셨군요. 제가 관사로 모셔다드리고 싶은데요.”
“감사하지만 이미 함께 갈 존재가 있어서요.”
“누구요, 혹시…….”
다른 귀족 청년이라도 있냐고 묻으려는데 파란 새가 푸드덕 날아왔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앉는 모습에 로도스는 말 대신 감탄하는 소리만 냈다. 그녀는 수줍은 듯 묵례하고는 복도를 걸어갔다. 로도스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역시 동물이 잘 따르는군.’
처음 보는 생김새의 새도 잘 따르는 걸 보면. 로도스는 그러면서도 새의 빛나는 깃털이 마음에 걸렸다. 나중에 조사를 통해 그 새가 항구의 영주가 주려 했던 희귀 새라는 걸 알게 되자 더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저와 수지가 어떻게든 연결된다는 신호 같아서.
‘저 짐승하고 먼저 친해져 봐야겠군.’
아끼는 동물을 챙기면 그녀가 자신을 더 친근하게 느끼겠지? 로도스는 당장 새 모이를 구해 주머니에 넣고 그녀와 마주칠 날을 기다렸다.
식사가 있던 날 밤. 렉스는 늦게 관사로 돌아왔다. 임무를 설명하는 왕자의 말이 길어진 탓이다. 왕자는 단순히 기술이 발명되는 실험실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이들도 모조리 암살하라고 명했다.
“지금 제국의 고위 관료들을 없애라는 말씀이세요?”
로리엔의 놀랐다는 음성에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야만 해. 그 기술은 존재해선 안 되는 거니까.”
“어떤 기술인데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던 터라서 의아해 묻자 왕자가 두리뭉실하게 답했다.
“우리의 무기를 앗아 가는 기술이지.”
“네?”
“그것까지면 알면 돼. 중요한 건 없애야 한다는 거야.”
왕자는 싱긋 웃었다. 어쩐지 엄정한 눈빛이라 로리엔은 더 캐묻지 못했다. 렉스는 그게 마나 기사에 대한 이야기란 걸 알고 있었지만 딱히 말할 의지가 없었고. 가려는 그를 왕자가 불러 세웠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어. 내 판단 착오였지. 적진 한가운데에는 자네를 보냈어야 했는데.”
왕자는 해맑게 미소 지었다.
“파괴에서만 의미 있는 사내인 자네를.”
왕자는 달콤한 어조로 덧붙였다.
“이번에도 증명해 줘. 죽음의 무기란 걸.”
“…….”
렉스는 말없이 돌아섰다. 공간을 나서자마자 로리엔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붙잡아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에서 전해 줄 게 있다고 하면서.
“여기요.”
그녀가 내민 서류를 보며 렉스가 눈썹을 움찔했다.
“생각보다 얇은데?”
“기록관에 보관되고 있는 건 그게 다예요.”
렉스는 그녀에게서 서류를 받아 훑었다. 내용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의식을 넣는 과정을 나열하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이전 기억에 관한 자료가 없자 렉스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정작 중요한 게 없는데?”
“보관할 필요가 없는 건 모조리 폐기했어요.”
“약속이란 건 말이야, 로리엔.”
렉스에게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미약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오싹해지긴 충분했다.
“실망하게 해서 본전도 못 찾을 상대와 해선 안 돼. 그 상대가 화가 나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예상했던 일인데도 직접 벌어지니 기분이 거꾸러진다. 음산한 분노를 쏟아 내는 그에게 로리엔은 흠칫하고 말았다. 살기까지 뿜을 줄이야. 몹시도 실망스럽다는 반응에 로리엔의 음성이 축 늘어졌다.
“미안해요. 사전에 알려 주지 못해서. 하지만 당신이 저와 이야기를 도통 하려 들지 않았잖아요.”
은근히 그의 탓이라고 밀어붙인 그녀는 렉스가 눈을 치켜뜨자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그리고 중요한 건 현재인걸요. 과거의 당신은 중요하지 않아요. 완성되지 않은 당신은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불필요한 기록을 모두 없앤 거예요. 앞으로도 그렇겠죠. 완벽한 당신만이 의미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