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렉스는 주위의 시선이 어떻든 장소 상관 없이 수지를 매만졌다. 진한 입술 키스를 날리고 싶지만 수지가 은근히 고개를 돌리며 거부하는 터라서 안고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관사에 돌아가 온갖 짓을 다하면 되니까. 문제 될 거 없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렉스였다. 그렇게 수지의 위치는 사령관의 애인으로 공고해졌다.
“저기.”
“꺼져.”
“실례지만.”
“뭐야?”
렉스는 접근하는 자들을 차례대로 물리쳤다. 따라서 뭣도 모르고 렉스와 친해지고 싶었던 청년들은 무안해져서 물러나야 했다.
고위 귀족들은 렉스의 성정을 살펴 노골적으로 말을 걸지 않았지만 은근하게 힐끔거리며 친해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란드 공작은 그 무리에서도 당당하게 걸어 나와 딸이 관심이 많다고, 언제 한 번 저택에 놀러 오라고 자신 있게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다르지 않았다. ‘관심 없습니다.’라는 짧고 건조한 답변뿐.
“곧 식사 자리가 있을 예정입니다.”
왕자의 개인 시종이 다가와 조용히 전했다. 연회가 끝나 가는지 연회장에도 사람들이 많이 줄어 있었다. 시종을 따라서 따로 식사 자리로 향하던 수지는 복도에 있는 화장실을 발견하고 말했다.
“잠깐 들렀다가 가도 되죠?”
“기다릴게.”
“먼저 가요. 금방인데.”
아닌 게 아니라 복도 끝에 잘 차려입은 시종들이 주르륵 서 있었다. 잘 모시겠다는 그들 뒤로 부드러운 음악과 환한 빛이 빠져나오는 것을 보면서 수지가 덧붙였다.
“바로 갈게요. 머리랑 옷 좀 손보고.”
“괜찮아. 넌 처음처럼 예뻐.”
“그, 그래도요! 전하를 만나는 자리니까 만반의 준비를…….”
렉스는 말끝을 흐리는 수지를 바라보았다. 왕국에서 왕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 때문인지 잔뜩 긴장해 있다. 저의 상관이라서 그럴까. 어쩌면 제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자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만반의 대비를 하고 싶다는 그녀의 덧붙임에 결국 렉스가 그러라면서 먼저 응접실로 향했다.
“휴.”
수지는 화장실 벽에 걸린 호화스러운 거울을 바라보았다. 금과 보석으로 조각된 멋들어진 틀이 사람을 더 주눅 들게 했다.
“겁먹지 말자.”
수지는 흩어지려는 용기를 그러모으듯이 중얼거리고는 서둘러 치맛단을 정리했다.
‘최대한 좋게 보여야 해.’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난다면 이러할까. 아니, 그것보다 더욱 긴장되고 무서웠다. 렉스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남자라고 생각하니 숨까지 막혀 오며 등골이 바짝 서니까.
‘트집 잡힐 일은 애초에 만들지 말아야지.’
밉보이면 렉스에게 불이익이 갈 거란 판단에 수지는 드레스를 둘러보며 떨어진 머리카락은 없는지, 튀어나온 실밥은 없는지 열심히 확인했다. 그때 무언가 창문을 콩콩 두드려 왔다.
“로난!”
수지를 찾아 연회장 근처를 날아다니던 로난이었다. 창문을 열어 주자 좋다며 얼른 그녀의 손에 부리를 비볐다. 수지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부리에서 떨어지는 달콤한 가루의 향을 맡은 것이다.
“아몬드 냄새가 나네. 또 어디서 맛있는 걸 먹은 거구나?”
상냥하게 로난을 감싸 안았다. 식사 자리에 데려가기는 무리겠지. 아쉬움에 털이라도 쓰다듬는데 갑자기 로난이 고개를 번쩍 들며 문을 노려보았다.
달칵.
화장실로 들어오는 여자는 늘씬한 키였다. 붉은 머리칼이 길게 떨어지는 그녀는 제 머리칼보다 더 진한 홍염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파란 새를 안고 있는 수지를 보자 크게 놀랐다.
‘마주치게 될 줄이야.’
손끝이 부들부들, 가슴이 답답해지고 울화가 자동으로 치밀었지만 애써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겨 수지가 방금까지 들여다보던 거울 앞에 섰다.
‘어떡하지.’
속은 끓을망정 멀쩡하게 있는 그녀와 달리 수지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상태였다. 긴장된 시간.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데 천연덕스럽게 분을 꺼내 고치고 있던 로리엔이 말을 거는 게 아닌가.
“렉스 생각보다 다정하죠?”
수지는 멈칫했다. 어조는 친한 사이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다들 냉랭하게 보지만요, 저는 알거든요. 그가 친한 이에겐 마음을 내어 준다는 것을. 어떻게 아냐고요? 제가 겪었으니까. 아니, 가르친 거라고 해야겠죠? 그가 깨어난 순간부터 눈을 맞추고 옷을 입혀 주고 몸을 살폈으니. 그보다 더 강렬한 화합은 없을 거예요.”
“…….”
“렉스의 본질을 알아보는 자는 많지 않아요. 그가 어떤 사람이냐를 넘어서 얼마나 위대해질지 알고 있는 사람은.”
이윽고 화장이 끝났는지 로리엔은 몸을 돌렸다. 옅은 미소가 분홍빛 입술에 맺혀 있었다. 그러나 눈은 열 길 물속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난 당신 같은 여자가 제일 싫어.”
“……!”
수지는 얼어붙었다. 이제야 본심이 나왔다는 듯이 눈앞의 여자는 한없이 냉랭했다.
“신비한 척 순진한 척 나타나서 그의 마음을 가져가지. 어떤 노력도 없이 그를 품에 안는 거야. 생애를 바쳐 노력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모든 게 술술 잘 풀린다고 웃고 다니면서 제가 가진 걸 은근히 뽐내기 바쁘지.”
여자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당신 같은 부류, 개인적으로 정말 경멸해.”
수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의 어조는 나긋나긋했지만 하나 같이 비수 같았다. 조금이라도 반격하면 진짜 칼이 날아올 거 같았다.
“렉스 곁에 있는 것도 한때야. 언젠간 지나치는 창녀보다 무의미해질 테니까.”
로리엔은 눈꼬리를 휘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존댓말로 돌아오며.
“그때까지 제가 창조한 그를 즐겨요. 모른 척해 줄 테니까.”
왕자의 경고대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이만하면 최대한 화를 억누르고 말을 한 게 아니냐고 로리엔은 자화자찬하면서 다소곳한 손동작으로 수지의 드레스의 무언가를 지적했다.
“거기. 깃털 떨어졌네요.”
아무렇지 않게 웃은 그녀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수지는 그녀가 나가고 나서야 한참 후에 움직일 수 있었다. 간신히 간신히 숨통이 트인 듯 후, 후 거리는 그녀를 보면서 로난은 소년으로 변신해 물었다.
“왜 한 마디도 안 했어요?”
나쁜 여자 같은데. 말할 때마다 서늘한 기가 뿜어져 나왔다. 반감과 적의로 무장한 살기가. 로난은 수지에게 그런 독사 같은 감정을 뿜어내는 여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수지는 창백해진 얼굴로 힘없이 대꾸했다.
“무서워서. 입을 열 수가 없었어.”
“그렇게 두려운 사람이에요?”
응. 수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늪지를 한번에 없애려고 했거든.”
“뭐? 그런 인간이에요? 진짜 나쁜 인간이네!”
로난은 화가 난다는 듯이 두 팔을 휘저었다. 제 팔이 날개라도 된다는 것 같았다. 수지는 진정하라는 듯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이 렉스를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아냐고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모르는 그를 얻기 위한 뼈아픈 시간이, 역경이 존재했노라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자신을 죽이겠다고 마음 먹은 여자에게 이런 변명은 그저 부아가 치미는 소리일 뿐이다. 그녀는 벌써 저를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다. 싫어하는 것을 너머서 생명을 끊어 놓아야겠다고 결단한 것이다. 그런 무서운 여자에겐 이런 건 나쁘다, 옳지 않다는 도덕적인 대응은 먹히지 않는다. 올바른 대꾸는 더 화만 키울 가능성이 있었다.
‘렉스를 엄청 좋아하는 거 같은데.’
수지는 그라는 단어에 어조에 깊은 숨결을 담던 그녀를 떠올리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걱정이 치밀어올랐다. 또 만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도 커졌고. 로난이 그런 수지를 위로해 왔다.
“걱정 마요. 다시 안 보면 되니까. 왕성은 넓으니까 피해 다니면 될 거예요.”
그러나 로난의 기대와는 달리, 로리엔 역시 왕자의 식사 자리에 초대받은 귀빈이었다. 수지는 로리엔을 다시 마주치자 움찔했지만 곧 침착하게 렉스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 로리엔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자리에 앉았다. 연회장에서 봤던 귀족들 몇이 차례대로 등장하고 왕자의 약혼녀라는 마에뜨도 자리에 앉고서야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새로운 얼굴들이 몇 있군.”
마지막 등장으로 단번에 시선을 끈 그는 의미심장하게 수지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고운 얼굴, 단정한 이목구비, 침착한 분위기가 늪지의 야만인 같지 않다. 늪지를 점검한 불법 침입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어왔던 터라서 왕자는 의외란 생각을 했다. 알다리스 후작이 넉살 좋게 말을 받았다.
“제 얼굴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시죠? 안 그래도 요새 연합국에서 유행하는 젊어지는 연고를 발랐답니다. 금가루와 상아 가루가 섞인 것인데, 바르면 바를수록 확실히 피부에 윤기가 흐르지 않겠습니까?”
“하하. 후작, 자네의 맹랑한 의견에는 내가 할 말이 없군. 그래, 젊어 보인다는 것에 동의해. 몸에 힘까지 좋아져 보이는데, 후작 부인이 좋아하겠어.”
“뭐 맨날 보는 얼굴 좀 젊어졌다고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녀는 서둘러 전쟁이 끝나 제국에 가는 것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주 근사한 포도밭 농장을 가지고 싶다고요. 지도를 보며 벼르고 있지요.”
“곧 꿈을 이루게 될 거야.”
왕자는 의미심장하게 대꾸했다. 그의 시선은 이제 공작으로 향했다. 공작 옆에는 도도한 암고양이 같은 이젤이 있었다. 왕자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이젤 공녀는 갈수록 정숙해지는군. 아주 우아해.”
“감사합니다.”
“하나뿐인 우리 왕국의 공녀인데. 좋은 신랑감을 얻으면 좋겠어. 마에뜨가 보기엔 어때?”
자연스럽게 약혼자를 대화에 껴 넣는다.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듯이. 그러나 그건 왕자의 불륜을 알고 있는 자들이 보기엔 그 장면은 어이없는, 희극적인 연극의 한 장면처럼 우스워 보였다. 왕자의 불륜 상대와 왕자의 약혼녀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한다는 자체가 기가 막혔으니까. 마에뜨는 다행히 아무 것도 모르는지 시원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렇게 아름다우신데 훌륭한 청년을 얻어야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령관님은 어떻습니까.”
난데없이 끼어든 로도스 때문에 시선이 단번에 그에게 쏠렸다. 로도스는 넉살 좋게 웃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예시로요. 저런 외양과 능력이면…….”
“좋아요.”
공녀는 냉큼 대답했다. 안 그래도 사령관이 맘에 들었다는 듯이. 아버지인 란드 공작은 절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지만 로도스만은 그녀의 반응이 좋다는 듯이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알다리스 후작이 란드 공작을 보조하려 끼어들었다.
“안 될 말입니다. 위험에 나서는 사령관과 곱게 자란 공녀가 어떻게 짝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사령관은 그 기능이 부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