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왕성은 소문이 빠르니까요. 사령관이 감싸고도는 의문의 여자가 누구인지, 등장한 순간부터 외모와 행동을 지켜보는 눈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당신의 정체에 대해서 모르다 보니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지요. 항간에선 당신이 외국의 범죄자다, 해적의 여자다, 섬나라의 노예라는 말이 돌아요. 사령관께서 긍정도 부정도 안 하고 있으셔서요. 소문만 무성해질 뿐이죠.”
대체로 도는 제 소문이란 게 안 좋구나. 수지는 움찔해서 입을 다물었다. 로도스 백작은 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화젯거리에 가볍게 말을 얹곤 하죠. 맘 쓰지 마세요. 저는 당신이 누구여도 굉장하다고 생각하니까. 늪지에서 여기까지 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알고 있거든요.”
상대의 호감을 얻어 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그답게 부담스럽지 않은 서글서글한 눈으로 수지를 응시하는 그였다. 그는 수지가 이곳에 있는 목적을 알아맞혔다.
“혹시 책을 보러 왔습니까?”
“네, 하지만 찾기가 어려워서…….”
수지가 빈손을 아쉽게 바라보는 걸 느꼈는지 그가 냉큼 제안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할 일이 있지 않으세요?”
백작이라는 사람이 한가할 수 없을 거 같아 묻자 가벼운 웃음이 뒤따랐다. 직설적인 그녀의 질문이 무례하게 느껴지면서도 재밌었다. 어딘가 다른 나라의 공주처럼 당돌한 것이.
‘매력적이야.’
백작은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할 일은 많지만 지금은 책을 보러 온 거라서요. 근데 이 시간 도서관 출입이 어렵다고 해서 이상해서 살펴보러 온 겁니다. 뜻밖에 당신과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백작은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죠?”
“아…….”
반짝이는 눈빛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진하고 달콤한 향수가 풍겨 오는 남자는 뼛속까지 귀한 신분이며 상대를 부드럽게 제압할 줄 아는 자였다. 누군가를 이끄는 권력자로서 손색이 없을 사람 같은데 그런 사람이 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걸까. 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늪지에서 온 수상쩍은 인물에 불과한데 말이다.
‘꼭 일부러 날 만나려고 온 거 같단 말이야.’
수지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향수와 비단, 보석으로 장식된 남자는 분명 잘생겼는데 다가가기가 거부감이 든다. 진짜 얼굴을 가면 뒤에 감춘 것처럼 모든 게 계산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결국 수지는 허리를 숙이고 말았다.
“말씀 감사합니다. 책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로난이 왔다면 로난의 핑계로 일어났을 테지만 그는 어디 갔는지 감감무소식이다. 어쩔 수 없이 수지는 의도적인 헤어짐을 선택해야 했다.
“전 다시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럼 만나 봬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녀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백작은 따라오지 않았다. 도서관으로 가자 경비병들이 수지를 알아보고 다시 들어가라고 한다. 수지는 안으로 들어가며 안도했지만 로도스의 눈길은 수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가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한동안 같은 곳에 머물러 있었다.
‘역시. 남달라.’
로도스는 그녀가 신비한 능력을 소유했다고 믿었다. 그녀를 만나자 그 믿음은 더더욱 견고해졌다. 그녀가 정말 늪지에서 온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인지 렉스 사령관에게 확인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망가진 꽃바구니를 돌려보낸 터였다. 로리엔도 수지의 비밀을 아는 기색이었지만 단 둘이 만나는 것을 피하는지라 그녀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로도스는 자력으로 그녀를 만나 느낌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내 느낌은 틀리지 않았단 말이야.”
수지는 비범한 존재다. 그녀 주변에 감도는 공기가 단지 늪지의 야만적인 기운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예민한 감으로 알아차렸다. 어떤 경위인지 모르겠으나 여자는 늪지의 신비한 기운을 소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 것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조용히 눈을 빛내며 제 가슴 부근에 박힌 사슴 자수를 만지작거렸다. 두 개의 뿔이 날카롭게 올라간 짐승 문양은 가문에서 신성시하는 황금 뿔 사슴이다. 어린 시절 그 동물을 만나고 싶어서 얼마나 애가 탔던가. 크면서도 내내 황금 사슴을 찾으려고 했다.
최근에는 자신을 닮은 사촌 동생에게 해적을 찾아가라고까지 했었다. 공공연하게 해적을 이용할 수 없는 입장이라서 그랬던 건데 도중에 사슴을 구했다고 말한 해적이 연락을 끊으면서 그것의 행방이 묘연해져 버리고 만 것이다.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로도스 백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겠어.”
그는 수지가 다음에 참석하게 될 연회를 떠올렸다. 과연 그녀의 흥미를 끌 만한 게 뭐가 있을지. 사슴에 대한 그의 집착이 그의 눈을 가린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가 궁리 중일 때, 렉스는 로리엔이 벌인 짓을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로리엔은 렉스가 참석해야 하는 행사가 있다고 다짜고짜 부르더니, 후작 가의 울창한 숲을 가리켰다.
“사나운 짐승들을 잡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조용한 읊조림은 어떤 기대를 싣고 있었다. 렉스가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녀 주위로 몰려든 귀족들은 풀어놓은 짐승들이 너무 난폭해서 사령관도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유명한 귀족 자제들이 내기를 하며 떠드는 것을 보면서 사령관은 피식 웃었다.
“이젠 별거에 나를 다 부르네? 내가 정말 개 같나 보지?”
“그래서가 아니에요. 알다리스 후작님께서 젊은이들을 위해 짐승을 풀었다가 곤란한 일이 발생했다고 하셔서요, 조용히 처리할 자로 당신이 생각난 거죠.”
로리엔은 침착한 얼굴로 사무적으로 덧붙였다.
“그분께서 우리 실험실에 얼마나 큰 후원자인지 알고 있죠?”
“알다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후원한 게 얼마나 거지 같은지 보여 드려야겠군.”
“렉스.”
로리엔이 멈칫했을 때였다. 그의 팔이 붉어지더니 소리 없이 얇은 광선 하나가 뻗어 나와 그대로 숲으로 달려갔다. 폭발은 고요했다. 녹색이 붉어지더니 땅이 흔들리고 광풍이 분다.
나무와 풀, 짐승과 벌레가 찢겨서 사라졌다. 잔인한 바람은 사람들이 머문 들판까지 덮쳤다. 사냥을 위해 차려 놓은 화사한 천막, 나무 테이블, 맛깔난 음식과 다과들이 그 여파에 휩쓸렸다. 아가씨들은 비싼 액세서리를 잃은 채로 찢어진 드레스를 잡고 멍하니 서 있었고, 청년들은 값비싼 검과 모자를 잃고서 얼이 나간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로리엔은 숲이 없어진 공간을 응시했다. 마나로 인한 파괴는 멸절에 가깝다. 전장에서 적을 쓸어 버리는 것처럼 살아 있는 게 하나도 없는. 로리엔이 우두커니 고개를 돌리자 렉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내일이 기록관에 가는 날이지?”
“…….”
“약속 잊지 마. 내가 지켰듯이.”
숲이 있던 곳을 무심히 바라보고는 그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로리엔은 말없이 그의 퇴장을 지켜보았다. 왜 이런 곳에 그를 불렀냐고 한다면 알다리스 후작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사람들 앞에서 능력을 쓰게 되면,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의 진정한 힘을 알고 좋아하면, 사령관으로서의 자부심도 생기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전장에서는 기사들만 당연히 그를 따르고 순종하는 터라 그의 대단함을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일부러 전쟁의 ‘전’도 모르는 귀족들이 있는 사냥터를 고른 것인데 결과는 좋지 못하다. 오히려 렉스의 짜증만 키운 것 같았다.
“저, 저분이 우리 왕국의 특별 사령관이라고요?”
귀족 청년 하나가 허망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겁나서 웃는 것도 같았고 좋아서 웃는 것도 같았다. 두 심정 모두 이해가 간다고 생각하며 로리엔은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찾고 계십니다.”
잠시 후 후작의 개인 시종이 당황해서 달려온 것을 보면서 로리엔은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 *
“전하? 준비 다 되셨습니까.”
“아, 마에뜨.”
왕자는 심각한 표정을 얼른 풀었다. 어느새 살구색 드레스로 분위기 있게 차려입은 약혼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연회가 곧 시작될 거예요.”
“그렇지. 근데 어떡하지?”
왕자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할 일이 남아 있어서 말이야. 혼자 먼저 입장해 주겠어?”
그러겠노라며 마에뜨는 얌전히 대답했다. 순순히 따라 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약혼녀라고 느닷없이 집무실 안까지 들어오지 않는 것도 좋았고. 왕자는 그녀의 튼실한 몸을 살갑게 응시했다. 타국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모양인지 그녀의 몸은 예전보다 조금 더 푸근해져 있었다. 힘들어서 살이 빠진 게 아니라 마음이 편해져 살이 붙은 경우.
여자로서 매력은 좀 감쇄했지만 원래 그런 것 때문에 매력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지라 왕자는 기분 좋게 웃었다. 오늘 밤에 그녀의 원숙함에 대한 보상을 몸으로 해 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그나저나. 이거 참.”
왕자는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서류에는 방금 도착한 정보가 짧게 서술되어 있었다. 왕자는 믿을 수 없어 다시 한 글자씩 정독했다.
【노만 벤젠. 제국이 설치한 함정에 팔다리를 잃음. 임무 수행이 더는 불가능한 상태로 본국으로 호송 중임.】
함정이라니. 제국이 우리가 잠입할 줄 알았다는 건가? 제 행동을 읽혔다는 것에 왕자는 콧잔등을 잔뜩 찡그리고 말았다. 완벽한 기습이어야 했는데. 설사 침입자에 대비해 함정을 설치했더라도 마나 기사들은 일반 기사들보다 몇 배는 신체가 단단한 터라 쉽게 팔다리를 잃을 수가 없었다. 함정이 처음부터 마나 기사를 노리고 설치된 게 아니라면.
‘우리가 마나 기사를 보낼 줄 알았다는 건가?’
매번 당하던 제국이 제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왕자는 한숨을 짧게 뱉어 냈다. 이게 진짜 그 기술을 발명 중이라서 더 공격적으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운이 좋아 핵심 전력을 파괴한 것인지 헷갈린다. 두 이유 모두 원인이 될 수 있겠지. 왕자는 임무 수행 불가능이란 단어를 의미심장하게 훑었다.
마나 기사는 목만 잘리지 않으면 살아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마나를 소비해야 하며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회복 과정을 지켜봐야 하지만 살아나고자 마음먹으면 못할 게 없는 것이다. 단지 돈이 아까웠다. 마나로 개량된 지 얼마 안 된 노만에게 또 많은 돈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위가 쓰려오면서.
“그만큼 철저히 뼛속까지 이용해 먹어야 한다는 건가.”
왕자는 그렇게 결론 내리며 수하를 찾았다. 노만에 대한 회복 계획을 말하면서 2차 잠입을 준비하라고 하자 곧바로 응답이 들려왔다.
“로리엔 님께 잠입에 능한 마나 기사들로 추려 보라고 하겠습니다.”
“잠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왕자가 그를 불러세웠다.
“할 필요 없어. 2차 잠입은 내가 직접 지시할 거니까.”
“누구로 말입니까.”
“지금 만나러 가는 남자. 특별 사령관으로.”
왕자는 눈빛을 빛내며 제복을 갈아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