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지 보고서 (117)화 (117/163)

117화

“아, 그리고.”

실험실로 향하려던 그는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일어나시면 바로 알려 줘.”

“네.”

아직도 왕의 허락이 필요한 사안들이 있다. 군대를 장악하고 정무를 도맡았지만 마나 광산 개발이나 외국과의 협약 같은 비밀스럽고 까다로운 사안에는 국왕의 개인 인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인장만큼은 아직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왕이 넘겨주지 않은 것이다.

‘하여간 골골거리면서도 고집스럽다니까.’

결국 제 것이 될 텐데. 무엇 때문에 미루고 있는 것인지. 앤드루는 왕년에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행동이 느린 현명한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그를 떠올렸다.

전쟁이 이렇게 질질 끌며 이어졌던 것도 다 그 칭호대로 그가 지나치게 신중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애먼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한 그의 결단은 왕국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결국 길고 긴 겨울이 휘도는 나라로 만들었다. 전쟁으로 인한 굶주림과 황폐함, 빈곤과 무질서가 온 영토를 휩쓸었으니까.

‘난 결코 그처럼 되지 않을 거야.’

왕이라면 과감하게 사람도 죽일 줄 알아야 하며 즉흥적으로 가족과 친구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동해야 아버지 같지 않은, 강력한 왕으로서의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앤드루는 걸어가는 내내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상상을 해 보았다. 제국의 황제도 연합국의 왕도 제게 승복해 머리를 조아리는 미래. 자신이 원하는 건 승리한 나라의 부유한 왕이 아니다. 누구나 우러르는 대륙의 절대 군주였지.

자각 속에서 실험실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여럿이 격양되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관계자와 왕성의 고위 관료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미루어볼 때 왕자는 그들이 누군지 절로 알아차렸다.

“수석 연금술사께서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요? 벌써 3일이 지났습니다. 대낮에 벌어진 소동에서 사령관이 공공연하게 여자 하나를 감싸고돈 이후로요!”

“몇 번이나 말씀하셔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드릴 답변이 없다고요. 사령관의 여자는. ……그 이상한 존재는 제 소관을 벗어났어요.”

로리엔의 목소리가 어쩐지 떨리고 있었다. 고위 귀족에게 추궁을 듣고 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모욕감에 그럴 수도 있었다. 왕이 직접 임명한 수석 연금술사로서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추궁을 들을 만한 위치는 아니었지만 알다리스 후작은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은 채 좁은 이마를 한껏 우그러뜨렸다. 

“그런 대답을 들으려고 내가 수만 금화를 해마다 실험실에 기부하는 게 아닙니다! 난 답을 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답은 사령관을 관리하는 수석 연금술사만이 줄 수 있지요. 솔직히 그런 여자를 모른다고 하면 연락책으로서 관리 소홀이 아닙니까! 여러 사람을 다 도맡는 것도 아니고 사령관 한 사람을 도맡는데 그 품 안에 있는 여자를 모른다고 하면, 우리가 누굴 믿고 사령관을 의지하겠습니까!”

“아무리 말씀을 하셔도요. 답을 드릴 수가 없어요. 저도 알아보는 중이라…….”

“그녀에 대해서 말입니까? 연금술로요?”

로도스 백작이 냉큼 끼어들었다. 로리엔은 젊은 백작은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분명한 답은 안 나왔습니다. 워낙 옛날 기술이다 보니…….”

주먹을 꽉 쥔 채로 눈을 내리깔고 말하는 그녀는 진짜 정보를 숨기고 있는 거 같았다.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로도스 백작은 그 미묘함을 눈치챘지만 알다리스 후작이나 란드 공작은 분노로 이를 보지 못했다.

노회한 두 귀족은 불안으로 인한 흥분 상태였다. 왕국의 보물이자 자신들의 가장 큰 투자물이 웬 여자와 함께 나타나 사라졌다는 데서 1차로 흥분했고, 사령관이 그 여자만 끼고 돌며 일을 안 한다는 향후 소문에 2차로 흥분했다. 왕국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사령관이 필요한데, 그 사령관이 여자 때문에 임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말들로 사교계가 흉흉한 것이다.

따라서 고위 귀족들은 걱정으로 두려워지고 말았다. 전쟁에서 이기는 데, 그들의 자산 대부분을 투자한 만큼 사령관이 제 임무에 집중하는 게 중요했다. 비단 승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제 가문이 파산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 또한 절박해지고 만 것이다.

“수석 연금술사께서도 물론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겠지만.”

일단 호응으로 시작한 란드 공작의 표정은 그러나 영 밝지만은 않았다. 그는 불안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사태 파악이 너무 늦는 거 같단 생각이 드오. 이 사안은 들리는 소문보다 훨씬 중요하다오. 알다시피 전쟁의 승패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투자한 비용만큼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여자 하나에도 신경을 기울이는 거라오.”

“맞습니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역시 공작님께선 핵심을 보고 계시는군요! 이게 다 우리 주머니에서 나간 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령관이 딴짓을 하고 있다니! 우리 주머니에 구멍이 생겨 돈이 줄줄 새고 있다는 말로 들리지 않겠습니까”

알다리스 후작이 금세 란드 공작의 말을 맞장구를 쳤다. 덩치에 안 맞게 굽신거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그는 힐끗 로도스 백작도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도 한 소리 거들라는 의미였지만 그는 딴소리를 했다.

“사령관의 여자요. 신비한 빛을 뿜어내는데. 그 빛이 본인의 능력일까요?”

“허허!”

“로도스 백작, 지금 그걸 물어야겠습니까!”

눈살을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타박하는 두 귀족이었다. 로도스 백작은 죄송스럽다는 듯이 살짝 묵례하면서도 할 말을 했다.

“상당히 특이한 능력 같아서 말입니다. 그 능력을 잘만 이용하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허허, 젊은 백작은 늘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구려.”

란드 공작은 마땅찮다는 듯이 콧수염을 비틀어서 튕겼다. 알다리스 후작 역시 영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그런 거야 나중에 논의하면 될 일이고 당장 급한 건 사령관을 제 임무에 집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자를 없애서라도, 당장 사령관이 임무에 전념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없앤다고요? 그 사령관께서 가만 있을까요?”

로도스 백작이 부정적으로 대꾸하자 알다리스 후작은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가만 있지 않으면? 우리를 다치게라도 한단 말입니까?”

어처구니없다는 대꾸에 로도스 백작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다치는 정도에 그치면 다행이랄까. 그가 화가 나 마나를 사용하면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령관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수행할 수 있는 자였다. 

‘그 사악한 힘을 보건대.’

아군도 거리낌 없이 죽일 거 같았으니까. 젊은 백작은 황소의 우두머리를 처리하던 렉스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는 뒷말을 삼켜야 했다. 가뜩이나 신경질적인 두 귀족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로리엔이 조사를 끝내고 정보를 공유하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간신히 발을 떼었다. 로도스 백작은 그들을 뒤따르기 전 살짝 고개를 뒤로 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여자의 힘. 마치 늪지의 신성한 사슴을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네?”

“온갖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불경한 땅이요. 그 여자는 그곳에 사는 황금 사슴을 연상시켜요.”

어쩐지 굳어 버린 로리엔이었다. 로도스 백작은 그 모습을 유심히 훑었다.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틀림없이 늪지와 관련된 것이. 로도스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나중에 은밀한 곳에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

“그럼 이만.”

말을 마치고 황급히 두 귀족을 뒤쫓는 로도스 백작의 모습은 마치 성난 거위 부부를 쫓아가는 유순한 새끼 거위를 연상시켰다. 황금 사슴이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일까. 그를 동물에 빗대어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던 로리엔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참견쟁이들이 왔다 갔군. 자네 괜찮나?”

“전하!”

그녀는 몹시도 놀랐다.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모퉁이에서 은발의 왕자가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옆머리를 시원하게 뒤로 넘기면서 실실 웃었다.

“기사였던 란드 공작이 날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내 실력이 조금 는 모양이야.”

하지만 그의 눈은 예리하게 번쩍였다. 

“물론 사령관에겐 전혀 효과가 없었지만. 내 개인 정원까지 와서 당당히 임무를 쉬게 해 달라고 할 때까지도 그가 언제 왔는지 조금도 감을 잡을 수 없었지. 물론 여자 때문이라는 말에는 그럴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어졌고.”

그때 일만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는 듯이 키득거리는 왕자였다. 그러나 로리엔은 웃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방금 들은 말을 되물어야 했다.

“렉스가 쉬게 해 달라고 했다고요? 여자 때문에요?”

정말이냐는 듯이 재차 묻자 왕자가 몰랐냐는 듯이 대꾸했다.

“사령관이 이야기 안 했나? 자네와는 그래도 좀 대화가 되는 줄 알았는데.”

“…….”

“벌써 3일 전 이야기야. 내가 정원에서 귀족 아가씨와 볼일을 보고 나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건넸지. 자잘한 임무에서 빠지고 싶다며.”

왕자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은 예리하게 빛났다. 그때 상황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다는 듯이.

“그래서 말인데. 로리엔. 사령관이 임무를 포기하게 만든 여자에 대해서 뭘 알아냈지?”

“그, 그게…….”

“날 속일 생각은 하지 마. 난 자네가 그렇게 대할 사람이 아니야. 자네가 3일 전에 허락 없이 대량의 마나를 썼던 걸 알고 있어. 그걸 내가 왜 침묵했는지 아나? 자네가 당연히 보고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역시 모르는 게 없다. 온 사방에 그의 귀가 도사리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로리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연금술 조사의 결과를 밝히는 게 왜 이리 싫을까. 저의, 연금술사들의 판단이 틀려서? 렉스와 그녀의 관계가 부정할 수 없는 필연성이 존재해서? 로리엔이 망설이자 왕자는 진지하게 끼어들었다.

“설마. 날 실망스럽게 하려는 건 아니지?”

뱀 같은 눈. 이럴 때의 왕자는 자비 없는 냉혈한 군주다. 로리엔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백했다.

“한 달도 전에 렉스 사령관이 늪지로 임무를 떠났던 걸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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